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되는 집은 아빠가 다르다 - 대한민국 30만 부모들이 열광한 구근회의 아빠 바로세우기 프로젝트
구근회 지음 / 와이즈베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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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선수범이라는 말이 있죠. 그 주장을 하는 사람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뜻인 줄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격언이나 가르침도 그렇지만, 말은 쉬운데 행동이 어렵습니다. 아빠 노릇이 중요한 줄은 알지만, 어떻게 실천에 옮겨야 할지 막막해하는 분들이 많죠. 그렇다면, 자녀 교육이나 자신의 인생이나 타에 모범이 될 만한 분이 펴는 주장과 설득이라야 큰 감흥이 있을 것 같습니다.


구근회 선생은 "공교육 전도사"로 유명합니다. 교육이 이 나라를 망치는 제 일순위 주범이 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자격도 없는 자가, 세금 한 푼 안 내고 달콤한 말로 아이들과 부모들을 현혹하지만, 머리에 든 지식이나 소양, 인품은 0점에 가까운 모습을 흔히 봅니다. 자신이 모범이 되어야 남을 이끌 자격이 생길 텐데, 아무 요건을 갖추지 못한 자가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드니 그 배운 제자들이 나중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구 선생은, 입시 교육에 대한 제도적 비판 외에도 이 점을 강조하며 그간 소신을 펼친 바 있는 존경스러운 분이죠. 그 자신 역시 최상의 교육을 받고, 자신의 주장을 실천으로 삶으로 옮긴 분이니까요.


이 책에서 여러 번 소개된, 블랜차드 박사의 미국 소재 연구소 모습입니다,



이번에 그가 내놓은 책은, 말하자면 "바른 아빠되기"를 설파하는 내용입니다. "아빠는 누구나 될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 노릇하기란 창으로 어렵다."가 그 핵심입니다. 아이에게는 물론, 그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적으로 돌보고 보호하는 어머니의 역할이 가장 크게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사내아이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딸마저도, 바른 자존감을 갖고 절제하는 행동 원칙으로, 자기 주도적 삶(꼭 공부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라, 인생 전반에 두루 통하는 것입니다)을 살아가는 당당한 성인이 되려면, 성장 과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과 거에는 농경 사회가 가정의 기본적 패턴을 결정하는 구조라서, 아버지뿐 아니라 할아버지, 증조부, 그리고 백숙부까지 한 지붕에서 사는 일이 많았다고 하죠. 이런 환경에서는, 원칙적으로 아이는 아버지의 모범과 본을 받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환경이었겠죠. 물론 가부장적인 낡은 봉건 이데올로기, 성차별적 행태 강요 등은 폐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정을 벗어 나 2차 집단에 속해서도, 리더십을 보이고 주변을 챙기며 어른스러운 행동으로 조직을 이끄는 사람들은, 대체로 아버지, 할아버지에게 교육을 잘 받고 자란 이들이 많더군요. 아버지의 결핍을 느끼고 자란 이나, 아버지와 원만한 관계를 이루지 못하고 자란사람은, 회사나 학교에서 융화되지 못하고 꼭 물과 기름처럼 따로 노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런 사람들도, 엄마의 사랑만큼은 넉넉히 받고 자란 경우도 많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사랑이 부족하면, 그 사람은 "큰 그릇"이 되기에는 뭔가 결여된 기량이 되기 쉽다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사랑을 주고 가까이 곁에 있어 주는 아버지가 될까? 요즘 세계적으로 단연 화두가 되는 게 바로 friendy입니다.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 주는 아빠! 사실 요즘 아이들은, 엄하고 어려운 아버지를, 지난 세대에서조차 구경할 일이 없기 때문에, "프렌디 스타일"을 과연 고마워할지 의문입니다만, 여튼 대세는 그것이라고 하네요. 우리 나라에서는, "프렌디'라고만 하면 "프렌드"와 바로 식별이 안 되어서, "프랜대디"라고 말을 좀 더 붙여 부르는 모습도 자주 봅니다. 사실, "프렌디 스타일"은 이미 한국 사회(특히 도시라면)에서는, 이미 자리잡은 지 오래입니다. 어느 아빠가 요즘 아이를 엄하게 가르치고 매를 들겠습니까. 어떤 때 보면 엄마보다 더 싸고도는 게 한국의 아빠들입니다. 프렌디 지향으로 아빠 할 일을 다한다면, 한국의 아빠들은 걱정 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교육학 서적에서 블랜차드와 빌러의 논문은 매우 인용이 잦습니다. (예시)



