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강
핑루 지음, 허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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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소설의 작가 핑루는 여성 문인입니다. 이미 쑹메이링이라든가 등려군 같은, 남들보다 몇 배는 고뇌와 영광과 시련 등의 요소로 가득한 삶을 산 여성들에 대한 책들을 낸 적 있고, 문학적 성취 면에서도 뚜렷한 업적을 이룬 분이죠. 재미있게도 본명은 성과 이름이 거꾸로 된, "루핑(路平)"이었다고 하는군요.

이 소설은 얼핏 보아 미스터리 스릴러(도서식) 같기도 합니다만, 주제와 내용은 전혀 그런 쪽이 아닙니다. 또 이 작품은 대만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실화(범죄 사건)에 바탕을 두었습니다만, 실제 전개는 주인공인 자전(佳珍)이란 여성이 탐욕스러운 노인의 음모에 억울하게 희생된 게 그 진상이라는 식으로, 동시대 대중이 받아들인 진실(과연 무엇이 팩트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처럼 호소력 짙은 소설까지 창작된 이후라면 더욱요)을 철저히 전복한 줄거리를 따릅니다.

문단이 아닌 현지(대만)의 일반 대중이라면 이 소설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이미 "사갈녀(뱀과 전갈이라는 뜻인데 한국어 사전에는 이 단어가 등재되었습니다만 실제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 말이죠)"로 낙인이 찍힌 피고인(이제는 유죄 판결, 무기형 선고를 받은 죄수입니다만)에 대해 터무니없이 비호한다거나, 악성 페미니즘에서 연원한 피해의식의 남발이라며 비난하는 층도 얼마든지 있었겠습니다. 파장이 그만큼 컸던 사건이며, 마치 수십 년 전 한국에서 벌어졌던, 유행가 <동숙의 노래>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 그 실화를 연상케 하는 면도 있습니다(그 사건보다 지금 이 실화가 훨씬 추합니다만). 우리 한국의 독자들은 보다 냉철하게, 그리고 가려진 이면의 사정에 대해서도, 작가 핑루 님의 해석, 상상을 따라서 얼마든지 "피고인 자전"에 대해 동정할 수 있는 다른 시나리오(예컨대 이 소설)에 따라 넉넉한 마음도 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후 내용 누설이 있으므로 주의해서 읽으십시오. 단 이 소설이 추리물이 아니므로 소설의 재미에 결정적 영향을 끼칠 만한 서술은 아니나, 여튼 책 후반부에 가서 받을 충격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소설은 두 사람의 피해자(피살된 노부부), 그리고 한 사람의 가해자(결혼을 앞둔 젊은 여성. 종업원에서 갓 지점 책임자 자리에 오른 인물)를 다루는데, 이는 이 소설이 바탕을 둔 실화의 구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소설은 "상상과 해석"을 시도하는데, 살해당한 부인과 살해를 한 젊은 여성이 사실은 피해자이며, 여인에게 살해당한 늙은 남성이야말로 모든 범죄를 계획했다가 자신이 도리어 목숨을 잃은, 어리석으면서도 사악한 꾀를 부린, 가장 가증스럽고 썩은 영혼을 지닌 캐릭터로 규정됩니다. 역자께서는 후기에서 "인간의 선과 악은, 우리들이 흔히 편할 대로 규정하는 습관과 달리 선을 긋기 매우 어렵다"고 하시는데, 이는 이미 법정에서 단죄를 받은 피고인 자전을 두고는 타당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늙은 영감 훙보(洪伯이라고 성씨만 나올 뿐 정확한 이름은 안 밝혀집니다)에 대해서는, 이 픽션 속의 진실대로라면 뼈속까지 썩은 악당이라는 데에 아무 이의가 없을 듯합니다.

우리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인물이라면 여주인공 자전입니다. 우리식대로 읽으면 "가진"인데, "아름다운 옥"이란 뜻이 됩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그녀는 매우 냉혹하고 무심한 생모에게 길러졌는데, 아마도 다정다감했고 잘생긴 용모를 한 남편을 생전에 무척 사랑한 듯한 그녀는, 이상하게도 남편을 잃은 슬픔과 한을 어린 딸에게 모조리 쏟아 붓듯 거친 양육을 했나 봅니다. 뭐 본심은 그게 아니고, 아비 없이 자란  애란 흉을 어디서 듣지나 않게 엄격한 지도를 한다는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린 자전은 그걸 다 애정결핍, 상처로만 받아들였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아픔을 가뜩이나 잘 다스릴 수 없던 그녀는, 이런 생모의 무정한 대우 때문에 더욱 큰 상처로 덧나게 했는데요. 초등학교 2학년 때에 그 또래가 결코 체험할 수 없을 끔찍한 일을 겪기도 했음이 나중에 드러납니다. 이런 그녀이므로 남들에 비해 비밀이 많고, 그 비말을 "신성시"하게까지 되고, 남들보다 말수가 현저히 줄어들 수밖에 없었겠습니다.

챕터와 챕터 사이에는 "제3자"들의 한마디 논평이 여럿 인용됩니다. 사건을 듣고 격분한 네티즌들의 덧글도 있고, 피고인에게 조금의 동정심도 품지 않은 자칭 전문가들의 비인도적 "분석(상당수는 근거 없는 인상 비평이나, 대중의 격앙된 정서에 편승하려는 무책임한 발언처럼 보입니다)"도 있습니다. 이 중 흥미로운 것은, 피해자 중 한 명인 훙타이(洪太. 역시 이름이 구체적으로 안 나옵니다)에 대해 어느 여대생(정확히는, 딱히 홍타이를 염두에 둔 발언도 아닐 수 있습니다. 눈치로 봐선 그녀에게 수업을 듣던 학생인 것 같지만)이 한 말입니다.

"우리 윗세대 여성 엘리트들은 아예 결혼을 포기하거나, 결혼이라는 늪에 빠져 인생을 완전히 망칠 수밖에 없었다."

이 의미심장한 말이 막간에 무심하게 실려, 자칫하면 독자의 시선을 못 받고 지나칠 뻔한 것도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었을지 궁금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이 "예언, 진단, 탄식"은 이후 홍타이의 관점에서 술회되는 대목에서 상세히 그 타당성이 입증됩니다. 그녀는 현업에서 충분히 능력을 발휘하고, 그 대가로 넉넉한 수입도 올리며 은행 잔고도 남이 부러워할 만큼 가진 엘리트(골드미스)였지만, 성취하는 여성, 능동적인 부인상에 대해 전혀 이해가 없는, 비뚤어진 성품의 남편 때문에 그 운명이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는 식입니다.

