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세계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살림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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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전반에 만들어진 실베스터 스탤론 주연의 <데몰리션 맨>이란 SF 영화를 보면, 가상의 한 미래에 사람들(스스로를 예전보다 훨씬 문명화했다며 자긍심이 대단하죠)이 어떤 방식으로 성욕을 충족하는지에 대한 묘사가 잠시 나옵니다. 상대가 있긴 하고, 실물의 이성이긴 합니다. 다만 헤드셋을 쓰고 뇌파를 교환하다 한순간 만족을 느끼고 종료하는 방식인데, 과거에서 온 주인공 스파르탄은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을 (동시에 이를 지켜 보는 우리가 지닌 관념대로) 설명을 해 줍니다. 상대인 젊은 여성은 "불결한 체액 교환 방식의 예전식 성교"에 대해 기겁하며, 그저 역사적 지식으로만 전해 들어 알고 있다고 답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짓을 몸으로 저지르고 동물적 쾌감을 느끼냐며 핀잔도 주죠.

<편의점 인간>으로 아쿠타가와 상을 받았으며, 한국에서도 많은 호응을 얻어낸 무라타 사야카 씨의 이 신작은, 가족관계와 전통적 성 역할이 완전히 전복된, 우리의 상식으로는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을 것 같은 한 평행우주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평행우주에서도, 예컨대 "혹시 평행우주라는 게 있다면, 그 중 어느 한 곳에서는 여전히 남녀가 동물처럼 옷을 벗고 뒹굴다 일정 시점에서 체액을 사출하고 행위가 종료되는 방식으로 성을 즐기지 않을까?" 같은 말을 주고받습니다(그러므로, 작가는 이 세팅이 미래가 아닌 우리 시점의 어느 한 패럴렐임을 분명히 밝히는 태도입니다). 이 세계에서는, 부부는 어디까지나 가족의 일원으로서 애정을 나누고 속 깊은 이해를 공유하는 관계일 뿐입니다. 혹 성욕이 생기면 전혀 모르는 다른 이성을 찾아 해결하는데, 이 역시 "짐승과도 같은 교미" 자체가 불온시, 금기시되는 세상에서 아주 정상은 아닙니다. 여기서 정상인 방식은 "캐릭터와의 사랑"인데, 소설 속에서도 언급되지만 이는 성행위라기보다 일종의 마스터베이션에 가깝죠(우리의 관념대로라면 말입니다).

소설은 "근친상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사람들 사이에 확고히 자리잡은 세태를 보여 주며 독자에게 놀라움을 안깁니다. 아마네는 엄마, 아빠 사이의 육적 사랑의 결실(우리들 중 누가 그렇지 않겠습니까만)로 태어난 게 결정적 흉이 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남편과 아내 사이에 성행위가 이뤄질 수 있으며, 그 와중에 애까지 낳았대니?"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고전에 보면, 가정에 대한 정의를 "독점적으로 성을 향유하는 공동체(그리고 사회 성원의 재생산)"란 정의가 분명히 내려져 있습니다. 사실 저 역시 그 고전을 사회학 시간에 처음 접했을 때, "가정이란 꼭 그런 기능만 행하는 단위가 아니지 않나?"하며 뭔가 좀 징그럽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마네는 가뜩이나 자신의 이름이 성의 없이 지어졌다며 불만이 많은데, 자신의 출생부터가 심상찮은 절차를 거쳤다는 사실에 더 상처를 받습니다(물론 그녀의 이름이 꽤 운치 있다며 [한자로 쓰면 雨音. 즉 "빗소리"지요. 두 자 다 훈독인 셈] 좋아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작품 속 이 세계에서 부부란 어디까지나 동년배 이성 간의 정신적 결합으로서, 짐승 같은 욕구를 발동시키지 않고 서로를 다독이며 보살필 것을 순결한 의무로 삼는 관계입니다. 그런 명시적, 암묵적 서약을 깨고 어느날 남편이 성관계를 요구하며 아내에게 달려들기라도 한다? 사회적으로 맹렬한 지탄의 대상일 뿐 아니라, 아내는 엄청난 배신감과 분농를 정당히 표현하며 이혼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아마네에게 그 모친은 자근자근 타이릅니다. "지금 남편이란 사람보다, 난 예전에 너한테 달려들었던 그 남자가 사윗감으로 더 마음에 들었다. 남편이 아내가 좋다며 안아 보자는 게 뭐 어때서 그러니? 예전에는 외간의 남정네, 혹은 여인과 정을 나누는 짓이 더 큰 비난과 흉을 입곤 했어."