자 그런데 구 소장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계시네요. 전 이 점에서 사실 깜짝 놀랐습니다. "아빠와 아버지는 다르다"는 말에서 벌써 눈치가 오기도 했지만, 구 소장은 "프렌디 만으로는 안 된다!"고 따끔하게 독자에 경종을 울리고 있네요. 대세에 어긋난다는 게 말은 쉬워도, 이를 주변에 설파한다는 건 예사 각오로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구 소장은. 과감하게도 (어떤 면에서는) 다소 전통적인, 절제 있는 엄한 아버지상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는 사실, 그의 지난 행보를 보면 새삼스러운 말은 아닙니다. <십대의 반란, 가정교육이 답이다>에서 이미 그는 엄격하면서도 흔들림 없이 인생의 좌표가 되어 주는 아버지상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구 소장 본인은 그럼 자신의 가정에서 이를 어떻게 실천하고 있었을까요? 사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뭐랄까 상궤를 다소 벗어나는 그 예화에 대해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TV 보는 시간을 줄이고 운동에 전념하게 한다는가 하는 모습은, 그렇게 드물지는 않습니다. <부모 vs 학부모>에도, 그저 축구 하는 시간을 확 늘려 준 (대신 TV는 못 보게 한) 어느 가정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아이는 보란 듯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했죠. 운동이 학생에게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는, 우리의 상식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건 어느 정도 공감대가 이뤄졌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로서 구 소장님의 파격적인 행보는 그에 그치지 않더군요. 요즘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안 사주는 부모는 거의 없는데, 구 소장은 사용요금을 (이제 중학생인) 아이게 스스로 낼 것을 제안했다고 합니다. 아이는 별 망설임 없이, "지불하는 돈에 비해 효용이 크지 않고, 꾀하려는 효과는 다른 방법을 통해서 거둘 수 있다."고 대답했다는군요.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게 그냥 애늙은이 같은 소리가 아니라, 자기 인생은 자기 스스로 세부적인 데까지 설계해 간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아빠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해서 효용-비용을 따져 보니, 스마트폰 그거 별 쓸모 없다는 이성적 결론에 스 스로 도달한 거죠. 이런 아이가, "지금 학업에 몰두하면 나의 장래에 매우 유리하겠군." 같은 결론이라고 스스로 내리지 말라는 법 있겠습니까? 내가 필요해서 내가 하겠다는 데, 그걸 누가 말리겠으며, 타인의 보조와 부추김을 받아 하는 공부보다 얼마나 큰 탄력을 받겠습니까? 세상에 자기 주도만큼 생산 효율을 내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엄격하기만 한 게 "구근회식 아버지 되기"가 아닙니다, 그는 베갯머리에서 아이와 함께 책을 읽어 주는 자상한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이 처럼, 어느 경우에 자상하고 어느 경우에 얼음처럼 냉정하며, 어느 경우에 불같이 단호해야 하는지 준별하는 게, 자기 주도로 제 인생을 이끌어나가는 아이를 키우는 첫걸음입니다. 특히 저는. 자기 전에 책을 같이 읽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너무도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독서가 무엇입니까. 아이에게, 생선을 먹여 주는 게 아니라 생선을 잡는 방법을 가르치는 첫걸음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가장 중요한 정신 성장의 발판을, 아빠가 직접 놓아 주는 아이, 그 아이는 사회에 나와서도, 타인에게 의지가 되고 가이드가 되는 리더 노릇을 하게 됩니다. 참 좋은 선배다, 상사다 싶은 분은, 가정을 방문해 보면 그런 느낌이 확연히 들더군요. 좋은 아버지가 되는 길은, 결국 사회에 이바지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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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롯 - “예수는 정치적 혁명가였다” 20년간의 연구로 복원한 인간 예수를 만나다
레자 아슬란 지음, 민경식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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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기독교 신자라면 "열심당원"이라는 말에 익숙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서에서 "열심당원"이라면 12사도 중 한 명인 시몬을 이야기합니다. 이 "열심당원'이라는 용어는, 문자 그대로의 해석이라면 다소 시대착오의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왜냐 하면 "열심당"이라는 단체는, (이 책에 잘 나와 있는 것처럼) 예수의 사후 몇 십 년 후에 비로소 생긴 단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살아 생전에 예수를 따르고 모신 제자가, 예수 사후에 생긴 단체의 구성원일 수는 없기 때문이죠.

그러나 공식적인 단체 결성 이전에도, 그런 이념을 막연하게나마 공유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피 끓는 열정으로 의기투합했던 무리들은 아마 있었을 겁니다. 비단 고대의 팔레스타인이 아니라도, 역사의 격변기, 시대의 모순이 극에 달한 혼란스러운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면, 동과 서를 떠나 언제, 어디서도 볼 수 있는 것이, 젊은 혁명가들의 결사입니다. 이런 결사가 반드시 공식적인 절차를 밟기 전이라도, 문자 그대로의 동지(同志)란 보편적인 실체, 현상입니다. 따라서 "열심당원"이란 고유명사일 뿐 아니라,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보편명사이기도 합니다.


복음서를 글자 그대로 읽고 이해한다면, 구태여 시몬 한 명에게만 붙여진 칭호가, 그렇지 않은 나머지 11인의 사도에도 해당할 가능성은 적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열심당원이라면 이 "시몬" 한 사람에게 고유한 신분으로 생각합니다. 바로 이런 태도가, 성경의 기록을 "역사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종교적으로 받아들이는 "교의적 시각"입니다. "교의적 시각"에 의해 바라본 예수가 바로 "교의적 예수"입니다.


반면, 성경이라는 기록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고, 성경 외 다른 기록의 정확성, 신빙성에 의해 교차 검토를 행하거나, 보편 역사과학적 방법론에 의해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기준을 적용하여, "비판적으로. 과학적으로" 구성하는 과정을 "역사적 시각"이라고 하며, 이런 관점에서 바라본 "예수"를 "역사적 예수"라고 부릅니다. "교의적 예수"가 교파의 관점에 따라 다른 내용과 색채, 함의를 지니듯, "역사적 예수" 역시 논자에 따라 천차만별의 스토리를 지닙니다.




