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의 대단한 역사 - 하루 일과로 보는 100만 년 시간 여행
그레그 제너 지음, 서정아 옮김 / 와이즈베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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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알렉산더 대왕, 칭기즈칸, 나폴레옹 등이 언제 어디서 대단한 위업을 쌓고 유방백세의 이름을 남겼는지는 우리들 모두가 학교에서 사회, 역사 시간에 열심히 배워 왔더랬습니다. 위대한 선인들이 남긴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그 후손들인 우리가 풍족하고 편리한 생활을 누리는 데 큰 기여를 하는 중이니, 학창 시절 골머리를 싸매며 배운 노고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헌데 위인들의 거창한 위업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들 평범한 소시민들이 매번 일상에서 접하는 지극히 평범한 하루 24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사업상의 약속을 정확히 지키거나 연인과 함께 달콤한 추억을 만드는 일, 혹은 지친 몸의 활력을 목욕, 샤워를 통해 회복하는 일, 배고플 때 단돈 얼마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편익 등이, 정확히 언제부터 가능했고 "일상"이 되다시피했는지 역시 중요한 의의를 갖습니다. 하지만 이 소소하고도 고마운 혜택이 누구 덕분에 처음 가능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사회 제도의 일부로 자리잡았는지는 교과서에서 배운 바도 없고, 어디 가서 알아봐야 하는지조차 우리가 모릅니다. 위인들의 업적에 기대는 건 우리 인생의 지극히 중요한 몇몇 순간뿐이지만, 의식주의 편리를 누리고 용변의 생리를 해결하는 건 매일매일 우리가 입은 혜택인데도 말입니다. 양쪽을 놓고 무게를 가늠하면 과연 저울 추가 어디로 기울지, 아무도 장담 못 합니다. 일상의 소소한 편의를 모조리 거부하고 살기란, 당장, 지금부터, 불가능해지기 때문이죠.



소소한 일상의 자그마한 편리함이 언제부터 가능했는지를 아는 건, 그저 호기심 해소에 그치는 게 아닙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한 게 결코 당연하지 않았으며, 이처럼이나 많은 이들(그 중 상당수는 우리가 이름도 모릅니다)의 지혜와 공헌이 쌓이고 쌓여 비로소 가능했음을 아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마음이 숙연해지고 일상의 고마움에 대해 절감하게 됩니다. 소소한 일상의 고마움과 (알고보니) 매우 깊은 저 먼 연원을 깨닫게 되면, 위생과 기초 생존 욕구의 원활한 해결(남는 에너지로 다른 고차원적인 작업과 상념에 몰두할 수 있습니다)이 우리 생을 몇 배로 행복하게 해 줌을 알고, 나 자신의 마음부터를 평안히 다스릴 수 있습니다. 불과 몇십 년 전, 혹은 한 세기 전만으로 거슬러 올라가도 사람 사는 게 짐승이나 다름없었을 생각하면 아찔해지죠.

책은 여태 몸을 숨긴 채 눈에 띄지 않았던 정말로 소소한 일상의 역사를 자세히 다룹니다, 위인의 행적과 굵직굵직한 정치사는 권위 있는 문헌이 공인 과정을 거쳐 출간되었기에(역사가 최초 기록된 시점부터 이미), 정확한 분석과 탐구가 그리 어렵지 않을 수 있습니다. 허나 소소한 생활사는 파편적으로 흩어진 기록을 일일이 조사, 취합해야 하고, 기록자들이 농담, 여담처럼 남긴 흔적에서도 단서를 얻어야 하므로 너무도 어려운 과제일 수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과업을 수행하면서도, 그 결과물은 재미있는 농담처럼 들려 주는 저자의 내공과 박학다식함에 독자로서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시간이 오늘날처럼 12시간 60분 12개월 단위법으로 정착하여 널리 쓰이게 된 건 어떤 절대적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음을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특히 재미있는 건 프랑스 혁명 이후 지도층이 그저 정치적 세력 교체만을 이룬 게 아니라, 전근대성을 몰아내고 근대성, 합리주의 사상을 국가 지도 이념으로 정착시키려 든 노력이 자세히 소개되었다는 점입니다. 앙시엥 레짐의 진정한 붕괴는 비합리적인 제도의 전복과 대체에서 비롯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미터법 등 표준단위의 계산, 측정이 10진법에 기인하기에, 12월 체제인 역법도 10개월 단위로 바꾸는 등의 개혁을 시도한 건, 사회와 민중의 호응을 전혀 얻지 못했기에 실패했음을 저자는 지적합니다. 이 정보를 전하는 톤과 분위기가 대단히 유머러스하기에, 인간의 관습과 제도가 절대적인 듯 보여도 실제로는 사소한 우연들이 겹치듯 끼어든 결과인 점, 우리는 허탈하게 절감합니다. 저자는 그저 우리에게 쉽게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이런 캐주얼한 화법을 쓰는 게 아니라, 세상의 거대한 이치 배후에 어떤 필연성이 도도히 흐르는 것만은 아님을 소탈한 말투 속에서도 전달하는 거죠.



독자들은 특히, 일광절약 시간제라 부르는 서머타임 제도가 어떤 과정을 거쳐 미국과 서유럽에 정착했는지, 저자의 너무나도 재미난 설명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책 전체를 통틀어 저는 이 대목이 가장 신나게 읽힌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국도 1988 서울 올림픽 전후로 이 시스템이 도입되었다가 현재는 거의 언급도 안 되는데, NBC사와의 방송 중계권 협상 과정에서 그리 되었다는 재미있는(좀 창피한) 일화가 있죠. 저자 그레그 제너 님께 이 사실을 알려주면 아마 귀를 쫑긋 세우고 들을 것 같습니다.

