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입시 Inside - 한 권으로 준비하는 의대입시의 모든 것!
송민호.주영식 지음 / 미디어숲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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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우수한 인재들이 과연 의학계열로만 편중되는 게 과연 바람직한 현상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외국의 경우 의료직이 일종의 가업처럼 대를 이어 종사되곤 하는 모습도 보는데요. 물론 실력도 재능도 없으면서 그저 선대의 후광으로 자격을 얻는 건 아니죠. 다만 어려서부터 보고 자란 환경이랄까 분위기라는 게 있어서, 같은 지식도 이미 친숙하고 사명감의 초점도 맞춰 오던 분야이니 훨씬 더 잘 습득되는 면이 있긴 할 것 같습니다. 이런 까닭에 외국의 명문의대 전형에선 면접시 그 집안의 가업 종사 여부도 묻고 가산점도 주곤 하는 건데, 물론 우리 나라에서 이런 패턴이 눈에 띄었다간 공정성 시비 때문에 큰일이 나겠지요. 각 나라마다 국민 정서, 사회 구조, 정의(正義) 관념의 차이가 있기 마련이니 무작정 외국의 제도를 따라가야 한다는 식의 사고는 옳지 않습니다.

시험 점수 서열 매기기 식이었던 과거와는 달리, 현재는 다양한 각도에서 인재를 평가하고 학업의 기회를 부여합니다. 의대 6년 과정을 이수하고 나면(국시도 통과하고 수련의 과정을 또 거쳐야겠으나) 사실상 직업의 안정과 사회적 지위 같은 것은 어느 정도 보장된 셈입니다. 몇 달 전 서남의대 등 몇 개 대학이 인가가 취소되어 많은 학생들이 동요하기도 했으니, 수험생들은 자신의 "수능 점수" 못지 않게, 학교의 인프라라든가 제반 여건, 자신의 적성이나 조건에 비추어 가장 유리한 지원이 가능한 곳들을 잘 살펴서 원서를 넣어야겠습니다.

한국에서 언제나 최고 수준의 인재들이 지원했던 서울대 의대의 경우(단, 1980년대 학번 어르신들의 경우 물리학과 등이 최상부를 이뤘다고도 하죠), 모집정원이 고작 140명입니다. 이 중 학생부 종합 선발이 108명, 기타 선발이 2명이니, 수능 성적만으로 승부를 걸어볼 수 있는 쿼터는 고작 30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만점이 아니면 원서를 넣어 볼 엄두도 안 나는 상황이죠. 얼마나 공부를 잘해야 이런 학교, 학부의 지원 자격을 얻을 수 있을지 생각만으로도 아찔하죠? 그마나 정시 모집인원은 올해 큰 폭으로(켁) 증가한 게 이렇습니다(작년엔 25명).

재미있는 건 이 학교의 경우, 올해부터 영어과목이 절대평가제도(등급제)로 전환되었으므로, 이게 학생의 자질을 판단하는 데 별 도움이 안 된다고 보아, 큰 폭으로 반영 비율이 낮아졌다는 겁니다. 물론 이공계는 수학, 과학 실력이 더 중요하고, 현행 수능 영어과 고사가 어차피 그전부터 변별력도 떨어질 뿐 아니라, 머리 좋은 학생이라면 학부 들어오고 나서 필요한 부분만 공부하면 충분합니다. 이런 학생들은 누가 시켜서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좋아서 공부를 찾아하는 타입이니, 혹 의사선생님 되실 분들이 영어 까막눈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필요 없겠습니다.

이화여대는 정반대입니다. 국영수과를 각각 25%씩 반영할 뿐 아니라(그러니 영어 점수 실질 비중이 타 학교에 비해 크다는 겁니다), 인문계열에서도 6명의 쿼터를 주어 선발합니다. 정시 총인원은 28명입니다. 여전히 좁은 문이 아닐 수 없죠. 이대는 예전부터 논술 전형을 꾸준히 실시해 온 학교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올해에도 열 명을 뽑는군요. 단 교과반영 비율이 30%이고, 수능 최저 학력 기준도 당연 적용됩니다.

연세대학교 역시 전통적으로 의대가 명문이었기도 하고, 특히 이 학교는 논술 전형을 올해도 실시하는데(고대는 올해부터 폐지했습니다), 그 난이도가 극강을 자랑합니다(서울대는 논술 전형이 현재 없습니다). 수시에서 학생부 선발(종합. "종합"이라는 건 비[非]교과성적 포함을 뜻합니다) 전형은 학년 제한이 있는데 삼수생까지라는 게 특이하네요. 수능을 통해 뽑는 정시 선발 인원은 고작 스무 명. 이마저도 학생부 성적이 10%는 반영이 됩니다. 이 역시 의예과 선발 인원수가 올해 큰 폭으로 늘어났다는 게 이렇습니다. 많은 학부형들이 공정성, 투명성 제고를 위해 수시:정시 비율을 5:5로 하자는 게 다 이런 배경에서이죠. 이런 여론이 근래 어디서건 대세를 타기 때문에 교육 당국이나 정치권에서도 골치깨나 아플 것입니다.



성균관대는 드디어, 그 학교가 고유하게 개발시킨 "글로벌 인재 전형"에서 최저학력 제한 기준을 폐지했습니다. 이처럼 성대는 타성에 젖지 않고 뭔가 전향적으로 자교 입시를 개선해 가는 흐름이 눈에 띄죠. 성대도 논술 전형을 언제나처럼 실시하는데, 관심있는 분들은 다들 아시겠지만 난이도가 정말 낮습니다. 너무 뻔한 문제만 출제되다시피합니다. 그런데도 채점은 (요즘 명문대로 급부상하는 학교답게) 까다로운데, 문제가 쉬워도 출제 의도를 파악 못 하거나, 기본을 무시하는 학생들에 대해서는 엄격하기 때문이죠.

요즘은 인성면접도 중요합니다. 아래 사진은 부산대학교 의예과 인성면접에서 출제되었던 예시 문항입니다. 해당 학교가 어떤 인재상을 교육이념으로 추구하는지 잠시나마 엿볼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의사는 그저 영리를 추구하는 직업인이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의 이솝 우화에도, 이윤 획득에만 몰두하다 낭패를 보는 의사에 대한 비웃음 섞인 풍자가 나올 만큼, "의술은 무엇보다 인술"이어야 한다는 확고한 사회적 합의, 윤리가 존재해 왔습니다. 이런 질문들에 대해, 막힘 없이 자신의 정직한 소신을 피력할 수 있는 "준비된 수험생"이라야, 사회가 그를 믿고 중차대한 소임을 맡길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책에는 {매우 우수} {우수} 등의 등급별 예시 답안까지 일일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수험생들은 별반 당황하지 않고, 솔직한 자신의 생각을 면접관 앞에서 발표하되, 이런 모범 답안을 참고하여 미리 생각을 구상해 두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부산대학교처럼 그 수험생의 "순수 인성 요소"에 초점을 두어 점검, 평가하는 학교들도 있으나, 많은 의대들은 과연 이 학생이 어느 정도 전공에 흥미를 가졌으며, 힘들고도 고된 의학 공부에 어느 정도나 흥미와 사명감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도 알기를 원합니다. 당연하죠. 기업체 면접에서도 일반적이고 두루뭉술한 지식이나 상식보다, 과연 "우리 회사"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가졌으며 조직에 적응할 확고한 정신 무장과 적성이 갖춰졌는지를 최우선으로 놓고 판단합니다.

