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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는 엄마
신현림 지음 / 놀 / 2018년 5월
평점 :

좋은 책의 글귀를 보는 일은 인생에서 굉장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엄마와 함께 책을 읽는 일은 삶의 지혜와 철학을 만나게 해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서로의 영혼을 느끼고 영혼이 풍요로워짐을 깨달으리라. 참으로 멋진 일이다. 지금 당장 엄마가 좋아하실 글이나 시를 전해보기를. 그러면 그 순간 추억이 만들어진다는 것. (206페이지)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있다. 아니, 그런 순간이 필요하다. 어떤 문장 하나, 어떤 음악 하나가 눈과 귀에 들어와서 힘든 한순간의 위로가 되는 때. 무심코 들었던 멜로디에서 눈물이 주룩 흐르기도 하고, 시의 한 구절이 가슴을 파고 들어와 이 순간을 건너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하는... 한 사람으로 살아가기에도 벅찬 게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 나 하나를 지탱하는 것도 어려운 순간마다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엄마'라는 존재감을 잊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무게일까? 수치로 측정할 수 없는 감정의 거대한 숫자이리라. 그 무게가 나를 꼿꼿하게 설 수 있게 묶어주면 좋겠지만, 또 그러지 못해서 에너지의 기복을 그리는 게 인간이고 엄마일 것 같다. 시인이자 작가이자 선생인 저자가 엄마로 살면서 그런 순간이 없었으랴. 누구에게나 있는 그런 순간이 이 사람에 없을 수는 없다. 그때마다 그녀를 위로하고 힘이 되게 하는 시의 구절들을 그대로 담아온 책이다.
매번 흔들리고 좌절할 때마다 엄마라는 이름의 그녀가 사는 의미를 얻게 한 문장들이 가득하다. 그녀의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 힘을 내게 했던, 이 세상의 모든 엄마에게 들려주고 싶은 시 38편이 담겼다. 거기에 저자가 엄마로 살면서 겪은 온갖 감정을 쏟아내는 에세이가 함께 했다. 아이가 어렸을 때 겪는 육아의 고충, 아이가 커가면서 부딪히게 되는 세상의 시선에 상처받았던 일. 하지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가 된 딸의 엄마로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 있었다. 그때마다 그녀의 옆에서 위로가 되었던 문장들이다. 두렵고 막막한 날들에 겁이 나면서도 나아갈 수 있었던 건 그녀가 품은 시 때문이었다. 시인들의 시가 묵묵히 그녀를 지켜주었고, 그녀 자신이 써 내려간 시 구절들은 그녀의 삶이 오롯이 담겼다.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글귀를 읽을 때마다
반드시 도달해야 할 어떤 곳이 있을 것 같다
그 비로소는 어떤 곳이며 어느 정도의 거리인가
비로소까지 도달하려면 어떤 일과 어떤 현상, 말미암을 지나고
또 오랜 기다림 끝에 도착할 것인가
팽팽하게 당겨졌던 고무줄이
저의 한계를 놓아버린 그곳
싱거운 개울이 기어이 만나고 만
짠물의 그 어리둥절한 곳일까
비로소는 지도도 없고
물어물어 갈 수도 없는 그런 방향 같은 것일까
우리는 흘러가는 중이어서
알고 보면 모두 비로소,
그곳 비로소에 이미 와 있거나
무심히 지나쳤던 봄꽃,
그 봄꽃이 자라 안 할의 사과 속 벌레가 되고
풀숲에 버린 한 알의 사과는 아니었을까
비로소 사람을 거치거나
사람을 잃거나 했던
그 비로소를 만날 때마다
들었던 아득함의 위안을
