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파워 시대
최성금 지음 / 모란(moRan)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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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최성금 대표는 현재 시니어TV 사장이며 MBC의 자회사 여럿에서 중요 직책을 수행하였고, 특히 어린이 직업체험 테마파크인 "키자니아"의 큰 성공으로 업계의 주목을 받은 인물입니다. p19의 머리말을 보면 구순의 연세에도 여전히 건강하신 친정어머니께 감사드린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런 정신적, 육체적 건강도 다분히 유전의 영향을 크게 받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성금 대표 본인도 이제 우리 사회 통념상 시니어에 속하는 연세이신데도 외견상 그런 느낌이 잘 안 들기 때문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나이 드신 분들 중에는 중견배우 윤문식씨 등이 활약한 MBC 마당놀이를 재미있게 보신 경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인공들보다 마당쇠, 방자 등의 역을 맡은 윤문식씨가 더 인기를 끈 특이한 현상도 있었는데, 이 마당놀이는 녹화되어 TV로도 방영되었는데 원래는 전국순회공연 형태였습니다. 이 이야기가 p39에 나왔는데 당시 MBC에서 이 기획을 주도한 분은 아니었지만 그 20주년 기념 리바이벌을 기획하셨다고 나오네요. 또 1988년 9월 17일 서울올림픽 개최를 보도한 역사적인 뉴스데스크(9시 메인뉴스)를 진행한 강성구 앵커의 비서 경력도 있다고 적혔습니다. 

키자니아를 성공적으로 정착시켰으나 당시 MBC 사정이 여러 모로 안정적이지 못해 사장직을 연임하지 못하고 유통물류 회사로 자리를 옮긴 일을 저자는 씁쓸하게 회고합니다. 여기에서 저자는 평생 직장 개념이 우리 나라에서 크게 흔들린다고 지적하며, 하지만 한국의 시니어들은 여전히 평생의 경력을 중시하고 또한 그럴 의사가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첫째 고용구조의 경직성, 둘째 시니어 본인들의 유연성 부족(p83)이 지적됩니다. 저자도 수십 년 몸담아온 방송일을 떠나 물류회사로 옮겼지만 성공적으로 적응했다고 나오는데, 특히 중장년 취업에는 이런 마음가짐의 전환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유럽의 경우 청장년기에 열심히 일한 후 남은 기간은 연금으로 사는 게 상식에 가깝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계에서 유독 한국과 일본은, 생산 활동에서 이탈한다는 게 불안과 자존감 하락으로 이어지며, 사람들과 어울리며 사회 생활을 계속 이어가는 게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사회 풍조가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p142). "계속 일하고 싶은 시니어" 역시 우리 나라에서 모든 이들이 공감할 만한 시대정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은퇴한 시니어의 가장 큰 고민으로, 첫째 시간을 보낼 줄 모른다, 둘째 만날 사람도,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다, 셋째 뭘 할지 모른다 등이 있다고 저자는 짚습니다(p149).  

이 책의 주목적은 시니어 비즈니스를 구상하는 이들에게 현재 한국의 이쪽 업황이 어떠한지를 알려 주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p155 이하에 본격적으로 서술되는데, 특히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들은 태어나길 아날로그 시대에 태어났으면서도 디지털 시대를 견인했기 때문에 세계 어느 집단보다도 적응력이 뛰어나고 감각이 탁월하다는 게 저자의 평가입니다. 그리고 정부의 역할은 복지, 기업의 역할은 비즈니스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두 부문의 역할이 혼동되는 데서 모든 부작용이 발생한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p197에서는 웰에이징(well-aging)을 위한 20가지 질문이 제시되는데, 더불어 헬시에이징을 위한 좋은 지침도 잘 정리되었습니다. 