어찌보면 자전은 일방적인 피해자가 아니고, 누구의 평가대로 정의관념이나 선과 악에 대한 의식이 아주 불충분하게 형성된 인격일 수도 있습니다. 초2때의 그 사건도 그렇고, 훙보에 대해 아빠 같은 느낌을 가졌고 기대했다는 말도 사후 합리화일 뿐, 실제로는 노골적인 원조 교제 의도였을 수도 있다고 보입니다. 자전이 결코 용서 받지 못할 부분은, 자신에게 언제나 잘 대해준 팡거(方哥)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던 시도입니다. 이런 행태를 보고서도 과연 그녀의 동기나 배경 사정에 대해 동정할 수 있을까요?

소설 속에서 가장 딱한 건, 뛰어난 능력과 건전한 철학을 가졌으면서도 못된 늙은이한테 잘못 걸려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 훙타이입니다. 그녀야말로 일방적인 피해자인데, 다만 그녀 역시 상황을 정공법으로 해결하려 찾아온 XX에게 모욕적으로 마구 대했다는 과오가 있긴 합니다(죽을 만큼 큰 죄는 아니었습니다만). 안타까운 건, XX의 진심이 뭔지,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그 희대의 악당에게 제대로 복수할 수 있었는지 훤히 (그 영리한 두뇌로) 알았으면서도, 분풀이나 감정 해소에만 몰두해서 대세를 그르치고 화를 불렀다는 점입니다. 소설은 이에 대해서도 "회광반조" 상태였던 그녀가 뉘우친다는 쪽으로 묘사하며, 그런 실수 역시 사회의 모순된 구조가 암암리에 여성에게 세뇌, 침투시킨 해악의 작용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해석은 독자들이 각자 알아서 할 일입니다.

허유영 번역가님의 문장은 언제나 자연스럽고 유려합니다. 운김(명사), 실그러뜨리다, 해뜩(부사) 같은 능숙한 어휘 구사 덕분에, 이 소설이 처음부터 한국어 창작이 아니었는지 잠시 오해도 하게 될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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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이야기 1 - 민주주의가 태동하는 순간의 산고 그리스인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이경덕 옮김 / 살림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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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년이 넘는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300"이란 숫자에 "테르모필레(필라이) 전투"라는 역사적 사건의 상징이 고스란히 담긴 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두고, 저자 시오노 여사는 새삼 책 중에서 감탄하고 있습니다. 사실 놀라운 건 그것뿐이 아니라, "민주주의, 자유, 독립심, 개인주의" 같은 가치들 그 원형이, 역시 그만큼이나 오래 전에 지중해 일대의 문명권 일부에서 형성되었고, 전제주의나 독재 따위의 안티테제로 이만큼이나 오래 버텨 오다 마침내 현대 국제 정치 체제의 기본 합의로까지 자리매김하게 된 그 내력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입니다(최근 일부 전체주의적 정치 단위들에 의해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요). 어쩌면 저자가 한 세대 전의 히트작 <로마인...>, 이탈리아 중근세사 시리즈에 이어 다시 "그리스인 이야기"라는 새로운 과제에 도전하게 된 것도, 그런 보편적 이념과 가치의 근원에 대한 끝없는 애모, 호기심, 경탄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스 역사는 부분적으로 우리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꽤 친숙하지만, 로마사처럼 체계를 잡고 요약해 보라면 훨씬 까다롭고 난삽합니다. 탁월한 이야기꾼인 시오노 여사에게도 아마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전부터 방대한 사료 섭렵, 혹은 현지 답사 등을 통해 작가로서 자신만의 확고한 시야와 중심틀을 갖고 역사를 이야기하고 싶어했던 저자는,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 전작들에 비해 별반 완성도가 떨어지지 않는, 역시 흥미롭고 개성 강한 이야기를 (그간 오래 기다려 왔을) 독자들 앞에 드디어 풀어내고 있습니다.

시오노 여사를 비롯, 우리 동아시아인들은 아마도 농경 중심 가부장 문화에서, 한번 설정된 공동체의 지향을 위해 가장 높은 강도로 개인의 주장을 억누르고 살아야 했을 문화권의 성원들일 겁니다. 반면 독재나 전횡을 거부하고, 형이상학적 사유이든 성 생활의 취향이든 경제 활동의 영위 양상이든 철저히 각성된 개인주의와 자유를 추구한 가장 아득한 원형은 바로 고대 그리스인들의 문명이었을 겁니다. "어째서 동과 서는 이만큼이나 서로 다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 동아시아인들이 가장 먼저 파고들었어야 할 과제는 바로 고대 그리스인들이 누구였는가에 대한 천착이었을 텝니다. 현대를 사는, 적당히 속물적이면서도 적절히 우리만의 해석과 감성을 대상에 부여(왜곡에 이르지 않는 범위 안에서)하고 싶어하는 평균적인 우리들의 수요를 가장 잘 간파하고 공감하며 대변하는 작가인 그녀가, 이 시리즈를 위해 정말 많이 연구하고 고민한 흔적이 역력히 배어나는 책이었습니다.

책은 일단 고졸기(古拙期. archaic period)와 고전기로 그리스인들의 고대를 나누며, 다만 고졸기에 대해서는 과감한 생략으로 건너뜁니다. 어차피 고대사나 고고학 전문가가 아닌 저자의 한계도 있겠으며, 웬만한 학식과 경력을 갖고서도 해당 시기에 대한 시원시원한 서술을 문외한인 대중에게 풀어 주기란 너무도 어려운 과제입니다(사료 부족. 유적 미비 등의 이유로). 책은 그리스 문명의 고전 개화기에서 시작점을 잡는데, 우리가 익히 봐 왔던 여사 특유의 스타일로, 박력 있고 활기차며(호불호가 갈려 왔지만 누구도 이런 개성적인 힘찬 행보의 매력은 부인 못 하죠) 고유의 관점, 평가(혹은 "감정")를 사항, 대목마다 선명히 불어넣거나 새겨 가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만약 고졸기를 (무리해서라도) 커버하는 시작, 구성, 계획이었다면, 아무리 노련한 저자였어도 아마 이런 경쾌한 발걸음을 떼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또 우리 독자들 역시 여사의 수고가 민망하게, 그 토픽에 대해 큰 관심을 주지도 않았을 거고요. 이런 지점에서도 여사는 역시 영리하다는 점 확인하게 됩니다. 그녀를 우리가 역사학자로 존경스레 대해 온 게 아니라 "스타일리스트"로서 선망해 온 건 우리들 독자들이 누구보다 잘 알지 않습니까.

여사는 스파르타의 역사를 그리스 고전 문화의 개창자(아테네보다 몇 발 앞선)로 분명히 규정합니다. 역시 그녀다운 단순화, 도식화, 개인화(?)를 통해, 우리가 표준적 관점이라며 교과서에서 배워 왔던 프레임보다 훨씬 선명한 채도의 설명을 자랑하며, 동시에 몇 배나 더 흥미로워지는 준거틀을 마련합니다. 책의 본문 전체를 통해 (언제나 그래 왔듯) 일관성도 뚜렷합니다. 디테일과 깊이의 빈약함을 주장의 선명도와 화려한 채색으로 은폐하려 든다는 일각의 비난은 과한 감도 없지 않습니다. 감상과 평가는 저자만의 특권이고, 팩트만 추려 볼 때 딱히 오류라 지적할 만한 부분도 눈에 띄지 않는데다, 무엇보다 그녀의 "썰"은 재미있기까지 하니 말입니다.