의사가 되겠다면서 정작 의사의 근무 환경이나 소명에 대해 전혀 지식 상으로 아는 바가 없으면서 의대에 지원했다면, 그 학생의 진지함이나 진정성에 대해 의심이 되는 게 당연합니다. 제 생각에는, 지원하기 전 미리 교수님들의 성향(예를 들면 연명치료 등에 대해, 평소에 어떤 소신을 가진 분인지 구체적으로)에 대해 좀 파악이 필요하지 않나 봅니다. 너무 전술적으로 계산적으로 임하라는 게 아니라, 그 역시 일종의 수험생으로서 가져야 할 성심성의라고 볼 수도 있으니까요.

대구가톨릭대 의예과는 이처럼 영어 실력을 면접장에서 어느 정도 측정하기도 합니다. 사실 의학의 현황과 특성을 생각하면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책의 권말 부록으로는 각 고교별 합격자 수(명단은 아니고요), 추천도서 목록도 제시되어 있으니 수험생들이나 (학생들의 장래를 각별히 걱정하는) 현장의 입시 지도 교사들이 참고하면 매우 유익하겠습니다. 특히 학교마다 전형 날짜가 겹치는 수도 있고, 머리를 잘 써서 현재 획득한(혹은 그럴 가망이 있는) 성적과 스펙으로 최대한 가망 높게 지원할 학교를 잘 골라서, 한번뿐인 인생 그 장래를 알차게 설계할 수 있는 좋은 레퍼런스북, 가이드가 될 것 같습니다. 책 한 권에 이렇게 많은 정보가 다 들어 있을 줄은 몰랐네요. 현재 수능이 두 달도 채 안 남은 시점, 시간이 정 없으신 분들은 책의 전반부라도 꼼꼼이 살피셔서, 실력이 아닌 전략의 부재로 아깝게 낙방하는 일은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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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비밀 - 뇌는 어떻게 마음을 창조하는가 한림 SA: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15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편집부 지음, 김지선 옮김 / 한림출판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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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림 SA 시리즈의 직전 권이 <기억의 비밀>이었습니다. 학계의 최첨단 성과를 일반 대중에게 이처럼 알기 쉽게 풀어 주기란, 해당 분야에 완전히 달통한 석학(들)이라고 해도 결코 수월하지 않습니다. 인류의 문명을 몇 단계 진보시키는 과업 외에도, 이처럼 독자들과의 소통까지 정성을 쏟아 주시는 집필자들에게 감사할 뿐입니다.

<기억의 비밀>을 재미있게 읽으신 분들이라면, 이 책 역시 놓칠 수 없겠습니다(물론, 이 책부터 읽고 <기억...>을 읽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내용 이해가 더 쉬워질 겁니다). <기억...>이 뇌과학 연구가 밝혀낸 뇌 구조와 작동 원리의 해명에 초점이 놓였다면, 이 책은 그 "뇌"를 다소 메타적으로 바라보며, 뇌과학자들의 자기 반성이라 할 고백까지도 흥미롭게 담아 냈습니다. 사람의 뇌, 정신 세계가 샅샅이 파헤쳐지는 게 인간 존엄에 대한 중대한 훼손에 이를 수 있다는 일각의 우려까지, 이들 과학자들께서 "다 염두에 두고 있으며, 우리들 중 역시 개인적으로는 그런 신조에 경도된 이들도 많다." 라고나 하는 듯, 어설픈 독서 대중의 피상적인 인식, 편견에 기한 거부감을 다 헤아린다는 톤이 반가웠습니다. 이렇게 해서 학자들은 (꼭 그럴 필요가 있다면) 기술만능주의에서 한 걸음 뺄 수 있겠고, 어리석은 독자들은 소중한 지식(과 그것이 필연적으로 부를 깨달음 - 영역 불문하고)에 한 걸음 또 다가서는 거죠.

음... 먼저 이 책을 읽기 전, 집필자들께서 "의식, 자각, 각성"을 엄밀히 구분한다는 점을 독자들이 명심해야 할 것 같아요. 먼저 "각성"은 센서...의 작동입니다. "나"라는 어떤.... 인식 없이, 아프다, 뜨겁다, 빛이 눈에 들어온다(그런 해석이나 사고가 아니라 그냥 느낌), 맵다, 뭐 이런 순전한 감각만을 일러 "각성"이라고 합니다. pp.116~117에 보시면, "식물 인간"의 경우 이런 각성만 있고, "자각"이 없는 상태의 대표적인 예임을 알 수 있네요.

반면 자각은 "나'라는 주체감입니다. 책에서는 그 예로 "자각몽"을 듭니다. 꿈인데도 그 꿈꾸는 사람은 내용을 선명히 알 뿐 아니라, "지금 이게 꿈이라는 점"까지도 알고 있으니 상당히 "깨어" 있는, 역설적 상태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 옆에서 나지막히 들리는(깨어 있었다면 충분히 들었을) 음악 소리를 (자는 중이라서) 전혀 눈치 못 챌 수도 있습니다(간혹은 이런 TV나 음악의 자극이 꿈 속에 흘러들어와 컨텐츠를 형성하는데 이건 "선잠"에 가깝죠. 자각몽보다 자각도가 낮아서, 꿈인지 생시인지는 잘 모릅니다).

"의식"은, 이 두 가지 느낌, 즉 자각과 각성이 통합된 상태입니다. 이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손상을 입었다면, 이는 "의식이 있는, 돌아온" 상태라고 판정을 못 합니다. 이 책에도 여러 번 언급되고 현재 이건희 회장 같은 분도 그렇습니다만, 가끔 눈을 크게 뜬다거나 소리에 반응하는 등 반사 작용을 보인다고 해서, "의식"을 되찾기에 성큼 다가선 건 아닙니다. 물론 극히 드물게, (흥미롭게도 이 책의 사례 소개에 따르면) 각성제 같은 것을 먹고 멀쩡한 정신으로 돌아오는 임상례가 있다고는 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환자에게 다 효험을 볼 수 있는 처방으로 일반화가 가능한가? 물론 아니죠. 집필자들은 "대체 왜 그런 경우, 그 환자에게서는 기적 같은 효과가 드러났는지, 우리는 아직 알 수 없다."는 정직한 고백을 합니다. 이 책은 첨단 성과에 대해, 여태 다른 책들에서 잘 다루지 않던(당연하죠. SA니까요) 새로운(또 신기한) 토픽과 친절한 "해설, 전달"을 고맙게도 해 주시지만, 이 시리즈치고는 "우리는 아직 잘 모른다"란 구절이 유독 많이 등장하는 권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친밀감도 느끼고, 내용에 신뢰를 더 줄 수가 있죠.