또 떠올리는 것이다 (「비로소」, 이서화)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들부터, 너무 유명해서 귀에 익숙한 시인들까지. 그들의 시를 저자와 같이 듣고 있는 느낌이 페이지를 넘기면서 계속된다. 누군가의 일상을 듣는 것도 같고, 힘든 순간을 잘 건너고 싶은 주문처럼 들리기도 한다. 부정의 감각들이 온몸을 감싸고 주저앉고 싶게 할 때마다, '그래, 사는 거 뭐 별거 있나, 다시 일어서는 거지, 이 정도도 건너지 못하면 뭘 할 수 있다고, 계속 가보는 거야.' 많은 의미와 감동을 담은 메시지로 전해오는 시 구절들이 힘이 된다. 그때마다 보이는 건 바로 옆의, 저자의 딸이다. 딸을 키우면서 알게 되는 감정이 또 다른 문장들로 함께 녹아 있다. 저자의 글을 읽다 보면,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보이는 게 있다. 이제는 딸과 함께, 친구처럼 동료처럼 가족처럼, 서로 의지가 되고 무한의 응원을 보내는 사이가 되어 있다는 거. 힘든 시간 같이 겪어간다는 건 그런 건가 보다. 저자의 상황과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지금 내가 엄마와 함께 지내면서 겪고 느끼는 시간의 감정은 저자와 비슷하다.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이지만, 그 이상의 많은 관계로 정의할 수도 있는, 엄마와 내가 공유한 같은 경험들이 만든 관계의 끈끈함이 있다. 지금도 서로 싸우면서 감정도 상하고 그러지만, 언제 그렇게 싸우고 그랬냐는 듯이 새로 개봉한 영화를 같이 보고 맥주 한잔을 기울이며 웃는 시간이 있다.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어떤 순간들을 같이 건너온 사람만이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이다. 저자와 딸도 아마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엄마의 아픔을, 엄마의 노력이 얼마나 힘에 부치는지... 그런데도 딸과 함께하는 시간을 계속 이어가는 엄마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아서 괜히 뭉클해진다.
물 냄새를 맡고 싶어
좁은 계단으로 강가에 내려간 적이 있다
휘어진 모래톱
부드러운 변방에 서서
눈을 감고 냄새를 맡았지만
물가에선 또 다른 냄새가 그리워
어디로 더 가야 하지
다리도 계단도 없을 곳이라면,
아득히 귀를 열고 선 내게
흘러드는 물은 멀어지는 물살은
날더러 기슭이라고 그토록
어디든 닿고 싶어서 (「강가에 내려간 적이 있다」, 조원규)
여름을 느끼게 하는 한낮의 더위가 아니라 아직은 봄이 다 가지 않았다고 느끼게 하는 선선한 바람을 맞는 기분으로 읽고 싶은 글이다. 부채질하면서 밀어내고 싶은 않은, 가슴으로 스며드는 바람으로 느끼고 싶어서... 아무리 이해를 한다고 해도 엄마의 모든 것, 모든 시간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이는 것 이상으로 건네져 오는 엄마의 마음을 알기에 저자의 글이 낯설지 않다. 읽는 순간순간 어떤 감동이 느껴질 때마다, '한 번도 좋은 딸인 적 없다'는 저자의 고백이 내 얘기를 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뜨끔해진다. 엄마의 마음을, 엄마의 힘든 시간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저 습관처럼 '엄마니까'라는 생각으로 지나쳤던 순간들을 다시 떠올려본다. 쉽지 않았겠구나. 우리 엄마도, 세상 모든 엄마도...
'엄마라는 무게를 견디고 있는 당신에게'라고 말하지만, 늘 삶의 무게를 이겨내야 하는 숙제로 오늘을 버티는 우리 모두와 공유하고 싶은 글이다. 엄마라는 책임이 절대 가볍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또 각자의 무게를 안고 사는 게 우리니까 말이다. 삶이 언제나 편하게 지나갈까 싶은 투정이 가슴 속에서 뛰쳐나오려고 하면서도, 이렇게 살아가며 울고 웃는 게 우리 인생인가 싶은 마음에 또 한 번 자신을 토닥이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런 위로가 없다면 우리가 오늘을 사는 일은 더 힘들 것만 같다. 저자가 전하는, 위로와 힘이 되었던 시 구절들이 이 책을 읽는 모두에게 그대로 가 닿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