이제 이 책의 저자 레자 아슬란을 보십시오. "레자'란 이름은 페르시아계, 이란계에 흔합니다(우리는 지난 세기 팔레비 왕조의 이란에서 유독 레자라는 이름의 "샤"를 많이 접한 바도 있습니다). 그는 이름에서 드러나듯 이란 계 혈통이며, 몇 번의 개종을 거쳐 지금은 다시 무슬림 신앙을 간직하고 있으며, 다만 이란 이슬람 혁명의 기조와는 상충하는 가풍을 지닌 가문을 배경으로 둔 인사입니다. 학문적 커리어는 녹록지 않습니다. 자신이 학위를 마친 코스에서 우등 성적으로 졸업한 실력이며, 인문 분야의 여러 학위를 손에 넣고 있습니다. 재능도 열의도 비상한, 활기와 창의력으로 충만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정신적 배경을 가진 분이, 그리고 아직 학자로서는 다소 젊은 축으로 여겨지는 분이, 자신의 버전으로 "역사적 예수"를 논하겠다며 쓴 작품이 바로 이 책입니다. 이슬람 신앙을 아직도 진지한 정신적 축으로 간직한 사람, 그리고 (비록 망명자의 혈통이지만) 현재 미국과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적성 국가인 이란을 육적(肉的)인 조국으로 간직한 그가, 예수에 대해, 그것도 백인 기독교 신자들의 정통 주류와 크게 벗어나는 톤으로, "나만의 역사적 예수"론을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찬성이든 반대든, 여기에 첨예한 관심이 쏠릴 수밖에요. 특히 남부 보수 기독교 벨트를 애청자의 거대 셰어로 보유한 팍스 TV가, 이 분을 끌어들여 적대적이고 직설적인 인터뷰를 시도하고 그 결과가 전미(全美) 지역에 퍼져 나가자, 여론도 들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평가에 대해서는, 대체로 이성적이고 차분한 어조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상대의 공격에 대응한 아슬란 박사의 손을 들어 주는 이가 많았습니다.

물론 그가 이 논쟁적인 책에서 펼친 역사적 예수론의 타당성은 또 별개의 논의를 거쳐야 합니다. 자, 여기까지 오도록 많은 우회적 논의를 거쳐야만 했지만, 다시 저 위에서 제가 말한 "열심당원"이란 개념을 떠올려 보죠. 열심당원이란, 기독교의 신조와 주의와는 상당히 대조적인, 폭력 혁명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행동파 젊은이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는 "당시 그런 사람들이 있었나 보다" 하는 정도로 사도 시몬을 연상하는 정도지만, 이 저자 레자 아슬란은 그 단계를 훨씬 넘어, 12사도의 상당수, 나아가 예수 자신부터가 사실상의 젤롯, 열심당원이었다는 데까지 논의를 확장합니다! 그가 끌어 대는 논거도 다채롭습니다. 1세기 초 팔레스타인의 정세, 사회 분위기("변방의 구멍'이라는 멋진 표현을 보십시오), 성경 안에서 발견되는 숱한 기술들("성전 정화" 등)을, 대단히 설득력 있게, 소설식으로 재구성하면서, 그는 "불의를 보고 참지를 못하며" "뜻한 바는 반드시 실행에 옮겨야 하는" 열혈 혁명가 예수의 초상을 핍진하게 그려냅니다. 박력 있게 그려지는 건 예수 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성경 본문,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꾸려진 소설과 영화에서, 마치 무기력의 상징처럼 묘사되어 온 빌라도 총독까지, 저자 아슬란은 냉철하고 설득력 가득한 어조로 마치 새로운 사실주의 결정판 픽션을 하나 꾸려내듯, 1세기 초반의 근동 세계를 생생히 묘사합니다.

비판하는 이들은 단지 근본주의 진영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종래 "역사적 예수"를 그리느라 많은 수고와 열정을 바쳐 왔던 역사학자들도, 레자 아슬란의 시도에 대해 "학문적으로는 새로운 게 없음"을 지적합니다. 다만 모두가 입을 모아 칭찬하는 미덕이 있죠. 그것은, "읽다 보면 너무도 재미있고, 이 서사의 활력이 마치 역사적 신빙성을 대신이라도 하는 듯하다"는 공감입니다. 진실은 시간 여행의 기술이 발견되기까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중요한 건, 예수의 아이덴티티를 어떻게 잡건 간에, 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용납지 않은 그의 신념과 이상만은 불변이라는 점입니다. 이 결론은 어느 누구의 입과 귀를 통해서도, 이천 년이 넘게 유지되어 왔습니다. 기적이라면, 신비라면, 바로 거기에 있을 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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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창업으로 세상에 뛰어들어라 - 청년 창업으로 네 꿈을 펼쳐라
유연호 지음 / 원앤원북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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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20대를 주로 겨냥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용을 읽어 보면 2030세대 전체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변 화하는 시대에, 어떤 유형의 창업이라야 경쟁에서 살아 남을 수 있을지, 그 비전과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내용인데요. 내용을 끝까지 읽다 보니, 4050세대라도 혹시 창업을 준비하는 분이라면, 구세대의 패턴에 끌려 다니지 말고, 이 책에 제시된 2030 감각과 방식을 따라야 성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해석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성공하는 "젊은" 창업은 이래야 한다는 게 이 책의 핵심입니다.