한국의 시니어들은 이처럼 의욕에 충만하고 능력도 있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을 가리켜 액티브 시니어라고 부르는데, 이런 분들에게 시니어 클럽을 권하면 "벌써 가려니 쑥스럽다(p208)"라는 반응이 반드시 나온다고 합니다. 하긴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 대목에서 저자가 개발한 실버니아가 자세히 소개되는데 무엇보다 시니어들이 스스로 자긍을 유지하고, 삶의 낙을 잃지 않게 돕는 요소가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시니어분들이 스스로 나이들었다는 위축감 없이, 젊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사회에서 퇴장할 만큼 나이든 것도 아니라는 어떤 확신을 주는 시스템이, 시니어 비즈니스의 핵심이라는 결론이 무척 설득력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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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받아들이게 하지? - 목표를 이루려면 서로를 받아 들이도록 해야한다.
김동환 지음 / 더로드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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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내의 성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기술은 내 편을 많이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편이라 함은, 어떤 저급하고 계산적인 정치질, 편가르기, 협잡, 상술이 아니라, 진실된 대의, 합리적 협동을 이룰 수 있는 동지(同志)들의 규합입니다. 마음이 비뚤어진 이들끼리의 야합이란 오래갈 수도 없고 목표가 달성되기도 힘듭니다. 진정한 "우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타인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건강한 공감을 이뤄야 할 텐데,  짧은 우화집처럼 보이는 이 책 안에는 쓸만한 교훈이 많이 들어있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도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 울어야만 했습니다. 한 마리(여러 마리라면 더욱)의 암탉이 달걀을 낳는 데에도 많은 노고가 투입됩니다. 이 책 p22를 보면 저자님이 자신의 양계농장에서 일하는 직원 두 분을 뽑았는데, 서로 다른 두 "도구"를 가진 채용이라야 인적 자원의 다양성이 갖춰지지 않겠냐고 생각하신 듯합니다. 우수한 사료냐, 아니면 듣기 좋은 동물 음악이냐? 두 개의 우수한 도구가 모두 사용되었는데도 소출(所出)은 그닥 좋지 못했습니다.   

p43을 보면 도구들은 "무작정 합치는 게 아니라", 어떻게 조화롭게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지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저자가 두 직원의 서투른 경쟁(협업이 아닌)을 처음에 그저 놓고 보았던 건, 다들 자신이 옳다는 확신에 가득차서 생각을 굽힐 줄을 모르니, 원하던 대로 끝까지 가게 해 보고 그 실망스러운 결과를 통해 직접 깨닫게 하려는 의도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교훈이 나오는데, 음악은 사료와 맞는 음악이라야 하고, 사료 또한 음악과 어우러져야 사료 본연의 기능을 발휘한다는 점입니다. 이런 이치가 어디 양계농장에 한해서만 타당하겠습니까? 

양만 많다고 닭이 건강해지느냐, 그런 것도 아니고 중간쯤이라야 가장 좋아하더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또 컨트리음악 같은 것보다는 차분한 첼로곡이 최고더라는 팁도 시행착오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왜 구기자 사료를 많이 주었는데 결과가 기대만 못할까? 저자 역시 몇 번의 대조군 실험을 거치고서야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우화, 혹은 실화(?)를 통해 저자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걸까요. 책을 계속 읽어 보면 알 수 있더군요. 

p68에 중요한 교훈이 또 나옵니다. 스타트업은 시장에서 통할, 고객만족을 최우선으로 삼는 상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엔지니어는 자기 솜씨만 과시하려다 일을 그르친다는 것입니다. 책 앞날개에 나오듯 저자는 원래 LED, 나노파우더 등을 개발하던 엔지니어셨고 스타트업 창업에 깊이 간여하던 컨설턴트여서 이런 언급이 나오는 거죠. 사실 이 책은 양계농장을 운영하려는 귀농 지망자를 위한 게 아니라 청년 창업자들을 타겟삼아 집필되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시장에서 잘 팔리는 게 목적이지 자기 만족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꼭 보면 사업가인 척하면서 나는 돈만 보고간다 어쩐다를 떠들어도, 실상은 전혀 아닌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돈만 보고 가기나 하면 괜찮은데, 그것도 아니고 그냥 자기 감정대로 당장 마음편한대로 결정을 내리는 엉터리들이 수두룩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끄는 스타트업이 잘 될 리가 없습니다. 

