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비밀 - 뇌는 어떻게 마음을 창조하는가 한림 SA: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15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편집부 지음, 김지선 옮김 / 한림출판사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한림 SA 시리즈의 직전 권이 <기억의 비밀>이었습니다. 학계의 최첨단 성과를 일반 대중에게 이처럼 알기 쉽게 풀어 주기란, 해당 분야에 완전히 달통한 석학(들)이라고 해도 결코 수월하지 않습니다. 인류의 문명을 몇 단계 진보시키는 과업 외에도, 이처럼 독자들과의 소통까지 정성을 쏟아 주시는 집필자들에게 감사할 뿐입니다.

<기억의 비밀>을 재미있게 읽으신 분들이라면, 이 책 역시 놓칠 수 없겠습니다(물론, 이 책부터 읽고 <기억...>을 읽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내용 이해가 더 쉬워질 겁니다). <기억...>이 뇌과학 연구가 밝혀낸 뇌 구조와 작동 원리의 해명에 초점이 놓였다면, 이 책은 그 "뇌"를 다소 메타적으로 바라보며, 뇌과학자들의 자기 반성이라 할 고백까지도 흥미롭게 담아 냈습니다. 사람의 뇌, 정신 세계가 샅샅이 파헤쳐지는 게 인간 존엄에 대한 중대한 훼손에 이를 수 있다는 일각의 우려까지, 이들 과학자들께서 "다 염두에 두고 있으며, 우리들 중 역시 개인적으로는 그런 신조에 경도된 이들도 많다." 라고나 하는 듯, 어설픈 독서 대중의 피상적인 인식, 편견에 기한 거부감을 다 헤아린다는 톤이 반가웠습니다. 이렇게 해서 학자들은 (꼭 그럴 필요가 있다면) 기술만능주의에서 한 걸음 뺄 수 있겠고, 어리석은 독자들은 소중한 지식(과 그것이 필연적으로 부를 깨달음 - 영역 불문하고)에 한 걸음 또 다가서는 거죠.

음... 먼저 이 책을 읽기 전, 집필자들께서 "의식, 자각, 각성"을 엄밀히 구분한다는 점을 독자들이 명심해야 할 것 같아요. 먼저 "각성"은 센서...의 작동입니다. "나"라는 어떤.... 인식 없이, 아프다, 뜨겁다, 빛이 눈에 들어온다(그런 해석이나 사고가 아니라 그냥 느낌), 맵다, 뭐 이런 순전한 감각만을 일러 "각성"이라고 합니다. pp.116~117에 보시면, "식물 인간"의 경우 이런 각성만 있고, "자각"이 없는 상태의 대표적인 예임을 알 수 있네요.

반면 자각은 "나'라는 주체감입니다. 책에서는 그 예로 "자각몽"을 듭니다. 꿈인데도 그 꿈꾸는 사람은 내용을 선명히 알 뿐 아니라, "지금 이게 꿈이라는 점"까지도 알고 있으니 상당히 "깨어" 있는, 역설적 상태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 옆에서 나지막히 들리는(깨어 있었다면 충분히 들었을) 음악 소리를 (자는 중이라서) 전혀 눈치 못 챌 수도 있습니다(간혹은 이런 TV나 음악의 자극이 꿈 속에 흘러들어와 컨텐츠를 형성하는데 이건 "선잠"에 가깝죠. 자각몽보다 자각도가 낮아서, 꿈인지 생시인지는 잘 모릅니다).

"의식"은, 이 두 가지 느낌, 즉 자각과 각성이 통합된 상태입니다. 이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손상을 입었다면, 이는 "의식이 있는, 돌아온" 상태라고 판정을 못 합니다. 이 책에도 여러 번 언급되고 현재 이건희 회장 같은 분도 그렇습니다만, 가끔 눈을 크게 뜬다거나 소리에 반응하는 등 반사 작용을 보인다고 해서, "의식"을 되찾기에 성큼 다가선 건 아닙니다. 물론 극히 드물게, (흥미롭게도 이 책의 사례 소개에 따르면) 각성제 같은 것을 먹고 멀쩡한 정신으로 돌아오는 임상례가 있다고는 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환자에게 다 효험을 볼 수 있는 처방으로 일반화가 가능한가? 물론 아니죠. 집필자들은 "대체 왜 그런 경우, 그 환자에게서는 기적 같은 효과가 드러났는지, 우리는 아직 알 수 없다."는 정직한 고백을 합니다. 이 책은 첨단 성과에 대해, 여태 다른 책들에서 잘 다루지 않던(당연하죠. SA니까요) 새로운(또 신기한) 토픽과 친절한 "해설, 전달"을 고맙게도 해 주시지만, 이 시리즈치고는 "우리는 아직 잘 모른다"란 구절이 유독 많이 등장하는 권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친밀감도 느끼고, 내용에 신뢰를 더 줄 수가 있죠.