어떻게 해야 성공하는 창업인가?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앞을 내다보고 젊은 감각을 따르는 방식이라야 한다는 거죠. 책의 첫머리에서, 저자는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1. 4050세대는 장소 중심의 고착된 창업을 고집한다.

2. 2030세대는 "공간" 중심, 아이디어 위주 창업을 선호한다.


장 소와 공간이 어떻게 다른가. 저자가 사용하는 의미에서, "장소"란 고착된 실체 개념입니다. 이른바 "목 좋은 곳"을 말합니다. 예전에 어느 외국 영화 관계자가 한국을 방문해서, 곽정환 씨 소유의 서울극장을 보더니, "이곳은 정말 손님이 안 들래야 안 들 수가 없는 노루목이다."라며 감탄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멀티플렉스 체제로 바뀐 지금은, 단일 극장이 어느 길목에 들어서 있는지가 중요하지 않고, 건물 내에서 어떤 시스템으로 컨텐츠가 운용되는지가 훨씬 중요한 세상이 되었죠. 서울극장처럼 좋은 길목을 잡아 두고두고 수익을 내는 방식이 4050이라면, 멀티플렉스 스타일은 2030입니다(자본의 스케일 문제는 일단 넘어가고요). CGV가 한국에 처음 이 시스템을 도입했을 때만 해도 관계자나 관객 모두 낯설어한 방식이었을 텐데요. 이제는 보편적으로 정착한, 그것 외에는 상상이 힘든 표준 업태가 되어버렸죠. 여기서 알 수 있는 교훈은, 현재 기준으로 다른 이들보다 몇 발짝 앞서가는 젊은 감각이라야, 앞으로의 생존이 유망한 창업이라는 점입니다.


고착된 점포를 고집하는 방식은, 당장 지금부터도 문제를 낳고 있습니다. 한국에는 예전부터 부동산(점포) 양수도의 공식적인 매매대금 수수 외에, 양수인이 "권리금"이라는 별도 명목의 프리미엄을 지불하는 게 관행이었습니다. 회계 용어로는 "영업권"이라는 항목인데요. 이게 한창 경기가 좋을 때는 성행하다가, 한국 사회가 장기 불황으로 접어든 이후에는 잠시 뜸해졌죠. 아직 불황을 탈출 못 하고 있는 형편인데도,  (회사에서 밀려 나와) 창업을 준비하는 분들이 워낙 많다 보니, 권리금의 수수 관행이 아주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특히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중심으로). 저자는, 구세대 창업은 이처럼 권리금 떼고 인테리어 비용 들이고 하는 통에 종잣돈을 다 날리고, 수익은 수익대로 박하게 거두는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쉬움을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신세대 창업은 이런 전통 방식과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는가? 여기서 말하는 "공간 중심"이란, 아이디어가 효력을 미치는 모든 공간을 의미합니다. 내 가 서울 구로구에서 플랫폼을 돌려도, 나의 플랫폼이 구독자를 가지는 저 먼 전남 영광에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방식이죠. 정작 나는 내가 사는 곳에 점포는커녕 어떤 시설도 구비하고 있지 않지만, 거창하고 화려한 홀보다 더 큰 매상을 올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 이 책에서 예를 들고 있는 " 배달의 민족"이라는 어플을 보겠습니다. 이 어플은, 어플 구독자가 살고 있는 지역 중심으로, 중식, 피자, 치킨 등 각종 음식 배달 업체를 소개해 주는 기능입니다. "배달의 민족"이라는 이름도 참 재미있게 지었거니와, 어플이 딱딱하게 정보 중심으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고, 마치 작은 게임이라도 하는 것처럼 "재미있게" 짜여져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입소문으로 널리 어플이 퍼지고, 플랫폼에 입주하는 업체들도 늘어나서, 이 어플은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치킨을 튀기지도 않고, 피자를 굽 지도 않으며, 면빨을 뽑지도 않으면서, 그 어떤 창업주보다도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 어플을 개발한 분은, "어떤 장소도 돈 주고 사들이지 않았으면서, 누구보다 많은 공간을 효과적으로 지배하는" 업주입니다. 그는 권리금이라는 본전 생각에 전전긍긍하지도 않고, 임대차 계약 만료시 비싼 인테리어 설치비와 철거 비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재미삼아 개발한 어플이라는 아이디어로, 그는 이처럼 나이 든 세대가 상상 못할 만큼의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여기서 잊지 않아야 할 점 또 하나는, 신세대 창업은 그 소비자의 재미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서 울보다 오히려 자영업 간의 경쟁이 치열한 부산 지역에 내려가 보면, 점포들의 간판이 대단히 재미있는 문구와 디자인으로 채워져 있는 모습이 의외였습니다. 같은 음식점이라도, 일단 외관에서 지나가는 손님의 눈을 확 끌만한 뭔가가 있어야, 같은 술 한 잔, 짜장면 한 그릇을 마시거나 먹어도 그 집에서 해결할 생각이 나겠지요. 서울과 달리 부산은 청년 자영업의 창업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아서, 이런 현상이 보이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울 역시, 지금은 4,50대 창업이 주류라서 보이는 보수적 컬러를 벗고, 언젠가부터는 더 활기 있는 와관이 대세를 이루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 이디어 자체는 돈이 들지 않지만, 그 아이디어의 실행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그냥 돈이 적게 든다 정도가 아니라, 거의 공짜에 가까운 것도 있습니다. 대학생들은 돈이 부족하다 보니 자료를 카피하는 경우가 많은데요(물론 저작권이 있는 자료를 함부로 복사하는 건 불법입니다만), 때로는 복사 용지나 (업소에서 할 경우) 그 수수료조차 아까울 수도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바로 이런 수요층을 노려, 카피 용지 뒷면에 실린 광고를 보는 대가로, 복사를 공짜로 해 주는 서비스가 등장했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 아이디어를 조금 발전시켜, 용지 앞면에다 광고를 싣는 방식으로 발전시켰구요. 제 생각에, 한국에서는 공짜 서비스라면 일단 이용하되, 일일이 뒷면을 살피는 수고까지는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현실을 감안한 고육지책이 아닐까도 싶더군요. 아무튼 평범해 보이는 소재에서 이처럼 사업의 소재를 발굴해 내었다는 게 신선했습니다.


