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과의 대화 - 넬슨 만델라 최후의 자서전
넬슨 만델라 지음, 윤길순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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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만델라의 자서전은 이미 한 권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RHK에서 펴낸 이 책은 그 포맷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네요. 이 책은, 만델라가 남긴 메모라든가, 동료, 기자, 그 외 여러 관계자와 나눈 대화의 기록, 편지 등에서, 의미 있는 기록들을 발췌해서 주제별로 엮은 모습입니다. 그러니, 소설처럼 연대기를 읽어 나가고 싶은 분들에게는 두터운 볼륨을 빨리 읽어내기가 다소 부담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 런데 이 책은, 전에 나온 자서전과는 다른 "존재 이유"를 갖는다고 봐야겠는데요. 비유를 하자면, 빠른 속도로 돌리는 영사기의 필름과, 앨범에 정리되어 한 순간 한 순간이 분명히 찍혀 나온 스틸 사진과의 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화를 볼 때에는, 장면의 전환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여간 주의하지 않으면 정확한 사태의 전개가 무엇이었는지 놓치고 지나갈 수 있습니다. 벌어진 사태에 대해서, 장면 하나하나를 정확히 관찰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진실을 이해하기보다는 주변의 맥락과, 보는 우리 자신의 선지식에 의해 적당한 "해석"을 거쳐 받아들이고 넘어가기도 합니다. 반면 스틸 사진은, 우리가 정지 화면으로 몇 분이고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피사체에 대한 정확한 모습을 알 수 있다는 게 장점입니다. 반면 전후 맥락을 알 수 없고, 캡처에는 장사가 없다는 말처럼 오히려 지나치게 미시적인 관찰이 전체를 왜곡할 수도 있죠.

이 책은 만델라의 긴 인생의 순간순간, 그가 가장 자신의 영혼에 진정성 있게 다가간 때에 자신에게, 혹은 타인에게 남긴 말들을, 가감 없이 그대로 잡아낸 단편적인 기록들을 편집한 모습입니다. 만델라 재단이 기록물 자료로 보존하고 있는 1차 문헌에서, 전체로 묶어내어 하나의 완성된 의미틀을 갖출 수 있는 언명들을 모은, 만델라라는 위인의 인성을 그대로 잘 드러낼 수 있는 모습을 캡처해 낸 조각들이라고 볼 수 있네요. 이 책의 자매편으로 <만델라 어록>이 있는데, 그 어록집은 만델라가 남긴 가장 정제된 문장만을 모은 것이고, 이 책이 인용하는 기록들은 "날것 그대로의 만델라 육성"을 채록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이 책만의 장점이라면, 우리가 흔히, 민주주의와 인권, 인류 보편의 대의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운, 그래서 인생의 태반을 영어의 몸으로 보낸 영웅, 투사, 성인으로서 떠올리는 전형적인 모습 외에, 인간적인 면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또다른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거죠. 전에 나온 자서전이,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는 바처럼 "집단 창작"의 느낌이 짙은 편이고, 그의 구체적인 행적들을 이야기의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묶으려고 다소 윤색과 가공이 입혀진 색깔이라면, 이 책은 피사체의 정직한 (때로는 당혹스러운)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게 장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가 마치 마하트마 간디처럼 숭고한 정신과 완벽한 도덕주의로 일관했던 걸로 알고만 있지만, 그는 감옥 안에서나 그 이전 ANC 활동 중에서나 "무장 투쟁"의 가능성과 효력을 절대 잊지 않고 있었다는 겁니다.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이나, (게릴라전이 아닌 정규전의 정석을 가르치는) 클라우제비츠의 저서를 탐독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단호한 투사로서, 비겁하고 잔인한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 험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 그의 투사로서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어려서 족장의 후예에게 관습적으로 강요되는 결혼을 피하기 위해 도피했다든가, 법학사 학위 취득에 장애가 되는 라틴어 이수를 면제해 달라고 청원하는 모습이라든가, "결국 내가 읽은 책이라곤 이런 것들밖에 없네요.. 아, 그 책의 저자 이름이 뭐였더라?" 하고 격의 없는 속마음을 토로하는 장면 등은, 이 책 표지와 속지 곳곳에서 가식 없이 환히 웃고 있는 그의 모습과 더불어, 한 "인간"으로서 그의 매력을 자연스레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원서에도 없는, 한국어 번역본만의 빼어난 점이 있습니다. 역사, 인문 대작 번역의 대가인 윤길순 선생이 언제나 독자를 위해 정성껏 마련하는 성의이기도 하죠. 책 말미에 보면, 등장하는 인물들의 약력, 생애, 만델라와의 관계 등을 잘 정리해 준 소사전이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서 이해 안 되는 항목이 나오면 수시로 참고할 수 있고(인명은 퍼스트 네임 기준 가나다 순입니다. 혼동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미리 이 소사전을 읽고 본문을 읽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뒤에는 지도까지 실려 있는데, 지명을 범례로 따로 정리하고서는 이 지명에 얽힌 만델라의 행적을 연도별로 하나하나 정리해 주고 있 어서, 만약 "만델라 능력 검정 시험" 같은 게 있으면 이 책 한 권 읽고 만점을 받을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만델라의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실려 있는 백과사전 같은 책입니다. 책을 읽을 때는, 남아공 백인 지도자 데클레르크라든가, 투투 주교, 그리고 만델라보다 세 살 많은 그의 "조카" 마탄지마 같은 인물들에 대해 정확한 좌표를 잡고 읽어야 100% 소화가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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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형제 교육법 - 엘리트 삼형제를 키워 낸 자녀교육 리얼 스토리
에제키엘 이매뉴얼 지음, 김정희 옮김 / 와이즈베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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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대인 성공 스토리, 유대인식 교육법, 유대인식 재테크,.. 이런 주제를 다룬 책들은 요즘 부쩍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탈무드"라는 제목을 단 처세술 매뉴얼이 한때 크게 유행한 적도 있었는데요. 대체로 이런 책들은 내용이 서로 비슷해서 독자는 몇 권 읽다 보면 질리는 게 보통입니다. 저만 해도 그렇고요.