서평 저 앞에서, 작가는 아마 의도적으로, 근미래 등을 배경으로 삼지 않고 구태여 평행세계 하나를 골라 우리 앞에 제시했으리란 제 개인적 추측을 적었더랬습니다. 명백히 "피곤하고 암울하며 내키지 않는 현재"를 주제이자 배경으로 다룬 <편의점 인간>에서도 작가는 그런 경향을 뚜렷이 드러냈지만, 이 장편에서도 일견 독자에게 큰 놀라움과 위화감을 던지는 가치관과 시스템의 전면 전복상이 드러나죠. 그러나 어떻습니까? 우리 독자가 불편해지는 진짜 이유라면, 소설 속의 각종 설정들이 사실은 우리가 실제로 머무는 "현재, 지금 여기"의 미묘한 풍자라는 점 때문이 아닐까요?

일본 사회에서 남성들은 "초식남"으로 변해 간다는 미디어의 "보도"가 오래 전부터 있었고, 이를 우려하거나 풍자하는 여러 문예도 발표되어 대중의 호응을 얻곤 했습니다. 여성은 그것이 타고난 본성이건, 사회적으로 학습 혹은 강요된 행위 산물이건, 대개는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바로 다가가선 호감을 표현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뭐 요즘은 그런 분들도 간혹 만나곤 합니다. 사람마다 사정이 다르긴 하겠지만). 즉 대개는 초식녀들이란 뜻이죠. 반면 남성은 호르몬 분비 양태의 차이 때문에라도 일단은 적극적인 양상을 보이는 게 보통입니다. 이러던 게 남녀 역할이 점차 같은 지점으로 수렴하니, 이례적이고 걱정스럽다는 반응을 일각에서 자아낸 게 또한 당연하기도 합니다(뭐 잘됐다며 그 반대로 안심하는 태도 역시 얼마든지 발견되죠).

이 작중 세계에서는 그저 정적인 캐릭터와의 사랑(현재에는 낙오자, 부적응자들만의 행태로 비웃음거리가 되거나, 정신병의 일종으로 진단되기까지 합니다만)이 누구에게나 권장될 뿐입니다. 다만 작중 등장인물들은, 여성에게도 남자와 같은 정도로 적극적인 구애 표현, 실천의 권리가 당연히 인정되었다는 태도입니다. 즉, 이 허구의 세계에서 야만, 폐습으로 지양되어야 할 풍습, 본능(으로조차도 인정되지 않습니다) 중에, "남녀 차별"은 비교적 색채가 옅은 편인 듯합니다. 순전히 제 생각인데, 일본에서는 정말로 전근대 사회에서조차 여성에게만 차별적으로 억압 발동된 시스템의 폐해가 (우리 한국이나 중국보다) 상대적으로 덜 심해서가 아니었겠나 싶습니다. 여성이 평등한 대접을 받았다는 게 아니라, 최소한 성적 측면에서 욕구의 발현이 남성의 그것에 비해 훨씬 엄혹한 감시의 대상은, 반도나 대륙의 형편에 비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아마네는 이런 사회의 규정과 제재 중, 일부는 그 규범의 정당성에 동의하면서도(예컨대 남편이 아내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 등), 다른 한편으로는 동물로서 정직히 느끼는 본능의 충족과 추구에 대해 왜 죄책감을 느껴가며 억눌러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의 그녀가 또래 친구(남성)와 함께 책을 찾아가며, 성기의 결합을 어떤 식으로 이뤄야 최상의 기쁨이 찾아진다는 건지, 학문 연구나 이어가는품으로 열심히 "발견"하는 과정은 그래서 우습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그처럼 당연하게 여겨왔던 모든 관행과 개념이, 언제나, 어느 환경에서나 그리 당연하게만 여길 건 아니었다는 새삼스러운 반성도 갖게 돕더군요.