인류는 체내에서 동화 이화 작용을 반복하며 생명을 유지하는 개체이기에, 이 부분 한정해서 여타의 하등 동물과 운명이 다를 바 없습니다. 문제는 정착하여 군집 시스템을 일구고 사는 처지이기에, 적 아닌 동료 거주자들의 "배설물"을 어떻게 처리할 지의 문제가 실로 난감하다는 거죠(아니, 자기 자신의 것이라도요). 감정적인 불쾌감도 불쾌감이지만, 위생상의 문제가 더욱 절실합니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부친 스트라보 장군도 이 문제 때문에 전황을 크게 그르칠 뻔했다는 역사가 전할 정도이니 배설 이슈는 더 이상 "소소"하지도 않은 셈입니다. 여기 대해서는 많은 대중서들이 이미 재미있는 정보로 독자들과 만난 바 있지만, 제가 여태 읽은 중에서는 이 그레그 제너의 책이 가장 재미있으면서도 포괄적이었습니다. 조선에서도 시비법이 고안된 후 수확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했지만, 유럽 역시 강물을 더럽히는 수세식이 아닌 저장식으로 농사에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한때 더 우세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6.25 당시 파병되고 이후에도 주둔한 미군들이, 논밭에 배설물을 비료로 주는 우리 농촌의 관행을 보고 몸서리를 쳤다는데, 이 책을 읽으면 그들 역시 소위 "문명"의 관점, 기준이 바뀐 지 그리 오래지 않다는 점을 알고 부끄러워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속옷 파트 역시 독자가 한번 펼쳐들면 끝까지 읽어내야 직성이 풀릴 만큼 재미있습니다. 원더브라가 이미 고대에도 그 원형이 존재했다는데, 속옷(특히 기능성)의 착용이야말로 우아한 현대인의 표징이라 알아 온 우리들로서는 맥이 빠지기까지 합니다. 한편으로, 이미 신석기 시대부터 문자 기호의 아득한 원형이 존재했으며, 표음 문자가 진일보한 수단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오히려 현대에 들어 픽토그램이 다시 널리 쓰인다거나, 메신저 등에서 애용하는 이모티콘, 스티커 등의 인기는 우리에게 사물과 현상을 다른 각도에서 관찰할 필요가 있음을 깨우칩니다. 한자(漢字)만 해도 전산화 시대에 대체 어떻게 활용하겠냐며 중국을 두고 불쌍하다는 시선으로 본 게 몇십 년 전인데, 지금은 다양한 입력 방식을 지원하는 앱의 개발로 중국인들도 무리 없이 의사소통을 합니다. 당연한 상식이 반드시 절대적 타당성을 갖고 받아들여져야 할 이유는 없음을 저자는 여러 고찰을 통해 깨우칩니다.

미국 대중 문화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저자의 상큼하고 기발한 비유가 매우 재밌게 와 닿을 것입니다(정작 저자는 영국 분인데). 표준 시간제 도입을 설명하며 저자는 "돌리 파튼의 나인 투 파이브가 혹여 '밤9시부터 새벽 5시'로 이해될 뻔했다"며, 대중들의 생활 습관에 맞지 않는 무리한 기준의 도입이 얼마나 우스운 결과를 낳을 뻔했는지 실감시켜 줍니다. 그런가 하면 만약 에디슨이 "헬로"라는 통화상의 표준 인삿말을 "어호이(ahoy)" 등으로 고안했다면, 라이오넬 리치의 대 히트곡 "헬로"도 "어호이"가 그 제목, 가사 후크가 되었겠다며 독자의 웃음을 유도합니다. 이뿐 아니라 브래지어(혹은 비키니 탑)의 유래를 설명하는 중, <공룡 백만년>의 여우주연 라켈 웰치(이 포스터가 너무 유명해서 사회학 서적에도 도판으로 실릴 정도죠)가 "원시인 브라"를 입는 모습은 결코 영화 속에서의 과장이 아니었음을 증명하여 독자를 놀라게 합니다(아마 반 세기 전 영화 제작자들도 몰랐을 듯요).



번역도 참 깔끔한데요. 마치 한국 저자가 처음부터 한국어로 책을 쓴 것처럼 자연스럽게 읽힙니다. 역주(본문 중 삽입)도 많이 달려 있어서 저자가 어떤 대목에서 위트, 말장난(pun)을 시도했는지 우리는 놓치지 않고 웃으며 감탄할 수 있는데, 이런 대중서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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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레퀴엠 버티고 시리즈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윤철희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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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자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만큼, 생전 자기 직분에 성실했던 이의 장례식. 애도하는 조문객이 많으면 많을수록 동료들의 죄책감은 한결 덜어집니다. 운집하여 고인의 넋을 기리는 이들이 도열한 모습을 두고 어떤 이는 "보기 좋았다"고까지 말하네요. 물론 그 짧은 코멘트 속엔 무수히 많은 감회와 상념과 결의가 교차할 것입니다.

이 소설 속엔 장례식 장면이 두어 번 나옵니다. 하나는 연쇄 살인범의 소행인지, 아니면 암살자의 짓인지 모를, 여튼 무고한 희생자임에는 틀림없는 어느 이혼녀의 죽음 때문이었습니다. 죽은 여성은 이 소설의 두 주인공 중 하나인 조 파이크의 전 여자친구이자, LA 시정 전체를 좌우하는 거물 사업가(틴에이저 시절 갱단 멤버였다가 또띠야 체인점으로 떼돈을 벌고 시의원 몇을 수중에 넣어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어린 시절 같은 갱단 소속이었던 민완 변호사를 친구로 둔, 라틴 아메리카 혈통의 미국 시민권자) 프랭크 가르시아의 딸이기도 합니다. 다른 하나는 매우 유능하고 정의감 넘치는 어떤 수사관의 죽음 때문이었는데 위 첫 문단의 서술은 사실 그녀의 안타까운 최후에 더 초점을 둔 것이었습니다.