이 책이 주제로 다루고 있는 "유대인 형제들"은, 그런데 그런 실용서, 자계서에서 다루던 추상적인, 평균적인 형제가 아닙니다. 마치 케네디 형제, 베르누이 형제, 반 아이크 형제, 라이트 형제, 비트겐슈타인 형제들, 이 책에도 잠시 언급되는 로트쉴트(로스차일드) 형제들.. 처럼,  뚜렷한 업적을 남기고 분명한 존재감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위인 반열에 들 만한 형제들입니다. 그 형제들은, 에제키엘, 람, 아리, 이 세 명입니다. 이 삼형제가, 그리 여유롭지도 유리하지도 않은 환경(가난한 데가 이민자 출신 배경)에서, 질곡과 시련이 많았던 성장 과정을 어떻게 거쳐서 오늘날 만인이 우러러보는 승자가 되었는지,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주로 유소년 시절에 초점을 두고 차분차분히, 그리고 진솔히, 독자에게 가르쳐 주는 책입니다.


보 통, 자녀들 중 하나 정도를 위인으로 키우는 일도, 위인이라는 존재 자체가 드문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대단히 힘든 일이겠죠. 위인은 고사하고, 좋은 대학만 보내고 좋은 직장에 취직만 시켜도 주변에선 자식 농사 잘 지었다며 그 부모를 향한 칭송이 자자합니다. 애가 원체 좋은 머리를 타고났거나, 성격이 차분하고 야무진 편이라면, 최소한 좋은 학교를 보내는 일까지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머리는,.. 아주 나쁜 수준은 갓 면한 정도고, 성격은 (요즘 학부모들 사이에 큰 이슈가 되고 있는) ADHD를 의심할 만큼 산만하고 통제 불능에다 야생적인 활력만 가득하다면, 그런 아이를 모범생, 성공자로 키우기는 고사하고 그저 남들만큼 정상적으로 양육하는 일도 어려울 것입니다. 네이버 검색창에 "아들 키우..:" 까지 단어를 입력하면, 자동 완성 후보 중에 "아들 키우다 미쳐 버리겠어요."라는 어구가 바로 등장할 정도입니다. 요즘처럼 민주적, 자유방임형으로 아이들을 키우는 분위기, 게다가 사회적으로 갖가지 유해 환경 요소가 아이들에게 직접 노출되고 있는 세상에서, 아이를 표준적 모범생으로 키우는 게 목표이든, 그저 아이 자신이 행복한 삶을 살게 도와 주는 정도의 목표이건, 특히 사내아이를 키우는 일이란 어머니들(아직 아버지의 육아 부담 부분이 명확히 합의되지 않은 사회이므로)에게 지극히 어려운 숙제로 다가올 것 같습니다.

큰 아들 에제키엘은 생명윤리학계의 세계적 거장입니다. 저는 생명윤리학이라는 분야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서, 이 책을 꼼꼼히 읽은 후에도 따로 여러 문헌을 찾아 보았습니다. 그저 "윤리"만 강조한다고 권위자가 되는 분야가 아니라, 법학, 인문 제 분야에 대한 소양은 물론이고, 본업 격인 생물학, 의학에 대해서도 정통해야 할 필요가 있더군요. 이 중 어느 하나만 잘하는 것도 벅찬 일인데 말이죠. 요즘 유행하는 말로 "통섭"의 자질이 갖추어져야 그 무리 없는 업무 수행이 가능한 분야였습니다. 아들을 이런 인물로 키우려면 대체 엄마는 어떤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요? 그저 열심히, 남들 해주는 일만 다 챙겨 준다고 이뤄질 결과는 아닐 것 같아요. 특히 대한민국 어머니라면 그 중에 열의 없는 엄마가 어디 있을까요. 하지만 통섭은커녕 학과 공부 두루두루 잘하게 만들기도 쉽지 않으니까요.

