누구도 선뜻 바라지 않을 일이었다. 그 대상이 가족이어도 말이다. ‘간병’이란 단어가 이렇게 무서울 수가 있을까. 상대적으로 다른 가족보다 시간 내기가 더 자유롭다는 이유로,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상황이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때때로 의문이 든다. 정말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인가? 왜 나만? 내가 안 하면 누가 하지? 간병인을 고용하면 그 비용은 어떻게 충당하지? 다들 대출금 갚으며 살아가고 있는데, 각자 먹고 사는 일에 바쁜데, 돈 얘기 앞에서 싸우겠지? 그럼 비용을 절약하려면 또 누군가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는데, 그게 내가 되어야만 하는 걸까? 질문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근데 왜 내가?
“세상에 병이란 병은 왜 이렇게 많은지. 내 주변은 왜 이렇게 하나둘 아픈 건지. 삶이 온통 돌봄이었다.” (케어러, 232페이지)
각 단편의 모든 상황이 답답했다. 어디 대나무숲이라도 달려가야 힘껏 소리쳐도 답답함이 해소될 것 같지도 않았다. 이게 현실이라는 게, 겪어보지 않은 누군가는 소설 속 이야기로 마무리할지도 모르지만, 이미 경험한 사람들의 속을 읽어주는 듯한 이야기에 마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그러다 결국 멈췄다. 마지막 단편 속 주인공의 이 한마디에 페이지를 계속 넘길 수 없었다. 사실 그럴 일도 아니고, 나란 인간이 화자의 독백에 마음이 크게 쓰일 정도로 공감이 넘치는 인간도 아니어서 무딘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지금 폭발하기 직전인 내 마음을 후벼놓는 것 같았다. 한마디만 더하면 나의 인내심이 끊어질 것만 같아서, 당연하면서도 당연하지 않은 돌봄의 역할을 하는 게 괜히 억울할 것만 같아서.
4편의 소설 속 주인공도 그와 비슷했다. 주인공 모두 여자, 저마다 다른 간병 상황에 놓여있었지만, 그들의 역할은 같았다. 누군가를 돌보는, 예상하지 않은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집안일에 손끝도 대지 않는 남편과 삼수생 아들을 뒷바라지하며 인생을 보냈던 ‘나’는 아들의 한마디에 밖으로 나선다. 이제 엄마 인생 살아요. 그동안의 삶이 어땠을지 눈에 훤하다. 우리네 엄마들과 다를 바 없는 인생이었을 거다. 이제 한숨 돌리나 싶을 때 거울을 보니 웬 노인이 서 있는 충격도 잠시, 자신의 인생을 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줄 이어 환자가 된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간병한 세월로도 모자라 기다렸다는 듯이 친정 부모님이 환자 이름표를 단다. 「내 이름은」 화자의 한마디에 공감할 수밖에 없던 나의 지금이, 그래서 더 공포였다. ‘삶이 온통 돌봄이었다.’ 혹시 몇 년 후 내 모습이 또 저럴까 싶어서. 이럴 때 혼자 있으면 안 되는데, 괜히 더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속이 상하는데, 지금 옆에 아무도 없다.
전에도 말한 적이 있었는데, 엄마와 함께 아버지를 돌보는 세월이 지나니 이제 엄마가 아프다. 어제는 저기가 아프고, 오늘은 여기가 아프고.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그때마다 전화 한 통에 달려가야만 했고, 여러 병원을 돌아야 했다. 5년여의 세월 동안 두 번의 입원, 수술이 있었다. 한 달에 몇 번씩 병원에 가는 것은 꾸준한 일상이었고, 2주 전에는 넘어져서 발목을 다치니 또 치료받고 있다. 허리 통증으로 서울 병원에 예약했던 것도 취소하고 눈앞의 치료에 또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이제 두세 달 후에는 또 다른 내과 검사가 있을 거고, 큰 변동이 없다면 또 입원과 수술이 있을 터였다. 병이 크든 작든, 나는 또 병원 안에서 누군가의 보호자로 불리며 여기저기 돌아다니겠지. 부모니까, 어떤 면에서 나는 엄마한테 채무자의 마음이기도 하니까, 괜찮다, 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지난 8월부터 한 달의 거의 3분의 1을 병원에 가는 시간으로 채웠다. 예약된 일정이기도 했고, 갑작스러운 병원행이기도 했다. 나의 일상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만 굴러가는 날들이었다. 아닌 줄 알았는데, 아닌 척하는 거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힘들다.
