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이야기 1 - 민주주의가 태동하는 순간의 산고 그리스인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이경덕 옮김 / 살림 / 201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500년이 넘는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300"이란 숫자에 "테르모필레(필라이) 전투"라는 역사적 사건의 상징이 고스란히 담긴 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두고, 저자 시오노 여사는 새삼 책 중에서 감탄하고 있습니다. 사실 놀라운 건 그것뿐이 아니라, "민주주의, 자유, 독립심, 개인주의" 같은 가치들 그 원형이, 역시 그만큼이나 오래 전에 지중해 일대의 문명권 일부에서 형성되었고, 전제주의나 독재 따위의 안티테제로 이만큼이나 오래 버텨 오다 마침내 현대 국제 정치 체제의 기본 합의로까지 자리매김하게 된 그 내력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입니다(최근 일부 전체주의적 정치 단위들에 의해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요). 어쩌면 저자가 한 세대 전의 히트작 <로마인...>, 이탈리아 중근세사 시리즈에 이어 다시 "그리스인 이야기"라는 새로운 과제에 도전하게 된 것도, 그런 보편적 이념과 가치의 근원에 대한 끝없는 애모, 호기심, 경탄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스 역사는 부분적으로 우리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꽤 친숙하지만, 로마사처럼 체계를 잡고 요약해 보라면 훨씬 까다롭고 난삽합니다. 탁월한 이야기꾼인 시오노 여사에게도 아마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전부터 방대한 사료 섭렵, 혹은 현지 답사 등을 통해 작가로서 자신만의 확고한 시야와 중심틀을 갖고 역사를 이야기하고 싶어했던 저자는,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 전작들에 비해 별반 완성도가 떨어지지 않는, 역시 흥미롭고 개성 강한 이야기를 (그간 오래 기다려 왔을) 독자들 앞에 드디어 풀어내고 있습니다.

시오노 여사를 비롯, 우리 동아시아인들은 아마도 농경 중심 가부장 문화에서, 한번 설정된 공동체의 지향을 위해 가장 높은 강도로 개인의 주장을 억누르고 살아야 했을 문화권의 성원들일 겁니다. 반면 독재나 전횡을 거부하고, 형이상학적 사유이든 성 생활의 취향이든 경제 활동의 영위 양상이든 철저히 각성된 개인주의와 자유를 추구한 가장 아득한 원형은 바로 고대 그리스인들의 문명이었을 겁니다. "어째서 동과 서는 이만큼이나 서로 다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 동아시아인들이 가장 먼저 파고들었어야 할 과제는 바로 고대 그리스인들이 누구였는가에 대한 천착이었을 텝니다. 현대를 사는, 적당히 속물적이면서도 적절히 우리만의 해석과 감성을 대상에 부여(왜곡에 이르지 않는 범위 안에서)하고 싶어하는 평균적인 우리들의 수요를 가장 잘 간파하고 공감하며 대변하는 작가인 그녀가, 이 시리즈를 위해 정말 많이 연구하고 고민한 흔적이 역력히 배어나는 책이었습니다.

책은 일단 고졸기(古拙期. archaic period)와 고전기로 그리스인들의 고대를 나누며, 다만 고졸기에 대해서는 과감한 생략으로 건너뜁니다. 어차피 고대사나 고고학 전문가가 아닌 저자의 한계도 있겠으며, 웬만한 학식과 경력을 갖고서도 해당 시기에 대한 시원시원한 서술을 문외한인 대중에게 풀어 주기란 너무도 어려운 과제입니다(사료 부족. 유적 미비 등의 이유로). 책은 그리스 문명의 고전 개화기에서 시작점을 잡는데, 우리가 익히 봐 왔던 여사 특유의 스타일로, 박력 있고 활기차며(호불호가 갈려 왔지만 누구도 이런 개성적인 힘찬 행보의 매력은 부인 못 하죠) 고유의 관점, 평가(혹은 "감정")를 사항, 대목마다 선명히 불어넣거나 새겨 가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만약 고졸기를 (무리해서라도) 커버하는 시작, 구성, 계획이었다면, 아무리 노련한 저자였어도 아마 이런 경쾌한 발걸음을 떼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또 우리 독자들 역시 여사의 수고가 민망하게, 그 토픽에 대해 큰 관심을 주지도 않았을 거고요. 이런 지점에서도 여사는 역시 영리하다는 점 확인하게 됩니다. 그녀를 우리가 역사학자로 존경스레 대해 온 게 아니라 "스타일리스트"로서 선망해 온 건 우리들 독자들이 누구보다 잘 알지 않습니까.

