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와 노인 사이에도 사람이 있다 - 인생의 파도를 대하는 마흔의 유연한 시선
제인 수 지음, 임정아 옮김 / 라이프앤페이지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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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병원에 다니는 거였다. 언제부턴가 병원에 갈 일이 너무 많아졌고, 다양한 병명이 나를 대신하고 있었다. 작년 말부터 나를 힘들게 하던 대상포진은 일 년 동안 두세 달에 한 번씩 나를 찾아왔다. 감기와 구분이 되지 않아서 괴로웠던 비염을 진단받았다. 오랫동안 통증이 있었던 어깨는 염증이 생겼다고 반년 가까이 치료받고 있다. 너무 많아서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이제 언젠가 엄마를 놀렸던 종합병원이라는 별명을 되돌려받았다. 사십 대는 그런 나이인가?


당신의 사십 대는 어떠한가. 나처럼 육체의 고단함으로 먼저 확인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이십 대 삼십 대와 확연하게 다른 뭔가로 불안해하고 있는지. 흔히 중년이라고 불리는 나이를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랐는데, 이 책의 제목 때문에라도 한 번은 더 생각해보고 싶은 문제였다. ‘소녀노인사이에 존재하는 우리는 뭐라고 불릴 수 있을까? 단순히 호칭보다는 그 나이가 된다는 것 자체가 무서웠다. 이십 대, 삼십 대를 살면서도 불안했던 마음은 사십 대가 되어서도 멈추지 않았으니까. 왜 이런 불안함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걸까 물어봐도 대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단지, 다음 나이대를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때, 우리의 예상과 계획대로 다음 나이대를 맞이한 적이 있었는지 되짚어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십 대는 이렇게 살 것이다, 삼십 대는 저렇게 살아가겠지 싶은 생각 그대로 우리의 이십 대, 삼십 대가 그렇게 흘러갔더냐고 묻고 싶은 마음 말이다.


작가는 우리가 느끼는 이런 불안을 다 안다는 듯이, 자기도 그렇게 겪어왔던 시간을 그대로 풀어낸다.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하고, 우리는 그 변화의 한가운데 살아가면서 벅차게 달리고 있다. 최신 IT 기술보다는 신형 안마의자에 현혹되는 그 마음을 아실는지. ^^ 필요하다면 겉으로 보기에 예쁜 것보다 실용적인 것을 선택하게 되는, 맛있는 걸 먹을 때도 위장 걱정하는 날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테다. 나도 비슷하다. 줄임말을 몰라서 못 알아듣기도 하고, 최신 스마트폰의 기능에 접근하기 어렵기도 한 일상. 초등학생 조카가 알려주는 몇 가지 얘기에 엄청나게 신기해하면서 듣기도 한다. 밖에서 나를 아줌마로 불러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병원의 물리치료실에서 뜨끈한 찜질팩을 깔고 누워있는 것도 좋다. 갑자기 찐 살이 너무 밉고 부담스럽지만, 살을 빼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외모가 아닌 건강 때문이었다. 뭔가 대단하고 우아한 사십 대를 예상했을지도 모르는데, 별로 변한 것 없이,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도 않는 시간을 산다. 여전히 실수투성이,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수다에 즐거워하는, 십 년 이십 년 전에도 살아왔던 그대로.


나이를 먹으면 다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작가도 비슷했을 듯하다. 우리는 나이를 먹고 어른이라고 불리지만 아직 완전한 어른이 되지 못했다. 여전히 젊은 날의 감성을 가지고, 때로는 깊이 있는 공부보다는 보기에 아름다운 것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노지에 텐트 치고 숙박하는 게 아니라, 몸이 편한 숙소를 선호하기도 한다. 때로는 수준 높은 물건에 눈길이 가면서도, 일상에서 편한 것은 한 번 쓰고 버려도 미안해하지 않을 물건이 되기도 한다. 기분전환일 수도 있지만, 삶의 계획이나 우선순위를 살짝 변경하기도 하는 일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다. 여전히 변화에 둔할 때도 있고, 온갖 사이트의 비밀번호를 찾아 헤매는 시간이 익숙한 날들이다. 조금 전에도 오랜만에 접속한 쇼핑 사이트의 비밀번호를 찾다가 변경하기도 했던지라, 작가의 이런 에피소드가 왜 이렇게 공감이 되는지. 세상이 바삐 돌아가는 걸 지켜보면서도, 그 안으로 스며들지 못하면 한참 뒤처지는 건 아닌가 걱정스럽기도 한 나이. 사십 대는 그런 나이인가 보다. 젊음을 발산하기에는 힘에 버거울 때도 있고, 인생의 노련함을 뽐내기에는 부족한 것투성이인 지금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날들을 잘 살아가는 법을 작가에게 듣는다.