"뇌는 어떻게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하는가? 뇌는 과연 정신과 육신을 엄밀히 이분하여 사고와 동작을 이루는가, 그렇지 않고 육신과 정신이란 본디 구분이 어려운 일체에 가까운가?" 이 책은 그래서 전권과는 주제와 접근 방식을 현저히 달리하는, "정신"의 탐구에 집중합니다. "정신은 본디 과학의 영역이 아냐!" 그렇게 여기고 싶은 분들은 일단 자신의 방법론에 충실하며 그 나름의 연구 결과를 열심히 쏟아내면 될 것입니다. 이 과학자들은 그런 반응까지 (쓸모가 혹여 있다면) 짬짬이 엿보며, (어차피 통합되고야 말) 거대한 지식 체계의 완성에 보다 가까이 다가설 테니까요. 적어도 이처럼 피드백이 가능한 두뇌, 자신을 재귀적으로 성찰(현재 AI 연구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죠. 복제, 확대, 계산 기능은 그게 아무리 양적으로 압도적이라 해도 지능이 아니에요. 그런 건 이미 70년 전에도 있었고, 잡초 같은 저주 받은 무지렁이도 어디서 베껴서 흉내내거나[정확하게 위도 경도까지 맞춰서 지 얼굴에 지가 침 뱉는 줄을 몰라요ㅋㅋㅋ] 배추장사 아저씨들도 하나씩 들고 다닙니다) 가능한 두뇌라야, 궁극의 진리에 다가설 수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이 역시, 완강한 광신과 비뚤어진 고집(목소리만 크면 다인 줄 알죠)만 내세운 이들이 아니라, 두뇌가 우수하고 현실을 바로볼 수 있는 이들의 몫입니다.

위에서 말한 "각성"은 학자에 따라 "육제적 자아"라고도 합니다. 또, "자각"은 대략 "인지적 자아"라는 개념으로도 치환되는데, 과거에는 이들의 상위에 "자전적 자아"를 두어 최상위, 고차원 사고와 판단을 관할하는 영역으로 간주했습니다. 현재는 비경험적 비실증적이라 하여 생략하거나, 유보적 태도를 취하거나, 혹은 인지적 자아에 통합시키는가 봅니다.

이 책에는 크리스토프 코치 박사(철자가 좀 특이한데 일단 -tof로 씁니다. 성은 독일계 미국인들 중 곧잘 보이는 성씨지만 Koch고요)의 아티클이 많이 실렸는데, 현재 이 분야 최고의 기린아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이분이 쓰신 글에는 신경상관자라는 개념이 그 논지 전개의 핵심을 이룹니다(음.... 그러니, 이분 글에서는 신경상관자라는 단어가 신경상관자 노릇을 하는 셈이기도 하네요? 자기지시 사례의 대표적 예?ㅋ). 저는 처음에 용어 정의 파트를 못 보고 넘어가는 통에, NCC가 뭐의 약자인지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 보고 알았습니다... 만, 책을 두 번째 읽을 때 p44:9에 이미 나왔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죠. 하긴 이런 책이 편집과 편제를 절대 소홀히할 리 없네요. 원문 원저는 말할 것도 없고 이런 좋은 책을 꾸준히 번역해서 펴 내는 한림출판사도 그렇고요.

우리는 대중 저술가로 더 잘 알고 있는 올리버 색스가 처음 고안해 낸 용어 중 "시네마토그래픽 비전"이란 게 있습니다. 아마 많은 뇌과학 관련 대중서에서 이 사레와 함께 자주 언급하기 때문에 익숙할 겁니다. 이 책에서는 "영사적 시야"로 번역하는데, 내용인즉슨 우리 뇌가 외부의 시각적 자극을 연속체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거죠. 영화나 애니메이션도 단절된 여러 컷을 빨리 이어붙이니, 뇌가 이 영상들이 이산적 구조를 지님을 못 알아채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를 속이는 건 영사기뿐이 아니라, 아예 뇌와 눈을 연결하는 신경망 통로 일체였던 셈입니다. 영화는 그래서 우리를 이중으로 속이는 매체이기도 한데, 영화 감독 중 짖궂은 이들은 등장인물이 정신적 충격을 받거나 했을 때 이런 "영사적 시야"를 겪음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한때 정지화면처럼 멈췄다가 밀린 뒷 장면이 화르륵 지나가는 거죠. 버퍼링이 원활치 않을 때 컴퓨터동영상이 어떻게 재생되는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제가 다른 책에서 읽은 내용인데(그 책 저자도 이 책의 집필 참여진처럼 뇌과학의 권위자입니다), 우리 인간의 정신이란 어차피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 구조가 아닌가 하는 (놀라운) 의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놀라운 성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그렇게나 정밀히 작동하는 회로처럼, 면밀히 신호를 분석하여 뇌에 부지런히 전달하면서, 한편으로는 갓난아기처럼 보호해야 할 자아가 따로 있다는 듯 우리를 "해석이 아닌 실재와 바로 접하기라도 하는 양" 즐거운 속임수(물론 그가 아닌 우리에게)를 부리고 있었는지요.

물론 이것은 더 연구가 진척되어야 말끔한 해명이 가능하며, 연구자 자신들이 디지털로 일일이 치환하는 방법론에 기대고 있으니 원 대상까지 디지털로 착시되는지는 또 모를 일입니다. 자, 우리 뇌는 디지털로 소통, 작동하는 구조라면, 그가 인지하는 외계(물리계)는 그럼 아날로그임을 가정하고 이런 말을 하는 건데, 그건 어떻게 우리가 확인할 수 있죠? 한 세기 전 양자의 역설은 어디서 연유했습니까? 관측의 모순을 처음 발견, 입증한 하이젠베르크의 연구에서였습니다. 이미 <매트릭스>같은 영화에서는, 우리 자신의 인지 체계뿐 아니라 객관적으로 존재(이 자체가 아찔할 만큼 모순덩어리인데다 확정할 수 없는 개념)하는 물리계까지도 다 디지털 부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파격적인 가설을 세웠습니다. 만약 물리계 역시 디지털 부호의 더미라면, 그와 별개의 계를 이루는 다른 메타(혹은 평행)의 세계가 있을까요? 왜 하필 이런 의식만 복합적이고

"의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에서 끝없이 제기하는 의문은, 대체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가 어디까지이며, 무엇이 나를 의식하게 만들고, 그 "자아, 의식"이 (특히 진화론적 이유에서) 있어야 할 이유는 또 무엇인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합니다. (p107 등에서, 왜 베타[경제학의 베타... 통계학의 베타를 안다면, 이 베타도 어렵지 않게 개념이 잡히겠죠]가 높게끔 유기체가 진화했는지,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한낱 단백질이 어쩜 이렇게 자신 속에 우주를 닮은 꼴을 품으면서 진화했을까요? 바퀴벌레 한 마리 뉴런의 베타를 닮으려면, 구글이 보유한 서버 전체를 가동해도 현재로선 힘들다고 합니다. 생명체의 경이로움에 새삼 마음이 숙연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코치 교수는 이런 말도 예언처럼 내뱉습니다. "의식은 진화 과정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거기에 있어오기만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우리 독자들은 그럼 어쩌란 말인지요. 뭔가 답을 얻기 위해, 코치 교수님 같은 분은 해답을 내어 줄 줄 알고 책을 펼쳤는데도 이리 야속하게 나오시다니!