"악동 뮤지션"이란 그룹을 요즘 아시는 분들이 많을 텐데요. 저자는 이 악동 뮤지션의 사례에서 두 가지 교훈을 추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악동 뮤지션의 성공이 "아주 대중적인 코드의 바탕에다, 한 줄 독 창적인 코드의 삽입으로 큰 호응을 불렀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아이디어가 독창적이라고 하나, 아이디어의 전 부분이 모두 독창적이라면 대중에게 호응을 얻기 어렵고, 오히려 반감을 부를 수도 있습니다. 위의 "배달의 민족" 앱도 마찬가지죠. 어떻게 보면 기존 전단지를 앱으로 옮겼다는 것뿐이고, 약간의 게임 요소를 첨가한 것 말고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존의 익숙한 요소들을 "매시 업" 하는 그 감각, 센스가 바로 창업자의 성패를 판가름하는 비결이란 말이죠.


다 른 하나는, 이 악동 뮤지션을 발굴한 "프로튜어먼트"라는 기획사에 관한 교훈입니다. 이 기획사는 종래의 업체와는 달리, 신인 발굴에서 트레이닝까지의 아주 힘든 사업 프로세스를 생략하고, 주로 유튜브에서 장래성 있는 신인을 발굴하여, 그들이 이미 발전시킨 창의력과 개성을 최대한 살려 가며 연예 활동을 하게 지원해 준다고 합니다. 이러면 기획사 입장에서는 초기 대규모 투자라는 리스크가 없어서 좋고, 애써 발굴하여 키운 신인이 식상한 컨셉으로 시장에서 외면받을 위험을 배제해서 좋습니다. 이 역시 "제거, 간이화"의 리버스 엔지니어링으로 혁신을 이룬 좋은 사례입니다.


평 생 직장의 신화가 무너진 지금, 창업은 어찌 보면 필수 코스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왕 하는 창업이면 필승의 각오로 벌여야 하며, 수동적인 회사 생활 하듯 창업을 한다면 냉혹하게 버림 받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창업은, 중년들이 기존의 대세를 따라 벌였던 "늙은 창업"이 아닌, 통통튀는 감각으로 전개하는 "젊은 창업"이라야 합니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물리적 연령과 관계 없이 모든 이가 성공할 수 있는, 영원한 젊음의 사업 그 비결을 제시하고 있다고 해도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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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가 실천하지 않는 1%의 성공 비결 - 직장 서바이벌에서 살아남기 위한 86가지 이기는 습관
고노 에이타로 지음, 김선영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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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가 실천 않는 1%의 성공 비결, 제목만 들어도 혹하는 구절입니다. 하긴 누구나 비결을 알고 있고, 또, 실천에 옮길 수만 있다면, 모두가 원하는 만큼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세상이 되겠죠. 그렇지가 않기 때문에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이의 운명이 극명하게 갈리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두 가지를 떠올렸습니다.

1. 누구나 아는 성공의 비결이지만, 다들 실천을 하지 않기에 성(盛)과 패(敗)가 갈린다.

2. 어떤 비결은 99%가 아예 모르고 있기에, 실천에도 옮길 수 없어서 실패하게 된다.


저자 고노 에이타로 씨가 여러 비결들을 상세하게 정리해 둔 이 책은, 특히 직장인들에게 있어 많은 공감과 울림을 준 멋진 핸드북이었습니다. 이 책에 수록된 총 86가지의 비결은, 책 뒤표지에 실린 대로 "내가 1년차 일 때도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절로 들 만큼, 주옥 같은 내용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습니다. 1년차일 때는 물론, 지금도 모르고 있었던 요령이 있었는가 하면, 1년차일 때도 알긴 했지만 그 내용을 불명확히 인식했거나 채  실천에 옮기지 못한 것들도 있었습니다.