소설은 안타까운 죽음 여럿, 수수께끼에 싸인 죽음 몇, 그리고 최후의 결전에서 죽을 줄 알았던 어떤 이의 기사회생(이분은 꼬마 시절부터 해서 진짜 죽을 고비를 여러 번도 맞이하더군요), 개인적 증오와 복수심에 눈이 멀어 어처구니없는 짓을 벌인 자의 죽을 뻔한 소동 등 "죽음" 근방에서 맴도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인간쓰레기이건 정신이상자건 거짓말쟁이이건 관심 중독자건 모두에게는 그 나름의 레퀴엠이 필요할 것입니다. 로렌스 블록의 장편 <800만 가지 죽는 법>이 대서양에 면한 뉴욕을 배경으로 삼은, 스릴러의 외관을 쓴 대서사시였다면 이 작품은 그 정반대방향 태평양에 면한 (제목 그대로) LA를 무대로 한 살육과 증오와 설육과 사랑을 테마로 삼은 폭풍 같은 에픽입니다.

이 소설은 기묘한 방향으로 엇나간 몇 편의 사랑을 숨겨 놓듯 깔아 놓은 작가의 선택 때문에 읽고 난 감상이 더 아련해지는 듯합니다. 우선 피도 눈물도 없는 목석 같은 사내이며, 언제 어디서 연쇄살인마로 돌변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조 파이크는, 이런 사람이 과연 어느 여성에게 연정을 품을 수 있을지(혹은, 어떤 여자가 저런 사내를 사랑할 수 있을지) 누가 봐도 고개가 갸웃해질 겁니다. 그런데 심성이 진국이고 약자를 돌볼 줄 알며 제 신상에 위해가 갈망정 인간된 도의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 "진짜 남자"는, 정말 괜찮은 여성들이 먼저 알아보나 봅니다. 그 증거로 카렌 가르시아 같은, 진짜 심성도 외모도 멋진 여성이 그를 선택했습니다. 최악의 환경에서 성장했을망정 자신의 인격을 보석 같이 가꿀 줄 안 파이크 역시, 카렌 같은 멋진 여성에게 마음을 안 줄 리 없고 세상사 쓴맛 단맛 다 본 대 사업가 프랭크 역시 "이 친구 괜찮네" 하며 자기 딸을 주려 합니다. 딸과 잘 안 된 후에도 조 파이크를 곁에 두며 "친구"로 연을 이어가려는 게 조금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진짜 안타까운 건, 조와 카렌 두 사람이 서로 순도 높은 사랑을 하며, 조의 선배인 (역시 조처럼 정의감에 불타고 진실된 성격이지만 안타깝게도 비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워즈니악 역시 그 부인 폴렛과 금슬이 좋지만, 못된 운명의 장난은 조와 폴렛 두 사람을 서로 엮어 버립니다. 어쩌겠습니까. 조는 폴렛을 보는 순간 (그 차디찬 강철 같은 심성의 사내가) 태어난 이래 처음 겪는 감정의 격동을 체험했고, 폴렛 역시 주변의 지구가 정지하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소설 후반부에 다 드러나지만, "플라토닉 러브"란 이들의 관계를 두고 이르는 말이라 할 만큼, 조 파이크는 "모텔에서의 그 사고" 이후 철저한 거리를 폴렛으로부터 유지해 왔습니다. "십 년도 지났는데, 그새 더 아름다워지신 것 같아요." 이 한 마디 속에 천 가닥의 사연과 번뇌와 위대한 절제가 들어 있습니다. 조 파이크란 인간 병기의 개성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절제"입니다. 마지막의 "그놈"도 그의 절제를 깨뜨리려 이 모든 추악한 살인극을 벌였고, "그놈"보다 더 추하고 한심한, 비열한 낙오자 역시 그의 평정심을 깨뜨리기 위해 자해에 가까운 미친 소동을 벌입니다.

소설은 물론, 거의 십 년 넘게 이어진 수수께끼의 연쇄 살인극이 과연 누구의 손에 의해 저질러졌는지, 범인이 "암살자"인지 "연쇄살인마"인지 가려내는 본격 미스테리 장르물입니다(작중 화자의 분류에 따르면 "암살자"는 일관된 계획과 특정인에 대한 구체적 살의를 갖고 사람들을 죽여나가는 자이며, "연쇄살인마"는 무작위로 희생자를 고르는 유형이라고 하네요). 일단 독자는 범인이 "누구"인지보다, 무슨 동기로 이런 짓을 저지르는지 범인의 유형(위 분류에 따른)을 주인공들과 함께 알아내는 재미에 집중해야 하겠습니다.

...만, 앞서 적은 대로, 이 소설은 (외견상 전혀 안 그럴 것 같은) 등장인물들 사이의 끈끈한 우정, 위대한 사랑, 극악무도한 적의와 복수심 등이 놀랍도록 생기 넘치게, 때로는 오싹하면서도 감동적이기까지 한 필치에 실려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게 놀랍습니다. 처음에는 엄청 하드보일드 풍으로 달리지 않을까 짐작했는데, 예상 외로 감정선을 묵직히, 섬세히 건드리는 진행이더군요.