둘째아들 람은 미국에서 뉴욕, LA에 이어 세번째로 큰 도시의 시장을 지내고 있는 거물 정치인입니다. 그 자신과 두 형제가 모두 시카고에서 나고 자랐으니, 커뮤니티의 일원으로서 가장 큰 영예를 누린 셈입니다. 백악관 비서실장을 역임한 건 오바마 1기 행정부에서였으며, 오바마 역시 이 시카고에서 정치적 경력을 다지고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까지 역임한 사람이므로 그와는 각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셋 째아들 아리는 헐리웃에서 손꼽는 규모의 연예인 에이전시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 막내 아리의 캐릭터가 가장 인상 깊게 남더군요. 큰형은 그나마 차분하고 지적이며, 둘째형은 결국 활동적이면서도 조정능력을 배양하는 쪽으로 자질과 성격을 정리해나갔습니다. 하지만 막내 아리는, 끝까지 자유분방한 성격의 미덕을 그대로 살려서, 자신의 적성에 가장 맞는 분야에서 커리어를 확립한 것입니다.

학 자, 정치인, 사업가,... 어쩌면 이렇게, 각 분야로 균형 있게 세 아들을 고루 진출시키는 아름다운 양육의 포트폴리오를, 그 부모들은 빚어 낼 수 있었을까요? 이 책에 자세히 나오는 대로, 아이들은 온순하다거나 질서와 기존의 가치에 순응하는 성격도 아니었습니다. 머리는 우수했지만, 타고난 성격은 거의 야생마에 가까운 타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아버지 베냐민(벤자민), 어머니 마샤는 도대체 어떻게 아이를 키워냈을까요? 놀랍게도, 타고나길 주체 못할 반항기와 도전정신으로 똘똘 뭉친 애들을 두고, 그 창의적이고 대담한 기질을 더 부추기는 방식으로  길러냈다는 이야기더군요. "공격이 최상의 방어다."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자명한 진리도 없다. 따지고, 묻고, 권위에 도전하라." "다만, 남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할 때는 먼저 그의 생각을 정확히 이해한 후, 어디까지나 팩트와 논리에 의거하여 이를 공박하라." "본디 남다른 일을 시도하는 자에게는, 평범한 이들의 십자포화가 뒤따르게 마련이다."

특히, 진보적인 정치성향은 어머니 마샤의 영향이 컸더군요. 이른바 오바마케어는 현재까지도 미국에서 기득권 보수 세력의 저항을 심하게 받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이기도 한 첫째 에제키엘은, 클린턴 행정부 시절부터 의욕적으로 추진되어 오던 의료제도 개혁 움직임에서 그 첫째 가는 옹호자입니다. 그가 주장하는 universal health coverage는 대안으로 거론되는 의료 제도 중에서도 가장 포괄적으로 시민들에게 혜택을 제공할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어머니 마샤는 "모르는 사람이라도 불의한 힘에 의해 박해를 받고 있다면, 즉시 나서서 그를 도우라."고 가르쳤다는 군요. 삼형제의 부친인 베냐민은, 게다가 (이민자 출신이기는 하지만) 의사가 직업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평소에는 진보적 입장에서 목소리를 높이다가도, 막상 제 밥그릇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친다 싶은 단계에서는 초강경 보수로 돌변하는 모습을 흔히 봅니다. 진보의 정치적 구호가 제 일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한 방편이나 위장이 아니라, 진정한 인격과 도덕에 통합된 후라야 주변의 존경을 얻을 수 있죠. 여기서도 이 집안의 교육 풍토, 즉 점수따기나 적자생존식 팔꿈치밀기 테크닉이 아닌, 이웃과 소통이 가능한 통합적 인격자를 키우는 교육 방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대 체로 진보적인 성향이기는 하나, 심지어 같은 의료제도 개선 방향을 두고도 형제 간에 의견이 갈려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기까지 합니다. 흔히 그런 말을 하곤 하죠. "유대인 열 명이 모이면, 열 한 개의 의견으로 갈라져 토론이 벌어진다." 부모는 좀 다른 말을 하고 있습니다만, 결국 세 형제가 한 방을 썼다는 건 집안 형편이 가난했다는 게 일차 원인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들 부모는 그런 열악한 조건을 오히려 기회로 삼았습니다. 한 방에 모인 자녀들은, 각기 다른 개성과 괄괄한 기질 때문에 충돌이 잦았습니다. 이 충돌과 대립의 순간을, 그 부모는 각자의 개성과 장점을 최대한으로 키울 기회로 바꾸었던 거죠. 대립과 갈등은, 합리적인 룰에 바탕한 토론을 통해 해소하게 유도했던 겁니다. 한 방에서 자란 형제들은, 눈만 뜨고 밥만 먹었다 하면 토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점에서, 무슨 뜻인지고 모른 채 그저 노예처럼 암기만 해야 하는 우리 아이들과는 방향이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저자 이름을 보면, 퍼스트 네임이 에제키엘, 라스트 네임이 이매뉴얼입니다. 참 이름만 봐도 "나 유태인이요." 하고 광고를 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더 이상한 꼴이 있습니다. "이매뉴얼"은 보통 퍼스트 네임으로 쓰이지, 성(姓)으로는 잘 보기 힘든 형태입니다. 아버지 베냐민은 예루살렘에서 나고 자란 사람인데,  간전기에 영국 신탁 통치를 받고 있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아랍인들이 일으킨 폭동의 와중에 희생된 형제 이매뉴얼을 기리기 위해, 가문의 성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 아이들은 그래서 삼촌의 이름을 그 성으로 태어날 때부터 지니게 되었습니다. 어떤 존재라도 그가 현재 생명을 영위하는 것은, 위로부터의 내력과 인과 과정이 긴 시간을 통해 반영된 결과입니다. 이들 부모는, "너는 세상에서 누구와도 유사하지 않은 특별한 존재임을 잊지 말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가르쳐 왔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차별되는 특성은, 결국 오늘날의 자신이 있기까지의 긴 이력을 정확하게 인식한 후에 바른 모습으로 정신에 자리할 수 있죠. 실제로 이들 형제는, 방학 중에 이스라엘에서 여름 캠프를 이수하곤 했는데요, 바로 그때에 유명한 6일 전쟁이 발발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아버지의 진한 삶의 자취는 어떤 식으로건 그 자식들에게 긍정적이고 활기찬 방식으로 상속되는 것입니다. 그 자신이 불꽃 같은 열정과 성실성으로 인생을 살았어야, 아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물려 줄 수 있겠죠.