구 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물이라는 말처럼, 산만하게 흩어진 지식은 그 지식의 담지자에게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하는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한 권의 콤팩트한 책에 잘 정리된 모습을 보고, 비로소 그 많은 요령들의 진가를 알아 보고, 바로 실천에 옮길 마음이 들게 되더군요. 동경대 문학부를 졸업하고, 유수의 광고 대행사를 거쳐 ,IBM 재팬에서 중역을 맡아 많은 업적을 남긴 저자의 깔끔한 핸드북에서, 과연 회사에서 살아 남아 멋진 커리어로 인생을 마무리하려면 어떤 자질을 갖춰야 하는 지 근본적으로 검토하게 해 준 유익한 책이었습니다.


1. 프레젠테이션의 요령

물 흐르는 듯 유려하게 이어지는 설명과 그렇지 않은 설명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저자의 말에 따르면, 매끄럽지 않고 툭툭 끊어지는 설명은, 전체적으로, 또 결론적으로 올바른 말을 하고 있어도, 사소한 데서 결점을 노출하기 때문에 결국 성공적인 시연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저자는 숲나무 →숲 의 순서로 전체의 구성을 잡을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먼저 듣는 분들(임원, 상사, 동료)에게 아웃라인을 분명히 잡아 전달합니다. 이 과정에서 정확성의 미덕이 다소 생략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내가 지금 어떤 이야기를 하는 중인지"를 분명히 인식시키고, 이 PT를 계속 들어야 할 이유를 각인시키는 게 이 단계에서 할 일입니다.

다음으로, 내가 애써 준비한 내용을, 상세한 논거와 함께 발표합니다. 이 과정에서 내가 어느 정도 성실히 준비를 했는지, 그 성의와 능력이 드러나는 거겠죠. 문제는, 이 두번째 단계, "가지"의 시연이 아무리 섬세하고 정연하더라도, 바로 앞 단계 "숲의 윤곽 잡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으면, 그건 별 효과를 낳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단계, 숲 → 나무에까지 이르는 과정이 깔끔했다면, 이제 마무리에서 다시 "숲"의 윤 곽을 분명히 집처 줘야 합니다. 이번에는 그 "숲"의 모습이, 앞선 디테일의 힘을 입어 보다 뚜렷하게, 듣는 이들의 눈 앞에 그려져야 하겠습니다. 저도 귀가 따갑게 들은 이야기지만, 이런 "만점짜리 회사인"이 하시는 말은. 뭐랄까 그 쓰는 어법과 분위기, 구성 면에서 와 닿는 무게가 다르더군요.


2. 대화에서 특히 지켜야 할 매너

이 문제는 매너의 차원일 수도 있고, 효율적인 소통을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일 수도 있습니다. 저자는 일본인이므로 "일본어는 문장의 끝에 긍정/부정을 판가름하는 성분이 따라온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말도 크게 다르지 않죠. 우리도 일상에서 흔히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결국, 대화의 중간에 끼어들면, 그 말을 이어나가던 사람이 기분을 크게 해칠 뿐 아니라,. 그 사람이 하고자 하던 말도 채 이해를 못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조직 에서, 타 성원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도 대단히 신경 써야 할 덕목입니다. 그런데, 의사 소통 과정의 장애로 인해 업무 효율이 저해될 지경이라면, 이는 단순히 감정적 문제를 넘어, 조직 메커니즘에의 심각한 손실을 끼치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남의 말을 끝까지 들어 보고 자신의 의견을 내놓든지 하자! 나이를 먹고 직급이 오를수록 소홀히하기 쉬운 부분입니다. 명심하고 또 명심할 일입니다.


3. 자료는 디지털 형태로 보관하자

이런 온건한 표현이 아니라, 저 자는 아예, "모든 종이 자료를 폐기하고, 전부 디지털로 변환하여 하드에 보관하라!"까지 말합니다. 보관 비용도 장난이 아니며, 종이 자료를 대체 필요한 부분만 검색할 수나 있겠느냐는 거죠. 시간이 없으면 PDF로 처리를 하라는 겁니다. 온당한 말씀이나, 근래 보안 문제가 크게 이슈가 되고 있는 분위기도 감안해야겠습니다. 이 문제는 개인의 재량이 아니고, 자신이 소속된 회사의 방침에 따를 필요가 있겠습니다. 또한 국가의 실정법 규율 문제도 고려를 해야 합니다. 다만 저자가 방점을 준 디지털화의 중요성은 물론 명심해야겠죠.


4. 요점 정리의 중요성

아 무리 잘 된 보고서라도, 너무 길어서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모르겠다거나, 설사 많은 정보를 요령껏 전달했다고 해도 상사가 일일이 읽어볼 수는 없습니다(물론, 일류 기업의 유능한 상사는 쉼표와 마침표의 오타까지 지적합니다만). 그래서 "세 줄 요약"이 중요합니다. 한국에서는 시시한 잡담을 늘어 놓는 익명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유행한 적이 있어서 이 주장이 다소 희화적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만,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이오?"라는 질문에 "네! 이것, 이것, 이것입니다."하고 요약할 수 있다는 건 자기의 능력을 증명하는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소개된 이토추 상사의 세지마 류조 씨는, 사실 한국의 현대사에서 한일 간의 가교로 지대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기도 합니다(긍/부정, 호/오의 평가는 엇갈리고 있습니다만). 아무튼, "세 줄 정리"의 시초가 이 사람이었다는 점은 역사적 관심에서도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5. 회의시 좌석 배치 하나에도 배려 혹은 전략이 필요하다

