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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심연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21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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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한 장면처럼 흐르는 이야기에 푹 빠져 있다 보니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다. 우리가 익히 아는 사랑, 아닌 걸 알면서도 가고야 마는, 내 마음을 봐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그러거나 말거나 내 사랑이 충만하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여겨도 좋은 일. 누군가의 사랑을 지켜보는 일은 설렜다. 그러면서도 불안은 틈틈이 끼어들었다. 이 사랑이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어서다. 아니면, 도덕적으로 허락되지 않은 사랑에 뛰어든 이들의 무모함이 궁금했던 건지도 모르지. 현실에서 마주했다면 분명 지금쯤 어떤 결말을 확인했을 테니 말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사랑 방식이 있지 않은가. 때로는 계획적으로 때로는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것처럼, 사랑은 어떤 식으로도 고정적이고 완전한 정의가 없는 듯하다. 이렇게 다양한 사랑의 모습에서 발견하는 공통점 한 가지는, ‘사랑’이라는 것. 각자가 선택한 사랑 앞에 최선을 다한다. 뤼도빅의 사랑처럼, 누구의 시선도 중요하지 않고 그동안 가졌던 사랑의 정의도 다 바꾸고 변해버릴 만큼 그 순간의 감정을 선택하는 일. 괴롭고 힘들게만 했던 사랑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 따위 무시할 만큼의 몰입이라면, 이게 사랑이겠지. 사랑은 그런 거니까. 그래야 사랑이니까. 프랑수아즈 사강이 들려준 사랑도 마찬가지. 내 마음이 끓어대는 그대로 하고 나니 과거와 다른 삶이 펼쳐졌다면, 그게 사랑이고 기적이 아닐까.
프랑스 지방 재력가 앙리 크레송의 저택 ‘라 크레소나드’가 배경이 된 이 소설은, 가면을 쓴 채로 움직이는 배우들의 연기가 한껏 무르익었다. 배우들은 가끔 그 가면을 벗으며 숨을 쉬려는 듯, 가슴 속 말을 적나라하게 쏟아내기도 했다. 가식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은 여전했지만, 오히려 그들의 가면이 더 돋보이는 이야기였다. 부호 ‘앙리’의 아들 ‘뤼도빅’이 자동차 사고를 겪고 2년 동안 정신 병원과 요양원에 머물다 집으로 돌아왔다.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묻고 싶지만, 이미 뤼도빅의 아내 ‘마리로르’의 표정에서 답을 들은 듯하다. 남편의 귀가가 반갑지 않다. 바보 같은 사람으로 낙인찍힌 그에게 처음부터 사랑을 찾지 않았던 그녀는 오직 저택의 존재와 앙리의 재산이 안겨주는 부유한 삶, 그녀가 원하는 사랑은 그런 거였다. 앙리의 두 번째 아내 ‘상드라’는 지적이지 못했고, 그녀의 동생이 ‘필립’이 저택에 머물고 있지만 역할 없는 기생충에 가까웠다. 뤼도빅의 아버지 앙리에게 아들은 체면을 위해서 챙겨야 하는 존재였으며, 그 아들이 아무 문제 없이 이렇게 잘살고 있다고 표명하는 자리라도 만들어야 했다. 앙리는 사람들 앞에 아들을 내보이게 위한 파티를 준비하며, 뤼도빅의 장모(마리로르의 엄마) ‘파니’가 저택을 찾는다.