데카르트의 그 유명한 언명이 또 나옵니다.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다. 저건 나의 착각이요, 환청이요, 환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의심을 하는 나 자신이 존재함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명확한 진리이다." 어쩌면 이 말대로, "의식, 자각"하지 않게 되는, 그저 "각성(혹은 그조차도 없는)"만 하게 되는 그 순간, 우주는 순식간에 부재하게 될지 모릅니다. 의식과 존재가 그저 주관과 객관, 주제와 객체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라는 통합적 각성이 가능하다면, 그게 존재와 지(知)의 궁극이겠고, 과학과 영적 세계가 비로소 오랜 이산을 극복하고 하나가 되는 순간일지 모릅니다. 하나만 아는 사람은, 그 하나도 올바르게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게 마련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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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경영의 지배자들 -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상품과 시장의 변화를 예측하는 지침서
롤프 옌센 지음, 서정환 옮김 / 리드리드출판(한국능률협회)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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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빈 토플러의 <미래 충격> 등 여러 고전들은 지금도 널리 읽힙니다. 노환으로 작년에 이미 타계한 분의 책이, 요즘의 첨단 추세를 시원히 해명하거나 곧 다가올 미래를 예견해 주리라는 기대 때문이 당연히 아니죠. 그가 말한(말했던) "미래"는 벌써, 지금 우리가 사는 현재이거나, 아니면 이미 과거에 편입된 시간들일 겁니다. 그런데도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이 그의 책을 읽는 이유는, 그의 예견이 이처럼이나 많은 시간이 지난 후 놀랄 만큼 많은 대목이 정확히 맞아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의 예견은 과거에 속한 사항이 아닌가? 우리가 다시 그의 책을 읽는 이유는, 이처럼 정확한 예언의 맥락을 찾아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가고 없지만(대신 그의 따님이 있긴 하죠ㅋ), 이 신통한 책의 취지를 다시 탐구하면, 혹시 "후편"에 대한 내용 짐작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입니다. 토플러뿐 아니라 영역을 달리하는 다른 모든 고전도 마찬가지죠. 뻔한 소릴 갖고 혼자만 깨우친 진리인 양 부풀려 떠드는 건 바보들이나 일삼는 짓입니다. 현명한 사람, 혹은 현명해지려 노력하는 사람은 미래의 향방에 주시합니다.

이 책은 앨빈 토플러에 버금간다 할 덴마크의 저명한 미래학자 롤프 옌센이, 믿어지지 않지만 지금으로부터 21년 전에 저술한, 어떤 의미에서는 "고전"입니다. 21년 전이 먼 예전이라서 그렇다는 게 아니라, 21년 전이라는 시간의 핸디캡을 딛고 이처럼이나 미래(즉 현재)를 정확히 내다보았다는 그 통찰력이 놀랍다는 뜻에서입니다. 만약 롤프 옌센이 누군지도 모르고, 21년 전의 저술임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있다면, 1) 담론이 시원하다. 다른 이론가의 체계를 엿보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한 시야에 의해 "이야기(이 책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입니다. 미래는 이야기의 세상이다, 이 정도로 한 줄 요약이 가능할 정도로)"를 풀어놓고 있다. 2) 많은 대중 경제경영서, 혹은 자계서 등이 요즘 써 대는 주장과 내용이 비슷하지만, 고품격의 철학이 전 내용을 관통한다 3) 디테일에는 다소 동의가 안 되는 부분도 있지만, 미래의 대세가 무엇일지에 대해, 실감나는 정신 무장이랄까 시야 전환을 힘있게 촉구해 준다, 뭐 이 정도 반응들이 나오지 않을지 짐작합니다.

21년 전에 쓰여진 책치고는 놀랄 만큼, "4차 산업 혁명"이란 말만 본문 중에 등장하지 않을 뿐, 이 책은 아날로그식 감성이 사회 전반의 산업적 지향을 "다시" 지배할 미래를 생생히 그려냅니다. 이 책이 쓰여진 시기는 이른바 "제3의 물결"이라 일컬어지던, 정보화의 도도한 흐름이 세계를 휩쓸 시절이었습니다. 이 당시만 해도 가정마다 PC가 보급 안 된 곳도 있었을 시절이고, 우리가 지금 TV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접촉하는 그래픽 인터페이스(MS 윈도라든가)가 아직 결정판이랄 만한 게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정보화 사회가 채 성인기에 접어들기도 전이었는데, 옌센 박사는 "꿈과 스토리와 낭만이, 산업화 시대가 안긴 기계적 효율과 마음의 상처를 모두 덮어버릴 세상"을 논하고 있는 거죠. 물론 아직 그런 세상은 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리로 향해 모두가 발버둥친다는 것, 이제 그 지점이 대세가 되었다는 것, 이 포인트를 잘 공략해야 시장에서 살아남는다고 기업들이 혈안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동의합니다.

옌센 박사는 놀랍게도, 인공지능이 등장하여(이 말은 물론 이보다 훨씬 앞선 시점부터 등장했었지만, 옌센 박사님이 거론하는 범주는 훨씬 구체적입니다. 게다가 지금 구글(이 책이 쓰여질 무렵 이 회사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과 애플, IBM 등이 컨셉화한 내용[상용화했든, 아니면 마케팅 구호에 아직 머물든 간에]과 거의 일치한다는 게 놀랍습니다),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는 예언까지 합니다. 물론 한 번의 대세 전환기에 대량 실업이 발생한다는 건 지난 역사를 통해 우리가 배운 바입니다. 그러나 요즘처럼, 사람들이 잃은 일자리에서 수익을 창출하는 기업에게 "로봇세"를 물려야 한다는 등의 절박한 논의가 나오는 사정을 반영하여, 아직 그런 위기를 꿈도 꾸지 않았을 무렵의 독자들에게 미리 위안을 건네는(ㅎㅎ) 투로 책을 쓰는 분은 당시에는 한 사람도 없었을 겁니다. 이는 저자가, 매우 vivid하게 미래를 내다보고 확신을 가진 채 책을 썼다는 방증이죠.

제3의 물결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정보화의 물결이 일상과 문명 전반에 가져다 줄 편의만 꿈꿨을 뿐, 실직이니 직업의 종언이니 하는 걸 거의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뿐만 아니라, 언제나 그래왔듯 이 대세가 적어도 반 세기는 지속되리라 보았죠). 박사님은 정보화사회가 일찍 종말을 맞고, 본인이 내다본 "드림 소사이어티"가 빠른 속도로 그 자리를 대체할 것이라 장담합니다. 제가 눈여겨 본 건, 산업화 사회건 정보화 사회건 간에, 이런 변혁의 물결은 많은 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겼다는 식으로 저자께선 보고 계신 대목이었습니다. 그럴 만도 하죠. 정보화 사회는 그간 사람들이 정을 붙이고 존재의 곁에 가까이 두며 위안을 구했던 많은 추억을, 메마른 부호 덩어리로 대체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육체 노동의 상당수를 자동화 시스템으로 갈아치우기도 했지요(제가 한 달 전쯤에 리뷰를 쓴 <더 박스>라는 논픽션에 그 실상의 상징적 일부가 잘 서술되어 있습니다). 산업혁명(1차, 2차)의 물결은 수공업 장인들의 설 자리를 대거 빼앗았습니다. 러다이트 운동 같은 것은 그 시대의 아픔을 표현하는 심각한 파문 중 하나였고요.