특히 광고업계 종사자들이나 증권맨들이 룸이나 단란 갈 때 농담(아주 저속하지만)으로 하곤 하는 소리가, "야, 어떻게 가족하고 성관계를 하니?(저는 이런 농담을 아주 혐오하곤 했는데, 지금 읽은 이 책 내용과 직통으로 관련성을 띤 코드라서 도저히 인용 안 할 수 없는...)"라는 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압니다(그래서 여성들과 바람 피운단 소립니다). 근데 그런 저속한 농담을, 전혀 다른 문화적 배경과 동기를 지닌 타국 작가의 작품 속에서, 다른 함의의 같은 워딩으로 만나게 될 줄은 전혀몰랐네요. 사실 우리 주변엔 이미 "관계 없는 부부"도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노년의 불화 때문에 "졸혼 상태"에 빠진 이들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성관계 자체에 혐오감을 느껴 플라토닉한 상태로 가고 싶은 이들(젊은 커플들)의 현상을 주로 가리키는 거죠. 또, 그 원인이 사회적 부적응이든 뭐든 간에, 자신만의 세상에서 "캐릭터 성애"에만 빠져드는 고립형 인간도, 최소한 일본에서는 무시 못 할 표본집단을 이뤄가는 게 현실입니다.

성과 육욕이 사라져가는 세상, 또한 이를 자발적으로 불결하다며 멀리하는 대중의 동의를 얻어 관습과 본능이 바뀐 세상은, 아마 전작 <편의점 인간>과는 달리 우리 한국 독자들 사이에 큰 공감을 얻지는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최소한 제가 느끼기로, 우리 주변의 일부(솔직히 대다수)는, 여전히, 자신 개인의 여건이 허락하건 말건, 열렬히 바라고 추구하고 틈만 노리다 범죄적 실행에까지 옮기는 한심한 행진이 끝날 기미가 안 보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까짓것 깨끗이 포기하고 나니, 뭐하러 그 한심한 원시적 충동에 그리 끌려다녔는지 모르겠다"며 쿨하게 말들을 쏟아내는 이 픽션 중의 풍속도가, 아주 생경하게 들리지만은 또 않습니다. 그 역시 가능한 경우의 수 중 하나로, 인간 진화의 경로가 택할 수 있는 방식 아니겠습니까? 무엇보다 저는, 전통적 방식(그러나 우리에게는 존재의 불가결 양상이자 모두스 비벤디)을 두고 "비위생적"이라며 경멸하는 그들의 태도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체액 교환은 어느 관점에서 봐도 비위생적인 게 맞으며, 생존에 미세하게나마 불리하다는 이유에서 진화와 친하지 않은 행태입니다.

성욕과 성행위라는 큰 쾌락을 포기한 후, 인류는 그럼 어디서 그 대체품을 찾을 수 있을까요? 저자는 인간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쾌감의 강도가, 생산되는 정자의 경쟁력과 품질에 모종의 영향을 준다고는 생각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인공 수정은 새 성원 충원을 위한 능률적인 방식이긴 하나, 어쩌면 그런 식으로 인간이란 종은 생존을 위한 활력을 잃어가고, 품위 있고 고상한 도태 과정을 완수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작품 중에 언급되는 "최후의 아담과 이브"는,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최종적으로 상실하는 비극을 암시한다고 봅니다. 가장 인간다워지는 순간에 사멸해버리는 인간 고유의 개성. 이는 결말에 이르러 현실화하는 "남성 임신(똑같이 10개월을 채웁니다)"의 등장으로, 전복을 통해 맹렬히 희구되는 동물적 본능과 번식욕을 우리 독자 앞에 내세움으로써, 과연 본능이 무엇이고 그에 대한 우리의 합의나 확신은 얼마나 단단한지 근본의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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