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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데트의 노래
프란츠 베르펠 지음, 이효상.이선화 옮김 / 파람북 / 2024년 9월
평점 :
19세기와 20세기 초, 로마 가톨릭에서 공인한 기적 두 건이 특히 유명한데 각각 루르드의 성모, 파티마의 성모라고 부릅니다. 이 중 전자를 소재로 삼아 20세기 독일의 소설가 프란츠 베르델이 장편으로 만든 게 바로 이 작품입니다. 그간 이런 작품이 있다고 말로만 들었는데 이번에 파람북 출판사에서 꼼꼼하게 번역하여 이렇게 두꺼운 완역본으로 재단장하여 내었습니다. 이 한국어판이 나오기까지는 1960년대 내내 국회의장을 지낸 이효상의 병상 원고가 초역이고, 그 아드님인 이문희 대주교가 중간에 다듬었으며 또 이선화씨가 이번에 참여한 결과물입니다. 특히 가톨릭 신앙을 가진 독자라면 그간 영성 교육 자료로 활용되는 걸 봤을 것이고, 이 완역본으로 더욱 신앙을 다질 만합니다. 실화에 대해 사전지식이 없다면 권말 p676에 등장인물 소개가 있으므로 먼저 읽고 나서 소설을 탐독해도 되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성모의 현현이 지체 높은 자, 신학적 지식에 밝은 자, 권세 높은 자 앞에서 이뤄지지 않고 저 두 건에서처럼 가장 초라하고 힘없는 이에게 이뤄졌다는 점은 우리에게 많은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져있던 소녀 베르나데트(p140), 그녀의 가족이라고 해도 무지몽매한 탓에 이 소녀가 참된 메세지를 전하려 해도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애를 때려서 제정신을 들게 하려는 생각뿐입니다. 이웃이 말리지만 그들 역시 이 부모가 "신앙심이 깊고 순한 사람들"이라는 점을 압니다. 그런데도 애가 갑자기 헛소리를 하는 걸로 오인하여 매를 들어 고치려 들었으니 정말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이 일은 전체 공동체가 나서서 바로잡거나 수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소설에는 제국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예를 들면 p198 같은 곳입니다. 검사, 판사 등 국가의 법질서 유지 직무에 종사하는 이들 직함 앞에 주로 붙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 루이(실제로는 다른 혈통이라고 합니다)가 노련한 포퓰리즘 술책으로 정권을 잡은 후 스스로 황제를 칭했는데(이 소설에도 잠시 나옵니다), 국민투표를 거쳐 국체를 바꾸었으므로 이처럼 프랑스가 제국으로 통합니다. 물론 이후에 공화국으로 다시 바뀐 후에도 북아프리카나 인도차이나에 식민지를 유지했으므로 제국주의 정책은 계속되었습니다. 이 대목에서도 시장, 검사장, 본당 신부 등이 모여 부랑자나 질서 교란자는 그저 태형으로 길들이는 게 최상이라는 둥 그 시대상을 반영한 언사를 주고받습니다만, 이 사람들도 베르나데트 수비루라는 소녀에 대해서는 뭔가 사정이 다르다는 걸 잘 압니다. 또 이때는 영국, 미국, 프랑스 모두 2차 산업혁명을 겪으며 곳곳에 철도가 놓이는 등 격변의 시기를 건너갈 때입니다.
"아니, 샘이 솟는 게 무슨 기적입니까? 샘은 그냥 땅을 파면 생길 수 있어요!" p289에서 클라랑스가 앙투안의 말을 가로채면서 퉁명스럽게 쏘아붙이지만 속으로는 이 사태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 싶습니다. 샘을 파는 인부들도 소녀 수비루의 위엄, 권위 같은 게 은연중에 느껴져 그 말을 따랐던 것 아니겠습니까. 4복음서에도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종의 authority 같은 게 그 언행에서 풍겼다는 기술이 자주 나옵니다. 1분에 최소 100리터가 나온다는 기적의 샘물. 아마 이때쯤이면 프랑스 전역에 미터법도 널리 보급될 무렵이겠는데 혁명과 함께 전파된 자유주의와 계몽주의의 여파가 이런 데서도 드러납니다.
p388을 보면 현장에서 질서를 잡기 위해 기를 쓰던 당글라가 땀을 뻘뻘 흘리며 통제불능 상황으로 가는 중이라고 힘들게 루르드의 고위 인사들에게 보고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몬테 크리스토 백작>에도 같은 이름을 가진 캐릭터가 하나 나오는데 거기서는 속이 시커먼 은행장이었죠. 검사장의 말이 재미있습니다. "용기는 대가를 비싸게 치러야 하는 오락이죠." 이 사람은 진정한 용기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누군가가 상황 앞에서 튀어 보이기 위해 부리는 일종의 쇼맨십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의 눈에는 여기 루르드의 높으신 분들이 모두 하찮은 속물로 보인다는 뜻이죠.
루이 나폴레옹은 국민투표를 통해 황제로 등극하고 반대파를 억압했습니다만 워낙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프랑스의 정치 풍토에서 그의 집권 기반이 내내 탄탄하지는 않았습니다. 루르드의 소녀 베르나데트가 일으킨 파장이 자칫하면 제정(帝政)의 기초까지 뒤흔들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황후 외제니까지 막후에서 나선 것입니다. 그러나 베르나데트는 아랑곳않고 페라말 신부에게 말합니다. "작은 쥐구멍으로 들어가지 않을 거에요.(p518)" 소녀의 심지는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자신과 함께한다는 확고한 믿음 덕입니다.
의외로 스케일도 크고 당대 사회상이 리얼하게 반영되었을 뿐 아니라 신앙의 문제를 떠나서도 소설적 재미가 느껴져서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