이 모든 일이 파티를 열기로 하면서 시작되었으니, 파티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한 마음으로 읽게 된다. 그 과정에서 보이는 이들의 사랑에 나는 파티의 주최 여부가 더 궁금해졌다. 파티는 무사히 열렸을까, 이들의 가식과 침묵과 염탐이 또 다른 사건을 만들어내지는 않았을까. 무엇보다 이들의 사랑을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은 걸까 싶은 마음. 권태롭고 우울한 분위기의 저택에서 버티는 건 웬만한 정신력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모두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가면 그뿐, 타인의 마음 따위 관심도 없고 궁금하지 않다. 그런 사람들 속에서 뤼도빅은 자기 존재에 관해 수도 없이 고민했을 터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존재, 사랑하는 아내조차 외면하는 그 자신을 탓하며 하루하루 살아내고 있지는 않았을까. 그때 저택에 들리던 피아노 소리와 그에게 다정했던 단 한 사람은 뤼도빅의 삶을 바꿔놓는다. 사고로 멈춰있던 그의 운전까지 가능하게 하고야 만다.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여전히 불안하고 위태롭게 보이지만, 그들은 자기 마음에 충실하다. 욕망하면 욕망하는 대로, 불안하고 초조하면 그 마음 그대로 감당하면서 오늘의 사랑에 빠져든다. 이게 사랑이 맞는지 의심하지만, 어느 순간 깊숙이 파고든 사랑을 인정하는 모습마저 아름답다.
그들은 두려움도 호기심도 부끄러움도 없는 또 다른 영역에서 서로를 발견했다. 그것은 운명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그보다 열 살이 많든 적든, 그 일이 스캔들이든 아니든, 그것이 지속적이든 일시적이든, 이 사건, 피아노 옆에서의 그 두 시간이 그녀의 삶, 그녀의 습관과 어울리든 그렇지 않든 간에. (194~195페이지)
가벼운 코미디 같은 장면이 군데군데 묻어나면서 소설은 리듬을 타기도 한다. 집사 마르탱이 저택의 곳곳을 보면서도 침묵하는 시선은, 그들의 비밀을 다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속으로 비웃는 것만 같다. 아내 상드라가 다쳤어도 그러거나 말거나 다른 사랑을 꿈꾸는 앙리의 헛물켜기는 안쓰럽기까지 하다. 비밀을 알면서도 끝까지 지켜보기만 했던 필립의 속내가 위험해 보였지만 알 수 없어서 더 궁금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개 한 마리는 어느 순간 이 소설의 화자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의인화하고 싶은 대상이다.
이상하게도 나는 앙리가 파니를 초대한 이유에서 웃음이 나더라. 아들이 병원에 있을 때 찾아와 유일하게 눈물을 흘려준 사람이라는 이유로 파니를 선택했다니. 장모가 사위의 고통을 지켜보면서 우는 일이 특별한 일인가 싶어 잠깐 머뭇거렸는데, 이 저택의 사람들을 보면 앙리가 파니의 눈물을 귀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는 걸 알게 된다. 아들을 무시하는 며느리보다 아들의 아픔을 알아보는 이가 먼저 생각나는 건 당연하다. 어쩌면 내가 앙리를 잘못 판단한 건 아닐까? 아들을 아끼는 사람을 알아보고 초대한다는 건,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아니라면 알아볼 수 없는 일이니까. 그건 뤼도빅 역시 마찬가지다. 경제적 여유와 화려함을 향한 삶을 추구하는 마리로르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열심히 살아가는(파니는 남편이 죽은 후 생계를 위해 일하지만 여유로운 삶은 아니다) 이에게 눈길이 간다. 물론 뤼도빅이 선택한 사랑의 대상이 존경의 이유만 있는 건 아니겠지만, 허세와 겉치장으로 가득한 사람들 속에서 파니가 빛나 보이는 건 처음부터 정해진 일이 아니었나 싶다.
처음부터 미완의 소설이라고 들어서일까. 어느 부분에서 부족한 게 있을까 찾는 마음으로 읽은 것도 있다. 하지만 이 결말이 오히려 더 잘 어울렸다. 현실 속 상황이라도 해도 우리는 여전히 고뇌하고 있을 테니까. 그러다 언젠가는 이 사랑의 마지막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선택하겠지. 어떤 사랑도 끝은 있으니까. 결국은 지금 내가 선택한 것, 사랑이든 사랑의 끝이든, 그게 전부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사랑도 삶도, 어떤 날이 될지 모를 내일보다는, 지금 보고 있는 오늘의 순간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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