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과의 대화 - 넬슨 만델라 최후의 자서전
넬슨 만델라 지음, 윤길순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만델라의 자서전은 이미 한 권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RHK에서 펴낸 이 책은 그 포맷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네요. 이 책은, 만델라가 남긴 메모라든가, 동료, 기자, 그 외 여러 관계자와 나눈 대화의 기록, 편지 등에서, 의미 있는 기록들을 발췌해서 주제별로 엮은 모습입니다. 그러니, 소설처럼 연대기를 읽어 나가고 싶은 분들에게는 두터운 볼륨을 빨리 읽어내기가 다소 부담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 런데 이 책은, 전에 나온 자서전과는 다른 "존재 이유"를 갖는다고 봐야겠는데요. 비유를 하자면, 빠른 속도로 돌리는 영사기의 필름과, 앨범에 정리되어 한 순간 한 순간이 분명히 찍혀 나온 스틸 사진과의 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화를 볼 때에는, 장면의 전환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여간 주의하지 않으면 정확한 사태의 전개가 무엇이었는지 놓치고 지나갈 수 있습니다. 벌어진 사태에 대해서, 장면 하나하나를 정확히 관찰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진실을 이해하기보다는 주변의 맥락과, 보는 우리 자신의 선지식에 의해 적당한 "해석"을 거쳐 받아들이고 넘어가기도 합니다. 반면 스틸 사진은, 우리가 정지 화면으로 몇 분이고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피사체에 대한 정확한 모습을 알 수 있다는 게 장점입니다. 반면 전후 맥락을 알 수 없고, 캡처에는 장사가 없다는 말처럼 오히려 지나치게 미시적인 관찰이 전체를 왜곡할 수도 있죠.

이 책은 만델라의 긴 인생의 순간순간, 그가 가장 자신의 영혼에 진정성 있게 다가간 때에 자신에게, 혹은 타인에게 남긴 말들을, 가감 없이 그대로 잡아낸 단편적인 기록들을 편집한 모습입니다. 만델라 재단이 기록물 자료로 보존하고 있는 1차 문헌에서, 전체로 묶어내어 하나의 완성된 의미틀을 갖출 수 있는 언명들을 모은, 만델라라는 위인의 인성을 그대로 잘 드러낼 수 있는 모습을 캡처해 낸 조각들이라고 볼 수 있네요. 이 책의 자매편으로 <만델라 어록>이 있는데, 그 어록집은 만델라가 남긴 가장 정제된 문장만을 모은 것이고, 이 책이 인용하는 기록들은 "날것 그대로의 만델라 육성"을 채록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이 책만의 장점이라면, 우리가 흔히, 민주주의와 인권, 인류 보편의 대의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운, 그래서 인생의 태반을 영어의 몸으로 보낸 영웅, 투사, 성인으로서 떠올리는 전형적인 모습 외에, 인간적인 면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또다른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거죠. 전에 나온 자서전이,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는 바처럼 "집단 창작"의 느낌이 짙은 편이고, 그의 구체적인 행적들을 이야기의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묶으려고 다소 윤색과 가공이 입혀진 색깔이라면, 이 책은 피사체의 정직한 (때로는 당혹스러운)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게 장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가 마치 마하트마 간디처럼 숭고한 정신과 완벽한 도덕주의로 일관했던 걸로 알고만 있지만, 그는 감옥 안에서나 그 이전 ANC 활동 중에서나 "무장 투쟁"의 가능성과 효력을 절대 잊지 않고 있었다는 겁니다.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이나, (게릴라전이 아닌 정규전의 정석을 가르치는) 클라우제비츠의 저서를 탐독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단호한 투사로서, 비겁하고 잔인한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 험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 그의 투사로서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어려서 족장의 후예에게 관습적으로 강요되는 결혼을 피하기 위해 도피했다든가, 법학사 학위 취득에 장애가 되는 라틴어 이수를 면제해 달라고 청원하는 모습이라든가, "결국 내가 읽은 책이라곤 이런 것들밖에 없네요.. 아, 그 책의 저자 이름이 뭐였더라?" 하고 격의 없는 속마음을 토로하는 장면 등은, 이 책 표지와 속지 곳곳에서 가식 없이 환히 웃고 있는 그의 모습과 더불어, 한 "인간"으로서 그의 매력을 자연스레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원서에도 없는, 한국어 번역본만의 빼어난 점이 있습니다. 역사, 인문 대작 번역의 대가인 윤길순 선생이 언제나 독자를 위해 정성껏 마련하는 성의이기도 하죠. 책 말미에 보면, 등장하는 인물들의 약력, 생애, 만델라와의 관계 등을 잘 정리해 준 소사전이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서 이해 안 되는 항목이 나오면 수시로 참고할 수 있고(인명은 퍼스트 네임 기준 가나다 순입니다. 혼동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미리 이 소사전을 읽고 본문을 읽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뒤에는 지도까지 실려 있는데, 지명을 범례로 따로 정리하고서는 이 지명에 얽힌 만델라의 행적을 연도별로 하나하나 정리해 주고 있 어서, 만약 "만델라 능력 검정 시험" 같은 게 있으면 이 책 한 권 읽고 만점을 받을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만델라의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실려 있는 백과사전 같은 책입니다. 책을 읽을 때는, 남아공 백인 지도자 데클레르크라든가, 투투 주교, 그리고 만델라보다 세 살 많은 그의 "조카" 마탄지마 같은 인물들에 대해 정확한 좌표를 잡고 읽어야 100% 소화가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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