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레퀴엠 버티고 시리즈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윤철희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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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자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만큼, 생전 자기 직분에 성실했던 이의 장례식. 애도하는 조문객이 많으면 많을수록 동료들의 죄책감은 한결 덜어집니다. 운집하여 고인의 넋을 기리는 이들이 도열한 모습을 두고 어떤 이는 "보기 좋았다"고까지 말하네요. 물론 그 짧은 코멘트 속엔 무수히 많은 감회와 상념과 결의가 교차할 것입니다.

이 소설 속엔 장례식 장면이 두어 번 나옵니다. 하나는 연쇄 살인범의 소행인지, 아니면 암살자의 짓인지 모를, 여튼 무고한 희생자임에는 틀림없는 어느 이혼녀의 죽음 때문이었습니다. 죽은 여성은 이 소설의 두 주인공 중 하나인 조 파이크의 전 여자친구이자, LA 시정 전체를 좌우하는 거물 사업가(틴에이저 시절 갱단 멤버였다가 또띠야 체인점으로 떼돈을 벌고 시의원 몇을 수중에 넣어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어린 시절 같은 갱단 소속이었던 민완 변호사를 친구로 둔, 라틴 아메리카 혈통의 미국 시민권자) 프랭크 가르시아의 딸이기도 합니다. 다른 하나는 매우 유능하고 정의감 넘치는 어떤 수사관의 죽음 때문이었는데 위 첫 문단의 서술은 사실 그녀의 안타까운 최후에 더 초점을 둔 것이었습니다.

소설은 안타까운 죽음 여럿, 수수께끼에 싸인 죽음 몇, 그리고 최후의 결전에서 죽을 줄 알았던 어떤 이의 기사회생(이분은 꼬마 시절부터 해서 진짜 죽을 고비를 여러 번도 맞이하더군요), 개인적 증오와 복수심에 눈이 멀어 어처구니없는 짓을 벌인 자의 죽을 뻔한 소동 등 "죽음" 근방에서 맴도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인간쓰레기이건 정신이상자건 거짓말쟁이이건 관심 중독자건 모두에게는 그 나름의 레퀴엠이 필요할 것입니다. 로렌스 블록의 장편 <800만 가지 죽는 법>이 대서양에 면한 뉴욕을 배경으로 삼은, 스릴러의 외관을 쓴 대서사시였다면 이 작품은 그 정반대방향 태평양에 면한 (제목 그대로) LA를 무대로 한 살육과 증오와 설육과 사랑을 테마로 삼은 폭풍 같은 에픽입니다.

이 소설은 기묘한 방향으로 엇나간 몇 편의 사랑을 숨겨 놓듯 깔아 놓은 작가의 선택 때문에 읽고 난 감상이 더 아련해지는 듯합니다. 우선 피도 눈물도 없는 목석 같은 사내이며, 언제 어디서 연쇄살인마로 돌변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조 파이크는, 이런 사람이 과연 어느 여성에게 연정을 품을 수 있을지(혹은, 어떤 여자가 저런 사내를 사랑할 수 있을지) 누가 봐도 고개가 갸웃해질 겁니다. 그런데 심성이 진국이고 약자를 돌볼 줄 알며 제 신상에 위해가 갈망정 인간된 도의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 "진짜 남자"는, 정말 괜찮은 여성들이 먼저 알아보나 봅니다. 그 증거로 카렌 가르시아 같은, 진짜 심성도 외모도 멋진 여성이 그를 선택했습니다. 최악의 환경에서 성장했을망정 자신의 인격을 보석 같이 가꿀 줄 안 파이크 역시, 카렌 같은 멋진 여성에게 마음을 안 줄 리 없고 세상사 쓴맛 단맛 다 본 대 사업가 프랭크 역시 "이 친구 괜찮네" 하며 자기 딸을 주려 합니다. 딸과 잘 안 된 후에도 조 파이크를 곁에 두며 "친구"로 연을 이어가려는 게 조금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진짜 안타까운 건, 조와 카렌 두 사람이 서로 순도 높은 사랑을 하며, 조의 선배인 (역시 조처럼 정의감에 불타고 진실된 성격이지만 안타깝게도 비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워즈니악 역시 그 부인 폴렛과 금슬이 좋지만, 못된 운명의 장난은 조와 폴렛 두 사람을 서로 엮어 버립니다. 어쩌겠습니까. 조는 폴렛을 보는 순간 (그 차디찬 강철 같은 심성의 사내가) 태어난 이래 처음 겪는 감정의 격동을 체험했고, 폴렛 역시 주변의 지구가 정지하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소설 후반부에 다 드러나지만, "플라토닉 러브"란 이들의 관계를 두고 이르는 말이라 할 만큼, 조 파이크는 "모텔에서의 그 사고" 이후 철저한 거리를 폴렛으로부터 유지해 왔습니다. "십 년도 지났는데, 그새 더 아름다워지신 것 같아요." 이 한 마디 속에 천 가닥의 사연과 번뇌와 위대한 절제가 들어 있습니다. 조 파이크란 인간 병기의 개성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절제"입니다. 마지막의 "그놈"도 그의 절제를 깨뜨리려 이 모든 추악한 살인극을 벌였고, "그놈"보다 더 추하고 한심한, 비열한 낙오자 역시 그의 평정심을 깨뜨리기 위해 자해에 가까운 미친 소동을 벌입니다.