조 파이크, 악마 같은 냉혹함과 (그와 도저히 양립할 수 없을 듯한) 거의 신적인 정의감의 소유자인 그를 주인공으로 봐야겠지만, 그와 동업 관계(개인 탐정업)인 엘비스 콜 역시 이야기를 떠받드는 양축의 하나인 매혹적인 남성입니다. 성장 배경은 잘 알 수 없지만, 이름값 하느라고 여자들이 엄청 따르나 봅니다. 결국 준 주인공 레벨로 올라서던 변호사 겸 방송인인 루시, LAPD의 여걸 돌런, 어느 사장님 여비서였던 홀리("저기, 여친 업그레이드할 생각 있으면 꼭 연락해요!"라던 멘트가 안 잊혀질 듯합니다. 다만 이걸 실제 써먹기란 뭐), 베트남 음식점 사장님 딸까지 해서 진정 여복을 타고난 사람인데, 완력이나 두뇌 회전, 생존 능력 같은 건 파이크에 현저히 못 미치지만 역시 변치 않는 의리와 균형 잡힌 윤리의식 등이, 이 장편 속에서 그를 파이크 못지 않게 신뢰의 무게중심에 배치하는 듯합니다.

범인은 글쎄 뜻밖의 사람이라 볼 수도 있고, 의외의 반칙성 출현으로 여길 수도 있는데 과연 동기가 충분히 설명되었는지는 좀 의문으로 남습니다. 매우 다양한 개성을 지닌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긴 하나 그리 경제적으로 배치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칼날 같은 구성의 묘미에 지적으로 압도되기보다는, 끈적하고 깊이 있는 인간 영혼, 정신에 대한 심도 있는 통찰, 혹은 비관과 희망이 교차하는 그윽하면서도 강렬한 문학적 풍미에 더 강점을 가진 장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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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데이터 경영 4.0 - 4차 산업혁명 시대, 데이터 경영 전쟁이 시작됐다
방병권 지음 / 라온북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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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의 본질이 무엇인지 말로만 무성할 뿐 아무도 분명한 아젠다나 실천적 과제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중소기업은 물론 대기업의 최고 경영자들도 일선에서 선명한 비전을 갖고 있지는 못한 듯합니다. 실정이 이런 판에 일반 시민이나 어린 학생들이 자신의 장래를 놓고, "4차 산업 혁명"을 키워드 삼아 어떤 건설적 투영을 해 내기란 거의 가망이 없다고나 해야겠죠. 그 실체가 파악되지 않은 채 말만 무성하니 사람들이 더 버거워하고 심지어 두려워하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보다는 훨씬 부담 없는 이슈이겠을 "빅데이터"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미 5, 6년 전부터 많은 전문가나 저술가들이 지적해 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건 이미 키워드가 대중화한지 한참 지난 이 문제를 놓고서도, 일선의 경영자들이 자신의 업무에 거의 활용할 줄을 모른다는 겁니다. 심지어 빅데이터의 개념부터가 안 잡힌 분들도 많습니다. 막연히 "통계를 잘 활용하라는 소리지"라든가(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빅데이터 어디 가서 얼마 주면 구할 수 있나?"라고 되묻는 분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의 사고 방식이란, 세상을 통째 바꿔 놓을 이 도도한 흐름에 대해 그저 "기존의 데이터가 덩치가 커진 것" 정도로밖에 인식 못 하는 데 머무는 거죠.

이 책에서 일단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고 들어가는 저자님의 진단, 시각이 있습니다. 작년 이맘때(하고도 한두 달 전입니다만)에 세계, 적어도 동아시아 3국을 충격 속에 몰아넣었던, 인공지능(소위)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국을 화제로 삼아, 대중들은 인간이 드디어 기계의 "지능"에 패배한 대사건이라며 입방아를 찧었죠. 헌데 저자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고 하시네요. "자동차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 그와 100m 달리기 경주를 벌여 진 인간을 보고 우리는 집단 패배감, 좌절감을 느껴야 하겠는가?" 오히려 또하나의 강력한 도구를 발견한 데서 무한한 희망과 가능성을 엿보았다고 평가해야 온당하다고 저자는 말씀합니다. 이 관점이 책 본문 전체를 관통하며, 또한 우리가 미래에 대한 구체적 비전을 갖추는 데 이 책이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잘 요약합니다.



저자는 책 전체를 통해, 인공지능이니 4차 산업 혁명이니 하는, 아직은 그 실체가 분명하다거나 논자에 따라 뜻이 구구하게 갈리는 용어, 화두를 자주 쓰지 않습니다. 책 제목을 봐도 알 수 있듯, (어쩌면 오래 전에 한물 간 듯 잘못된 느낌을 갖기도 하는) "빅데이터" 하나로 모든 설명을 시도하는 내용입니다. 인공지능을 운위하는 시대에 왜 옹색하게 빅데이터인가? 저자는 정반대로, 심지어 저 알파고- 이세돌 대국이 불러온 파장마저도 "종래의 방식에 대한 빅데이터 활용의 승리"라고까지 "치환"해서 설명합니다. 하긴 더 간명하고 상식에 부합하는 설명이 가능하다면, 구태여 번거로운 개념을 동원하거나 논증 과정이 불분명한 논의를 끌어올 필요가 없긴 합니다. "인공지능의 승리"라고 설령 인정해도, 그 실체와 핵심은 결국 "인간이 이용하지 못했던 방대한 데이터의 분석에 기인한 승리"라고 바꿔 말해도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직 "지능" 자체가 어떤 구조, 속성인지 모르는 형편에, 더 이해하기 쉽고 내용도 분명히 규명된 "빅데이터의 위력"으로 초점을 잡으면, 더 유익한 결과가 나올 것 같기도 합니다. 현장에서 적용해 보기도 더 쉽고 말입니다.