세 상에 당연한 건 없습니다. 아무리 옳아 보이는 진리라도 세부적으로는 허점이 있게 마련이고, 그를 향한 정당한 지적, 창의적인 정신에 의해 교정되고 개량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토론과 경쟁을 통해, 소모적인 말꼬리잡기가 아닌 상생의 지향을 위해 건전한 룰을 마련해야 하죠. 심판이 따로 없는 대립의 장에서, 결국 참여자 각자가 상대를 존중하며 공동선을 지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가 먼저 바로 서야, 자녀들에게 이런 칼날 같은 지성과 성숙한 윤리의식을 배양할 수 있을 겁니다. 아직 한국은 갈 길이 너무도 멀다는 점을 절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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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지도 - 고독한 일인자를 웃게 하라
타오돤팡 지음, 유소영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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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그런 데에서도 의외의 쾌감을 찾곤 합니다. 분명 도덕적으로는 용납이 안 되는 말인데, 실제로 치열하고 야비하기까지 한 사회 생활을 하면서 몸 으로 터득한 "교훈"이랄까 요령에 대해, 뻔뻔스럽게 "이것이 진리!"라며 늘어 놓는 말, 이런 말은 최소한 "정직'이라는 미덕을 갖추었기에, 많은 이들로부터 통쾌한 감정에서 우러나오는 지지를 받습니다. "까놓고 이야기해서, 맞는 말 아닌가?" 중국 고전은 물론 유교 윤리를 잔뜩 담고도 있지만, 초월적 명제나 진리를 설파하고 있는 일이 극히 드물기 때문에, 처세와 인간 관계의 법칙을 배운다는 점에서 특히 경청할 게 많습니다. 공자 역시 "괴력난신"을 언급하고 논하기를 꺼렸는데, 이는 그의 개성적이고 심오한 객관적 관념론의 토대를 마련하는 큰 공헌을 했다고 평가 받습니다.


요 즘 "후흑학"처럼, 실용과 처세의 묘한 이치를 "돌직구"의 언명에 담아 대중에게 가르치는 책이 여럿 나오고 있습니다. 읽어 보면 비록 표현은 기분 나쁘고 거칠어서(표현이 세련되어, 그 대의에 찬동하지는 않아도 묘하게 수긍을 유도하는 것도 있습니다) 일시의 반감을 부르지만, 따지고 곱씹어 보면 대단히 타당하며, 무엇보다 실제 인간 관계를 이끌어 나가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게 많죠. "실용성"이란 요즘 같은 스피드와 효율이 강조되는 시대에, 가장 선호되고 우선시되는 미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실제의 쓸모가 없는 건 결국 정신의 공간만 잉여로 차지하여, 결과적인 말썽이나 장애를 빚기기 보통이라는 점에서 말이죠.