리쿠르고스의 독주와, 솔론-페이시스트라토스-클레이스테네스-테미스토클레스-페리클레스(이 마지막 분은 2권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지려나 봅니다) 5인의 계주라며, 스파르타/아테네의 헌정 체제와 역사를 요약한 건 물론 표준적인 관점입니다. 전자를 일종의 종교 체계로, 후자를 합의와 이성과 법체계의 지배로 규정한 건 그녀만의 단칼식 이분법입니다. 권위주의적이고 보수적인 풍토가 지배한 체제였기에 한번 정한 걸 좀처럼 손대지 않고 신성화하기까지 한 문화를 두고 대번에 "종교"로 후려치듯 요약한 건 또한 그녀의 익숙한 필법이자 우리 독자들이 사랑해 온 "귀여운 폭주"입니다. 사실 그녀는 소녀처럼 열광하는 듯 하면서도 은근 서양 고전 문화에(나아가 현대의 그것에까지) 심리적 거리를 두는 편인데, 아테네인이든 스파르타인이든 왜 그렇게 신전이나 제의에 집착하고, 비실용적인 초자연적 사고를 즐기는 지가 끝내 이해 안 된 듯한 느낌도 드러내곤 합니다. 그녀의 프레임대로라면 개인주의-합리주의 전통과 이런 푸닥거리는 서로 심각한 모순이 아닐 수 없었겠죠.

그녀가 모순으로 꼽는 또하나의 지점은, 평소에는 그토록 분열, 대립, 불화, 각개약진 양상으로 서로를 밀어대던 여러 도시 문명권(물론 그리스)이, 외적의 침략이란 공통의 재앙에 마주해서는, 때로는 책략, 속임수, 협박으로, 때로는 진지한 이해와 공감과 연대의식으로 놀랄 만한 단결을 이뤄 내고야 마느냐 하는 대목입니다. 이에 대해 그녀는 자체 해답을 어느 정도는 내어 놓고 있는데, 철저하고 진지한, 유감이 남지 않는 개인주의에의 경도가, 결국 협업이 필요할 때 놀랄 만한 자기희생, 팀웍, 애국심, 이타주의로 귀착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는 점입니다. 사실 자율과 독립심, 주체적 사고방식이란 범주와, 이성적으로 감정과 욕구를 절제하며 유효한 팀웍을 이뤄나가는 정신이란, 동전의 양면에 가깝습니다. 평소에 억눌리고 존중 못 받아 온 영혼은, 단체에의 헌신조차 온전하게 못 이뤄내기 마련입니다. 단합과 노예 근성은 알고 보면극과 극의 지점에 위치합니다.

2부의 후반부를 꼼꼼히 읽어야, 풍토가 다양하고 지형이 복잡하며 정복-이주-복속-식민의 역사가 복잡한 그리스 고대사의 개념틀을 잘 잡을 수 있습니다. 여사의 책이 항상 그렇듯, 꼭 꼼꼼히 선행 파트를 읽어야 매 섹션이 재미있어진다거나 맥을 잃고 헤매지 않게 된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아무데나 펴서 읽기 시작해도 충분히 재미있게 읽히도록 독자를 배려하는 게 그녀의 장기죠). 이 그리스 역사는 저자께서도 공부와 연구를 해 가며 집필한 게 여러 대목에서 드러나는데, 예를 들면 "나는 평소에 메모를 자주 하며 사항을 정리하지만, 그것을 책에 그대로 써 놓지는 않는다"면서, 그러나 이번이 첫 예외라는 듯 그간 저술한 여러 책에서 반대, 대립의 도식 구조 속에 배치한 세력, 신분, 집단과, 이 책 중의 (스파르타의) 왕 - 감독관 대립 구도를, 서로 닮았다는 듯 병치하여 둔 "메모 초안"을 공개합니다(이미지 파일 같은 건 아니고 본문 중 텍스트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동의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의도도 처음엔 혼란스러워하며 간신히 이해할 정도로 반감까지 느껴졌습니다만, 역시 여사의 책은 또 그런 맛에 읽는 겁니다.

여사는 좋아하는 편, 치떨리게 싫어하는 편을 극명히 나눠 가며 독자에게 말을 거는 분이죠. 이 책에서의 그런 예를 찾자면 역시 수미일관되게, 스파르타의 에포로이(감독관들로 번역합니다)를 동양식 개념의 "소인배"로 규정하여, 전쟁영웅 파우사니아스 왕의 비참한 말로에 대해 폭풍 공감을 표현합니다. 파우사니아스는 비교적 후대에 등장한 특정한 개인이지만, 제도로서의 에포로이(에포로스들. 물론 교대 선출직)은 스파르타의 건국기 이래 지속적으로 여사님께 욕을 들어먹는 한심한 작자들입니다.

다만, 대 페르시아 항전기 내내 아테네의 정치적 숙적으로 지낸 아리스티데스- 테미스토클레스 양인의 스탠스는 다소 미묘한 느낌도 없지 않던데요. 대체로 저자께서는 "(선거에, 혹은 정계 지도자로)나와야 할 사람"을 전자로, "나오고 싶어하는 사람"을 후자로 보시던데, 책 읽으신 분들은 눈치 챘겠지만 역사 위인(캐릭터?!)으로서는 전자가 훨씬 이 저자님의 편애를 받는 편이었습니다(여사님의 사랑을 받으려면 일단 대 명문가 출신이라야 합니다. 졸부, 평민으로 자수성가, 이런 애들은 안 키우죠). 허나 우리가 교과서에서 익히 배워 알듯, 정치인으로서 경세가로서 후자의 족적이 워낙 뚜렷하기에, 전자(여사님이 편애하는)와 대립하는 국면에서도 후자의 평가에 대해서는 공정한 태도를 결코 잃지 않습니다.

또 미소년, 동성애, 귀공자, 훤칠한 신장, 고귀한 출신 등의 모에화 요소가 여사님 책에서는 빠질 수가 없겠는데요. 벼락 출세자이자 보기에 따라 찬탈자 위상이기도 한 다리우스의 아들, 그 출생과 정통성에 한 점 흠결이 없는, 잘생기고 키 큰 39세의 청년(중년 아닌가요?) 크세륵세스에 대한 저자님 묘사의 결이 어떨지 구경하는 재미가 빠질 수 없습니다. 여러 번 반복되는 "귀공자" 운운에서 알 수 있듯, 여사님의 필치는 다분히 감성적입니다. 그러면서도 부황에게서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을 허공에 날리고 "인격 파탄(저자의 표현입니다. 여러 번 반복되기까지 합니다)"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못난 생을 마쳤다며 최종의 평가는 가차없고 냉랭합니다(이 또한 우리가 잘 아는 저자의 개성이죠).