"뇌는 어떻게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하는가? 뇌는 과연 정신과 육신을 엄밀히 이분하여 사고와 동작을 이루는가, 그렇지 않고 육신과 정신이란 본디 구분이 어려운 일체에 가까운가?" 이 책은 그래서 전권과는 주제와 접근 방식을 현저히 달리하는, "정신"의 탐구에 집중합니다. "정신은 본디 과학의 영역이 아냐!" 그렇게 여기고 싶은 분들은 일단 자신의 방법론에 충실하며 그 나름의 연구 결과를 열심히 쏟아내면 될 것입니다. 이 과학자들은 그런 반응까지 (쓸모가 혹여 있다면) 짬짬이 엿보며, (어차피 통합되고야 말) 거대한 지식 체계의 완성에 보다 가까이 다가설 테니까요. 적어도 이처럼 피드백이 가능한 두뇌, 자신을 재귀적으로 성찰(현재 AI 연구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죠. 복제, 확대, 계산 기능은 그게 아무리 양적으로 압도적이라 해도 지능이 아니에요. 그런 건 이미 70년 전에도 있었고, 잡초 같은 저주 받은 무지렁이도 어디서 베껴서 흉내내거나[정확하게 위도 경도까지 맞춰서 지 얼굴에 지가 침 뱉는 줄을 몰라요ㅋㅋㅋ] 배추장사 아저씨들도 하나씩 들고 다닙니다) 가능한 두뇌라야, 궁극의 진리에 다가설 수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이 역시, 완강한 광신과 비뚤어진 고집(목소리만 크면 다인 줄 알죠)만 내세운 이들이 아니라, 두뇌가 우수하고 현실을 바로볼 수 있는 이들의 몫입니다.

위에서 말한 "각성"은 학자에 따라 "육제적 자아"라고도 합니다. 또, "자각"은 대략 "인지적 자아"라는 개념으로도 치환되는데, 과거에는 이들의 상위에 "자전적 자아"를 두어 최상위, 고차원 사고와 판단을 관할하는 영역으로 간주했습니다. 현재는 비경험적 비실증적이라 하여 생략하거나, 유보적 태도를 취하거나, 혹은 인지적 자아에 통합시키는가 봅니다.

이 책에는 크리스토프 코치 박사(철자가 좀 특이한데 일단 -tof로 씁니다. 성은 독일계 미국인들 중 곧잘 보이는 성씨지만 Koch고요)의 아티클이 많이 실렸는데, 현재 이 분야 최고의 기린아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이분이 쓰신 글에는 신경상관자라는 개념이 그 논지 전개의 핵심을 이룹니다(음.... 그러니, 이분 글에서는 신경상관자라는 단어가 신경상관자 노릇을 하는 셈이기도 하네요? 자기지시 사례의 대표적 예?ㅋ). 저는 처음에 용어 정의 파트를 못 보고 넘어가는 통에, NCC가 뭐의 약자인지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 보고 알았습니다... 만, 책을 두 번째 읽을 때 p44:9에 이미 나왔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죠. 하긴 이런 책이 편집과 편제를 절대 소홀히할 리 없네요. 원문 원저는 말할 것도 없고 이런 좋은 책을 꾸준히 번역해서 펴 내는 한림출판사도 그렇고요.