(물론 인공지능이 정말 성공, 실용 단계에 확실히 진입한다면 그건 빅데이터를 훨씬 뛰어넘는, 넥스트 레벨의 성취임에 틀림 없습니다. 자동차가 "엔진과 강철과 휘발유와 플라스틱과 쿠션의 합"이 아닌 거나 마찬가지로요. 하지만 그건 업계의 성취가 일정 수준을 확실히 넘어선 후에 의미 부여를 해도 충분합니다)



저자께서는, 여전히 빅데이터라고만 해도 뭔가 어렵게 다가올, 현장의 그저 평범한 사장님들을 위해, 자신이 직접 겪은(본인이 CEO이시기도 하니까요) 사례를 중심으로 무엇이 "빅데이터 경영"인지 재미있게 설명해 줍니다. 이 책은 이처럼 저자 스스로가 겪은 사례를 바탕으로, 실무에서 쉽게 실천해 볼 수 있는 지침이 많이 담겼다는 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예컨대 요즘 우리는 기업들이 "잉여 서비스"를 많이 줄여가고 있다는 점 실감하게 됩니다. 과거에 노트북 한 대를 사면 딸려오는 매뉴얼만 해도 웬만한 자계서 한 권 분량의 책이었습니다. 요즘은 가전제품을 사도 지류에 적힌 설명서를 구경하기 힘듭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서운하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허투루 새어나가는 무익한(?) 비용을 줄이자는 절박한 현실인식에의 발로이니, 우리도 다들 기업에 몸담은 입장에서 이해해 줄 여지는 있습니다.

저자는 잔반 줄이기로 비용 절감(나아가 환경 보호 기여ㅋ)에 성공한 직접 사례를 들어 주십니다. 회사 카페테리아 같은 데서 저렴하게 공급하는 식단에, 먹지 않고 버리는 반찬이 연간 수십 톤에 달한다면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그 역시 의미없는 원가(직원 복리 후생) 출혈입니다. 우선 먹고 버린 잔반통을 다 뒤져(여기서 웃음이 나기도 했고 과연 CEO  체면에 이렇게까지 해야하는지 회의도 느껴졌지만 - 물론 직접 하신 건 아니겠지만요 - 비용 절감과 경영 효율화는 이런 자질구레한 문제의 위급한 인식에서 비롯한다는 점은 확실히 배웠습니다) 어떤 반찬을 가장 많이 남기는지 조사했다고 합니다. 답은 부침개인데, 이 음식은 갓 요리하고 바로 배식해야 하는, 온도가 생명인 품목이죠. 그런데 싸늘히 식어 있으니 입맛이 당길 리가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현장(확장하면 결국 시장이 됩니다)의 진짜 니즈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게 경영 효율화, 나아가서는 혁신의 단초가 된다는 거죠.

거기에 그치면 작은, 소소한 개량에 불과합니다. 저자는 반찬의 다양한 품목을 코드화하여, 막연한 직관이나 불분명한 "문과 언어" 사용이 아닌, 잔반 줄이기 프로젝트에서 계량화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언어"로 이 문제를 접근했습니다. 순간 독자인 제 머리도 아찔해지던데 해당 대목 바로 그 다음에 숱한 애로사항이 진술되더군요. 전산시스템은 글자 하나만 틀려도 전혀 다른 품목으로 분류하니 이른바 정성적 분석이 원활히 안 이뤄지더라는 거죠(오죽하겠습니까. 상상만 해도 땀이 나네요). 저자는 이 귀찮은 단계에서 포기하지 말고, 아예 당신 주변의 모든 환경을 "데이터"로 다 바꿔 놓으라고 합니다. 왜 혁신기업의 CEO들이 "데이터는 미래의 석유"라고 했겠는지 그 의미를 새기면서 말입니다(사실 이 한 줄이 책 전체의 요약, 주제 대변이라고 새겨도 됩니다).



인간의 뇌는 사물과 환경을 실체, 혹은 아날로그 포맷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결국은 의식, 무의식상으로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모두 데이터로 변환한 후 일정 프레임에 끼워 넣고 정리할 뿐입니다. 여담입니다만 사실 여기서 인간 사이의 소통 부재, 오해, 갈등이 비롯하기도 하죠. 나는 나를 이러이러한 존재로 스스로 자리매김하는데 상대는 상대 나름대로 그의 시각에서 나를 판단(데이터화)하고, 객관적 실체(논란이 있겠습니다만)는 또 전혀 별개 지점에 있고... 여튼 문제를 선명히 인식하고 실천을 쉽게 이루려면, 아날로그적 감상이나 밑도끝도없는 이미지에 매달릴 게 아니라, 각종 장애와 이슈와 목표를 모조리 데이터로 바꾼 후 판단하고 고민하고 결정하라는 겁니다. 진짜 맞는 말씀이라고 생각되더군요.

재미있는 사례가 많이 소개되고, 또 여러 혁신가들의 명언이 곳곳에 소개되어 결론 정리에 유익했습니다. 시장 조사를 통한 체계적 예측 끝에, 독신자 가구가 증가하는 대세에 호응하고자 작은 벽걸이형 세탁기를 야심차게 출시한 회사가 있었습니다. 벽걸이까지는 모르겠는데 소형 세탁기라면 대략 십 년 전에 여러 작은 기업에서 생산, 판촉을 벌이기도 하더군요. 그런데 큰 실패로 끝나고 만 게, 1) 원룸 거주자나 소형 아파트 입주민 중엔 이미 빌트인 형태로 중형 세탁기를 제공받은 경우가 많으며, 2) 이런 사람들은 대개 빨래를 그때그때 하지 않고 일주일치를 몰아서 하는 습관이 있더라는 거죠. 이처럼 데이터의 해석은 그저 큰 줄기에만 주목하거나 현장의 구체적 상황을 무시하는 게 되어서는 안 됨을 저자는 지적합니다.