스토리를 만들고, 팔고, 산다! 이는 2년 전쯤 제가 이미 읽고 리뷰도 여기 남겼던 <르네상스 소사이어티>에도 나옵니다(이 책이 그 책보다 훨씬 앞서서 저술되었습니다만). 요즘은 아이들 수학 커리큘럼(국가에서 기획, 집행하는)에도 이 개념이 반영되었을 정도로, 파편적이고 냉정한 지식 덩어리는 미래(현재) 사회에서 퇴출되어 가는 게 현실입니다. 저자는 잃어버린 꿈과 낭만, 그리고 가슴을 가득 물들이는 "스토리"야말로, 사람들이 진정으로 소비하고 향유하는, 그래서 존재의 일부로 편입하고 그만큼 더 행복해지는 궁극의 상품이자, 모두가 제작자로 나설 수 있는 산업의 장이라고 말합니다. 기업 역시, 고용주가 피용인과 넘을 수 없는 장벽을 쌓았던 과거와 달리, 생산의 본체를 이루는 만인 경영의 시대가 열려, 종업원의 모임이 곧 기업이 되는, 계급 구조와 산업화 사회의 본격 해체를 선언합니다. 사람들이 꿈과 희망을 소비하는 세상에, 독점적 대량 생산 설비가 무슨 소용이겠냐는 뜻입니다. 이것과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저자는 "마르크시즘은 이 점에서 부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도 하는 대목이 있는데, 아마 요즘 독자들은 무슨 소린가 싶을 겁니다. 물론 이 책은 소련 붕괴 한참 후에 저술되긴 했지만요.

학교 다닐 때 저는 어느 미국인 저자가 쓴 책을 부교재로 삼았던 수업 시간에, "예컨대 코카콜라 광고 같은 건 아무런 실용적 정보를 시청자에게 전달하고 있지 않다. 그럼 소비자는 왜 이런 광고를 소비하며, 기업은 무슨 까닭으로 거액을 들여 집행하는 것일까?" 같은 질문(과제)을 접했던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때 신입생이었기에, "경제학 논리에만 파묻혔기에 이런 어리석은 의문이 드는가 보다"하고 넘겼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엉뚱하게도 "그래, 이런 건 다 쓸데없는 사회적 비용에 지나지 않아"라며, 교재의 취지에 맞게 세계관까지 새로 세팅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책을 영문판으로 대략 십 년 전에 읽고서야, 학부생 시절의 그 당돌한 반발이 오히려 정당했다는 각성이 들더군요. 그 광고는 (방향이 건전하든 그렇지 않든, 꿈이든 환각이든 간에) 시청자에게 "스토리"를 팔고 있었던 게(심지어 지금도 그렇죠) 분명하고, 오히려 시대를 앞서갔던 셈입니다. 나만의 꿈을 정직하게 간직하고, 타인에게 희망과 긍정을 불어넣는 능력으로, 미래에는 서열(!)을 매기게 될지 모릅니다. 그런 뜻에서, 저자는 "드림 소사이어티야말로 그 이후의 단계가 없는, 사회 발전의 궁극적 귀착점"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곱씹을 만한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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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으로 향하다 - 리암 니슨 주연 영화 [툼스톤]의 원작 소설 밀리언셀러 클럽 97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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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으면 그거라도 타서 마셔야지 싶은 인스턴트 커피라도, 막상 들이켜 보면 꽤 괜찮습니다. 커피뿐 아니라 모든 싸구려 품목들에는, 특유의 쓴맛("내 다시 이딴 거 쓰는가 봐라")을 안기는 게 있고, 생각밖으로 괜찮았네 같은 묘한 안도감(내지, 내 취향이 이 정도밖에 안 되었나 보다 같은 자괴감)을 주는 게 있죠. 어떤 싸구려는 "이거, 진짜 명품 아냐?" 같은 착각을 선사하기도 하는데, 이미 해당 소비자에게는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튼 이 비슷한 감상이, 개인적으론 예전부터 매튜 스커더 시리즈를 읽으며 느껴 오던 점입니다. 아쉬운 대로 로렌스 블록의 명작-명작 맞죠-들은 이처럼 짬짬이(심지어 지금도) 밀클 브랜드로 번역되어 나오는데, 왜 조너선 켈러먼 작품은 소식이 없는지 저로서는 잘 짐작이 안 됩니다.

이 장편은 이미 영화로도 옮겨졌고, 이상하게도 그 영화는 Y2K 운운하며 1999년으로 시간을 세팅하지만 제작연도는 얼마 되지도 않았습니다(그러니, 주연인 리암 니슨이 스커더 캐릭터로 나오기엔 좀 늙었죠). 반면 지금 이 원작은 1992년에 쓰여졌습니다. 그래서 "팩시밀리라는 게 발명되어서 5마일, 10마일, 심지어 지구 반대편에서까지 바로 자료를 받아볼 수 있다...." 같은 희한한 말이 스커더 입을 통해 나옵니다. 물론 팩스가 쓸모없다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시설이라면 웹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를 대비해서 구비를 해야 하고, 책임 있는 공적 섹터에서도 공공서비스의 일환으로 (수익이 나든 안 나든) 지원, 운영을 해야 합니다. 근데, 제가 좀 의아한 건, 팩스는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한국에서도 널리 쓰였거든요.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묘사로는 "...호텔 전화 시스템 방식이 변경되어, 밖에서 걸려 오는 전화는 여전히 프런트를 통해야 하지만, 객실에서 외부로 거는 전화는 교환을 거칠 필요가 없어졌다.." 같은 말도 있습니다. 한국이라면 1992년에 어땠을 것 같습니까? 심지어 그 시절에도, 이런 건 우리가 전혀 시대 트렌드에 뒤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매튜 스커더가 마약상한테 전화를 받고 그의 자택으로 달려갈 때(영화에서는 좀 더 고급 레지던스였습니다. 물론 브루클린에도 고급 주거지구는 여럿 있습니다만) "오로지 죽은 자들만 브루클린을 알고 있으니 (거길 알려면) 나도 죽어야겠군요."라며 너스레를 떨죠. 이건 토마스 울프의 소설 <You Can't Go Home Again>중에서 따 온 인용구지만 여러 꼴로 패러디되어 널리 쓰입니다. 단 영화에서는 이게 대사로 안 나오죠. 넣었으면 멋있었을 텐데(배경도 별도 각색 없이 브루클린이고 실제 로케도 거기서 이뤄졌으면서). 인문 소양이 부족할지는 모르나 여튼 이 원작에서도 코리 형제가 브루클린 토박이라고 분명히 나옵니다(이 농담을 이해 못해도 말이죠).

"내가 택시 타고 오라고 했잖소? 비용도 내가 내겠다는데 왜 그런 푼돈을 아끼는 거요?"
"여기 뭘 타고 오든 그건 내 마음이오. 당신이 내게 그걸 가르쳐 줄 필요는 없소. 내가 당신한테 어떻게 하면 애들을 마약쟁이로 만드는지 가르쳐 줄 필요가 없듯이 말요."