이 책의 제목을 보십시오, "아부지도"입니다. "아부지도, 어무이도, 내 말이 그르다 하지 않으시네."할 때의 어구가 아님은 분명합니다. 阿附, 아첨에도, "도(道)"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전에 홍 모 비서관이 아무개 전직 대통령에게 짐짓 비꼬듯 추어올리는 말을 하면서, "아부는 이렇게 해야 한다."며 기자들에게 농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은 주로 중국의 지난 고사를 여러 시대로부터 추출하여 인용하면서, 상급자의 비위를 달래고 소통을 강화하는 효과적인 표현을 구사하되, 그저 듣기에만 좋고 내심으로는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실패한 아부가 아닌, "이런 말을 해야 상사, 주군이 진짜 좋아할 법한 테크닉"을 골라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가진 최대의 문화적 자산은 바로 그 풍부한 고전입니다. 양적으로 풍부하다 보니 자연 담아올릴 엑기스도 많겠지만, 이 저자 타오돤팡(陶短房. 도단방)은 용케도 그 방대한 사서(史書)에서 적실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만 추려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재 미없게 편집한 처세서는, 그저 우리가 잘 아는 고사 몇 개만 짚다 보면 어느 새 식상함에 빠집니다. 이런 책이 우리 독자에게 환영 받으려면, 첫째 교과서나 다른 실용서가 잘 다루지 않는 좀 드물다 싶은 이야기를 취해야 하고, 둘째 그러면서도 보편적으로 잘 알려진 이야기를 끼워 넣어 맥락이 산만해지지 않게 해야 하며, 셋째 잘 알려지지 않아 참신하다고 해도 그 주인공(역사 인물)이 너무 생소하면 공감과 동조의 효력이 반감되므로, 되도록이면 인물만큼은 어느 정도 알려진 pool에서 잡아야 하며, 마지막으로 저자의 구수한 입담과 해설, 책의 편찬 취지를 잘 구현할 힘 있는 독자적 서술이 들어가야 합니다. 기껏 역사 이야기만 재미 있게 늘어 놓아도, 나중에 가서 "그냥 이야기책이었나? 저자가 말하고자 한 바, 그리고 내가 이 책을 시간 들여 읽은 이유와 보람은 뭐지?" 같은 생각이 들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이 책은 이런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으며, 매 챕터마다 "요지, 핵심"이 무엇인지 간단한 요약까지 곁들이고 있어서, 이런 종류의 책으로 최고의 만족을 주었습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읽는 재미만으로도 최고였습니다.


사 람 사이를 잘 줄타기하는 데 있어, 최고의 묘미는 바로 그 정해진 공식이 없다는 점입니다. A라는 상황에서 분명히 통하던 게, 새로운 B상황에서는 전혀 약발이 먹질 않습니다. 이 책에 나온 예를 들어 보죠. 진 문공은 전쟁상황에서 벼슬을 사양하고 누운 신하에게 그 용태를 살피고 올 것을 측근에게 주문합니다. 이 말을 듣자 신하의 주변에선 "대감님, 즉시 자리보전하고 칭병을 하십시오." 라고 권하죠. 그런데 이 사람은 문공의 측근이 와서 자신을 살피는데도, 아픈 기색 없이 일어나서 뛰기(저자의 유머러스한 표현에 따르면 "유산소 운동"이라는군요)까지 합니다.사실 진 문공은 "그자가 누워서 아픈 시늉을 하면 다른 마음이 있다는 뜻이니 즉시 처단하고, 그렇지 않으면 살려 두라."고 은밀히 지시를 해 둔 상황이었습니다. 만약 주변의 권유대로 따랐다면, 이 사람은 목숨을 보전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다고 정말 딴 마음이 없었느냐, 후에 위(魏)씨 가문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한(韓), 조(趙)씨 가문과 나란히, 진(晉)나라를 삼분하여 나눠 가집니다. 만약 이 때 마음을 들켜 잡혀 죽었다면, 후대의 창업은 아마 없었던 일로 되었겠죠.

진 시황의 명을 받들어 초를 정벌하러 가는 장군은, 수시로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어 이런 저런 물질적 요구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황제가 불쾌히 여기지 않겠습니까? 말 없이 동병(動兵)에만 힘을 쓰심이... " "그렇지 않다. 내가 지금 국가의 병력 80만 중, 60만을 휘하에 두고 있는데, 무슨 딴 마음을 먹어 군대를 돌릴 지 황제가 어찌 안심하겠는가? 그러나 내가 이런 시시한 요구를 끊임 없이 보내면, 황제는 나를 그저 물욕이나 채우려는 소인배로 보고 안심할 것이다." 본디 큰 일을 하려는 자는 소소한 금전욕을 채우려 들지 않고, 색욕에도 어느 순간부터 초연해집니다. 대사를 갈무리하면 그런 부산물은 자연스럽게 굴러 들어올 텐데, 뭐하허러 별도의 수고를 들이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방식을 기계적으로 "교주고슬膠柱鼓瑟"하듯 되풀이하면, 상사나 주군은 어느 새 그 정직하지 못한 마음을 꿰뚫어보고 오히려 불이익을 줄 지 모릅니다. 실제로 양수는, 이처럼 주군의 마음을 너무도 잘 헤아려 일을 처리했기에, 이른 죽음을 자초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 써먹은 수법은 다시 쓰면 안 되는 것이고, 어느 정도 내 생각의 흐름을 투명하게 누설하기도 해야 진정한 믿음을 살 수 있겠죠.