그리스 역사는 그 본질부터가 여러 도시 공동체의 연맹 이상이 아니었기에, 로마처럼 한 줄기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게 대단히 어렵습니다. 이런 어려운 과제를 놓고 저자께서는 특유의 맥락화, 설화화, 채색화(?)를 통해, 좀처럼 평균적 대중의 시야에 "한 큐로" 들어오기 어려운 구도를, 종래 본인의 스타일까지 고수해 가면서, 성공적으로 책 한 권에 엮어 놓고 있습니다. 여러 지도는 저자 고유의 관점을 반영하고, 독자와의 소통, 본문과의 유기적 연결을 위해 특별히 편집된 게 많습니다. 본인 스스로도 무엇을 생략하고 무엇을 일일이 반영할지에 대해 고민한 흔적을 본문 중에서 털어놓는 대목이 있습니다. 복잡한 줄기를 한 눈에 파악하는 데에, 이 분야 역사에 익숙한 독자들도 아마 실용적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스의 위인과 제도사에 대해 깔끔하고 신뢰성 있는 분석을 균형있게 배치했을 뿐 아니라(위인들의 일화, 여담에 치중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특히 데모스- 트리부스- 트리티움의 행정 구조 개혁에 대한 설명이 일품이었습니다), 대(對) 페르시아 전쟁의 큰 줄기와 전술적 기발함에 대해, 최대한 알기 쉽게 풀어 준 대목이라든가, 현대인이 보편적 상식으로 이미 수용한 여러 지향과 가치에 대해, 사항 설명과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수렴해 가게 하는 솜씨가 놀라웠습니다(중산층의 건전한 성장과 민주주의 활성화 사이의 상관 관계 등). 2권도 어여 읽어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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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라는 무기 - 나를 자극하는 수만 가지 감정을 내 것으로 만드는 심리 솔루션
수전 데이비드 지음, 이경식 옮김 / 북하우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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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쓰여진 여러 고전 문학이나 에세이 들을 읽어 보면, 필자나 등장인물들이 그리 "감정"이라는 팩터를 중시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감정은 낭만주의의 대흥성 이후뿐 아니라 그 이전부터도 문학의 영원한 주제이자 소재였으며, 인간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건 자신의 신조나 신앙보다도 차라리 감정에 가까웠습니다. 일개 미물인 동물에 대해서도 학대 등을 해서 안 되는 이유 중 하나로 "그들도 생명과 감정이 있다" 같은 것을 들기도 합니다. 지식과 이념 때문에 살인 등의 폭거를 일으키는 사람은 극히 드물어도, 감정을 상한 경우 거의 누구라도 뒷일을 생각지 않는 무리수를 둡니다. <사기>에 보면 "필부라도 모욕을 당하면 반드시 칼을 뺀다" 같은 말이 있을 정도죠.

하지만 현대를 사는 우리들만큼, 의지나 신조, 인격의 수양 같은 덕목보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상처 안 받기, 내 마음을 잘 챙기고 평안해지기 같은, 감정의 다스림에 신경 썼던 인류는 아마 지상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는 세계화가 진척 되어서인지(?) 동양과 서양이 전혀 그 양상이 다르질 않습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개인 차원을 벗어난 어떤 추상적인 가치의 중요성에 대해 대체로 회의적이 되고 난 여파가 아닐까 생각도 듭니다.

직장에서 트러블을 일으키고, 이직이나 사직을 하는 이유 대부분은, 일이 힘들거나 능력이 감당 안 되는 이유도 있지만, 이런 경우에도 사람들은 대개 적응을 해 냅니다. 그러나 직근 상사, 동료 들과 감정적으로 심하게 맞부딪힌 후에는, 많은 이들이 가차없이 사표를 던져 버립니다. 이후의 일은 채 대비나 생각도 않고 말입니다. 물론 감정을 잘 챙기지 못해서 억지로 환경을 참아 내다 병을 얻거나 몸을 망치는 것보다는 그런 결단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평소 자신의 감정을 현명히 관리하여, 애 써 얻은 직장에 충실하는 편이 전 인생 설계의 관점에서 더 유리한 선택임을 감안하면, 감정의 작동 원리에 대해 잘 파악하고 평소에 (향후 큰일이 터지기 않게) 대비하는 게 중요합니다. 또, 사람의 감정이 상처를 입는 건 혼자만의 세계에서 벌어지진 않습니다. 보통은 타인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이뤄집니다. 그러므로 타인의 감정을 잘 파악하는 건 그 타인을 배려한다기보다, 그 타인과 지속적으로 상호 작용해야 할 나 자신(의 감정)을 위해 중요한 선택입니다.

여태 많은 자계서를 읽으며 그간 심리학자나 뇌과학자들이 밝혀 낸 성과를 바탕으로, 여러 몰랐던 지식이나 팁 등을 깔끔하게 정리하여 이를 독자들에게 전달해 주는 걸 많이 봐 왔습니다. 아마 책을 자주 골라 정성껏 읽는 많은 다른 독자들도 사정이 같을 것입니다. 개중에는 공감이 가는 내용도 있고, 나에게 너무 무리한 주문을 한다 싶은 것도 있었겠으며, 다 맞는 말이고 수긍하지만 실천에는 가능하면 옮기고 싶지 않다,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다른 방법은 없는지 알아 보고 싶다, 같은 생각이 들게 한 것도 있었겠습니다.

만약, 소개하는 정보가 비교적 정확하고 근거 있으며, 여러 상황을 전제로 한 제언(충고)도 귀에 거슬리지 않고 무난히 다가오는 책이라면, 그런 책은 일생을 두고 곁에 가까이하며 좌우명처럼 활용해도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새롭다기보다는 깔끔하고 센스 있게, 여러 독자에게 잘 어필할 만한 사항을 잘 정리한 책으로 보였습니다. 물론 저자께서는 현직 하버드 의대 심리학 교수이므로, 학문적 권위까지 충분히 갖춘 분이기도 합니다. 또, 그녀만의 임상례와 상담 사례를 친절하고 시의적절하게 여럿 소개하기에, 여태 여러 책에서 엿봤던 듯한 익숙함 내지 식상함도 가능한 한 최소로 줄이고 있습니다.