이건 정말 되게 웃기는 소린데, 그 코리 형제의 손윗사람은 지하철 치안이 불안하니까(특히 그 일대라면) 걱정이 되어서 하는 소린데(여기서는 보안 이슈와 무관합니다), 매튜는 저렇게 퉁명스레 받아치는 거죠. 헌데 내 돈을 노리고 적당히 시늉만 하는 인간은, 확실히 아니라는 걸 증명시켜 주는 솔직함이기도 해서, 결국 이 "계약"은 성사가 됩니다. 스커더가 진실한 인물(기분 콱 상하게 하는 말을 하긴 해도)임은 확신이 되니까 말이죠.

둘은 전략을 짜서, 전혀 단서를 남기지 않은 놈들에 대한 실낱 같은 정보라도 건지기 위해, 돌이라도 던져 수면에 파문을 일으켜 보기로 합니다. 우선 이 바닥에 밟이 넓은 대니에게 200달러를 건네주죠.

"이걸로 택시값이나 해요."
"나더러 200달러 받고 지금 택시 불러달라는 것?"

".... 로빈 훗 이야기는 나도 어려서 좋아했지. 헌데 공공의 안녕과 정의를 걱정하는 마약상이라고? 자기 마누라가 안전하다면 됐지 왜 경쟁자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나? 누가 걸려들어 인질금을 뜯기면 라이벌 업체의 자금 사정이 위축될 테니 지한테는 고만큼이라도 더 좋은 것 아님?"
"하 이거... 당신한테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그럴싸한 이야기 같았는데 말야.. 사실은...."

이런 재치 있는, 서로 흉금을 훤히 들여다보면서 주고받는, 은근한 비꼼과 걱정과 양해가 오가는 대화들이야말로 스커더의 세계가 드러내는 짖궂은 매력 중 하나입니다. 저 대목에서 교정을 해야죠. 대니 보이가 알아듣는다면 다른 비슷한 처지의 타인들도 눈치를 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담배나 술 때문에 죽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시오. 약 하는 사람들이 없어지면, 자연 나 같은 놈들도 없어지게 마련 아니오."

이건 가당찮고 흔한 합리화이므로 대꾸할 가치도 없습니다. 허나 마약이 사회의 근간을 좀먹고 파멸로 이끈다는 점만큼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죠. 이런 말을 하는 본인도 크게 꿀리기에 스커더에게 접고 들어가는 겁니다. 술 이야기를 하면 스커더가 사실 할 말이 없어지기도 하고요.

스커더는 이 작품에서 "헌금 하는 버릇이 없어졌다"고 처음 털어놓습니다. 술 끊으면서 같이 없어진 버릇이라는데, 사실 그는 교회나 성당에 어떤 특별한 경의를 가져서가 아니라, (마치 돈을 갖다 버리듯이 - 그래도 안 쓰게 된 표를 꼭 환불해야겠다는 등 그가 돈 개념이 없는 건 아니고요)버릇처럼 헌금을 하는 점 우리 독자 모두가 압니다. 여러 동기가 있었고, 말로 표현은 안 해도 대략 뭔지 정도는 우리가 짐작을 합니다.

잔혹한 묘사까지는 아니라도 설정상 끔찍한 연상을 이끄는 서술이 있으므로 비위 약하신 분들은 주의가 필요합니다(이 시리즈가 대개 다 그렇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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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이션의 시대 - 풀린 돈이 몰고 올 부의 재편
김동환.김일구.김한진 지음 / 다산3.0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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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저는 정주영 현대 창업자의 자서전을 읽을 때, 소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그를 두고 주위(선발 사업가들 그룹이나 고위 관료 그룹)에서 "그 사람이 인플레가 뭔지나 알겠어?"라고 비웃었다는 대목을 읽은 적 있습니다. 교육도 제대로 못 받은 사람이 남들 하는 대로 사업이라고 벌여 동분서주하지만, 거시 경제의 큰 흐름이나 자본주의 구조의 기저를 손톱만큼이나 이해하고 설치겠냐는 조소였죠.

이에 대해서는 대강 이렇게 대응을 할 수 있겠습니다. 1) 미시(개인 사업은 아무리 규모가 커도 어디까지나 미시입니다)와 거시는 작동 원리가 꽤나 다르며, 2) 현장에서 열심히 뛰고 목숨 거는 열의로 사업을 하는 이라면 아주 바보로 태어난 게 아닌 이상 뭔가 통찰력 같은 게 생깁니다. 그게 탁상공론식 겉치레(소화 안 된 겉도는 지식)보다 훨씬 효용이 높을 때가 많죠. 물론 가장 골치 아픈 유형이라면, 배움도 없고 그렇다고 실물의 흐름도 모르면서 머리까지 나쁜, 몇 마디 주워들은 구호로 거친 현실을 마구 재단하려 드는 용감한 이들입니다.

아무큰 요즘은 일본식 줄임말인 "인플레"를 잘 쓰지 않고 원어 그대로를 더 널리 사용하는 듯합니다. 제가 서평 앞에 저 일화를 꺼낸 이유는, 이 인플레이션이라는 게 자본주의 경제가 죽을 때까지 안고 가야 할 영원한 숙제, 업보 같은 것이라는 뜻에서였습니다. 불가사의하게도 자본주의를 채택한 어느 나라의 거시경제건, 경기의 사이클이라는 게 반드시 있습니다. 잘나갈 때는 어느 목에서 점포를 잡고 장사를 하는 이들이건 높은 매상고를 올리고, 이들이 다시 다른 섹터에서 통 크게 소비를 하면 그 돈이 또 돌고돌아 다른 이들의 가계를 살찌우고..... 이게 세칭 "경기가 좋다, 활황이다"라고들 부르는 전형적인 풍경입니다.

그러다가, 경제 전체에서 새로이 생산된 물자, 서비스의 가치는 그럭저럭인데, 이를 적절히만 대표해야 할 종이돈만 엄청 불어나서 많은 이들의 눈을 속였다는 인식("내가 알고 보니 그리 부자가 아니었어!")이 확산하면, 소위 "거품"이란 게 뻥 터집니다. 거품도 아주 없을 수는 없어서 그저 필요약 정도로만 기능하면, 관리 가능한 수준에서만 커졌다 줄었다 하면, 그건 정상적인 생리 작용의 일부라서 오히려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진즉에 부피가 줄었어야 할 것이 맘대로 덩치를 키우고 돌아다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정체를 드러내고 돌연사하면, 걔만 죽은 게 아니라 그 위에 올라탔던(돈도 없으면서 펑펑 써대었던) 상당수의 경제 주체, 대중들이 함께 죽습니다. 이런 게 공황입니다. 따라서 버블과 공황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분수도 모르고 즐긴 대가를 나중에서야 혹독히 치르는 거죠.

이 책의 제목과 주제는 "인플레이션"입니다. 인플레 때문에 물가가 살인적으로 올라서 국민들이 도저히 살 수가 없다, 이런 걸 지적하는 건 아닙니다. 물론 장바구니 물가 수준에 비해 소득의 오름세가 너무 더뎌 못살겠다는 아우성은 곳곳에서 들리고, 이 책에서도 김동환 소장님 같은 분이 (심지어 작년 촛불집회는 정치적 성격보다 민생고의 절규라고 봐야 한다면서)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도 세 분 전문가가 거의 의견이 일치하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지금 한국 대중의 불만과 좌절은 물가고 때문이 아니라, 벌이가 시원찮은 데서 연유한 부분이 더 큽니다.