참 아부라는 게 어렵습니다. 무조건 교언영색만 갖춘다고 윗사람의 마음에 드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어리석은 대중을 속이려면 그런 구태의연한 방법으로도 가능하겠으나, 그 사람이 복합적인 사고와 판단 능력을 갖추었기에 그 자리에까지 올랐다면, 일차원적 접근 방식으로는 환심을 살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은 정반대로, 자신이 타인들과의 소통에 능하지 못하기에, 남이 시도하는 방법은 무조건 진정성 없는 아부라며 깎아 내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그 자신이, 진심이라곤 없는 기만과 허위로 상대를 대했기에,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식의 반응이 나오는 거죠. 이렇게, 진정성도 없고 아부에도 서투른 인생이야말로 조직에 있어 암적인 존재입니다. 이런 사람은 업무 처리를 위한 능력도 불비한 경우가 많더군요. 이 책에서 설파하고 있는 진정한 "아부의 도리"란, 상대방의 마음을 정확히 읽고 나의 처신을 그 주파수에 맞추는 능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남(상사, 오너)를 이해하는 작업은, 부끄럽지도 않고 떳떳하지 못한 부도덕, 반칙이 아닙니다. 내가 바라보는 그 상대가, 동시에 내가 자신을 이해하고 있음을 알게 하는 것, 나와 상대 사이의 복합 다차원 게임이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균형점에 다다르게 하는 게 바로 아부의 정도(正道)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에서 말하는 아부란 해로운 거짓과 교란 요소가 아닌, "세련된 소통의 방식"을 이른다 함이 타당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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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비 없는 삶 -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인생을 아낌없이 쓰는 법
호사카 다카시 지음, 박현정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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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가 흔히 식문화를 두고, 한일 양국의 근본적 스타일 차이를 곧잘 논하곤 합니다. 우리는 한 상 부러지게 차리고, 접시마다 담은 양도 그득그득 넘치며, 다 먹지도 못할 요량으로 벌여 놓은 음식 중에 버리는 양도 무척 많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저렇게 먹고도 사람이 사나? 싶게, 정말 접시나 공기마다 양을 조금만 담고, 가짓수도 최소한으로 줄입니다. 소식하면 과연 오래 사는 법인지, 일본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긴 평균 수명을 자랑하는 민족이죠. 이에는 덜 짜고 덜 매운 풍으로 조리하는 그들만의 양식도 크게 작용하지만, 크게 봐서는 유례 없는 질박하고 검소한 기풍이라는 관점에서 봐야 더 잘 이해가 됩니다.


가뜩이나 이처럼 검약하게 사는 일본 사람들인데, 거 기서 뭘 더 줄이고 아끼나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절약이라는 키워드를 물질 아닌 정신의 영역까지 확장해서. 사람 사이에 맺고 사는 관계에까지 확장 적용하여, 감정과 에너지의 낭비 없는 건강한 인생을 영위할 것까지 추가로 주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목의 "낭비없음"은, 인생을 통합적으로 고찰했을 때의 개념입니다. 음식이나 금전 지출에 있어 낭비를 줄이면, 인생 전반의 영역에 그 절약과 합리의 정신이 두루두루 미친다는 가르침으로 정리됩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서, 과연 이 책이 일본인 저자에 의해 쓰여진 게 맞는지 수시로 책 앞으로 돌아가 확인하는 소모적인 버릇까지 들였네요. 일본이 확실히 우리하고 닮아도 닮은 점이 많은 건지, 한 대목 한 구절을 저 섬나라가 아닌 우리의 실정에 적용해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잘 들어 맞고, 공감이 되었습니다. 왜 우리도, 절은 층에서는 솔로족이 많아서, 노년층에서는 자식들 다 분가시키고 넓은 공간을 놀리기 싫어서(물론 금전적 부담이 더 큰 이유입니다만), 점차 대형 평수에 대한 선호가 줄어들고 있죠. 얼마 전만 해도 큰 평수 아파트에 사는 게 지위나 신분의 과시가 되어, 부르는 게 값이 되던 대단한 거품 현상이 있었음을 생각하면, 이런 현상은 상전벽해의 느낌을 부릅니다. 저자 호사카 씨는, 남들 눈치 보지 말고 노년층은 과감히 다운사이징을 하라고 조언합니다. 자, 이러면 기껏 빚을 얻어 내집 장만을 했다가 상투잡이의 봉변을 당하 하우스푸어들께는 달갑지 않은 공기를 부르겠습니다만, 이게 시대의 대세이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거품은 줄여야 개인에게나 사회에나 합리적이니까요. 아무튼 기존의 무분별한 투기 광풍이 선량한 중산층의 피해를 낳은 건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요즘 "비우기, 잘 버리기"의 바람이 적지 않은 이들 사이에서 관심 대상입니다. 꽉 쥐고 놓아 주지 않는 모습은,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본인에게 손해를 가져 옵니다. 더 이상 자신에게 소용이 크지 않은 물건은 과감히 버리는 게 상책이고, 이게 앞에서 언급한 "거주저택의 다운사이징"에도 일정 도움이 됩니다. 문제는 어떻게 버릴 것인지의 방법론인데, 동거 가족이 있으면 최대한 합의를 이뤄 내야 하고, 폐기물을 인수하려는 업자가 있다면 그를 알아보는 게 한푼이라도 이익이라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한국에도 그런 업자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요즘 인터넷에는 틈새 시장을 노린 다양한 서비스가 수요자를 향해 구애 중이니까, 혹시라도 인근에 업자가 있는지 알아 보는 게 현명할 것 같습니다.


