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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줄도 읽지 못하게 하라 - 누가 왜 우리의 읽고 쓸 권리를 빼앗아갔는가?
주쯔이 지음, 허유영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헌법에 "출판의 자유"가 보장되었다는 사실은, 과거 한때는 출판의 자유가 누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드러냅니다. 협소한 개인의 행복과 자유의 범위를 넘어, 특정한 사상과 원리가 공동체, 나아가 전 인류의 복리 증진에까지 영향을 주려면, 그 정신적 가치나 기술적 세부 사항 등이 지면을 통해 확산될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도 웹 페이지의 최종 발표를 위한 편집 기술을 "퍼블리싱"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이런 이유가 있겠습니다. 인간은 이런 의미에서 "출판하는 동물"이라 불릴 만한데, 이런 근원적이고 양도 불가능한 자유를 제한당한다면 이는 표의자나 잠재적 독자층에게 크나큰 고통이자 불행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책은 주로 서양의 출판, 저작 역사에 초점을 두어, 어떤 빼어난 책들이 여태 금서로 지정되고, 그 지정된 금서가 인류 문화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재미있게 서술합니다. 못된 책, 혹은 요즘 널리 입에 오르내리는 말로 "불온 서적"은 그럴 이유가 있어(내용이 불건전하여) 양식 있는 이들에 의해 금지되었겠거니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서적에 끌리거나 호기심이 생기는 내 자신이 어딘가 불측하거나 올바르지 못한 심성이겠다며 괜한 자책감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권력에 의해 이른바 금서로 지정된 서적들 중, 이 책에서 소개한 것들의 경우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불후의 명작, 고전 리스트"에 다름 아닙니다. 어떻게 "금서=명작"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수 있을까요?
모든 금서가 다 명작으로 분류되는 것은 아니며, 실제로 오늘날의 눈으로 봐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풍속물들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흔히 음서, 도색물로 분류되는 것들은 교황청이라든가, 엄숙한 지역 교구라든가, 정부의 출판 규율 당국 등으로부터 "금서 목록"에 오르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은 흔히 "물건"으로 다뤄져 발각 즉시 소각되거나 압류되었을 뿐이었죠. 따라서 위험한(당시의 지배 계층이 보기에) 사상이나 주장을 담은 책들, 혹은 우아하고 잘 제련된 언어 속에 성(性)의 지향(행태가 아닌)을 담은 책들이 비로소 권력층에 의해 "금서"로 분류되는 것입니다. 이런 기준이 적용되었기에, 당대인들이 이해 못 하거나 질서(낡은 적폐를 포함할 가능성이 높죠)를 위협할 만하겠다 싶던 책들이 제재를 받았겠고, 그런 책들 중에 명작, 고전이 많이 낀 것도 당연합니다.
아마도 금서라고 하면 <데카메론>이나 <우신 예찬> 등, 교회와 지배특권계층의 이해에 반했던 여러 선구자들의 문예 작품이나 논설을 대뜸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 수록된 다양한 작품 목록들은, 오히려 근현대에 들어서까지 정부 당국에 의해 경원시된, 불멸의 명작들을 더 많이 포함한다는 게 놀랍습니다. 이 중에는 노동자층의 비참한 근로 여건을 고발하는 소설, 희곡도 있고, 인습과 제재를 넘어 남녀 간의 자유로운 사랑을 주장하는 문예물도 있습니다. 이 정도의 표현이 이처럼이나 가까운 시기에까지 금지되었다는 점도 의외이겠으며, 이런 책들을 개인 간에 우송, 교환하는 행위도 무려 "우편 당국"에 의해 검열, 규제되었다는 사실이 많은 독자들에게 놀라움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표현의 자유"를 넘어 "사적 비밀, 통신의 자유"까지 침해하는 처사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 실린 여러 금서들 중, 유독 제정 러시아의 폭압적 처사라든가, 이후 소비에트 시절까지 포함하여 많은 명작, 정의로운 외침을 담은 저술이 포함되었다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제정 시대에는 다른 예속 민족의 자유를 외치는 행위가 금지되었고, 공산 정권 때에는 우리가 잘 알듯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라든가 솔제니친 등의 작품들이 엄혹한 조치에 족쇄가 묶였습니다. 더 재미있는 건, 제정러시아나 공산당 일당 독재나 결국 체제의 내부 적폐를 청산, 극복 못 해 무너지고 말았다는 사실이죠. 선각자,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 문학가들이 외치는 소리에 제때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시스템이 한결같이 맞아야만 했던 운명이라고 봐도 되겠습니다.