또하나 재미있는 게, 결국 빅데이터의 성공적 활용은 처음에 질문을 바르게 확정해야 가능하다는 겁니다. 세탁력이 우수한 세제를 출시하려던 회사는 데이터의 분석 후, 소비자들이 세탁 완료 후 빨래를 꺼내어 제일 먼저 하는 행동이 "냄새를 맡는 것"이란 점에 착안하여, 전략 자체를 수정했습니다. 성공의 관건은 "얼마나 깨끗하게 빨리느냐"가 아니라, "소비자들에게 얼마나 깨끗하게 빨렸다는 느낌을 확실히 주느냐"에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2차 대전 당시 미 공군에서는 출격하는 폭격기가 적의 대공포에 희생되는 경우를 줄이기 위해, 비행기 곳곳에 추가 장갑을 설치하려 했는데 자원이 무제한이면 문제가 없겠으나 한정된 자원, 물자를 놓고 어떻게 효율적으로 배분하느냐가 난점이었겠습니다. 귀환한 전투기를 보니 특정 부위에 집중적으로 탄환을 맞은 흔적이 있어, 전문가들은 여기에만 장갑을 입히면 되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최고 책임자는 정반대로, 그곳만 빼고 다른 데다 장갑을 장착하라고 했다는군요. 그 이유란,

"그나마 이곳을 맞은 폭격기는 타격이 크지 않아 귀환할 수 있어서 우리가 지금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허나, 다른 곳을 맞은 폭격기는 적진에서 다 격추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아예 확인도 못 하는 것이다."

같은 데이터를 놓고도 통찰력 있는 리더는 이처럼 정확하고 본질을 해결하는 해법을 내어 놓습니다. 미래가 어떤 모습으로 펼쳐지든, 인간의 창의와 상상력은 결코 기계의 효율에 압사하지 않고, 오히려 주인으로서 그 위에 군림하며 더 많은 효용과 복리를 창출합니다. 그 기반은 현재도 무한히, 한계비용 0에 가깝게 생산되는 데이터, 빅 데이터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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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보기가 역겹다 - 그러기에 아직 늦지 않았어, 마야 로드 에세이
마야 (Maya) 지음 / 뮤토뮤지크 / 2015년 3월
평점 :
품절


책에 담은 인물만큼이나 책이 예쁜, 뭐 그런 책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가수 마야 씨는 지금부터 13년 전 새로 취임한 어느 대통령이 첫번째 맞이한 광복절 기념식에서 초청가수로 나와 열창하여 더 많은 국민들에게 알려졌을 것 같습니다. 사실 그녀는 그 몇 년 전부터 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진달래꽃"이라든가, "쿨하게" 같은 드라마 주제곡이 인기를 끌어 유명해졌고, 대학 축제 등 라이브 무대에 오르면서 젊은 층으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이미 얻어낸 가수였습니다. 이런 그녀가 정부 공식 행사에까지 초청된 이유는, 그녀의 고향이 아마도 당시 대통령의 근거지에 멀지 않았던 점도 있었겠지만, 마치 예전 1960년대 미국의 조언 바예즈처럼 빼어난 가창력을 자랑하는 그녀의 스타일 속에 모종의 "저항 정신"이 밴 것을 이심전심으로 알아본 이유도 없지 않았으리라 짐작합니다.

이후에도 마야 씨는 SBS 일요일 아침 프로그램인 <도전 1000곡> 같은 데 단골로 출연해서, 연령대를 가리지 않고 인지도가 높습니다. 지금도 저희 어머니마저 마야 하면 누군지 바로 알아보실 정도입니다(그녀가 출연한 방송회분은 재방송도 자주 되더군요 신기하게). 이후 그녀는 방송 출연은 뜸했지만 이런저런 행사에서 자주 라이브 연주를 가졌고, 그녀의 진가는 현장에서 그 생동감 넘치는 무대매너라든가 숨도 안 차하며 미친 고음을 정확하게 뿜어내는 경이로운 솜씨를 체험, 목격해야 제대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런 분이 외모까지 빼어나니 참으로 세상은 불공평하다고밖에 못하겠네요.

여튼 그녀는 최근에 음반도 뜸하게 내고 무대에도 자주 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녀의 팬은 물론 일반 대중도, 그렇게 아까운 재능과 여건을 지닌 분이 지금 뭐하는지 궁금해할 정도죠. 못내 아쉬웠던 분은 이제 이 책으로 그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책의 제목 "나보기가 역겹다", 그 부제 "그러기에 아직 늦지 않았어"는 모두 그녀의 발표곡 가사 일부를 따온 것입니다(전자의 경우 소월 시의 한 구절이기도 하죠). 저는 제목의 문구가, 단호하게 "종결 어미 -다"를 취한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왠지 지나가듯 명곡의 한 소절을 인용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쿨하게 툭 내던지듯 "정말 내가 봐도 역겹구나" 같은 방황과 자기 회의, 총체적 회고를 표현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역겨워" 혹은 "역겨워서" 등으로 말꼬리를 흐렸다면 모르겠는데, "-다"는 우리말에서 (누구의 입에서 나왔건, 맥락이 무엇이건) 단호한 언술일 뿐이며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물며 발화자가 마야 씨라면요.

책을 받아든 팬들은 일단 그녀의 "책"이기에 안 펼쳐들 수 없겠지만, 페이지를 넘기기 전 뭔가 걱정부터 됩니다.

"이렇게 예쁜 얼굴이 대체 어디가 역겹다는 건가요? 아무리 자신의 얼굴에 대고 하는 말이지만요."

심미적 평가가 문제가 아니라, 그녀가 뭔가 중대한 정신적 고비를 맞이한 건 아닌지, 그래서 앞으로 그녀를 무대에서 못 볼 수도 있다는 폭탄 선언이나 담긴 건 아닌지, 예쁘고 반가운 책을 받아들고서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과연 책을 열어 넘겨 봐야할지.

책은 물 반 고기 반이라고 할까. 마야의 담담한 자기 표백이 반, 그녀가 직접 찍은 사진이 반. 여튼 편집도 곰살맞게 일일이 자신이 정규 앨범 꾸미듯 손수 했을 것 같은 정성어린 외관입니다. 텍스트 부분만 보면 큰 줄기는 여행기입니다. 여행을 하며 자신이 만난 풍광과 사람들과 자신을 사진에 담았고, 여행이 으레 그렇듯 참다운 자신과 다시 만나며,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어언 마흔이시라는군요. 누가 믿겠습니까)을 담담히 들려 주는 내용입니다.