여사는 스파르타의 역사를 그리스 고전 문화의 개창자(아테네보다 몇 발 앞선)로 분명히 규정합니다. 역시 그녀다운 단순화, 도식화, 개인화(?)를 통해, 우리가 표준적 관점이라며 교과서에서 배워 왔던 프레임보다 훨씬 선명한 채도의 설명을 자랑하며, 동시에 몇 배나 더 흥미로워지는 준거틀을 마련합니다. 책의 본문 전체를 통해 (언제나 그래 왔듯) 일관성도 뚜렷합니다. 디테일과 깊이의 빈약함을 주장의 선명도와 화려한 채색으로 은폐하려 든다는 일각의 비난은 과한 감도 없지 않습니다. 감상과 평가는 저자만의 특권이고, 팩트만 추려 볼 때 딱히 오류라 지적할 만한 부분도 눈에 띄지 않는데다, 무엇보다 그녀의 "썰"은 재미있기까지 하니 말입니다.

리쿠르고스의 독주와, 솔론-페이시스트라토스-클레이스테네스-테미스토클레스-페리클레스(이 마지막 분은 2권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지려나 봅니다) 5인의 계주라며, 스파르타/아테네의 헌정 체제와 역사를 요약한 건 물론 표준적인 관점입니다. 전자를 일종의 종교 체계로, 후자를 합의와 이성과 법체계의 지배로 규정한 건 그녀만의 단칼식 이분법입니다. 권위주의적이고 보수적인 풍토가 지배한 체제였기에 한번 정한 걸 좀처럼 손대지 않고 신성화하기까지 한 문화를 두고 대번에 "종교"로 후려치듯 요약한 건 또한 그녀의 익숙한 필법이자 우리 독자들이 사랑해 온 "귀여운 폭주"입니다. 사실 그녀는 소녀처럼 열광하는 듯 하면서도 은근 서양 고전 문화에(나아가 현대의 그것에까지) 심리적 거리를 두는 편인데, 아테네인이든 스파르타인이든 왜 그렇게 신전이나 제의에 집착하고, 비실용적인 초자연적 사고를 즐기는 지가 끝내 이해 안 된 듯한 느낌도 드러내곤 합니다. 그녀의 프레임대로라면 개인주의-합리주의 전통과 이런 푸닥거리는 서로 심각한 모순이 아닐 수 없었겠죠.

그녀가 모순으로 꼽는 또하나의 지점은, 평소에는 그토록 분열, 대립, 불화, 각개약진 양상으로 서로를 밀어대던 여러 도시 문명권(물론 그리스)이, 외적의 침략이란 공통의 재앙에 마주해서는, 때로는 책략, 속임수, 협박으로, 때로는 진지한 이해와 공감과 연대의식으로 놀랄 만한 단결을 이뤄 내고야 마느냐 하는 대목입니다. 이에 대해 그녀는 자체 해답을 어느 정도는 내어 놓고 있는데, 철저하고 진지한, 유감이 남지 않는 개인주의에의 경도가, 결국 협업이 필요할 때 놀랄 만한 자기희생, 팀웍, 애국심, 이타주의로 귀착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는 점입니다. 사실 자율과 독립심, 주체적 사고방식이란 범주와, 이성적으로 감정과 욕구를 절제하며 유효한 팀웍을 이뤄나가는 정신이란, 동전의 양면에 가깝습니다. 평소에 억눌리고 존중 못 받아 온 영혼은, 단체에의 헌신조차 온전하게 못 이뤄내기 마련입니다. 단합과 노예 근성은 알고 보면극과 극의 지점에 위치합니다.

2부의 후반부를 꼼꼼히 읽어야, 풍토가 다양하고 지형이 복잡하며 정복-이주-복속-식민의 역사가 복잡한 그리스 고대사의 개념틀을 잘 잡을 수 있습니다. 여사의 책이 항상 그렇듯, 꼭 꼼꼼히 선행 파트를 읽어야 매 섹션이 재미있어진다거나 맥을 잃고 헤매지 않게 된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아무데나 펴서 읽기 시작해도 충분히 재미있게 읽히도록 독자를 배려하는 게 그녀의 장기죠). 이 그리스 역사는 저자께서도 공부와 연구를 해 가며 집필한 게 여러 대목에서 드러나는데, 예를 들면 "나는 평소에 메모를 자주 하며 사항을 정리하지만, 그것을 책에 그대로 써 놓지는 않는다"면서, 그러나 이번이 첫 예외라는 듯 그간 저술한 여러 책에서 반대, 대립의 도식 구조 속에 배치한 세력, 신분, 집단과, 이 책 중의 (스파르타의) 왕 - 감독관 대립 구도를, 서로 닮았다는 듯 병치하여 둔 "메모 초안"을 공개합니다(이미지 파일 같은 건 아니고 본문 중 텍스트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동의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의도도 처음엔 혼란스러워하며 간신히 이해할 정도로 반감까지 느껴졌습니다만, 역시 여사의 책은 또 그런 맛에 읽는 겁니다.