그게 그게 아니냐는 반론은 경제를 모르는 소치인 게, 각각의 경우 처방이 다르기 때문이죠. 다른 정도가 아니라 180도 반대 방향입니다. 물가가 쓸데없이 높기만 하다면 지금 시중에 풀린 돈을 거둬들여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 물가는 적정 수준인데, 다만 지갑이 텅텅 비어서 문제라면, (의미심장하게도) 정부는 금리를 더 낮춰 시중에 돈을 더 돌게 해야 합니다. 전자는 허리띠를 졸라 긴축을 하자는 거고, 후자는 여력이 있으니 당장 빚을 좀 내서 실탄을 보충한 후, 신나게 번 뒤(그럴 전망이 있다는 뜻) 나중에 갚자는 거죠. 후자를 무작정 죄악시하는 시각은 역시 경제를 모르는 소치입니다. 김동환 소장님은 "생일 하루 잘 먹자고 사흘 굶을 생각이냐"고도 하시는데, 그냥 당장의 지출만 줄이고 궁상 떨다가는 평생 가난하게 그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취지입니다.

이 책은, 지금 우리가 어느 수준, 어느 정도 역량을 가졌는지 냉철하게 진단하여, 주제파악 후 긴축, 긴축 모드로 회귀할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세계적 경기 팽창 모드에 편승해서 돈 좀 벌어 볼 것인지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란 전제 하에 모든 논의를 시작합니다. 제목은 소박하게 "인플레이션"이지만, 내용은 차라리 "한국과 세계의 경제는 지금 어디로 가는가?", 거시경제 이슈 전반을 모두 망라한다 할 만큼 광범위합니다.

주제가 광범위하면 "거, 말은 듣긴 좋지만 하나마나한 덕담만 주고받다 끝나는 거 아냐?" 하고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시중에 그런 책도 많죠(아니면 정반대로, 특정 정파의 정강 정책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선전물, 경제 서적의 탈을 쓴 정치 서적도 있습니다). 이 책은, 적어도 그런 류는 아닙니다.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너무 과감한 것 아닌가, 본래 경제 현상이라는 게 이처럼 직설적이고 직관적인 말로도 표현 가능한 주제였나, 새삼 놀랄 만큼, 세 분 전문가 모두 시원시원하게 막 지르십니다. 막 지르는 식으로 논의를 끌고 가면 재미도 나고 논지가 바로바로 이해 되는 장점은 있는데, 깊이가 없거나 편향된 결론만 잔뜩 얻고 끝날 위험도 있습니다.

이 책은 (고수들답게) 상당수 이슈나 현황에 대해 합의를 공유하는 세 전문가들의 토론이지만, 반대로 의견이 갈릴 때는 대립 지점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아주 솔직한 책"입니다. 대개가 토론, 대담 형식이라, 독자는 어느 한 가지 결론에만 오도, 고착될 염려가 적습니다. 곰곰히 숙고하면 세 분 중 어느 전문가의 결론이 옳을지, 논점에 따라 개별적으로 알찬 깨달음이 자리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하나만 놓고 보면, 무작정 긍정하거나 반대로 거부하게도 되고, 아예 뭐가 뭔지 몰라 판단을 못하기가 십상이죠. 그러나 서로 미묘하게, 혹은 판이하게 다른 세 아이템을 같이 대조하면, 각각의 장단점이 잘 파악되어 무엇을 취사선택할지 판단이 빨리 섭니다.

의견이 일치하는 대목에서도, 세 분 고수는 같은 현상, 결론, 논리를 두고 서로 다른 표현으로 독자에게 풀어 줍니다. 그래서, 설령 한 분의 입장이 잘 이해되지 않더라도, 다른 분의 다른 버전으로 다시 듣고 나면 앞 분의 논의까지 덩달아 납득됩니다. 앞으로, 난해한 주제를 다루는 경제 서적은 모두 이런 포맷을 취한다면, 독자들에게 꽤 유익한 공부가 될 것도 같네요. (헛된 기대이겠습니다만)

1장은 자산시장에 대한 전망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작년 하반기부터 주가가 고공행진이고, 아파트값도 (전체는 아니고 일부 지역에서 - 라곤 하나, 그래도 꽤 추세적입니다. 전엔 다들 이게 일시적이라고 봤는데 너무 오래갑니다. 지난시절과는 패턴이 다르긴 하나, 여튼 호황은 호황입니다. 많은 전문가분들 위신이 크게 상할 만큼) 투기과열지구 지정이 이어질만큼 심상치 않습니다. 그럼 고수들 이야기를 들어 봐야죠. 이거 큰 재앙으로 이어질 거품으로 치닫는 거냐. 아님 미래를 낙관해도 된다는 어떤 시그널이냐. 물론 후자 쪽으로 치달을 나이브한 이는 일반인 중에도 없을 겁니다. 문제는 신중하게 처신하되, 어느 수준까지 신중할지를 판단 잘 해야 한단 거죠. 아파트 버블 터질 거라고, 박 정부가 정권 유지를 위해 인위적으로 부양하는 거라고 그렇게들 지적이 나올 때, 현장에서는 다들 코웃음을 쳤습니다. 이론에만 매달릴 뿐 시장의 형편을 너무도 모르는 소리라고요. 이게 작년 이맘때 분위기였어요.

김한진 박사는 (좀 많이) 신중하자는 입장에 기웁니다. 이 1장에서뿐 아니라 책 전체를 통틀어 이 입장이 꽤 일관되어 있습니다. "경제에는 공짜가 없다. 2008년 위기는 양적 완화를 위해 미봉되었을 뿐, 누군가가 무분별하게 소비하고 타인에게 전가한 부담, 해악은 아직 덜 해소되었다. 이런 판에 다시 통화를 팽창하거나 방만하게 시스템을 관리하면 다시 부실이 폭발할 수 있다." (책의 표현은 아니고 독자인 저 나름대로 요약, 리프레이즈한 겁니다) 반면 김일구 한화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이미 부채와 위험 요소는, 놀라울 만큼 효과가 컸던 연준의 핸들링으로 다 녹았다(녹았다는 건 영어식 표현이지만, 우리말로 저리 직역해도 그 뜻이 잘 전달됩니다. 본래 경제 정책은 경로 곳곳에 포진한 폭탄을 해체하고, 독성 물질을 옅은 농도로 잘 녹여 내는 수완이 그 본질이죠)"는 전제 하에, 이제 성장을 위해, 경제 주제의 지갑을 두둑이 채우기 위해 과감한 행보를 디디야 할 때라는 쪽입니다. 세 분 중 김일구 센터장이 가장 알기 쉽게, 또 직설적으로 말을 하는 타입입니다. (그래서 가끔은 사회자 격인[실제로 방송 프로그램 진행을 맡고도 있습니다] 김동환 소장이 책 중 좌담에서 개입도 하더군요)

"이러다 일본 된다." 이 진단은 보수 언론, 심지어 대중 사이에서도 폭 넓은 지지를 얻고 있는 편이죠. 그런데 이 책 대담자 세 분 중, 적어도 두 분은 이 말에 정면으로 반대합니다. 특히 김일구 센터장 같은 분은 여러 근거를 들어가며, 결코 한국은 일본처럼 장기침체에 빠지지 않을 것임을 확신합니다. "잃어버린 30년을 겪은 일본이 특수할 뿐이지" 다른 각국의 경제, 특히 조건이 여러 모로 다른 한국은 다른 길을 걸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거죠. 제가 가장 속이 후련했던 건, 이 일본의 사례를 일반화할 게 아니라, 기존 경제학 교과서에서 써 오던 "저축의 역설" 한 마디로 정리하면 될 것 아니냐는 주장이었습니다. 기존의 개념틀로 설명이 가능한 내용이면 그로 환원하면 충분하다는 건 어느 학문에서나 공통된 상식입니다. 번거롭게 매번 새 말을 만들어낼 게 아니라 말이죠. 또, "일본화"의 프레임은 결국 거기서 빠져 나올 답이 없다는 점에서 건설적이지 못한 논의입니다. 허나 "저축의 역설"은 경제학자들이 고안해 둔 이론적 해법과 관료들이 실제 운용 과정에서 터득한 경험적 처방이 이미 있습니다. 어느 것이 낫겠습니까?