내 도구가 도구로서 빛을 발하려면 다른 도구와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 수 있을까요? p78에 답이 나옵니다. 첫째 남의 도구에 예(禮)를 갖출 줄 알아야 합니다. 둘째 그 남의 도구를 열과 성을 다해 배울 줄 알아야 합니다. 또, 다시 닭의 비유로 돌아가자면, 비록 달걀을 많이 낳는 최적조건을 찾았으나 그 결과 닭의 생명에 위험이 가해진다면? 이 역시도 닭이라는 생명체에 몹쓸 짓임은 말할 것도 없고, 길게 보아 자신의 사업에도 유리할 바 없습니다. 무엇이 스타트업, 나아가 비즈니스 성공의 요체일지에 대해 쉽고 재미있게 배울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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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을 내는 철학책 - 삶의 궤도를 바꾸는 전방위적 철학 훈련
황진규 지음 / 철학흥신소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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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사람을 어떤 의미를 찾는 존재로 이끕니다. 고대부터 철학의 출발점은 거기였고, 지금처럼 물질문명이 발달한 시기야말로 철학이 사람의 삶 중심에 다시 놓여야 할 때입니다. 여태 무심히 봐 넘겼던 일상도 사물도 자연도 철학이라는 필터를 입히면 다르게 보입니다. 그저 착시가 아니라 나의 둔한 눈을 틔워 주고, 여태 생각지 못했던 바를 일깨웁니다. 저자 황진규 선생님처럼 많은 이들에게 철학을 가르치는 일을 하시는 분들의 삶이 보람으로 가득한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76에는 관계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관계는 평등한 관계도 있고, 일방이 타방에 종속된 경우도 있습니다. 종속이면서도 불가항력적인 관계 중 자발적인 것도 있고 비자발적인 것도 있는데, 후자는 부모-자녀 사이가 대표적입니다. 책에는 선생-학생도 예로 나오는데 이건 초중등학교에서 무작위로 배정되는 경우가 그렇겠습니다. 그럼 전자의 대표는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분명 불가항력적이지만 자발적입니다. 이 미묘한 모순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 감정인데도 헷갈려하고 올바른 관계 설정을 어려워합니다. 이처럼 철학의 프레임으로부터 도움을 받으면, 내가 직면한 문제의 성격이 더 분명히 보입니다. 우리에게 아마 영원히 낯설 미래,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이처럼 남겼습니다. 

"구경은 보는 것이지만, 사랑은 '하는' 것이다.(p120)" 사랑만큼 개념, 관념에 머물길 거부하는 그 무엇도 없습니다. 사랑을 책으로 배웠냐는 우스개도 있지만, 사랑은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프랑스의 평론가 기 드보르는 구경만 하는 행위의 한계와 취약점을 지적합니다. 사태의 변천에 주인공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자가 구경꾼으로 머물고 소외되는 건데, 그래서 이 병든 사회에 리얼리티 예능이 그처럼 판을 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본주의 발달 이전에는 으뜸되는 감각이 지금처럼 시각이 아니었고, 사람이 주체가 되어 직접 만져 보고 관계를 설정할 수 있게 하는 감각이 바로 촉각이었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관계를 완성하는 사랑이란, 몸소 "하는" 형태라야 비로소 제값이 쳐 지는 셈입니다. 이제 더 이상 온갖 요상한 상업적 이미지로부터 자극만 받지 말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사랑을 해 보자는 게 저자의 제안입니다. 

300여년 전 동프로이센의 철학자 칸트를 보면 어쩌면 한 인간이 이처럼이나 박학다식하고 철두철미한 탐구정신을 지녔을까 하는 감탄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올해는 칸트 탄생 300주년이 되는 연도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는데, 그 중에는 인간의 미성숙을 다룬 대목(p143)도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한 인간이 나이에 걸맞지 않게 미숙하다고 하면, 머리가 모자라다, 지성이 부족하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칸트는 지성이 설령 정상이라고 해도, 그 지성을 활용할 용기가 부족하면 역시 미성숙한 사람으로 머문다고 합니다. 대개 사람이 자기 현실을 똑바로 직시할 자신이 없고 말도안되는 망상에 사로잡히길 좋아한다면, 이 역시도 미성숙의 뚜렷한 증명이 됩니다. 물론 이런 사람은 대체로 머리 역시도 모자라며, 그 아들 손자 대에도 그런 특성이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진실은 힘이 강합니다. 진실이 위대한 이유는, 별반 가공을 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많은 문제를 통짜로 해결해 버리는 무서운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아무리 불편하다 해도 그대로 진실을 까발겨버리면 그 복잡하던 문제가 저절로 해결책을 찾기도 합니다.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너무도 솔직하게, 인간은 본래가 폭력적이며 존재 자체가 폭력(p180)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솔직합니까? 말만 번드르르하게 늘어놓고 문제를 호도하기보다 이처럼 대놓고 솔직해지는 언명을 보면 속이 다 시원해집니다. 삶의 조건 자체가 폭력인데 뭘 옳고 그름을 따집니까? 우리가 공기, 심장, 눈, 물에 대해 언제 찬반을 가린 적 있습니까? 폭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사람이 동물과는 다른 탓에, 어떻게 해야 그 행사하는 폭력이 조금이라도 더 인간적으로 순화되고 공리적일 수 있을지 고민할 뿐입니다. 