우리는 대중 저술가로 더 잘 알고 있는 올리버 색스가 처음 고안해 낸 용어 중 "시네마토그래픽 비전"이란 게 있습니다. 아마 많은 뇌과학 관련 대중서에서 이 사레와 함께 자주 언급하기 때문에 익숙할 겁니다. 이 책에서는 "영사적 시야"로 번역하는데, 내용인즉슨 우리 뇌가 외부의 시각적 자극을 연속체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거죠. 영화나 애니메이션도 단절된 여러 컷을 빨리 이어붙이니, 뇌가 이 영상들이 이산적 구조를 지님을 못 알아채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를 속이는 건 영사기뿐이 아니라, 아예 뇌와 눈을 연결하는 신경망 통로 일체였던 셈입니다. 영화는 그래서 우리를 이중으로 속이는 매체이기도 한데, 영화 감독 중 짖궂은 이들은 등장인물이 정신적 충격을 받거나 했을 때 이런 "영사적 시야"를 겪음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한때 정지화면처럼 멈췄다가 밀린 뒷 장면이 화르륵 지나가는 거죠. 버퍼링이 원활치 않을 때 컴퓨터동영상이 어떻게 재생되는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제가 다른 책에서 읽은 내용인데(그 책 저자도 이 책의 집필 참여진처럼 뇌과학의 권위자입니다), 우리 인간의 정신이란 어차피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 구조가 아닌가 하는 (놀라운) 의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놀라운 성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그렇게나 정밀히 작동하는 회로처럼, 면밀히 신호를 분석하여 뇌에 부지런히 전달하면서, 한편으로는 갓난아기처럼 보호해야 할 자아가 따로 있다는 듯 우리를 "해석이 아닌 실재와 바로 접하기라도 하는 양" 즐거운 속임수(물론 그가 아닌 우리에게)를 부리고 있었는지요.

물론 이것은 더 연구가 진척되어야 말끔한 해명이 가능하며, 연구자 자신들이 디지털로 일일이 치환하는 방법론에 기대고 있으니 원 대상까지 디지털로 착시되는지는 또 모를 일입니다. 자, 우리 뇌는 디지털로 소통, 작동하는 구조라면, 그가 인지하는 외계(물리계)는 그럼 아날로그임을 가정하고 이런 말을 하는 건데, 그건 어떻게 우리가 확인할 수 있죠? 한 세기 전 양자의 역설은 어디서 연유했습니까? 관측의 모순을 처음 발견, 입증한 하이젠베르크의 연구에서였습니다. 이미 <매트릭스>같은 영화에서는, 우리 자신의 인지 체계뿐 아니라 객관적으로 존재(이 자체가 아찔할 만큼 모순덩어리인데다 확정할 수 없는 개념)하는 물리계까지도 다 디지털 부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파격적인 가설을 세웠습니다. 만약 물리계 역시 디지털 부호의 더미라면, 그와 별개의 계를 이루는 다른 메타(혹은 평행)의 세계가 있을까요? 왜 하필 이런 의식만 복합적이고

"의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에서 끝없이 제기하는 의문은, 대체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가 어디까지이며, 무엇이 나를 의식하게 만들고, 그 "자아, 의식"이 (특히 진화론적 이유에서) 있어야 할 이유는 또 무엇인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합니다. (p107 등에서, 왜 베타[경제학의 베타... 통계학의 베타를 안다면, 이 베타도 어렵지 않게 개념이 잡히겠죠]가 높게끔 유기체가 진화했는지,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한낱 단백질이 어쩜 이렇게 자신 속에 우주를 닮은 꼴을 품으면서 진화했을까요? 바퀴벌레 한 마리 뉴런의 베타를 닮으려면, 구글이 보유한 서버 전체를 가동해도 현재로선 힘들다고 합니다. 생명체의 경이로움에 새삼 마음이 숙연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코치 교수는 이런 말도 예언처럼 내뱉습니다. "의식은 진화 과정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거기에 있어오기만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우리 독자들은 그럼 어쩌란 말인지요. 뭔가 답을 얻기 위해, 코치 교수님 같은 분은 해답을 내어 줄 줄 알고 책을 펼쳤는데도 이리 야속하게 나오시다니!

데카르트의 그 유명한 언명이 또 나옵니다.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다. 저건 나의 착각이요, 환청이요, 환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의심을 하는 나 자신이 존재함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명확한 진리이다." 어쩌면 이 말대로, "의식, 자각"하지 않게 되는, 그저 "각성(혹은 그조차도 없는)"만 하게 되는 그 순간, 우주는 순식간에 부재하게 될지 모릅니다. 의식과 존재가 그저 주관과 객관, 주제와 객체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라는 통합적 각성이 가능하다면, 그게 존재와 지(知)의 궁극이겠고, 과학과 영적 세계가 비로소 오랜 이산을 극복하고 하나가 되는 순간일지 모릅니다. 하나만 아는 사람은, 그 하나도 올바르게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게 마련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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