잘하고 싶지만, 그 누구도 잘할 수 없는 게 돌봄이다. 가족이든 일이든, 어떤 이름으로 간병을 한다고 해도 완벽할 수 없다. 돈을 주며 간병인을 고용한다고 해도 그게 온전할 수 있을까. 그 돈은 또 누가 내나. 온전히 개인의 일로 감당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어쩌다 운이 좋으면 요양등급도 받고 집으로 방문하는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 등급 받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니 그 집에서 누군가 한번 가족 돌봄의 역할을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그 자리가 굳어진다. 갑작스러운 전화 한 통으로 시작된 보호자라는 이름은 또 다른 공포이기도 하다. 「나를 돌보며 너를 돌봄」의 모녀는 동네 진상인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며 병원 생활을 시작한다. 엄마는 다른 사람 손에 못 맡긴다며 아버지의 보호자로 병원 생활을 이어가고, 딸은 한 번씩 엄마와 교대하며 그 돌봄을 돕는다. 소설의 결말은 아버지가 어느 정도 회복되고 못된 성격도 온순해지면서 부드럽게 마무리된다. 어설프게 계획했던 가족사진도 찍고, 가족여행까지 준비하면서 돈독해지는 이야기가 되었는데,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가 싫었다. 현실 속 이런 배경이라면 이런 훈훈함으로 마무리되는 이야기를 보지 못해서 말이다. 이 상황에서도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을 말하고 싶었을까 싶지만, 희망을 생각하기에 이 현실은 너무 혹독하니까. 그런데도 놓치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 갑작스러운 병원 상황, 생활에서 조심이 손을 내미는 다른 환자 보호자들이 있었기에 그나마 견딜 수 있었던 건 아닐까. 다른 단편에서도 이런 조력자(?)들이 등장한다. 같은 돌봄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마치 연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신 곁에 누군가」의 주인공은 항암 치료 중인 아버지의 보호자가 된다. 일하다가 걸려 온 전화 한 통에 병원으로 달려간다. 아버지는 항암 후유증으로 입원하고, 주인공도 덩달아 병원 생활이 시작된다. 일하다가 말고 왔으니 마무리도 해야 하고, 앞으로 또 해야 할 일의 일정도 있다. 병원에서 상주하며 일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불가능한 상황이다. 마침 조건 맞는 간병인을 만나서 아버지를 맡기고 집으로 가게 되지만, 동시에 발생하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간병인에게 지급해야 할 돈은 상당했고, 간병인이 언제 그만둘지 모르니 그 대책도 세워야 했다. 언젠가 나도 겪었던 일을 이렇게 활자로 마주하니 생생하다. 이런 부분은 남의 일 같지 않다. 아버지가 입원했을 때도 나는 병원에서 환자의 보호자였다. 종일 병원에서 있는 게 너무 힘들어서 나중에는 간병인의 도움을 받기도 했는데, 돈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퇴원하면서 전원했던 요양병원도 금액이 만만치 않았다. 알아서 다 해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감당해야 했지만, 그때도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요양병원에 드나들어야 할 일도 계속 생기니까. 돌봄도 끝이 없고, 돌봄의 상황에서 발생하는 현실적인 문제도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이게 돌봄의 현장에서 감당해야 하는 가족, 보호자의 부담으로 남아 있다.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 문제를 감당하는 것 역시 개인의 몫이었다.
소설 속 주인공은 모두 간병인의 역할로 등장한다. 각자의 사정, 역할이 조금 다를 수 있지만, 환자를 돌보는 것 자체는 똑같다. 각자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도 다르다. 그런데도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하는, ‘간병’이라는 단어에 갇혀 있는 모습은 너무 닮았다. 화장실에서 소변보는 일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는 게 슬플 정도다. 그 당사자는 얼마나 또 우울할지, 언제 이 상황이 끝나는지 알 수 없는 답답함은 또 얼마나 숨이 막힐지. 아무리 이 답답함을 호소해도 누군가의 지루한 하소연으로 들릴까 봐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기도 어렵다. 그저 소설 속 많은 간병인(보호자)처럼 서로가 같은 역할을 하면서, 병원 생활이 조금은 수월하도록 정보를 공유하면서 숨을 좀 쉴 수 있게 되면 다행일까. 작가들이 직접 경험한 일이기에 더 생생하게 들렸고, 지금도 누군가 이런 상황을 겪어내고 있을 것이기에 마음 한쪽 쓰다듬어 주는 듯했다. 돌봄의 의미를 고민하게 하는 것 같지만, 나에게는 돌봄의 방식에 대해 더 큰 고민의 무게를 갖는다. 이미 해봤고 앞으로도 해야 하는 일이기에, 어쩔 수 없이 또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 어려운 시간을 좀 더 잘 건너갈 방법을 찾고 싶다. 내가 보호자로 간병인으로 보호받고 도움받을 수 있는 제도가 충분하기를, 개인이 감당하는 부담이 좀 덜어지기를.
이 책의 작가들이 겪었을 그 마음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져와서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다. 100세 시대라는 말이 어울리기보다는, 유병장수의 시대가 맞는 말 아닐까. 누구의 앞에 이런 문제가 놓여도 이상하지 않을 시대를,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듯하다. 돌봄의 상황에 놓인 개인이 덜 절망하도록 제도의 변화를 기대하는 게 맞지만, 제도의 변화보다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같은 상황에 놓인 개인의 연대에 더 의지하게 되는 게 현실이다. 어쩔 수 없다면, 그 절망의 크기를 줄이는 일에 애쓰는 게 더 현명한 일일지도. 입원 준비할 거 싸갈 캐리어가 멀쩡한지 꺼내 봐야겠다. 피해 갈 수 없다면 머릿속에 긍정적인 생각만 가득 채워야지 별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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