책의 목표는 저자 스스로 말씀하시길, "감정의 민첩성"을 기르는 일이라고 합니다. 서평 처음에도 말했지만, 우리 이전의 사람들은 감정을 억누르고,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고, 타인의 감정을 고려하여 행동과 결단을 머뭇거리기보다는 "고지를 향해 전진(물론 그리 말하는 사람 본인부터가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면서)!"을 외쳤습니다. 그 시대에 나온 자계서(많지는 않으나 있었고, 또 인생 독본 등으로 이름 붙여졌을 뿐 자계서라고 부르진 않았죠)는 감정이란 중요 팩터를 대개는 무시했습니다. 허나, 아이디어의 질(퀄리티), 의지의 지속도, 종합적인 삶의 만족도, 구체적인 개인의 삶에서 후회 없음 같은 목적을 달성하려면, 하루하루, 순간순간의 감정에 충실하고, 잘 보듬고, 좋지 않은 감정을 재빨리 유리한 것으로 바꿔 주는 요령이, 그 어떤 다른 목표나 이상보다 중요합니다. 매일, 덜 늙고 덜 피곤해하며 더 행복해할 수 있는 나를 위해서 말이죠.

감정의 민첩성을 어떻게 기를 수 있는가? 저자는 크게 네 가지 과정(혹은 세부 목표)을 제시합니다. 1) 마주하기, 2) 비켜나기, 3) 자기 목적대로 걸어가기 4) 전진하기. 일단 예전 사람들처럼, 감정을 억누르고 무시할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녀석과 눈을 마주치며 응시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책에서 가장 중시하는 최상위 전제이자, 이 책이 담고 있는 모든 주장의 발판이기도 합니다. 그 다음에는, 그 감정이 원하는 대로 끌려가거나 노예가 될 게 아니라, 오히려 객관적으로 거리를 두고 길을 들여야 한다는 거죠. 1)도 중요하지만 저는 그 다음 2)가 의미 깊다고 봤습니다.

1) 관련해서는 대개 의지력 충만하고 뭔가 비범한 이들이 종종 저지르는 오류입니다. 우리는 보통 그런 유형이 아니고,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없기에 큰 신경은 안 쓰지만, 그래도 그들과 비슷한 오류를 잘 저지르죠. 예전에는 거꾸로 그런 사람들을 높이 평가했으니까요. 대개 가부장적 유형이기도 한데, 요즘 일부 독서 트렌드에서 "남자 역할의 종말"을 거론할 때는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무작정 무시하는 일부 남성"을 특히 염두에 둔 것이기도 합니다.

반면 2)와 관련해서는, 제 개인적 생각으로 나르시시스트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입니다. 이들은 전근대적 가부장들과는 정반대 지점에 위치하지만, 그들 나름의 이유에서 역시 불행합니다. 그들에게는 감정이 곧 자기 자신의 주인입니다. 왜 나의 부모는, 내가 하고 싶은 걸 못 하게 할까(사실은 그들 부모는 자녀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평균보다 훨씬 자주, 그 정제되지 않은 욕구를 풀어 주었습니다). "왜 사회는 내 감정, 내 욕구,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발상을 바로 수용하지 않을까? 내 생각엔 내가 맞는 것 같은데." 반응하거나 생각하는 품이 그저 아이들과도 같습니다.

어쩌면 그 부모가 단단히 버릇을 잘못 들여 놓은 건데, 물론 나이 들어 그 책임은 본인 자신이 지겠지만, 이들은 여튼 팍 싫어지고, 비위에 거슬리고, 당장 기분을 망치는 모든 요소를 "악"과 동일시합니다. 매사에 합리화를 하려 들고, 희한한 데서 이유를 찾아내어 자기가 맞는 것 아니냐고 우기고, 상황을 거칠고 어이없는 방식으로 정리하곤 자신의 세계에 팍 파묻힙니다. 저 개인적으로 이 책 전체를 통해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게, 자기 감정을 어떤 초자연적 명령이나 일생을 걸고 완수해야 할 사명으로 보지 않고, 그저 길들여야 할(물론 존중은 해야 합니다만) 대상으로,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들어가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나에게 혹 그런 요소가 있으면 고치고, 타인이 그리한다면 (여튼 그의 인생이므로 중뿔나게 주제넘게 개입할 것까지는 없지만) 저 사람은 그런 동기로 움직이는 사람인가 보다 하고 "이해, 정리"를 하면 됩니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에 휩쓸리지 않은 채 거리를 두었다면, 이제는 이미 대상화해 버린(따라서 "내"가 아닙니다. 내가 나를 처리하고 다루고 처분한다면 얼마나 고통스럽겠으며, 이미 과업이 불가능합니다. 아니면 정신병에 걸리거나 말이죠), 이 감정이란 녀석을, 어떻게 잘 달래느냐의 과제가 남았습니다. 이 책 70% 정도는, 다양한 상황에서 감정을 어떻게 핸들링하는지, 저자께서 참으로 정성껏 정리해 둔, 환자나 저자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소중한 가르침들이었습니다. 사실 이 네 가지 패러다임을 잘 몰라도, 그 본문에 나온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만, 패러다임을 먼저 머리에 넣고 그 개별 팁과 교훈, 처방을 접한다면 훨씬 내면화가 쉽고 오래갈 뿐 아니라, 사람이 기계가 아니고 창의적인 정신 작용이 가능한 이상 그 "응용"과 "발전"이 가능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개별 방법론의 상세함, 진정성에 못지 않게, 저자의 프레이밍이 매우 유익했던 책 중 한 권으로 기억에 남습니다.

세번째 단계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또하나의 중요 과제는, "감정은 나의 감정이지, 어떤 일반화하고 추상적인, 혹은 공통적인 무슨 별개의 감정 이데아 같은 게 있지 않다"는 겁니다. 자기 감정에 휘둘리는 이들 대부분은, 자기 자신의 감정만을 최우선으로 배려, 고립화하면서도(즉 타인을 고려 안 함), 동시에 감정을 절대시하는데 이게 자가당착입니다. "그건 너의 개인 감정일 뿐이야"라는 말 중에는, 다른 사람이 자기 감정을 위해 희생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뜻이 들어 있죠. 그런데도 이런 사람들은 "너(혹은 그)는 내 감정을 이해 못 해"를 두고, "너(그)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 못 해"로 일반화, 혹은 격상시킵니다. 내 감정이 내 감정이 아니라 인류 일반이 존중해야 할 위대한 가치로 바꾸어 버리는 거죠. 이런 이들이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그럼 이해라도 하고 저런 요구를 하느냐,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목전의 이익을 얻기 위해 알랑거리기는 합니다. 그조차도 대단히 피상적이죠.

네번째 단계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전진하기"는, 퇴행과 현실 도피와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생을 살며 순간 맞이하는 모든 도전에 대해 정면으로 응전하고, 사소한 작은 나쁜 습관을 교정해 가며 큰 변화의 동력으로 삼으라는, 어찌 보면 공자나 맹자, 주자의 가르침처럼 대단히 윤리적이고 지행합일의 경지를 바라보는 성격입니다. 일일이 실천에 옮기다 보면, "감정(옛 사람들이 무작정 억누를 것을 주문했던)"에서 토픽이 시작되었으나, 결국 수신제가와 덕업정진으로 마무리되는 느낌도 듭니다.