김동환 소장 같은 분은 이 대목에서, "작년 촛불집회를 보라. 우리 국민들이 이처럼 역동적인데 과연 침체가 있을 수 있겠는가?" 같은 말까지 합니다. 이는 예전 학장 시절 정운찬 전 국무총리도 수업 시간에 비슷한 말을 한 적 있죠.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요(생각해 보니 맥락도 큰 찬이가 안 나네요).

"소득과 성장이 일치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기업은 높은 실적을 거두어도 그 과실은 개별 경제주체, 가계의 소득으로 적정하게 분배, 파급되질 않는다." 근데 이 논의는, 근래 다분히 정치적 논쟁으로 타락한 소위 낙수효과(트리틀다운 이펙트) 이슈와는 관점이 좀 다릅니다. 어떤 분은 이 책 세 분 대담자 중 한 분인 김일구 센터장님이 우파 쪽에 치우치지 않았냐고도 하던데, 지금 바로 위에 인용한 이 말을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드는지 물어봐야겠어요. 다만 김 센터장께선 "국가대표를 키운다는 생각으로 대기업을 밀어줘야 한다"는 논지는 자주 강조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또 김 소장님(김동환)과 김 박사님(김한진. 세 분이 모두 김씨라서 책 읽으면서 처음엔 구분이 좀 어렵더군요)이 동맹을 이뤄 반대하는 장면이 연출됩니다. 이런 개인 성향을 파악하면서 읽어야 책이 더 재미납니다.

김 센터장께선 그러나 성장과 소득의 (거의 필연적인) 분리까지 논지를 확장시키시는데,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저는 이런 대목은 좀 의아스럽더군요. 교과서 이야기도 하시지만 거시경제학의 가장 뼈대를 이루는 도그마 중 하나가 "국민 소득 삼면 등가의 원칙"입니다. 경제 구조의 개별 특성에 따라 경로가 길고 짧고, 시간이 덜 걸리고 더 걸리는 차이는 있어도, 결국은 생산국민소득이 분배, 소비 국면에서까지 일치, 균형을 찾아간다는 게 교과서의 가르침이죠. 물론 현실의 사정이 그새 변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원 설마!), 언제나 모범생처럼 근본 명제의 적용과 원용을 강조, 선호하시는 센터장께서 유독 이 대목에서만은 좀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하시지 않나 해서입니다. 다른 이슈를 설명하실 때 너무 사이다처럼 후련한(그러면서도 엄정하고 명쾌하게 교과서적인) 해명을 해 주셨기에 제가 하는 소리입니다.

"우리 나라는 자영업자가 너무 많다." 그러면서도 이 많은 자영업자들이 생산에서 기여하는 비중은 또 적습니다. 그 말은 자영업자들이 대개 현장에서 돈 많이 못 벌고 고전한다는 뜻도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들이 자기 책임 하에 개별적으로 뛸 게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기량을 효율적으로 쏟을 직장을 마련해 주는 게 더 중요하다"는 제언도 합니다. 상당히 과격하지만, 자영업이 점차 특정 프랜차이즈들로 통합되어 가는 양상이, 어느 정도는 이런 진단을 반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 점주들은 본사와의 갑을 관계 대립상을 그리 부각하지 않고, 정부 쪽에 불만을 토로하는 쪽으로 바뀌더군요. 이 논의는 과거 영세농이 너무 많아 구조 개편이 필요하다는, 엄청난 폭발성을 지닌 이슈와도 유비 관계가 성립합니다. 잘못 다뤘다가는 큰일나죠.

김한진 박사님은 그럼 (정치적으로) 개혁 성향(소위)이냐,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김 박사님은 자유주의 진영을 대변하는 편이더군요. 정부는 최소한으로 개입을 억제하고, 경제의 작은 지류에까지 속속 파고들어 전체적으로 놀랄 만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시장(market)"에 더 많은 권한을 넘기라는 입장입니다. 책에는 심지어 공기업을 대폭 민영화하고, 정부는 새로운 공기업을 만들어서 유능한 젊은 인력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마련해 주라는 제언까지 나옵니다. 듣기엔 큰 기대를 부풀게 하는 면도 있습니다만(국지적으로 타당하기도 합니다), 현실적으로는 너무도 많은 난관이 기다릴 것 같습니다. 공기업 노조측에서 과연 가만있겠습니까? 또, 어떤 기준으로 무슨 인재들을 선발하여 그런 "특혜"를 줄 것인지를 놓고, 끝도 없는 분란이 일겠지요. 안 봐도 눈에 선합니다.

지금 세계는, 2008년 대재앙이 남긴 몹쓸 폐단을 과연 말끔히 쓸어내고 나서 새출발을 다짐하는 중인가? 이에 대해서는 제가 지난 3월경에 서평도 쓴 <트럼프 시대 호황....>에서 이미 한 입장을 광폭으로 전개하고도 있었습니다. 오바마를 지지하거나 높이 평가하든, 그렇지 않든, 최소한 그가 위기 수습을 멀끔하게 해 놓았다는 데 대해선 의견이 일치합니다. 그의 가장 극렬한 반대자인 트럼프가, 이제 확장 정책, 과감한 인플레이션 자극을 통해 호황기를 한번 열어보자고 나서는 건, 전임 오바마가 일군 성과를 그도 긍정한다는 실토밖에 안 됩니다(역설적이죠). 소규모 개방 경제로서 대외 요인에 너무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엮일 수밖에 없는 우리(이 책에도 나오듯 소위 베타가 큰)로서는, 이 국면에서 과감한 결단을 내려 영리한 실속을 챙길 건지, 아니면 이른바 "재정 건전화, 충실"이란 매력 없는 옛 숙제에 계속 매달릴 건지, 선택의 기로에 섰다고 해야겠습니다. 세 분 전문가가 호방하게, 솔직하게, 기탄 없이 심중을 털어 놓는 토론을 구경하며, 독자도 함께 각성하고 공부하는 바가 많았네요. 말미에 실린 "트럼프라는 현실"은, 정치적 선호나 프레임이 깔리지 않은, 냉정하면서도 현실에 밀착한 쾌도난마식 설명이 너무도 재미있었습니다. 이 책, 한마디로, 소설보다 더 재미있으면서, 보약보다 영양가 높은, 교과서보다 더 공부가 되는, 종합 선물 세트 같은 읽을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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