시대가 변하고 가치관도 빠르게 변해간다. 일하는 남성의 종신고용과 연공서열, 전업주부의 무상 돌봄노동으로 지탱되던 경제는 진즉에 끝났다. 낡은 가치관에 매달려 있으면 남자들의 매일은 암담할 것이다아버지의 씩씩함을 보고 있으면 나도 배워야 한다고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때는 좋았지라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늘 새로운 것에 몸과 뇌를 점점 적응시켜간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언제까지나 인생을 즐기는 비결이라고 아버지는 있는 힘을 다해 가르쳐 주신다언젠가는 엄마를 만나러 가버리실 테니, 아버지가 숨 닿는 데까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 만큼 다 해보시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111페이지)


어쩌면 이렇게 긍정적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작가는 나이 들어감의 대단함이 아니라 별일 없는 날들을 살아가는 오늘을 즐겁게 표현한다. 지나온 시간이 마냥 좋았던 건 아닐 테다. 그런데도 우리는 가끔은 젊은 날을 그리워하면서 산다. 서툴러서 긴장하고 알게 되면서 만만해 보이는 것도 생긴다. 그러다가 익숙해지는 것들로 나이와 경험을 채워가겠지. 여러 가지 위기를 힘겹게 통과해온 시절이 내 것일 수밖에 없듯이, 지금 살면서 겪는 모든 것도 내 것이 된다. 좋은 일 나쁜 일 찾아오는 게 인생일 텐데, 이왕이면 기쁘고 좋은 일에 더 마음 두면서 살아가도 좋겠지. 작가가 들려준 소박한 날들의 이야기가 그 증거가 된다. 일상의 곳곳에서 적당한 선을 지키며 관계의 비결을 발휘하고, 육체의 노화와 건강, 여행이나 우정을 중요하게 여기기도 하면서, 결혼이나 출산, 동거와 같은 주제에 공감하며 행복한 날들을 만들어간다. 사십 대의 날들, 그동안 살아온 날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앞으로 살아간 날들과도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이제껏 살아왔던 것처럼, 그럭저럭 괜찮은 날들이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아무래도 비혼으로 살아가는 작가에게 일상은, 일이 중심이 되면서도 여성의 연대와 같은 우정이 큰 축이 된다. 각자의 삶은 다르지만, 그 영역에서 축적된 지혜로 서로를 돕기도 한다. 미혼(비혼)이거나 기혼이거나, 결혼생활 중이거나 이혼이거나, 그 생활에서 보이는 많은 것이 대화의 주제가 되고 인생의 지침이 된다. 과거를 기억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법 말고는, 여전히 우리는 미래를 알지 못한다. 그러니 정답도 없다. 매 순간 새롭게 덮쳐오는 파도를 견디는 수밖에. 그게 나쁘지 않다는 것을 작가의 일상으로, 이야기로 알게 됐다. 변해가는 세상에 적당히 스며들어도 좋고, 상황에 맞게 사고를 전환해도 좋다.


삶이 꼭 계획대로, 또 예정대로 되는 것은 아니니까. 이 순간에 집중하고 즐기는 것, 그것 또한 삶에 대한 존중일 것이다. (64페이지)


일상의 구석구석에서 느끼는 평범하고 솔직한 이야기가 듣기 좋았다. 실수나 어설픈 것을 감추려고 하기보다는, 이래도 괜찮다고 보여주고 싶은 것처럼 유쾌했다고 해야 하나. 마냥 불안하게만 여기던 시기를 건너가는 것이 생각보다 재밌다고 말하는 것만 같더라. 괜찮았다. 미리 불안해할 필요도 없고, 걱정할 것도 없다. 굳이 마흔이 아니어도, 사십 대가 아니어도 공감할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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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16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2021년 서재의 달인 추카 합니다 ^ㅅ^

구단씨 2021-12-17 14:4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스캇님도 축하드려요.
내년에도 다양하고 깊은 음악 이야기 계속 듣고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