결단주의 정치학자 카를 슈미트는 국가의 존재 이유에 대해 지도자의 과감한 결단이라는 행위로 그 논의의 출발점을 잡았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인간은 나 외에 모두를 적으로 삼으려는 본능(p303)을 가졌습니다. 이러니 정치판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싸움이 그칠 날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자들은 근거없이 특정 지역을 폄하하고, 그 과정에서 개인의 내밀한 믿음을 비난하기도 합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규정(헤겔은 규정에 대해, 부정의 부정이라고 말한 바 있죠)하길,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연속"이라 했습니다. 적을 없애버리는 근원적 방법 중 하나가 모두를 적으로 돌리는 자발적 고립이라는 역설을 통해, 대체 개인을 둘러싼 조직, 사회, 국가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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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데트의 노래
프란츠 베르펠 지음, 이효상.이선화 옮김 / 파람북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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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와 20세기 초, 로마 가톨릭에서 공인한 기적 두 건이 특히 유명한데 각각 루르드의 성모, 파티마의 성모라고 부릅니다. 이 중 전자를 소재로 삼아 20세기 독일의 소설가 프란츠 베르델이 장편으로 만든 게 바로 이 작품입니다. 그간 이런 작품이 있다고 말로만 들었는데 이번에 파람북 출판사에서 꼼꼼하게 번역하여 이렇게 두꺼운 완역본으로 재단장하여 내었습니다. 이 한국어판이 나오기까지는 1960년대 내내 국회의장을 지낸 이효상의 병상 원고가 초역이고, 그 아드님인 이문희 대주교가 중간에 다듬었으며 또 이선화씨가 이번에 참여한 결과물입니다. 특히 가톨릭 신앙을 가진 독자라면 그간 영성 교육 자료로 활용되는 걸 봤을 것이고, 이 완역본으로 더욱 신앙을 다질 만합니다. 실화에 대해 사전지식이 없다면 권말 p676에 등장인물 소개가 있으므로 먼저 읽고 나서 소설을 탐독해도 되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성모의 현현이 지체 높은 자, 신학적 지식에 밝은 자, 권세 높은 자 앞에서 이뤄지지 않고 저 두 건에서처럼 가장 초라하고 힘없는 이에게 이뤄졌다는 점은 우리에게 많은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져있던 소녀 베르나데트(p140), 그녀의 가족이라고 해도 무지몽매한 탓에 이 소녀가 참된 메세지를 전하려 해도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애를 때려서 제정신을 들게 하려는 생각뿐입니다. 이웃이 말리지만 그들 역시 이 부모가 "신앙심이 깊고 순한 사람들"이라는 점을 압니다. 그런데도 애가 갑자기 헛소리를 하는 걸로 오인하여 매를 들어 고치려 들었으니 정말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이 일은 전체 공동체가 나서서 바로잡거나 수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소설에는 제국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예를 들면 p198 같은 곳입니다. 검사, 판사 등 국가의 법질서 유지 직무에 종사하는 이들 직함 앞에 주로 붙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 루이(실제로는 다른 혈통이라고 합니다)가 노련한 포퓰리즘 술책으로 정권을 잡은 후 스스로 황제를 칭했는데(이 소설에도 잠시 나옵니다), 국민투표를 거쳐 국체를 바꾸었으므로 이처럼 프랑스가 제국으로 통합니다. 물론 이후에 공화국으로 다시 바뀐 후에도 북아프리카나 인도차이나에 식민지를 유지했으므로 제국주의 정책은 계속되었습니다. 이 대목에서도 시장, 검사장, 본당 신부 등이 모여 부랑자나 질서 교란자는 그저 태형으로 길들이는 게 최상이라는 둥 그 시대상을 반영한 언사를 주고받습니다만, 이 사람들도 베르나데트 수비루라는 소녀에 대해서는 뭔가 사정이 다르다는 걸 잘 압니다. 또 이때는 영국, 미국, 프랑스 모두 2차 산업혁명을 겪으며 곳곳에 철도가 놓이는 등 격변의 시기를 건너갈 때입니다. 