여사는 좋아하는 편, 치떨리게 싫어하는 편을 극명히 나눠 가며 독자에게 말을 거는 분이죠. 이 책에서의 그런 예를 찾자면 역시 수미일관되게, 스파르타의 에포로이(감독관들로 번역합니다)를 동양식 개념의 "소인배"로 규정하여, 전쟁영웅 파우사니아스 왕의 비참한 말로에 대해 폭풍 공감을 표현합니다. 파우사니아스는 비교적 후대에 등장한 특정한 개인이지만, 제도로서의 에포로이(에포로스들. 물론 교대 선출직)은 스파르타의 건국기 이래 지속적으로 여사님께 욕을 들어먹는 한심한 작자들입니다.

다만, 대 페르시아 항전기 내내 아테네의 정치적 숙적으로 지낸 아리스티데스- 테미스토클레스 양인의 스탠스는 다소 미묘한 느낌도 없지 않던데요. 대체로 저자께서는 "(선거에, 혹은 정계 지도자로)나와야 할 사람"을 전자로, "나오고 싶어하는 사람"을 후자로 보시던데, 책 읽으신 분들은 눈치 챘겠지만 역사 위인(캐릭터?!)으로서는 전자가 훨씬 이 저자님의 편애를 받는 편이었습니다(여사님의 사랑을 받으려면 일단 대 명문가 출신이라야 합니다. 졸부, 평민으로 자수성가, 이런 애들은 안 키우죠). 허나 우리가 교과서에서 익히 배워 알듯, 정치인으로서 경세가로서 후자의 족적이 워낙 뚜렷하기에, 전자(여사님이 편애하는)와 대립하는 국면에서도 후자의 평가에 대해서는 공정한 태도를 결코 잃지 않습니다.

또 미소년, 동성애, 귀공자, 훤칠한 신장, 고귀한 출신 등의 모에화 요소가 여사님 책에서는 빠질 수가 없겠는데요. 벼락 출세자이자 보기에 따라 찬탈자 위상이기도 한 다리우스의 아들, 그 출생과 정통성에 한 점 흠결이 없는, 잘생기고 키 큰 39세의 청년(중년 아닌가요?) 크세륵세스에 대한 저자님 묘사의 결이 어떨지 구경하는 재미가 빠질 수 없습니다. 여러 번 반복되는 "귀공자" 운운에서 알 수 있듯, 여사님의 필치는 다분히 감성적입니다. 그러면서도 부황에게서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을 허공에 날리고 "인격 파탄(저자의 표현입니다. 여러 번 반복되기까지 합니다)"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못난 생을 마쳤다며 최종의 평가는 가차없고 냉랭합니다(이 또한 우리가 잘 아는 저자의 개성이죠).

그리스 역사는 그 본질부터가 여러 도시 공동체의 연맹 이상이 아니었기에, 로마처럼 한 줄기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게 대단히 어렵습니다. 이런 어려운 과제를 놓고 저자께서는 특유의 맥락화, 설화화, 채색화(?)를 통해, 좀처럼 평균적 대중의 시야에 "한 큐로" 들어오기 어려운 구도를, 종래 본인의 스타일까지 고수해 가면서, 성공적으로 책 한 권에 엮어 놓고 있습니다. 여러 지도는 저자 고유의 관점을 반영하고, 독자와의 소통, 본문과의 유기적 연결을 위해 특별히 편집된 게 많습니다. 본인 스스로도 무엇을 생략하고 무엇을 일일이 반영할지에 대해 고민한 흔적을 본문 중에서 털어놓는 대목이 있습니다. 복잡한 줄기를 한 눈에 파악하는 데에, 이 분야 역사에 익숙한 독자들도 아마 실용적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스의 위인과 제도사에 대해 깔끔하고 신뢰성 있는 분석을 균형있게 배치했을 뿐 아니라(위인들의 일화, 여담에 치중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특히 데모스- 트리부스- 트리티움의 행정 구조 개혁에 대한 설명이 일품이었습니다), 대(對) 페르시아 전쟁의 큰 줄기와 전술적 기발함에 대해, 최대한 알기 쉽게 풀어 준 대목이라든가, 현대인이 보편적 상식으로 이미 수용한 여러 지향과 가치에 대해, 사항 설명과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수렴해 가게 하는 솜씨가 놀라웠습니다(중산층의 건전한 성장과 민주주의 활성화 사이의 상관 관계 등). 2권도 어여 읽어 보고 싶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