들려 주시는 사연은 물론 곧이곧대로 다 받아들일 건 아니고, 산문시의 주인공이 모호한 구름 속에 화자로서 반은 환상, 반은 현실에 몸 담근 채 한 올 한 올 풀어내는 심상과 대화하라는 것이겠습니다만, 어떤 건 "이분이 실제로 이런 생을 사셨던 건가" 싶어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일단 그녀는 예상과 달리(?) 지방 출신이었고, 타고난 가인으로 예술가로 혜성처럼 데뷔한 게 아니라 연습생 시절을 오래 거쳤다고 하는군요. 훈련을 거쳐 데뷔한 분들도 물론 실력이 빼어나지만, 마야만이 보여 줄 수 있는 놀라운 생동감과 카리스마를 보면, "배우지 않고 타고난 대로 그냥 통하는 사람"이 뭔지 바로 깨달음이 올 정도죠. 그런 줄 알았던 그녀가 그런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니, 다른 사람들은 그럼 어떻게 데뷔가 가능했다는 건지 아찔해지기만 합니다.

당연하다고 믿었던 바를 냉혹한 진실은 인생에서 무참히 배반하기도 합니다. 안정되고 튼튼한 줄 알았던 길은 어느 순간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함정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에서 어느 순간 기로에 섭니다. 자신의 지난 생, 화려함과 불안과 실망과 환희가 교차하는(이런 분은 그저 꽃길만 걸어왔을 것 같은데) 그 모든 모멘텀을 여행과 함께 회고하는 마야 "작가"는, 남들 눈에 더 띄고 덜 띄고의 차이만 있을 뿐 유한한 생을 사는 모든 영혼이 통과하는 희로애락의 지점 그 행로는 거의 같음을 우리 독자들에게 깨우칩니다.

그녀를 무대에서 더 자주 만났으면 좋겠지만, 이제 그녀는 이런 예쁜 책을 내는 작가라든가, 공연 기획자 같은 올라운드 크리에이터로 변신, 제2의 인생을 꾸려 나갈 생각 같습니다. 우리는 보다 성숙한 그녀가 더 다양한 컨텐츠로 우리와 소통해 준다기에 서운해할 이유가 없겠고요. 다시 이 책의 부제를 보죠.

그러기에, 아직 늦지 않았어.

"그러기에"의 내용은 사람마다 살아온 과정이 다 다르겠죠. 하지만 열정과 사랑을 잃지 않은 우리 모두에게, "아직 늦지 않았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해당되는 격려이자 치유입니다. 작가, 크리에이터로 우리의 인생을 영원히 곁에서 응원해 주겠다는 "저자 김영숙씨"의, 다소 개구쟁이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도사님 같은 모습을 보며, 우리 독자들도 작은 힘이나마 보태어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 싶습니다.

"그럼요, 늦긴요. 아직 시작도 안 했는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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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투스는 베레니스를 사랑하지 않았다
나탈리 아줄레 지음, 백선희 옮김 / 무소의뿔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고전에 대한 오마주랄까 현대판 재해석이 요즘 자주 나와서, 현대에는 이미 문학이 죽었거나 예전의 황금기보다 훨씬 못하다며 실망하는 분들의 눈을 크게 띄우는 실정입니다. 예전 학교 다닐 때 "라신, 몰리에르, 코르네유"라고 하면 17세기 프랑스 고전주의 사조를 이끈 3대가로 배우곤 했었죠("~곤 했었죠"라고 하면 프랑스어에서 반과거 시제입니다ㅎ). 마치 그보다 수천년 전 그리스에서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3대가가 있었듯이 말입니다.

비극과 희극이라는 전문(?) 분야의 차이가 있을망정 어쩌면 프랑스의 저 문호들도 시대와 공간을 건너뛰어 아득한 선배들에 대한 경의와 헌정의 마음가짐으로 그들의 재능을 더욱 갈고닦았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 책 저자인 나탈리 아줄레도 앞으로 그만큼 대성하실 작가가 될 지도 모르고요. 참고로 제가 몇 달 전에 읽은 <뫼르소, 살인 사건>의 저자 카멜 다우드도 북아프리카 출신으로서 알베르 카뮈의 대작에 대한 멋진 화답작을 발표해서 유명해졌는데, 이분 역시 (프랑스령 바르바리아 출신은 아니지만) 이집트 태생으로 프랑스어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탐구심으로 작가가 되었다는 점에서 닮아 있습니다.

티투스는 다른 누가 아닌, 우리가 고대사에서 예루살렘을 파괴한 로마 황제로 알고 있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군사 원정을 떠나기 오래 전, 아직 비교적 평온한 위성 국가로 남아 있던 유대 지방의 왕녀 베레니케(베레니스)를 사랑해서 한때 결혼을 시도했었음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다만 백성들의 반대가 심하여 결국 혼인을 단념했는데, 이걸 두고 이 책에서는 "그의 합법적인 아내이자 자식들의 어머니인 로마를 떠나지 않기 위해..."라고 표현합니다. "나를 다시 받아 주오." 로마가 여기서 여성으로 의인화된 건 유럽 문학의 오랜 전통 그 일환이죠.

이런 근사한 표현들은 장 라신의 원전 <베레니스>에도 나옵니다. 라신은 셰익스피어보다 조금 후대에 활동했는데, 아무래도 당시 유럽을 휩쓸던 "고대의 재조명" 트렌드에 합류하여 이처럼 소재를 로마 시대에서 취했으나,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보다 장중하고 인간 보편 정신의 탐구, 회복을 지향했다면 라신의 그것은 이처럼 섬세하고 달달한 사랑, 감정에의 천착이 지배적이라 하겠습니다. 이 책에도 "이폴리트를 사랑한 페드라" 이야기가 잠시 언급되는데 역시 그의 희곡 <페드라>를 염두에 두었겠죠.