" 나를 위한 선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작은 일, 혹은 일상에서 의미 없이 지나치던 소소한 일이라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나만의 세레모니로 치러 낸다면, 그 작은 행복과 뿌듯함이 몇 배는 커져서, 오롯이 존재적 만족으로 남는다는 겁니다. 어찌 보면 삶의 정수는 소유가 아닌 체험에 있습니다. 모 광고 카피에 나와 있었듯이, "사는 게 힘들어 자꾸 사게 된다"는 수동적이고 비관적인 태도를 가질 게 아니라, 이 구매는, 소비는, 나만을 위한 귀중한 예식임을 자신과, 잘 통하는 지인 사이에서 나눔으로 추억에 남기라는 주문입니다. 이 저자는 "뭘 살 때 많이 사면 결국 버리게 된다. 소량을 사도 고급 품을 사서, 그것을 소비하는 추억을 각별하게 남기는 게 더 현명한 소비"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만족은 양적 측면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좀 속물적이다 싶어도, 남들이 좋아하는 질적 측면에 누구라도 눈길이 가는 게 인지상정이죠. 특별한 소비를 가까운 지인 소수와 함께, 즐거운 분위기에서 소비하는 게 총체적 만족의 측면에서 더 현명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점원한테 "하나만 주세요."라고 하기가 좀 꺼려지거나 미안하지 않은가? 저자는, 공손하고 정중하게 말을 거는 손님에게는 언제나 점원들도 흔쾌히 맞아 준다면서, 괜한 체면의식은 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방식이 한국에도 잘 맞을지는 좀 의문입니다.


세상에는 믿을 만한 친구가 세 명 있다. 늙은 아내, 늙은 개, 그리고 저금.

이 말은 벤자민 프랭클린의 입에서 나왔다는군요. 확실히 프랭클린이라면 자기 관리, 체계적인 경영의 삶에 있어 대가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인생의 결어(結語)를 맺듯 남긴 말은, 어느 연령대의 독자라도 곱씹어 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특히 저자는 이 말로부터 노년층의 독자에게, "나를 위해 이제 조금씩 소비하는 건 죄가 아니니만큼, 얼마 남지 않은 인생에서 작은 즐거움이나 기쁨이라도 맛보는 게 좋다."고 이야기합니다. 다만 그 방식은 "온전히 자기만을 위한 용도로" 돈을 쓰는 것이라야 한다는군요.


중장년층에게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이슈가, "웰빙"이 아닌 "웰 다잉"이라고 합니다. 품위 있고 미련 없는 방법으로 이 세상을 떠나려면, 일찍부터 여러 방향에서 정리 작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엔딩 노트의 작성이 중요한데, 그 항목은 진솔하되 꼼꼼하고 광범위하게 작성하라고 하네요.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도 손글씨로 남기는(정보의 용량도 제한되었을) 기록의 의의는 무시 못할 범위로 다가옵니다. 정리, 검약의 기본은 어찌 보면 잘 마련된 정리가 그 출발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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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거의 모든 것
대니얼 코나한 & 댄 스미스 지음, 박수철 옮김, 김대중 감수 / 원앤원북스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이 런 책이라면 별 10개도 아깝지 않습니다. 처음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마치 아이들용 비주얼 백과사전인 미국의 DK 시리즈처럼, 총천연색 도판에다, 구겨질까 겁이 나서 함부로 넘기질 못할 만큼 질 좋은 용지에 인쇄된, 최고의 책이라고 불러 주고 싶네요. 요즘 책은 확실히,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처럼 편집에 정성을 들여야 특히 어린 독자들이 접근하기가 좋습니다. "돈"의 생리와 특성을 몰라도 사는 데 지장 없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재테크의 원리는 처음 접하는 나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더 좋은 것입니다. 딱딱하고 복잡한 수식(數式)만 잔뜩 나열하면 아이들이 그저 버거워할 뿐이죠. 명료하고 요령 있는 설명과 풍부한 도판이 곁들여져야, 까다로운 주제가 쉬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 럼 이 책이, 어린 독자들을 상대로만 삼은 기획인가. 그렇지는 전혀 않습니다. 과연 이 책을 펼쳐 보고, 학부 때 해당 분야를 전공한 이라고 해도, 한 항목도 막힘 없이 이 책의 내용을 설명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요? 어른이 보아도 "아 그런 내용이었군, 그런 사실이 있었군, 그런 논리로 돌아가는 거였어,'라며 무릎을 치거나 고개를 긁적일 이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내용과 주제가 제법 깊이 있는 편인데도, 영리한 아이들에게 책을 쥐어 주고 읽혀도 부담이 없을 만큼, 깔끔하게 편집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 책은 주로, 우리가 원하든 그렇지 않든 몸을 담고 의지하는 거대한 체제인 "자본주의"에서, 혈액처럼 그 운용에 필수요소로 작용하는 "돈"에 연관된 모든 개념, 제도, 현황에 대해, 백과사전처럼 항목을 설정해 놓고 친절한 해설을 해 주고 있습니다. 요즘 흔히 보는 재테크에 대한 개념도 있지만, 그런 팁 위주의 명제 정리(이런 건 자본주의의 작동원리에 대해 피상적인 이해만 가져올 뿐입니다)보다, 경제 제도 전반에 관한 근본 운영 개념과 원리를, 키워드 부연 방식으로 설명해 주면서, 왜 흔한 재테크 기본 명제들에서 그런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는지의 이유를 체계적으로 가르칩니다. 꼭 학습용도로만 쓸 게 아니라, 모르는 내용이 있으면 이 책의 색인이나 차례에서 해당 항목을 찾아 읽어 봐도 됩니다. 그냥 읽어 내려가도 좋은 읽을거리이고, 필요할 때마다 참조식으로 사용해도 무방한 구성입니다.