"아니, 샘이 솟는 게 무슨 기적입니까? 샘은 그냥 땅을 파면 생길 수 있어요!" p289에서 클라랑스가 앙투안의 말을 가로채면서 퉁명스럽게 쏘아붙이지만 속으로는 이 사태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 싶습니다. 샘을 파는 인부들도 소녀 수비루의 위엄, 권위 같은 게 은연중에 느껴져 그 말을 따랐던 것 아니겠습니까. 4복음서에도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종의 authority 같은 게 그 언행에서 풍겼다는 기술이 자주 나옵니다. 1분에 최소 100리터가 나온다는 기적의 샘물. 아마 이때쯤이면 프랑스 전역에 미터법도 널리 보급될 무렵이겠는데 혁명과 함께 전파된 자유주의와 계몽주의의 여파가 이런 데서도 드러납니다. 

p388을 보면 현장에서 질서를 잡기 위해 기를 쓰던 당글라가 땀을 뻘뻘 흘리며 통제불능 상황으로 가는 중이라고 힘들게 루르드의 고위 인사들에게 보고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몬테 크리스토 백작>에도 같은 이름을 가진 캐릭터가 하나 나오는데 거기서는 속이 시커먼 은행장이었죠. 검사장의 말이 재미있습니다. "용기는 대가를 비싸게 치러야 하는 오락이죠." 이 사람은 진정한 용기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누군가가 상황 앞에서 튀어 보이기 위해 부리는 일종의 쇼맨십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의 눈에는 여기 루르드의 높으신 분들이 모두 하찮은 속물로 보인다는 뜻이죠. 

루이 나폴레옹은 국민투표를 통해 황제로 등극하고 반대파를 억압했습니다만 워낙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프랑스의 정치 풍토에서 그의 집권 기반이 내내 탄탄하지는 않았습니다. 루르드의 소녀 베르나데트가 일으킨 파장이 자칫하면 제정(帝政)의 기초까지 뒤흔들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황후 외제니까지 막후에서 나선 것입니다. 그러나 베르나데트는 아랑곳않고 페라말 신부에게 말합니다. "작은 쥐구멍으로 들어가지 않을 거에요.(p518)" 소녀의 심지는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자신과 함께한다는 확고한 믿음 덕입니다. 

의외로 스케일도 크고 당대 사회상이 리얼하게 반영되었을 뿐 아니라 신앙의 문제를 떠나서도 소설적 재미가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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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와 함께 춤을 - 시기, 질투, 분노는 어떻게 삶의 거름이 되는가
크리스타 K. 토마슨 지음, 한재호 옮김 / 흐름출판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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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 속에 오로지 긍정적인 감정만 가득할 수는 없습니다. 석가모니, 예수 그리스도도 그들의 행적을 보면 악인들의 몹쓸 짓을 보았을 때 격하게 분노를 표출하곤 했습니다. 하물며 평범한 우리들이 언제나 차분하고 행복한 느낌만으로 우리를 채울 수는 없습니다. 시기, 질투, 분노는 우리들의 마음 한 구석에 남아 무엇인가를 행하는데, 저자는 이런 감정들도 일정한 기능이 있으므로 무조건 억누를 수만은 없고, 오히려 그 긍정적인 의의를 잘 살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감정도 무시할 건 아니라는 정도의 소극적인 주장이 아니고, 이런 감정을 적극적으로 살려 내 인생을 더 풍요롭고 아름답게 가꾸라는 적극적인 취지입니다. 