소설은 물론, 거의 십 년 넘게 이어진 수수께끼의 연쇄 살인극이 과연 누구의 손에 의해 저질러졌는지, 범인이 "암살자"인지 "연쇄살인마"인지 가려내는 본격 미스테리 장르물입니다(작중 화자의 분류에 따르면 "암살자"는 일관된 계획과 특정인에 대한 구체적 살의를 갖고 사람들을 죽여나가는 자이며, "연쇄살인마"는 무작위로 희생자를 고르는 유형이라고 하네요). 일단 독자는 범인이 "누구"인지보다, 무슨 동기로 이런 짓을 저지르는지 범인의 유형(위 분류에 따른)을 주인공들과 함께 알아내는 재미에 집중해야 하겠습니다.

...만, 앞서 적은 대로, 이 소설은 (외견상 전혀 안 그럴 것 같은) 등장인물들 사이의 끈끈한 우정, 위대한 사랑, 극악무도한 적의와 복수심 등이 놀랍도록 생기 넘치게, 때로는 오싹하면서도 감동적이기까지 한 필치에 실려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게 놀랍습니다. 처음에는 엄청 하드보일드 풍으로 달리지 않을까 짐작했는데, 예상 외로 감정선을 묵직히, 섬세히 건드리는 진행이더군요.

조 파이크, 악마 같은 냉혹함과 (그와 도저히 양립할 수 없을 듯한) 거의 신적인 정의감의 소유자인 그를 주인공으로 봐야겠지만, 그와 동업 관계(개인 탐정업)인 엘비스 콜 역시 이야기를 떠받드는 양축의 하나인 매혹적인 남성입니다. 성장 배경은 잘 알 수 없지만, 이름값 하느라고 여자들이 엄청 따르나 봅니다. 결국 준 주인공 레벨로 올라서던 변호사 겸 방송인인 루시, LAPD의 여걸 돌런, 어느 사장님 여비서였던 홀리("저기, 여친 업그레이드할 생각 있으면 꼭 연락해요!"라던 멘트가 안 잊혀질 듯합니다. 다만 이걸 실제 써먹기란 뭐), 베트남 음식점 사장님 딸까지 해서 진정 여복을 타고난 사람인데, 완력이나 두뇌 회전, 생존 능력 같은 건 파이크에 현저히 못 미치지만 역시 변치 않는 의리와 균형 잡힌 윤리의식 등이, 이 장편 속에서 그를 파이크 못지 않게 신뢰의 무게중심에 배치하는 듯합니다.

범인은 글쎄 뜻밖의 사람이라 볼 수도 있고, 의외의 반칙성 출현으로 여길 수도 있는데 과연 동기가 충분히 설명되었는지는 좀 의문으로 남습니다. 매우 다양한 개성을 지닌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긴 하나 그리 경제적으로 배치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칼날 같은 구성의 묘미에 지적으로 압도되기보다는, 끈적하고 깊이 있는 인간 영혼, 정신에 대한 심도 있는 통찰, 혹은 비관과 희망이 교차하는 그윽하면서도 강렬한 문학적 풍미에 더 강점을 가진 장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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