확실히 공감가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바로 옆자리에 앉아서는 그 사람을 공격하기가 거북합니다.
요 즘 여러 분야에서 자주 원용되는 심리학상의 원칙으로, 바로 옆의 사람에게는 이유를 모를 동지의식이 작용한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과 굳이 대결을 피해야 할 상황에서는, 그 사람의 옆에 가서 앉는 요령이 필요하다는 거죠. 반대로, 그 사람의 옆 좌석에 앉아서 구태여 공격을 펼친다면, 공격 받은 사람은 정도 이상의 적대의식을 품게 되어, 이후 돌이킬 수 없는 관계 악화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사실 이미 회의석상에 들어서기 전부터 대단한 앙숙이었거나, 사사건건 대결하는 사이였다면, 이런 전술은 이미 소용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고 중립적인 분위기, 신사도가 아직은 지배하는 조직이라면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네요.


총 86가지의 팁입니다. 저자가 스스로 강조한 바를 실천이라도 하듯, 장황하지 않고 간결,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말을 할 때는 결론부터 하라 같은 건, 끝까지 들어 봐야 아는 일본어나 한국어를 쓰지 않는 미국에서도 의사 소통의 기본 규칙으로 쓰고 있죠. 전체 회신 메일을 사용할 때는, 숨은 참조 기능을 적극 활용해서 일부 성원이 감정 상하는 일 없도록 하자, 같은 팁도, 사실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우리네 기업에서는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어쨌든, 들고 다니면서 수시로 참고할 수 있는 이런 멋진 책에, 알짜 팁이 다 정리된 모습은 참 유용하고 보기에도 좋았습니다. 상위 1%의 성공 대열에 오르는 그날까지, 반드시 곁에 두고 수시로 참고해야 할 멋진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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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20시간의 법칙 - 무엇이든 가장 빠른 시간 내에, 가장 완벽하게 배운다
조시 카우프만 지음, 방영호 외 옮김 / 알키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발견"이 열풍처럼 통용되고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유행은 다소 가라앉았는지 모르지만, 어떤 이들은 이제 유행 차원을 넘어 아예 이 명제를 확립된 법칙으로 받아들이고도 있는 형편입니다.


카우프만의 이 책에서도 수시로 언급되는 말콤 글래드웰의 그 주장은, 주장 자체의 혁신성에 기대었다기보다는, 그의 현란하고 설득력 넘치는 언변에 의존한 바 컸다고도 보여집니다. "1만 시간의 법칙"은 사실 글래드웰의 순수 창의 소산도 아니고, 앤더스 에릭슨 박사의 실증 연구 결과 중 엑기스를 아름답게 추출하여 대중에 시연한 이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비유하자면, 제품 자체의 탁월성보다는 마케팅 역량에 크게 힘입은 히트 상품에 유사하다고나 할까요. 1만 시간이란, 정상적으로 경제 활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적은 투자가 아닙니다. 단순 육체 노동으로 환산해도, 웬만한 사람에게는 막대한 기회비용을 발생시킬 자원입니다. 여간 재능이 부족하지 않고서야, 일만 시간을 투자해서 설사 달인까지는 될 수 없다고 해도, 상당한 결과가 나오지 않기란 그게 오히려 힘듭니다. 글래드웰의 그 법칙이 주는 매력은 1) 일단 누구나 공감하거나 이미 알고 있던, 그래서 기꺼이 동의를 보낼 수 있는 내용이고. 2) 누구에게나 공평히 주어진 시간만 일정하게 투자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그 "양적인 발상"에 혹할 만하며, 3) 설사 결과가 기대한 만큼 나오지 않았다고 해도 "나는 그러나 최선을 다했어!"라는 일종의 도덕적 숭고감을 느끼게 하기엔 충분하기에, "사후 회환"을 최소화한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입니다. 책임질 사람도, 패배한 사람도 없다는 견지에서, 이 "법칙"은 그 수용자보다 차라리 주창자를 winner로 만드는 캐치프레이즈입니다.


카 우프만은 이 책에서, 글래드웰의 그 언명과는 외관에서부터 큰 차이를 보이는 "처음 20시간의 법칙"을 이야기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눈치 빠른 분들은, "아, 1만 시간.. 하고는 뭔가 다른 입장인가 보다, 그와는 정반대되는 이야기가 펼쳐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지레 가질 만도 한 컨셉입니다. 사실, "1만 시간"이라는 말에 선뜻 기운부터 솟는 이들은, 시간을 금쪽 같이 관리해서 써 본 적이 없는 무경험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1만 시간은 결코 적은 시간이 아닙니다. 달인이 된다는 달콤한 결과 언급에 혹하지 않고, "여전히 힘들겠군.."이라며 고개를 흔드는 이들은, 오히려 이 책의 표제와 기조에 끌릴 가능성이 많습니다.


"당신은 지금 정반대로 말하는 것 아닌가? 1만 시간 정도 투자해야 원하는 결과가 나온다는 말은 차라리 덜 유혹적이지만, 20시간으로 뭐가 바뀐다는 주장은 오히려 요행을 부추기는 분위기 아닌가?"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이런 가상의 질문에 대해 정면으로 답하기보다는, 저는 이 책의 내용 일부를 소개하는 것으로 간접 해명을 할까 합니다.


