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강
핑루 지음, 허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이 소설의 작가 핑루는 여성 문인입니다. 이미 쑹메이링이라든가 등려군 같은, 남들보다 몇 배는 고뇌와 영광과 시련 등의 요소로 가득한 삶을 산 여성들에 대한 책들을 낸 적 있고, 문학적 성취 면에서도 뚜렷한 업적을 이룬 분이죠. 재미있게도 본명은 성과 이름이 거꾸로 된, "루핑(路平)"이었다고 하는군요.

이 소설은 얼핏 보아 미스터리 스릴러(도서식) 같기도 합니다만, 주제와 내용은 전혀 그런 쪽이 아닙니다. 또 이 작품은 대만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실화(범죄 사건)에 바탕을 두었습니다만, 실제 전개는 주인공인 자전(佳珍)이란 여성이 탐욕스러운 노인의 음모에 억울하게 희생된 게 그 진상이라는 식으로, 동시대 대중이 받아들인 진실(과연 무엇이 팩트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처럼 호소력 짙은 소설까지 창작된 이후라면 더욱요)을 철저히 전복한 줄거리를 따릅니다.

문단이 아닌 현지(대만)의 일반 대중이라면 이 소설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이미 "사갈녀(뱀과 전갈이라는 뜻인데 한국어 사전에는 이 단어가 등재되었습니다만 실제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 말이죠)"로 낙인이 찍힌 피고인(이제는 유죄 판결, 무기형 선고를 받은 죄수입니다만)에 대해 터무니없이 비호한다거나, 악성 페미니즘에서 연원한 피해의식의 남발이라며 비난하는 층도 얼마든지 있었겠습니다. 파장이 그만큼 컸던 사건이며, 마치 수십 년 전 한국에서 벌어졌던, 유행가 <동숙의 노래>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 그 실화를 연상케 하는 면도 있습니다(그 사건보다 지금 이 실화가 훨씬 추합니다만). 우리 한국의 독자들은 보다 냉철하게, 그리고 가려진 이면의 사정에 대해서도, 작가 핑루 님의 해석, 상상을 따라서 얼마든지 "피고인 자전"에 대해 동정할 수 있는 다른 시나리오(예컨대 이 소설)에 따라 넉넉한 마음도 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후 내용 누설이 있으므로 주의해서 읽으십시오. 단 이 소설이 추리물이 아니므로 소설의 재미에 결정적 영향을 끼칠 만한 서술은 아니나, 여튼 책 후반부에 가서 받을 충격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소설은 두 사람의 피해자(피살된 노부부), 그리고 한 사람의 가해자(결혼을 앞둔 젊은 여성. 종업원에서 갓 지점 책임자 자리에 오른 인물)를 다루는데, 이는 이 소설이 바탕을 둔 실화의 구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소설은 "상상과 해석"을 시도하는데, 살해당한 부인과 살해를 한 젊은 여성이 사실은 피해자이며, 여인에게 살해당한 늙은 남성이야말로 모든 범죄를 계획했다가 자신이 도리어 목숨을 잃은, 어리석으면서도 사악한 꾀를 부린, 가장 가증스럽고 썩은 영혼을 지닌 캐릭터로 규정됩니다. 역자께서는 후기에서 "인간의 선과 악은, 우리들이 흔히 편할 대로 규정하는 습관과 달리 선을 긋기 매우 어렵다"고 하시는데, 이는 이미 법정에서 단죄를 받은 피고인 자전을 두고는 타당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늙은 영감 훙보(洪伯이라고 성씨만 나올 뿐 정확한 이름은 안 밝혀집니다)에 대해서는, 이 픽션 속의 진실대로라면 뼈속까지 썩은 악당이라는 데에 아무 이의가 없을 듯합니다.

