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나폴리 4부작 2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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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맨부커상을 받는 쾌거를 통해, 한국인이면서 좀 게으르거나 불성실한 독자들에게(물론, 전세계의 뜻있는 독자들에게도) 확실히 자신의 이름과 작품 세계를 각인시킨 한강 작가님(아는 분들은 이미 십여년 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을 통해 다 알았지만), 그리고 이 두꺼운, 연작의 두번째 마디로 우리 한국 독자들과도 치열하고 행복한 소통을 이룬 엘레나 페란테, 이 두 분은 제 생각에 참 닮은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대하소설에 가까운 "나폴리 4부작" 중 두번째 권입니다. 첫째 권도 워낙 좋다고 권하는 지인(주로 여성들이었지만)들이 많아서, 이제 이런 쪽에선 나올 이야기가 다 나오지 않았냐며(사실 가당치도 않은 소리죠) 시들했던 저 같은 독자도 (또, 출판사의 휘광도 있고 해서) 이미 몇 달 전에 찾아서 읽어 봤습니다. 질곡 많고 민중의 상당수에게 큰 아픔을 안긴 현대사의 가까운 지점들을, 소설 형식을 통해 가상의 주인공(그러나 꼭 가상만은 아닐)들을 등장시켜 쓰라리고 고통스럽고 죄책감과 절망의 수렁에 빠져들고 마침내 건강한 각성과 카타르시스를 안기는 시도는 여러 역량 있는 작가들에 의해 이뤄져 왔습니다. 과거에는 윤정모 작가님 같은, 거의 자전적인(그래서 더욱 독자가 고통스러운) 소설 등이 대표적이었겠고, 이런 여성 작가들은 대개 시대의 모순을 이중삼중으로 자신의 내면에 아프게 새기게 될 여성 주인공들을 앞에 내세워 세계의 거울과 평행우주를 구축합니다.

1권도 그랬지만 이 2권에서도 반드시 무슨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이 배경을 이루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그 대신, 선량한 개인들, 이웃과 평화로운 공존을 이루고 아름다운 인간 본성을 끝까지 지키며 생을 일궈 가려 드는 개인들에게 반드시 대적(大敵)으로 등장하는 게 "폭력"입니다. 이 폭력은 이 소설 속에서처럼 "마피아(시칠리아에만 마피아가 있는 게 당연히 아니죠)"라는, 그 존재 이유와 격렬한 양상을 반드시 "폭력"으로 표현하는 익숙한 실존의 집단으로만 등장하는 게 아닙니다(깡패가 폭력을 휘두르는 건 끔찍할망정 놀랍지는 않죠).

사회의 기저에서 폭력의 행사, 공포의 유발을 통해 정의롭지 못한 권력과 경제적 이익를 챙기려 드는 이들은, 반드시 폭력의 확대 재생산을 통해 개인의 일상과 가장 사적인 평온이 지배해야 할 공간인 가정까지 침투하려 듭니다. 폭력은 정당한 이익의 대가의 귀속을 방해하려 체계 속속들이 꽂힌 빨대와도 같으며, 이 기제에 세뇌된 어리석은 남성들은 가부장의 허울 아래 가장 약한 구성원들에게 체제의 폭력을 대리 행사하는 부품으로 악용됩니다.

여성의 저항은 물리적 조건으로는 이들 수컷의 강력한 폭력에 맞대응하기 어렵기에, 릴라나 레누, 우리의 주인공들은 인간의 내면과 정직한 본성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의 습득에 매달립니다. 책을 읽고, 정직한 느낌을 교환하고, 나만의 감상과 상념을 글로 써 보고, 남이 아닌 나 자신의 발전과 각성과 절절한 느낌을 명징한 언어로 표현함으로써(물론 이런 활동 중에는 학교 공부도 포함됩니다. 세계의 문명화한 부분과 미미한 개인들의 존재가 합일을 이루려면 그 길은 공부가 가장 유력하다는 게 이런 [좀 아픈]성장 소설에 등장하는 깨인 여성들의 공통된 선택이죠), 그들은 야만적 폭력과 동전의 양면 같은 구조를 이루는 "무지 몽매"에 정면으로 반기를 듭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쪽이나 당하는 쪽이나, 자신이 지금 어떤 거대한 기제 속에서 무슨 노릇을 하는지를 모르기에 자신과 타인(조금도 적이 아닌)을 동시에 파괴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거죠. 이탈리아를 수백 년 전 다녀간 괴테의 말처럼, 폭력에 짓밟히거나 스스로를 폭력 행사 속에 모독하는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더 많은 빛이 그 어두운 내면에 비추이는 것"입니다. 이들은 누가 더 주먹을 잘 쓰고, 누가 더 야만 속으로 타락할 수 있느냐로 경쟁하지 않고, 누가 더 지혜롭고 온유하며 타인을 더 잘 이해하고 사랑하느냐로 우열을 다툽니다. 두 소녀가 영혼의 동반자이며 동시에 경쟁자이기도 한 건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아내를 죽어라 하고 두들겨 팬 후에야 그 남자가 비로소 남자로 주위로부터 대접받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쪽은 그 남자를 키운 늙은 여인(더 이상 여자라고 볼 수도 없는 음울하고 찌든 폭력배 같은 눈빛을 한)의 입에서, 그녀 역시 과거 한때 가장 적나라한 폭력의 희생자였을, 이제는 왜곡되고 타락한 채 폭력 행사의 말단 대리인 노릇을 하며 자신의 현재와 과거로부터 스스로 유리된, 축출된 영혼이, 대를 물려 제단에 서서 소중한 자아를 더럽히고 강간당하는 희생자의 입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뱉는 저주의 전승입니다. "경계의 허물어짐"은 사실 그리 낯선 동기는 아니겠지만, 멀쑥하고 다정해 보이는 얼굴선이 느닷 무너지고 야수 같은 그 부친의 모습과 표정이 느닷 튀어나오는 스테파노(아들/아버지의 경계 부정)의 행동 묘사 같은 건, 페란테 여사만이 이 연작에서 섬뜩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장기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이때의 경계 부정은 변증법적 지양이 아님은 물론이고, 진화와 문명의 성과를 무위로 돌리는 무한 회귀적 퇴행에 지나지 않죠.

이탈리아 남부는 경제적 빈곤, 부의 편재, 전근대적 인습의 횡행, 낙후한 정치 시스템 등 여러 근본 모순을 예나 지금이나 간직한 고장입니다. 그리 먼 과거도 아닌 시점에서 그저 평범하고 행복하게 자라야 할, 이후 숱한 남자, 여자 아기들을 생산하며 세상을 더욱 풍요로운 공간으로 채워야 할 모성(母性)에, 이만큼이나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며 사회를 끌고 가는 체제란 정말 못나고 무력하며, 아름답고 풍요로운 자연 환경, 어머니 대지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는 흉물들이란 생각이 들었네요. 여사는 그러나 아픔과 좌절, 눈물과 비통함만으로 주인공의 앞길을 채우지 않습니다. 완성도 높은 성장 소설이 언제나 그렇듯, 연약한 주인공이 체제와 인습이라는 사납고 야수적인 발톱을 재치있고도 유쾌하게 피해가며 자기만의 발전을 일구고 승리하는 모습은 성별을 떠나 독자에게 성취감마저 안깁니다. 이 역시 어둠을 빛으로 극복하는, 위대한 인간 정신이 위기마다 보여 준 치열하고도 통쾌한 행보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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