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으로 향하다 - 리암 니슨 주연 영화 [툼스톤]의 원작 소설 밀리언셀러 클럽 97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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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으면 그거라도 타서 마셔야지 싶은 인스턴트 커피라도, 막상 들이켜 보면 꽤 괜찮습니다. 커피뿐 아니라 모든 싸구려 품목들에는, 특유의 쓴맛("내 다시 이딴 거 쓰는가 봐라")을 안기는 게 있고, 생각밖으로 괜찮았네 같은 묘한 안도감(내지, 내 취향이 이 정도밖에 안 되었나 보다 같은 자괴감)을 주는 게 있죠. 어떤 싸구려는 "이거, 진짜 명품 아냐?" 같은 착각을 선사하기도 하는데, 이미 해당 소비자에게는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튼 이 비슷한 감상이, 개인적으론 예전부터 매튜 스커더 시리즈를 읽으며 느껴 오던 점입니다. 아쉬운 대로 로렌스 블록의 명작-명작 맞죠-들은 이처럼 짬짬이(심지어 지금도) 밀클 브랜드로 번역되어 나오는데, 왜 조너선 켈러먼 작품은 소식이 없는지 저로서는 잘 짐작이 안 됩니다.

이 장편은 이미 영화로도 옮겨졌고, 이상하게도 그 영화는 Y2K 운운하며 1999년으로 시간을 세팅하지만 제작연도는 얼마 되지도 않았습니다(그러니, 주연인 리암 니슨이 스커더 캐릭터로 나오기엔 좀 늙었죠). 반면 지금 이 원작은 1992년에 쓰여졌습니다. 그래서 "팩시밀리라는 게 발명되어서 5마일, 10마일, 심지어 지구 반대편에서까지 바로 자료를 받아볼 수 있다...." 같은 희한한 말이 스커더 입을 통해 나옵니다. 물론 팩스가 쓸모없다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시설이라면 웹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를 대비해서 구비를 해야 하고, 책임 있는 공적 섹터에서도 공공서비스의 일환으로 (수익이 나든 안 나든) 지원, 운영을 해야 합니다. 근데, 제가 좀 의아한 건, 팩스는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한국에서도 널리 쓰였거든요.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묘사로는 "...호텔 전화 시스템 방식이 변경되어, 밖에서 걸려 오는 전화는 여전히 프런트를 통해야 하지만, 객실에서 외부로 거는 전화는 교환을 거칠 필요가 없어졌다.." 같은 말도 있습니다. 한국이라면 1992년에 어땠을 것 같습니까? 심지어 그 시절에도, 이런 건 우리가 전혀 시대 트렌드에 뒤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매튜 스커더가 마약상한테 전화를 받고 그의 자택으로 달려갈 때(영화에서는 좀 더 고급 레지던스였습니다. 물론 브루클린에도 고급 주거지구는 여럿 있습니다만) "오로지 죽은 자들만 브루클린을 알고 있으니 (거길 알려면) 나도 죽어야겠군요."라며 너스레를 떨죠. 이건 토마스 울프의 소설 <You Can't Go Home Again>중에서 따 온 인용구지만 여러 꼴로 패러디되어 널리 쓰입니다. 단 영화에서는 이게 대사로 안 나오죠. 넣었으면 멋있었을 텐데(배경도 별도 각색 없이 브루클린이고 실제 로케도 거기서 이뤄졌으면서). 인문 소양이 부족할지는 모르나 여튼 이 원작에서도 코리 형제가 브루클린 토박이라고 분명히 나옵니다(이 농담을 이해 못해도 말이죠).

"내가 택시 타고 오라고 했잖소? 비용도 내가 내겠다는데 왜 그런 푼돈을 아끼는 거요?"
"여기 뭘 타고 오든 그건 내 마음이오. 당신이 내게 그걸 가르쳐 줄 필요는 없소. 내가 당신한테 어떻게 하면 애들을 마약쟁이로 만드는지 가르쳐 줄 필요가 없듯이 말요."

이건 정말 되게 웃기는 소린데, 그 코리 형제의 손윗사람은 지하철 치안이 불안하니까(특히 그 일대라면) 걱정이 되어서 하는 소린데(여기서는 보안 이슈와 무관합니다), 매튜는 저렇게 퉁명스레 받아치는 거죠. 헌데 내 돈을 노리고 적당히 시늉만 하는 인간은, 확실히 아니라는 걸 증명시켜 주는 솔직함이기도 해서, 결국 이 "계약"은 성사가 됩니다. 스커더가 진실한 인물(기분 콱 상하게 하는 말을 하긴 해도)임은 확신이 되니까 말이죠.

둘은 전략을 짜서, 전혀 단서를 남기지 않은 놈들에 대한 실낱 같은 정보라도 건지기 위해, 돌이라도 던져 수면에 파문을 일으켜 보기로 합니다. 우선 이 바닥에 밟이 넓은 대니에게 200달러를 건네주죠.

"이걸로 택시값이나 해요."
"나더러 200달러 받고 지금 택시 불러달라는 것?"

".... 로빈 훗 이야기는 나도 어려서 좋아했지. 헌데 공공의 안녕과 정의를 걱정하는 마약상이라고? 자기 마누라가 안전하다면 됐지 왜 경쟁자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나? 누가 걸려들어 인질금을 뜯기면 라이벌 업체의 자금 사정이 위축될 테니 지한테는 고만큼이라도 더 좋은 것 아님?"
"하 이거... 당신한테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그럴싸한 이야기 같았는데 말야.. 사실은...."

이런 재치 있는, 서로 흉금을 훤히 들여다보면서 주고받는, 은근한 비꼼과 걱정과 양해가 오가는 대화들이야말로 스커더의 세계가 드러내는 짖궂은 매력 중 하나입니다. 저 대목에서 교정을 해야죠. 대니 보이가 알아듣는다면 다른 비슷한 처지의 타인들도 눈치를 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담배나 술 때문에 죽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시오. 약 하는 사람들이 없어지면, 자연 나 같은 놈들도 없어지게 마련 아니오."

이건 가당찮고 흔한 합리화이므로 대꾸할 가치도 없습니다. 허나 마약이 사회의 근간을 좀먹고 파멸로 이끈다는 점만큼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죠. 이런 말을 하는 본인도 크게 꿀리기에 스커더에게 접고 들어가는 겁니다. 술 이야기를 하면 스커더가 사실 할 말이 없어지기도 하고요.

스커더는 이 작품에서 "헌금 하는 버릇이 없어졌다"고 처음 털어놓습니다. 술 끊으면서 같이 없어진 버릇이라는데, 사실 그는 교회나 성당에 어떤 특별한 경의를 가져서가 아니라, (마치 돈을 갖다 버리듯이 - 그래도 안 쓰게 된 표를 꼭 환불해야겠다는 등 그가 돈 개념이 없는 건 아니고요)버릇처럼 헌금을 하는 점 우리 독자 모두가 압니다. 여러 동기가 있었고, 말로 표현은 안 해도 대략 뭔지 정도는 우리가 짐작을 합니다.

잔혹한 묘사까지는 아니라도 설정상 끔찍한 연상을 이끄는 서술이 있으므로 비위 약하신 분들은 주의가 필요합니다(이 시리즈가 대개 다 그렇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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