책은 또한 유머 감각으로 가득합니다. 저는 처음에 읽다가 "카드신용을 휴지통에 버린다"는 대목에서, 오타는 오타인데 참 이상한 오타다, 귀엽다고나 할까, 그런 느낌이었는데, 한 장 뒤로 넘어가니 "마음챙김, 마음흘림"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예로 든, 고의적인 미스프린트였더군요. 저자는 관심사가 참으로 넓으신지, 시대별로 서양이 동양과 접촉하며 소중한 교훈이나 수련 방법으로 얻어내고 발전시킨, 예컨대 요가라든가 다양한 노하우를 망라적으로 정리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효험을 본다 싶은 모든 바람직한 트렌드는, 우리의 현재에는 특히 다 "감정 수련"과 직결되어 있음을 재확인하기도 했습니다. 앞서도 말했습니다만 감정이 다스려지면 결국 의지, 도덕성, 추구해야 할 목표 까지 덩달아 해결되기도 합니다. 심리학이 결국 감정 트리트먼트를 위한 학문이었던가 싶기도 하게, 이 석학의 자상하고 위트 넘치는 충고가 어느새 인생 전체를 관조하는 계기까지를 만들어 주더군요. "감정은 곧 당신 일상의 모든 것이다. 그러나 결코 노예가 되지는 말라. 마주하고, 다루고, 친해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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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첫인상 - 나만의 브랜드를 만드는 이미지 메이킹의 모든 것
김경호 지음 / 팬덤북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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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와 이미지는 서로 다르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어떤 이는 그럴싸한 외모를 가졌으면서도 이 좋은 조건을 남들에게 어필하지 못합니다. (사실은 이런 분들이 놀라운데) 어디 내놓을 만한 조건이 아니다(안타깝지만) 싶은 이들이, 뜻밖에 이미지 메이킹을 잘해서(대단한 능력이죠) 남들 눈에 선망의 대상으로 비춰지기도 합니다. 저자가 말하는 외모/이미지의 차이점이란 이런 것입니다. (저자의 다른 책 <타고난 외모는 어쩔수 없다>를 참조하십시오)

제가 눈여겨 본 건, 저자께서 "진정한 이미지 메이킹"의 조건 중 하나로 "타인과의 원활한 소통 능력"을 든 것입니다. 이 "소통"은 물론 눈치가 빠르다거나, 말을 잘한다 같은 요소 외에도, 상대가 이 점을 내게 원하겠거니 하는 포인트를 정확히 잘 짚어서, 지금 마주하는 상대에게 나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분명히 전달시킬 줄 아는 능력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런 취지에서, 저자는 "이미지메이킹이야말로 진정한 소통 능력"이란 말까지 합니다. 타당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생은 순간순간의 무수한 선택들로 채워집니다. 이런 이유에서 "우연"이라든가, "불운"이라든가, 기타 외부의 변수로 남 탓을 할 여지는 없습니다. 사람이 예컨대 감옥(의 독방) 같은 데에서 철저히 외부와 고립되어 살지 않는 한, 그 사람은 아무리 작은 몸짓이나 말을 통해서도 자신의 환경(을 구성하는 무수히 많은 타인들)과 소통을 하면서 삽니다. 어떤 이가 뜻하지 않은 성과를 올려 부러움을 사게 되었다 해도, 그 사람은 심지어 자신도 모르는 동안 부지기수의 건전한 축적을 통해 이미 발판을 쌓고 있었던 셈입니다. 일본 속언에 "운도 사나이의 실력이다" 같은 말이 있는 건 이 때문입니다.

이미지 메이킹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타고난 외모는 어쩔 수 없다 해도, 사람이 심지어 길에서 스쳐지나가는 전혀 안면 없는 타인에게까지 좋은 인상을 주었다면, 그 사람은 평소에 자신의 시간을 성실히 가꾸었다든가, 뭔가 작은 일상 속에서 기쁨을 찾은 흔적이 몸에 배어 있기에, (말하자면) 그 전혀 안면 없던 이에게까지 호감을 준 것이죠. 그런데 사실 이런 예외적인 현상, 실례라면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겠고, 역시 긍정적인 마음가짐이랄까 노력을 통해, 자신의 단점은 최대한 극복하고, 장점을 극도로 부각하는 어떤 세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런 책도 대중 앞에 출판되는 것이겠고 말입니다. 위장 같은 게 아니라, 이 역시 타인을 향해 "당신과 소통을 하고 싶다"는 진정성 있는 외침이고 노력입니다. 또한 이는 개인의 성실성과도 통합니다.

특히 많은 여성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시지만, 내가 이 정도로 꾸미고 밖에 나서면 일단 "정체감에 변화가 생긴다"고들 하는데, 이 책 저자도 정확히 같은 표현으로 그 말씀을 하시는군요. 사회 생활이란 나 자신의 민낯, 타고난 그대로의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게 아닙니다. 그럴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안타깝게도 사회는 개인들에게 각각의 역할을 부여하며 전체가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나쁘게 말하면 집단 연극 같은 것입니다. "어? 나는 우리집에서 이런 역할이었는데요?" 안 통하죠. 사회가 주는 대로 대체로는 역을 승인해야 하며, 마음에 안 들면 피나는 노력을 통해 지위를 향상시키고 역량과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거리에 나서거나 직장에서 어떠어떠한 직을 맡을 때, 대체로는 가면을 쓰고 훌륭히 연기들을 하는 게 우리들입니다. 이게 매치가 안 될 때, 즉 "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 같은 아찔함이 들 때, 잘 극복 못하면 공황장애가 오기도 하는 거죠. 근데 어쩔 수 없어요. 그게 사회가 우리한테 부여한 미션이니 말입니다. 이게 싫은 사람은 시골로 가야 합니다.