우리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인물이라면 여주인공 자전입니다. 우리식대로 읽으면 "가진"인데, "아름다운 옥"이란 뜻이 됩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그녀는 매우 냉혹하고 무심한 생모에게 길러졌는데, 아마도 다정다감했고 잘생긴 용모를 한 남편을 생전에 무척 사랑한 듯한 그녀는, 이상하게도 남편을 잃은 슬픔과 한을 어린 딸에게 모조리 쏟아 붓듯 거친 양육을 했나 봅니다. 뭐 본심은 그게 아니고, 아비 없이 자란  애란 흉을 어디서 듣지나 않게 엄격한 지도를 한다는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린 자전은 그걸 다 애정결핍, 상처로만 받아들였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아픔을 가뜩이나 잘 다스릴 수 없던 그녀는, 이런 생모의 무정한 대우 때문에 더욱 큰 상처로 덧나게 했는데요. 초등학교 2학년 때에 그 또래가 결코 체험할 수 없을 끔찍한 일을 겪기도 했음이 나중에 드러납니다. 이런 그녀이므로 남들에 비해 비밀이 많고, 그 비말을 "신성시"하게까지 되고, 남들보다 말수가 현저히 줄어들 수밖에 없었겠습니다.

챕터와 챕터 사이에는 "제3자"들의 한마디 논평이 여럿 인용됩니다. 사건을 듣고 격분한 네티즌들의 덧글도 있고, 피고인에게 조금의 동정심도 품지 않은 자칭 전문가들의 비인도적 "분석(상당수는 근거 없는 인상 비평이나, 대중의 격앙된 정서에 편승하려는 무책임한 발언처럼 보입니다)"도 있습니다. 이 중 흥미로운 것은, 피해자 중 한 명인 훙타이(洪太. 역시 이름이 구체적으로 안 나옵니다)에 대해 어느 여대생(정확히는, 딱히 홍타이를 염두에 둔 발언도 아닐 수 있습니다. 눈치로 봐선 그녀에게 수업을 듣던 학생인 것 같지만)이 한 말입니다.

"우리 윗세대 여성 엘리트들은 아예 결혼을 포기하거나, 결혼이라는 늪에 빠져 인생을 완전히 망칠 수밖에 없었다."

이 의미심장한 말이 막간에 무심하게 실려, 자칫하면 독자의 시선을 못 받고 지나칠 뻔한 것도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었을지 궁금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이 "예언, 진단, 탄식"은 이후 홍타이의 관점에서 술회되는 대목에서 상세히 그 타당성이 입증됩니다. 그녀는 현업에서 충분히 능력을 발휘하고, 그 대가로 넉넉한 수입도 올리며 은행 잔고도 남이 부러워할 만큼 가진 엘리트(골드미스)였지만, 성취하는 여성, 능동적인 부인상에 대해 전혀 이해가 없는, 비뚤어진 성품의 남편 때문에 그 운명이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는 식입니다.

어찌보면 자전은 일방적인 피해자가 아니고, 누구의 평가대로 정의관념이나 선과 악에 대한 의식이 아주 불충분하게 형성된 인격일 수도 있습니다. 초2때의 그 사건도 그렇고, 훙보에 대해 아빠 같은 느낌을 가졌고 기대했다는 말도 사후 합리화일 뿐, 실제로는 노골적인 원조 교제 의도였을 수도 있다고 보입니다. 자전이 결코 용서 받지 못할 부분은, 자신에게 언제나 잘 대해준 팡거(方哥)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던 시도입니다. 이런 행태를 보고서도 과연 그녀의 동기나 배경 사정에 대해 동정할 수 있을까요?

소설 속에서 가장 딱한 건, 뛰어난 능력과 건전한 철학을 가졌으면서도 못된 늙은이한테 잘못 걸려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 훙타이입니다. 그녀야말로 일방적인 피해자인데, 다만 그녀 역시 상황을 정공법으로 해결하려 찾아온 XX에게 모욕적으로 마구 대했다는 과오가 있긴 합니다(죽을 만큼 큰 죄는 아니었습니다만). 안타까운 건, XX의 진심이 뭔지,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그 희대의 악당에게 제대로 복수할 수 있었는지 훤히 (그 영리한 두뇌로) 알았으면서도, 분풀이나 감정 해소에만 몰두해서 대세를 그르치고 화를 불렀다는 점입니다. 소설은 이에 대해서도 "회광반조" 상태였던 그녀가 뉘우친다는 쪽으로 묘사하며, 그런 실수 역시 사회의 모순된 구조가 암암리에 여성에게 세뇌, 침투시킨 해악의 작용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해석은 독자들이 각자 알아서 할 일입니다.

허유영 번역가님의 문장은 언제나 자연스럽고 유려합니다. 운김(명사), 실그러뜨리다, 해뜩(부사) 같은 능숙한 어휘 구사 덕분에, 이 소설이 처음부터 한국어 창작이 아니었는지 잠시 오해도 하게 될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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