우선 제목이 풍기는 인상과는 달리, 그리고 책 서두와 중간중간에 글래드웰을 자주도 언급하고 있지만, 저자 카우프만은 결코 "1만 시간의 법칙"과 그 주창자를 "디스diss"하지 않습니다. 그렇기는커녕, 속마음이야 어찌 되었든 그는 "1만 시간의 법칙"에 대해 어느 정도는 경의를 표하는 듯한 인상마저 줍니다. 다만 이 와중에 슬쩍 그가 강조하는 포인트가 두엇 있습니다.


"우리들은 과연 독하게 1만 시간을 투자할 각오가 되어있는가?"

"1만 시간을 투자하여 달인이 되고 싶다는 마음에 어느 정도 진정성이 갖추었는가?"

"1만 시간씩이나 투자하고서 소정의 결과가 안 나왔을 경우, 그 보상은 정신적 위안 외에 어떤 것을 스스로 준비하고 있는가?"


카 우프만은 "1만 시간..."을 부정하거나 폄하하는 게 아니라, "그 좋다는 1만 시간 스케줄"이 과연 우리에게 필요한지를 먼저 묻고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1만 시간을 투자해서 달인이 되었다 해도, 알고 보니 이 분야에서 달인까지는 될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면(개인적 만족 면으로나 사회에서의 상품적 수요 면에서나), 사실 이 투자는 성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달인까지나 되지 않고, 그저 내가 적당히 만족하고 증기기 위해, 어지간히 재주에 능해서 남과 나를 만족시키는 레벨만 성취하고 싶다면, 1만 시간이 아닌 그보다 훨씬 적은 시간 투자만으로 가능하다는 취지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가격 대비 고성능"이란 미덕과도 통합니다. 고통스럽고 기회 비용도 엄청난 1만 시간을 쏟을 게 아니라, 약게약게 잠시만(상대적으로) 집중한 후, 최대한의 성과를 내는 게, 나 자신과 시간한테 모두 덜 미안한 길이라는 거죠. 이런 의견에 누가 동의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취 지는 좋습니다. 이제 그럼,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들어갈 차례입니다. "대체 어떻게 20시간을 보내야 최대한의 효용을 뽑을 수 있을까?" 소설가도 장편보다 단편에서 승부 내기가 더 힘들다는 말처럼, 카우프만은 차라리 더 모험적인 승부수를 독자에게 던졌는지도 모릅니다. 그가 진정성과 자신감을 충분히 갖추지 않은 이상, 말에 대한 책임은 쉽사리 지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합니다만...


대체로 글래드웰의 문장이 "나-저자-와 당신-독자-를 구별하는 스타일이라면, 이 카우프만은 1 인칭 복수 대명사 "우리" 안에 모든 주제를 포함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런 모습은, " 내가 직접 해서 안 되는 것이면 독자들에게도 강변하지 않겠다."는 겸손과 실천 중시의 태도를 풍깁니다. 자계서의 생명은 "실천과 실용성"인데, 이를 만족 못 하는 책이라면 제아무리 멋진 말로 겉을 포장한다고 해도 별 소용이 없다는 점에서, 그의 말에선 일단 강한 신뢰감이 풍깁니다.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듯, 이 책의 후반부는 그가 직접 시도해 본 "20시간 실전 적용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책 의 제 2장에서 그는 이른바 10원칙을 제시합니다(구체적인 내용은 책을 찾아 보시구요). 일반 이론은 이 2장에서 그가 제시한 것이 다입니다. 그런데, 일반론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다시 강조하지만) 실천이 문제입니다. 저자는 그래서, 어떤 실험군이나 연구 대상 집단이 아닌 자신이 직접 실천에 옮겨 본 요가, 우쿨렐레, 윈드서핑, 바둑에의 "도전기"를 자세히 풀어 주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특히 바둑은, 서양인에게는 아마 마법의 게임과도 같은, 상당한 난이도가 있는 오락(두뇌 스포츠에 가까운)일 것 같습니다. 그는 "체스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복잡하고, 체스보다 훨씬 고급의 두뇌작용과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이 바둑이란 게임에서, 자신이 이뤄낸 성취(우리 동양권 독자가 보기에는 별 것 아니지만)를 대단히 뿌듯해합니다.  아마 그는 이 정도의 결과만으로도 충분히 책 한 권을 쓸 자신감이 생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의 성인 남성이라면 아마 군 복무 중에 담배와 함께 배우는 필수 취미 정도겠지만 말이죠.


결론은 그것입니다. 달인이 되고 싶으면 1만 시간을 투자하되, 적당히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잘하고 싶으면 20시간을 똘똘하게 투자하라! 이 두 요청은 알고 보면 서로 배치되는 것도 아닙니다. 대체재가 아닌 보완재 관계라고나 할까요? 양과 질이 서로 상충관계라고 보는 분도 있겠지만(지나친 몰입으로 예컨대 1만 시간을 유지하기는 힘들다는 점에서), 시간을 영리하게, 그리고 즐겁게 쓰라는 저자의 말에 동의 못 할 바는 전혀 없습니다. 이 책에는 권두 부록으로, 예쁜 노란색 바탕의 시간 계획표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실용성 면에서 참 큰 도움이 되었다는 평을 남기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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