저자는 "내적 이미지의 변화를 체험하면서 참자아를 발견한다"고 하십니다. 사실 사회 생활을 열심히 하면 어느 순간 오는 각성이 있습니다. "아, 이래야 나도 편하고 내 주변의 나와 협력하는 성원(상사, 동료, 부하), 나에게 월급을 주는 조직 전체가 편하구나." 그럴 때 외면의 이미지 메이킹도, 내가 거울을 보며 뭘 어떻게 세팅해야할지 각성이 옵니다. 이게 안 되는 사람은, 예컨대 이런 책이라든가 코칭을 받기라도 해야겠지요. 여튼 저자께서 강조하는 건, 그냥 겉모습을 위장, 변장하라는 게 아닙니다. "내적 참자아의 발견"이 그렇게나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 단계를 거쳐 외적 이미지까지 변화되면, 그 다음부터는 타인과의 관계가 원활해집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 부분을 너무 어려워해서 주저앉는 이들도 간혹 보이는데, 이건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니 본인이 마음을 독하게 먹고 대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까짓것 다른 사람 놀이 한 번 해 본다, 이렇게 여기고 대범하게 상황을 즐기는 거죠. 그래서 타인의 인정을 받고 수중에 예산도 넉넉해지면, 부처님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제법무아라고요 ㅎㅎ. 이제 바뀐 자아가, 종전의 어린 나를 보면서 흐뭇해할 겁니다. "이봐, 이렇게도 할 수 있었잖아." 껍질을 깨고 나오는 아픔과 두려움이, 결코 무엇인가를 영원히 가로막는 장벽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이 이미지메이킹에 대한 편견을 깰 목적"이라고도 말합니다. 아니, 아무리 설령 겉모습만 가꾸는 이미지메이킹이라 한들,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장 절실한 스킬이 그쪽인데 그저 수용을 하고 본인이 그 룰에 맞춰 신나게 남들보다 앞서 달려나가야지, 달리 뭘 어쩌겠습니까? 이미지를 바꾸면 직장과 거리에서 활동 반경이 달라지며, 저자의 말씀대로 내적인 이미지까지 바꾸면 이미 이는 이미지가 아니라 "진짜 자신"이 됩니다. 사회 생활에 위기를 맞은 이라면 한번쯤 읽어 볼 만한 책입니다. 나이도 문제가 안 됩니다. 오히려 중노년일수록 더 승부를 걸어야 하는 게 이미지죠. 개선의 여지도 더 많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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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세계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살림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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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전반에 만들어진 실베스터 스탤론 주연의 <데몰리션 맨>이란 SF 영화를 보면, 가상의 한 미래에 사람들(스스로를 예전보다 훨씬 문명화했다며 자긍심이 대단하죠)이 어떤 방식으로 성욕을 충족하는지에 대한 묘사가 잠시 나옵니다. 상대가 있긴 하고, 실물의 이성이긴 합니다. 다만 헤드셋을 쓰고 뇌파를 교환하다 한순간 만족을 느끼고 종료하는 방식인데, 과거에서 온 주인공 스파르탄은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을 (동시에 이를 지켜 보는 우리가 지닌 관념대로) 설명을 해 줍니다. 상대인 젊은 여성은 "불결한 체액 교환 방식의 예전식 성교"에 대해 기겁하며, 그저 역사적 지식으로만 전해 들어 알고 있다고 답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짓을 몸으로 저지르고 동물적 쾌감을 느끼냐며 핀잔도 주죠.

<편의점 인간>으로 아쿠타가와 상을 받았으며, 한국에서도 많은 호응을 얻어낸 무라타 사야카 씨의 이 신작은, 가족관계와 전통적 성 역할이 완전히 전복된, 우리의 상식으로는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을 것 같은 한 평행우주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평행우주에서도, 예컨대 "혹시 평행우주라는 게 있다면, 그 중 어느 한 곳에서는 여전히 남녀가 동물처럼 옷을 벗고 뒹굴다 일정 시점에서 체액을 사출하고 행위가 종료되는 방식으로 성을 즐기지 않을까?" 같은 말을 주고받습니다(그러므로, 작가는 이 세팅이 미래가 아닌 우리 시점의 어느 한 패럴렐임을 분명히 밝히는 태도입니다). 이 세계에서는, 부부는 어디까지나 가족의 일원으로서 애정을 나누고 속 깊은 이해를 공유하는 관계일 뿐입니다. 혹 성욕이 생기면 전혀 모르는 다른 이성을 찾아 해결하는데, 이 역시 "짐승과도 같은 교미" 자체가 불온시, 금기시되는 세상에서 아주 정상은 아닙니다. 여기서 정상인 방식은 "캐릭터와의 사랑"인데, 소설 속에서도 언급되지만 이는 성행위라기보다 일종의 마스터베이션에 가깝죠(우리의 관념대로라면 말입니다).

소설은 "근친상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사람들 사이에 확고히 자리잡은 세태를 보여 주며 독자에게 놀라움을 안깁니다. 아마네는 엄마, 아빠 사이의 육적 사랑의 결실(우리들 중 누가 그렇지 않겠습니까만)로 태어난 게 결정적 흉이 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남편과 아내 사이에 성행위가 이뤄질 수 있으며, 그 와중에 애까지 낳았대니?"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고전에 보면, 가정에 대한 정의를 "독점적으로 성을 향유하는 공동체(그리고 사회 성원의 재생산)"란 정의가 분명히 내려져 있습니다. 사실 저 역시 그 고전을 사회학 시간에 처음 접했을 때, "가정이란 꼭 그런 기능만 행하는 단위가 아니지 않나?"하며 뭔가 좀 징그럽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마네는 가뜩이나 자신의 이름이 성의 없이 지어졌다며 불만이 많은데, 자신의 출생부터가 심상찮은 절차를 거쳤다는 사실에 더 상처를 받습니다(물론 그녀의 이름이 꽤 운치 있다며 [한자로 쓰면 雨音. 즉 "빗소리"지요. 두 자 다 훈독인 셈] 좋아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작품 속 이 세계에서 부부란 어디까지나 동년배 이성 간의 정신적 결합으로서, 짐승 같은 욕구를 발동시키지 않고 서로를 다독이며 보살필 것을 순결한 의무로 삼는 관계입니다. 그런 명시적, 암묵적 서약을 깨고 어느날 남편이 성관계를 요구하며 아내에게 달려들기라도 한다? 사회적으로 맹렬한 지탄의 대상일 뿐 아니라, 아내는 엄청난 배신감과 분농를 정당히 표현하며 이혼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아마네에게 그 모친은 자근자근 타이릅니다. "지금 남편이란 사람보다, 난 예전에 너한테 달려들었던 그 남자가 사윗감으로 더 마음에 들었다. 남편이 아내가 좋다며 안아 보자는 게 뭐 어때서 그러니? 예전에는 외간의 남정네, 혹은 여인과 정을 나누는 짓이 더 큰 비난과 흉을 입곤 했어."

서평 저 앞에서, 작가는 아마 의도적으로, 근미래 등을 배경으로 삼지 않고 구태여 평행세계 하나를 골라 우리 앞에 제시했으리란 제 개인적 추측을 적었더랬습니다. 명백히 "피곤하고 암울하며 내키지 않는 현재"를 주제이자 배경으로 다룬 <편의점 인간>에서도 작가는 그런 경향을 뚜렷이 드러냈지만, 이 장편에서도 일견 독자에게 큰 놀라움과 위화감을 던지는 가치관과 시스템의 전면 전복상이 드러나죠. 그러나 어떻습니까? 우리 독자가 불편해지는 진짜 이유라면, 소설 속의 각종 설정들이 사실은 우리가 실제로 머무는 "현재, 지금 여기"의 미묘한 풍자라는 점 때문이 아닐까요?