반드시 체제에 반대하거나, 음란한 풍습을 다룬 책들만 금지되는 건 아닙니다. 인간의 야수적이고 잔인한 면을 그대로 묘사한, 졸라 풍의 자연주의 작품들도 결국 윤리와 미풍에 반한다는 이유로 금서 목록에 오르기도 했죠. 어느 사회나 부모자식간의 바른 범절, 부부 윤리, 공동체 질서의 이상적 방향을 성원들에게 가르치고 사회화의 지침으로 삼기 마련인데, 이런 정책에 방해가 되는 내용을 담은 책 중 파급력이 있겠다 싶은 책은 흔히 금서로 지정되었습니다. 인간의 품성 중 어둡고 부조리한 면을 그대로 서술했다는 이유만으로 이것이 금서로 묶여야 한다는 정책은, 오늘의 관점으로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조치이겠습니다. 사실 이런 결과는 오늘날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고, 다만 워낙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현대 자유시장의 원리에 의해 개별 저작의 튀는 성향이 그저 대중의 눈에 쉽사리 안 뜨인 결과일 뿐입니다.
이 책에 소개된 많은 금서들의 경우, 문제작이다 음서다 불쾌하고 불온한 저서다 이런 막연한 선입견을 확실하게 배반하며, 오히려 "고전, 명작 엄선 리스트"라 불려 무방할 정도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게, 이 많은 명작들이 하나같이 금서로 묶인 적이 있다면, 금서가 대체 인류 문명의 진보를 선도했다고 해도 될 정도입니다. 어째서 이런 모순된 명제가 성립할 수 있을까요? 당대의 정부 당국자들, 권력자들은 하나같이 눈멀고 아둔한 자들만이 그 자리에 앉혀졌다는 뜻일까요? 그 해답은, 어느 체제나 질서라도 그에 대해 정당한 의문이 제기되지 않거나, 비판과 개선 사항이 반영, 수용되지 않는 닫힌 사회라면 결국 그 존속이 어려워지고, 자체 붕괴나 발전적 해체로 치닫는 게 필연이라는 뜻도 됩니다. "우리가 몸담은 사회가 훌륭하지만, 이를 더 나은 사회로 만들어보자는 외침이 죄가 될 수는 없다." 오랜 시간 공산주의자로 몰려 고초를 겪은 작가 트럼보의 유명한 말이죠.
사실 이 책은 인류 문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의 엄선 소개로 파악해도 전혀 무방한데, 절묘하게도 "금지, 금압"의 코드로 이 많은 책들을 엮어 소개한 저자의 센스가 탁월합니다. "센스"라고만 표현하면 어딘가 감각적인 능력만 강조하는 것 같은데, 이 책의 필치는 찬란한 고전을 선별하고 소개함에 있어 조금도 부끄럽지 않을, 엄정하고도 세련된 필력을 자랑합니다. 특히 저자는 어느 작가를 소개하면서, "위대한 고전을 자신의 스타일대로 변형, 재창조하려 든 계획"을 가졌다고 서술하는데, 이는 아마도 저자 본인이 어려서부터 많은 책을 섭렵하며 가졌을 꿈의 일부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갖게 합니다.
명작 리스트라고 하면 대개 건조한 필치에 내용 요약식 뻔한 체제로 진행되기 일쑤인데, 이 책은 내공 깊은 저자의 소양 있는 문체로 각각의 저작에 대해 멋진 입문적 소개, 현대적 의미 부여가 되어 있어 소재 못지 않게 저자의 입담, 고아한 인문적 취향에 함께 매료되는 면이 있습니다. 고전에 대한 소개가 낡은 문장, 이미 확립된 정평에 의존하는 수가 많은데, 이 책은 전혀 그렇지 않고 독자로 하여금 신선한 시각으로 해당 고전에 눈길을 다시 주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아직도 출판, 표현의 자유가 널리 확립되지 않은 중국의 저자가 썼다는 점에서 묘한 여운도 남기는 게 사실입니다. 언제나 믿고 고를 수 있는 허유영 번역가의 유려한 문장도, 처음부터 한국어로 쓰인 저술인 양 즐거운 착각을 부르게도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