(*몽실북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고대 로마의 귀족, 학자 들 중 중요한 비중을 지닌 일단의 인사들이 신봉했던 철학의 한 지류가 스토아 학파이며, 황제 철학자로 유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이 이 철학에 기여도 하고 깊이 심취했던 인물이었습니다. p47을 보면 성공한 CEO 등이 요즘 부쩍 강조하는 게 "신 스토아주의"라고 하는데, 원래 기업가들이나 스타트업 창업자들은 기질이 진취적입니다. 진취적인 기질이야 남들이 따라하고 싶은 장점이지만 문제는 이게 지나치면 목표 달성에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점이죠. 그래서 이들이 주장하는 신 스토아 주의는 그런 저돌적이고 성급한 마음을 잠시 진정시킬 수 있는 여러 가지 마이크로팁을 담습니다. 고전 스토아주의는 프뉴마라는 "창조의 불"이 세계를 지배하는 신의 원리라 믿었는데, 사람은 무엇이 이 세상을 관통하는 질서인지 깊은 사색을 통해 깨닫고 그에 순종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종류의, 마치 성인과 같은 감정통제형 삶의 방식이, 과연 우리가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성격의 목표인지에도 의문을 품습니다. 물론 순간순간 우리를 격동하게 만드는 감정을 잘 컨트롤하는 건 대단한 능력입니다. 그러나 그 정도로 성숙하고 초연하며 인생에 달관한 경지에 이르려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정도나 되어야 가능할지도 모르며,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소통하며 살아야 하는 현대인에게 그만큼 초인의 경지에 이를 수양의 기회가 주어질지도 의문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나의 감정을, 설령 그것이 질투, 시기 같은 한심한 감정이라고 해도 이를 일단 긍정하고, 그 자원의 에너지를 좋은 방향으로 살리자고 독자들에게 제안합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아름다운 꽃으로 가득한 정원에 벌레가 꼬인다면, 이를 독한 살충제를 써서 없앨 게 아니라(없어질지도 의문이지만) 그 벌레라는 걸 제 구실을 하게 잘 살려 오히려 꽃가루를 널리 퍼뜨리는 용도로 잘 써 볼 수는 없겠냐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과연 부정적인 감정을 이처럼 실용적으로 잘 길들인다는 게 말처럼 쉬울까? 일단 질투, 시기, 분노 등이 내 마음에 들어오면 나의 상태부터가 엉망이 됩니다. 오염, 비참화, 잠식(p89) 등이 아마 으리가 이런 감정들에 대해 들어온 부정적인 효과이겠습니다. 그래서 평범한 우리들도, 이런 감정이 내 안에 생기면 스스로 부끄러운 줄 알고 자제하거나 아예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니체의 경우 그의 여동생이 열렬한 반유대주의자, 민족주의자였으므로 사후에 그의 여동생에 의해 내용이 많이 왜곡되었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p118). 그의 사상 핵심은, 지나치게 이성에 의해서만 행동하려 들면 결국 정신에 병이 들어 남도 나 자신도 불행해진다는 것입니다. 내 자아를 올바로 작동하게 하려면 부정적인 감정을 정당화(p132)하려고 애쓸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엄청난 에너지를 좋은 쪽으로 활용하려는 선택입니다. 

영어에는 green with jealousy라는 표현이 있는데 질투라는 감정 때문에 정신을 못차리는 상태를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이 책 p177에도 그 표현을 이용하여 작가가 재미있는 말을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시기는 또 어떻습니까? 남과 나 자신을 비교하는 데서 이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생깁니다. 그런데 남과 비교해서 부정적인 내 자신을 낫게 만들려는 의도가 있다면, 또 이를 실천에 잘 옮긴다면 오히려 나의 발전을 자극하는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죠. p197에는 쌤통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게 우리말 쌤통도 물론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독일어의 Schadenfreude를 옮긴 것이라고 본문 내 역주에 나옵니다. 저도 대략 십 년 전에 어느 독일 저자가 쓴 자계서에서 이에 대한 긴 논의를 읽은 적 있습니다. 요는, 이 Schadenfreude를 적극적으로 잘 활용하면 폭발적인 동기부여로 전용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감정을 억누르는 게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감정만이 내게 선물할 수 있는 엄청난 에너지원을 나의 도약, 진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그냥 느껴라. 감정은 감정의 독자적인 삶을 산다는 점을 잊지 말라(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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