이 작품의 곳곳을 관통하는 심상은 "불"입니다. 코르넬리우스 얀센(신학자이며, 이후 프랑스 낭만주의 장편 소설에 배경으로 곧잘 나오는 "장세니스트(얀센주의자)"의 시조격입니다). 이 사람의 공모자(협력자, 동반자가 맞겠지만)인 생시랑의 말이 인용되는데, "...아담은... 다이아몬드였으나... 원죄 이후에는 석탄이 되고 말았다...."에서 금강석의 탄소분자 배열 구조를 바꾼 건 세월과 압력 외에도 "불"이 개재하는 게 자연의 이치이겠지요. 얀센주의자 중 한 명으로 알려진 파스칼도 이 소설 중 잠시 인용되는데, 장이 학교에서 "후작"과 즐거운 유희 끝에 그 흥분감으로 밤에 잠을 못 이루는(이상하게도 그 나이 때에는 다 이렇지요. 저도 이 대목을 읽으면서 그 비슷한 기억이 새로워졌습니다) 대목에서 "... 파스칼 역시 갈랑트리에 빠졌다..."고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밤에 잠을 못 이루는 건, 낮에 피운 불잉걸이 마음 속에서 채 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이 들어서 그런 체험이 뜸해지고 무덤덤해진다면 그게 바로 늙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지금 책 속에서 우리는 한창 팔팔한 나이때의 장과 만나고 있습니다.

이국의 영웅, 군주와 비련의 사랑에 빠지다 버림 받는 아득한 원형은 또 저 북아프리카의 여왕 디도(영어로는 "다이도"라 읽고, 1990년대 후반에 이 이름을 한 미국 가수가 낸 히트곡이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었죠)가 있습니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드>를 인용하며(당연히 원문은 라틴어) 장은 그 정확한 번역, 이해에 골몰합니다.

Caeco carpitur igni

문장은 짧아도 이게 엄청 어렵습니다. 우선 책 중에서 장은 형용사 caeco를, "숨겨진"으로 번역할 것인가, 아니면 "눈먼"으로 옮길 것인가를 놓고 고민합니다. 한 단어에 어떻게 이런 이질적인 뜻이 함께 들어있나 의아할 수 있는데, 만약 "주체"가 눈이 멀었으면 그건 "객체" 입장에서는 "숨겨진" 것입니다. 반대로, "객체" 역시 무정물이라면, 생각과 감정이 없으므로 (인간이 그걸 보기로는) 역시 눈이 먼 것이죠. 장은 지금 그녀(디도 여왕)가 눈이 멀었는지, 아니면 그녀를 집어삼킬 불이 눈먼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는 겁니다. 저 라틴어 문장은 주어가 생략되어 있는데, caeco igni가 (영어로 치면) by the blind fire입니다. carpitur는 한 단어여도 수동태꼴 동사인데, 영어로 옮기면 is seized입니다. carpi- 어근은 "오늘 하루를 놓치지 말라"는 경구 "카르페 디엠"이라고 할 때 그 "카르페"와 완전히 같은 겁니다.

장은 셰익스피어처럼 언어의 조율에 민감하고 까다롭습니다. 잠시 아르튀르 랭보도 언급이 되지만, 여기서 캐릭터 장은 실존하거나 픽션 속에서 등장한 모든 천재들의 개성을 다 조금씩 합친 듯합니다. 혹은 나이가 어려서인지 아직 서투른 모습도 보이는데, 아몽과의 관계에선 "데미안을 대하는 싱클레어"가 생각나기도 하고 말이죠.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모든 명사에 관사를 붙여야 해." 마치 우리가 영어 시간에 "apple이란 없다. the apple이나 an apple이 있을뿐"이라고 배운 것과 같습니다. 이런 당연한 소리를 왜 하느냐면, 라틴어는 개체(특정/불특정)를 가리키건 보편을 지시하건 관사 일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더 오랜 고전어인 헬라어도 까다롭게 변화하는 관사류를 달고 있는 언어인데도 말이죠.

당신의 <베레니스>에 나오는 인물들이, 내 눈에는 한낱 잿더미로 보였어요.

생생한 감각에 대고 칼을 가는 장에게 어느 여성이 다가와 하는 말입니다(p199), 이런 말에 장은 무덤덤하니 동의합니다. 여성의 진의가 무엇이었건 어떤 의미에서는 타당하기 때문입니다. 아담 역시 하와에게 그 나름 신의의 표시로 금기에의 도전에 동참했다 그꼴이 되었고, 아이네이아스를 떠나보내는 디도 여왕은 자신을 장작더미 위에 올려 태우고는 순정을 증명합니다. 모든 사랑은 불장난이며, 사랑이 징벌처럼 휩쓸고 간 마음에는 새하얀 재만 남습니다. 과연 티투스가 베레니케 왕녀에 대한 사랑이 식어서 그녀를 버린 건지, 아니면 그 유명한 시쳇말대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 건지"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죠. 다만 베레니케(베레니스)는 미련 없이 쿨하게 티투스를 떠남으로 해서, 사랑하는 티투스의 자존과 위신을 완전하게 지켜 주었습니다. 속으로만 삭이고 상대의 발이 내 위를 사뿐히 즈려밟게 가도록 전송하는 사랑이란 역시 아무에게서나 빚어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들불이 어디로 번질지 알 수 없듯, 사랑의 갈 길도 이처럼이나 종잡을 수 없으면서 동시에 다양한 방식으로 아름답고 숭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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