경 제는 박물관에 전시된 고색 창연한 화석이 아니죠. 현재 살아 숨쉬는 맥박으로 모두를 추동하고, 구속하며, 승자에게 짜릿한 전리품을 안기는 시스템입니다. 따라서 바로 지금의 현황을 잘 반영하는 통계와 실증의 뒷받침이 없으면 그 지식은 반은 죽고 쓸모 없는 공연한 치창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책은 고전적인 개념 설명도 빼어나지만, 최신의 통계를 반영해서 우리가 발을 디디고 호흡하는 세계의 실상이, 숫자와 그래프로는 어떻게 대변되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책을 어린 독자에게 읽힌다면, 경제뿐 아니라 통계의 개념, 분석에도 친근해질 것 같고, 나아가 인문지리적 지식에도 익숙하게 두뇌가 훈련되지 않을까 기대가 되네요.


항목 설정도 기존의 책에서 보던 방식과 크게 다릅니다. "극빈곤층", "심리", "중년기", "아동기", "사이버 범죄" 심지어 "사기" ... 이런 항목이 주제어라면 그게 경제서적이라는 느낌이 오실까요? 이 책은 버젓이, 마치 사회학 서적의 외피를 쓰기라도 한듯 이런 주제어를 깔아 두고 서술을 해 나갑니다. 읽어 보면 결국 돈 이야기이고, 실물 경제에서 이런 변수들이 어떻게 의미 있는 경제적 파장을 낳는지 납득을 시켜 주고 있습니다. 돈과 관련 안 된 사회 현상이 더 이상 뭐가 남아 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이런 시도는 대단히 참신하고, 죽은 지식이 아닌 살아서 모든 현상에 고루 적용되는 학문의 모습을 일깨워 줍니다. 그런가 하면 "다국적 기업" "신용 창출" ,"은행" 같은 전통적 경제학 키워드를 두고도,실용적이고 최신의 지식이 반영된 설명이 이어집니다. 특히 2008년 전세계를 강타한 리먼 쇼크, 아직도 여진이 남아 있는 그리스 등 남유럽의 경제 위기, 이런 가장 최근의 사정까지 다 업데이트된 내용이라서, 돈이 그저 만능이고 규칙에 따라야 상책이라는 기계적 체념의식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 "세계화, 신자유주의"라는 토픽으로는 분명 비관적인 분석이 뒤따를 것 같은데, 이 책은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절묘하게 균형점을 찾아 나간다는 게 특이합니다.


p168 이하의 통화공급량, 그리고 이어지는 인플레, 디플레이션 파트를 보십시오. 적 절한 일러스트와 그래프가 곁들여지기도 했지만, 저는 일반용 대중서에서 이처럼 명확하고 유창하게 이어지는 설명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기술적인 설명만 있냐 하면, 바로 앞에는 "경제학의 거장들" 항목을 통해 칼 마르크스를 포함한 이론의 거장들을 소개하여, 이 책에 인문적 품격까지를 더하고 있네요. 이렇게 공을 들인 경제입문서를 저는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윤리은행이라고 들어 보셨나요? 은행의 운영 기법을 비영리 사회재단이 받아들인 새로운 법인 패턴입니다. "돈"과 사회봉사가 어느 접점에서 연결되는지, 색다른 각도에서 보여주는 예입니다. 얼마 전 우리도 특별법 제정을 두고 이슈가 되었던 "이슬람식 은행"에 대한 설명도 나와 있습니다. 만약 이 책으로 경제 기본 개념을 처음 접하는 아이들이라면 이런 최신의 균형 잡힌 지식 포트폴리오가 첫 경험으로 연한 머리에 자리잡힐 것을 생각하니 부럽기도 하네요. 어른들이라고 해도 새로운 지식은 허세나 거품 없이 이런 좋은 책의 도움을 받아서 정리하면 그걸로 충분하겠죠. 정말 너무 멋진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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