일본 사회에서 남성들은 "초식남"으로 변해 간다는 미디어의 "보도"가 오래 전부터 있었고, 이를 우려하거나 풍자하는 여러 문예도 발표되어 대중의 호응을 얻곤 했습니다. 여성은 그것이 타고난 본성이건, 사회적으로 학습 혹은 강요된 행위 산물이건, 대개는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바로 다가가선 호감을 표현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뭐 요즘은 그런 분들도 간혹 만나곤 합니다. 사람마다 사정이 다르긴 하겠지만). 즉 대개는 초식녀들이란 뜻이죠. 반면 남성은 호르몬 분비 양태의 차이 때문에라도 일단은 적극적인 양상을 보이는 게 보통입니다. 이러던 게 남녀 역할이 점차 같은 지점으로 수렴하니, 이례적이고 걱정스럽다는 반응을 일각에서 자아낸 게 또한 당연하기도 합니다(뭐 잘됐다며 그 반대로 안심하는 태도 역시 얼마든지 발견되죠).

이 작중 세계에서는 그저 정적인 캐릭터와의 사랑(현재에는 낙오자, 부적응자들만의 행태로 비웃음거리가 되거나, 정신병의 일종으로 진단되기까지 합니다만)이 누구에게나 권장될 뿐입니다. 다만 작중 등장인물들은, 여성에게도 남자와 같은 정도로 적극적인 구애 표현, 실천의 권리가 당연히 인정되었다는 태도입니다. 즉, 이 허구의 세계에서 야만, 폐습으로 지양되어야 할 풍습, 본능(으로조차도 인정되지 않습니다) 중에, "남녀 차별"은 비교적 색채가 옅은 편인 듯합니다. 순전히 제 생각인데, 일본에서는 정말로 전근대 사회에서조차 여성에게만 차별적으로 억압 발동된 시스템의 폐해가 (우리 한국이나 중국보다) 상대적으로 덜 심해서가 아니었겠나 싶습니다. 여성이 평등한 대접을 받았다는 게 아니라, 최소한 성적 측면에서 욕구의 발현이 남성의 그것에 비해 훨씬 엄혹한 감시의 대상은, 반도나 대륙의 형편에 비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아마네는 이런 사회의 규정과 제재 중, 일부는 그 규범의 정당성에 동의하면서도(예컨대 남편이 아내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 등), 다른 한편으로는 동물로서 정직히 느끼는 본능의 충족과 추구에 대해 왜 죄책감을 느껴가며 억눌러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의 그녀가 또래 친구(남성)와 함께 책을 찾아가며, 성기의 결합을 어떤 식으로 이뤄야 최상의 기쁨이 찾아진다는 건지, 학문 연구나 이어가는품으로 열심히 "발견"하는 과정은 그래서 우습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그처럼 당연하게 여겨왔던 모든 관행과 개념이, 언제나, 어느 환경에서나 그리 당연하게만 여길 건 아니었다는 새삼스러운 반성도 갖게 돕더군요.

특히 광고업계 종사자들이나 증권맨들이 룸이나 단란 갈 때 농담(아주 저속하지만)으로 하곤 하는 소리가, "야, 어떻게 가족하고 성관계를 하니?(저는 이런 농담을 아주 혐오하곤 했는데, 지금 읽은 이 책 내용과 직통으로 관련성을 띤 코드라서 도저히 인용 안 할 수 없는...)"라는 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압니다(그래서 여성들과 바람 피운단 소립니다). 근데 그런 저속한 농담을, 전혀 다른 문화적 배경과 동기를 지닌 타국 작가의 작품 속에서, 다른 함의의 같은 워딩으로 만나게 될 줄은 전혀몰랐네요. 사실 우리 주변엔 이미 "관계 없는 부부"도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노년의 불화 때문에 "졸혼 상태"에 빠진 이들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성관계 자체에 혐오감을 느껴 플라토닉한 상태로 가고 싶은 이들(젊은 커플들)의 현상을 주로 가리키는 거죠. 또, 그 원인이 사회적 부적응이든 뭐든 간에, 자신만의 세상에서 "캐릭터 성애"에만 빠져드는 고립형 인간도, 최소한 일본에서는 무시 못 할 표본집단을 이뤄가는 게 현실입니다.

성과 육욕이 사라져가는 세상, 또한 이를 자발적으로 불결하다며 멀리하는 대중의 동의를 얻어 관습과 본능이 바뀐 세상은, 아마 전작 <편의점 인간>과는 달리 우리 한국 독자들 사이에 큰 공감을 얻지는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최소한 제가 느끼기로, 우리 주변의 일부(솔직히 대다수)는, 여전히, 자신 개인의 여건이 허락하건 말건, 열렬히 바라고 추구하고 틈만 노리다 범죄적 실행에까지 옮기는 한심한 행진이 끝날 기미가 안 보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까짓것 깨끗이 포기하고 나니, 뭐하러 그 한심한 원시적 충동에 그리 끌려다녔는지 모르겠다"며 쿨하게 말들을 쏟아내는 이 픽션 중의 풍속도가, 아주 생경하게 들리지만은 또 않습니다. 그 역시 가능한 경우의 수 중 하나로, 인간 진화의 경로가 택할 수 있는 방식 아니겠습니까? 무엇보다 저는, 전통적 방식(그러나 우리에게는 존재의 불가결 양상이자 모두스 비벤디)을 두고 "비위생적"이라며 경멸하는 그들의 태도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체액 교환은 어느 관점에서 봐도 비위생적인 게 맞으며, 생존에 미세하게나마 불리하다는 이유에서 진화와 친하지 않은 행태입니다.

성욕과 성행위라는 큰 쾌락을 포기한 후, 인류는 그럼 어디서 그 대체품을 찾을 수 있을까요? 저자는 인간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쾌감의 강도가, 생산되는 정자의 경쟁력과 품질에 모종의 영향을 준다고는 생각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인공 수정은 새 성원 충원을 위한 능률적인 방식이긴 하나, 어쩌면 그런 식으로 인간이란 종은 생존을 위한 활력을 잃어가고, 품위 있고 고상한 도태 과정을 완수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작품 중에 언급되는 "최후의 아담과 이브"는,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최종적으로 상실하는 비극을 암시한다고 봅니다. 가장 인간다워지는 순간에 사멸해버리는 인간 고유의 개성. 이는 결말에 이르러 현실화하는 "남성 임신(똑같이 10개월을 채웁니다)"의 등장으로, 전복을 통해 맹렬히 희구되는 동물적 본능과 번식욕을 우리 독자 앞에 내세움으로써, 과연 본능이 무엇이고 그에 대한 우리의 합의나 확신은 얼마나 단단한지 근본의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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