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릴리언트 블루 (Brilliant Blue)
함지성 지음 / 잔(도서출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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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서 만남은 여행의 즐거웠던 시간을 기억하듯 그곳에 남겨두고 오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굳이 기대하지 않아도 좋을, 여행이 끝나면 현재의 생활로 가져와서 감정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나이를 먹을수록 이런 계산(?)은 더 짙어졌고, 오늘을 살아내느라 바쁜 인생은 이렇게 살아가는 거라고 얘기하곤 했는데... 이 소설을 읽다 보니 잠깐, 아주 잠깐 한 번쯤은 그냥 여행 자체로 생각하면서 떠나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러니까, 여행지에서의 만남을 꿈꾸지도 않지만, 혹시 여행지에서의 만남이 있더라도 거기 놔두고 와야만 하는 결론을 미리 내지 않아도 되는 일 아니었느냐고 말이다.


수키는 남프랑스에서 결혼하는 친구의 초대를 받았다. 이 친구들은 몇 년 전 보라카이에서 만난 친구들이고, 이들의 초대로 남프랑스에서 지내던 시간도 있었다. 그때, 리버를 만났다. 파란 눈의 중심에 노란빛이 섞인 그와의 시간은 사랑이 되었고, 그와 함께 뉴욕으로 돌아온 그녀는 이 사랑이 영원할 거로 믿었다. 하지만 이들은 각자의 일상을 살아가던 중 선뜻 선택하지 못할 문제에 이르렀고, 그렇게 헤어졌다. 그렇게 시간은 또 흐르고...


친구의 결혼식에서 그를 만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나만 하는 건 아니지? 수키가 그와 연인이기에 앞서 그는 결혼 당사자의 친구였으니, 당연히 초대받을 수 있는 일이니까. 그래서 의외의 망설임을 겪어야 했다. 친구의 결혼을 축하하고 싶은데, 그와 만남이 어색할까 잠깐 주춤거렸다. 단순히 그의 얼굴을 다시 보는 게 어색해서만은 아니다. 그와 헤어진 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순간순간 그를 떠올리게 하는 기억은 튀어나왔다. 어느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들 때문에, 어느 음악 바 앞에서, 어떤 음식을 두고도. 그녀의 옆에 다른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줄곧 그녀의 온전한 사랑을 갈구하고 있음에도 리버의 잔상은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친구의 결혼식에 왔으니, 즐거우면서도 불안한 이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두근거리면서, 떨리고,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다시 봐도 어떻게 할 거라는 생각도 계획도 없는데, 보고도 싶고 안 보고도 싶고. 모든 상황과 순간에서 갈팡질팡하게 되는 이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다.


혼자 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을 때면 항상 데리러 와 내 것과 똑같은 차를 시키던 그 사람이. 잔이 거의 비워질 때 즈음에 맞춰 책을 덮으면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 내 등을 감싸던 그 사람이. 저녁을 먹고 집에 들어가기 전이면 꼭 허드슨 강 쪽 부두까지 손을 잡고 걷고 싶어 하던 그 사림이. 이제는 내 마음속에 존재하는 그 사람 따위, 전혀 가볍지 않지만 나는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다. (43페이지)


벽에 박힌 못을 뽑아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처럼, 이 자리에 없는 건 한 사람뿐이다. 서로의 생각이 일치하지 못해서 헤어졌지만, 그렇게 헤어졌다고 슬프거나 아프지 않은 건 아니다. 인간은 혼자 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쓴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이 아픔을 그대로 표현하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이만큼 보고 싶고 힘든데 마치 아닌 것처럼, 지금 잘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말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저자는 이렇게 아닌 척하는 게 아니라, 수키라는 인물을 통해 너무 솔직하게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일상에 집중하고 해야 할 공부를 하고 지냈지만, 어느 순간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그의 흔적을 가감 없이 들려줬다. 그런 마음 모른다고 하는 것도 거짓말 같아서, 나도 모르게 수키의 감정을 담은 문장을 따라가고 있었다. 오래 전의 어떤 감정, 어려서 그랬다고 변명하기에는 후회가 가득했던 순간들, 조금 양보하지 못해서 감정적으로 대했던 날들을 지금도 기억해 낼 수 있을 정도니까.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 번쯤 경험했을 그 순간을 소설로 다시 만나니. 웃음도 나지만 아련하기도 하다. 사실 이런 감정을 느끼고 살기에는 오늘이 너무 바쁘지 않은가. 전쟁통에서도 사랑을 한다고 하지만, 나이를 먹고 살아가는 일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우선에 두지 못하게 하는, 어떤 눈치를 챙길 때도 있다. 그래서일까, 스물 전후의 시간을 보내는 수키의 일상에서 돌아가지 못할 시간의 설렘에 두근거렸다. 뭐든 열심히 하면서 실수도 하니까, 그래도 된다는 너그러움을 먼저 보이게 된다. 한 사람의 일기장을 보는 기분으로 읽게 되는데, 그 중심에 로맨스가 있다. 그래서? 친구의 결혼식에 갔어? 리버가 거기에 왔어, 안 왔어?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묻고 싶은 게 많았다. 그를 다시 만났는지, 만났다면 두 사람은 어떻게 됐는지, 지나간 시간을 묻어두고 각자의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그녀의 오랜 그리움에 대한 답을 얻었는지. 뉴욕, 보라카이, 남프랑스 등 이국적인 배경이 이 소설을 더 특별한 느낌으로 전달하면서, 괜히 수다쟁이가 되면서 읽게 되는, 오랜만의 가슴 떨림이, 이 소설을 읽는 재미를 배가 되게 한다.


한 가지 궁금증만 보고 이 소설을 대했다. 처음 소개 글에서 언급된 헤어진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에, 두 사람이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하는 결말만 파헤치고 싶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재회 여부를 확인하기까지 서술되는 한 사람의 일상과 그 나이에 해야 할 일들에 집중해서 살아가는 날들, 이국적인 풍경을 들려주는 재미에 빠져있다 보면, 어느새 결말에 도착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색다른 장소를 문장으로 여행하는 기분, 잊고 지냈던 두근거림을 마주하며 잠깐 설렜던 즐거움이 가득했던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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