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여인 세계문학의 숲 35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김규종 옮김 / 시공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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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체홉은 단편소설과 희곡의 대가로 너무나도 유명한 작가이다. 그러나 나는 이 '귀여운 여인'을 통하여서 처음으로 그의 명성을 확인하게 되었다.

팟캐스트 중에서 '일당백'이라고 일생동안 당신이 읽어야 할 백권의 책이라는 콘텐츠가 있다. 정영진, 정미녀 그리고 정박이라는 삼J가 진행하는 책 소개 관련 팟캐스트인데 거기서 안톤 체홉의 귀여운 여인과 갈매기라는 작품을 소개받았다. 먼저 귀여운 여인을 읽었다.

솔직히 귀여운 여인은 선입견이 있었다. 워낙 유명해서 이름을 옛날부터 많이 들어봤으나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귀여운 여인'이 먼저 개봉하고 내가 그 영화를 먼저 본 바람에 체홉의 소설도 그 비슷한 사랑을 찾는 여자의 이야기가 아닐까 막연히 먼저 생각하고 가볍게 여겨 여태껏 책을 보지 않았던 것이다. 제인 오스틴의 책이 아니더라도 이렇듯 오만과 편견이 무서운 것이다.

 

책을 보는 내내 왜 올렌카가 귀여운 여인일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의 요소 요소에서도 "귀여운 여자야!"라고 그녀의 남편, 그녀의 이웃들이 올렌카를 보고 감탄하는 부분이 많이 나온다. 책에서 올렌카는 항상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생각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여 마치 자신이 오래전부터 그 생각을 해왔던 것 처럼 자기화한다. 그리곤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가 흡수한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대화의 소재와 주제로 삼곤 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와 생각을 진심을 다해 자기화하여 밝게 때로는 우울하게 표현하는 그녀를 보며 그녀의 주변 사람들은 늘 "귀여운 여자야!"라고 칭하고 귀여운 여인 올렌카라는 것이 공식화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왜? 올렌카는 귀여운 여인인가?

처음 작품을 접할때는 자신의 주관이 없고 견해가 없고 그저 남을 따라하기만 하는 줏대없는 여자로 판단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된다, 여전히) 올렌카를 보면, 지금까지 사회문제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주관이 없이 남편의 생각을 그대로 따르는 그런 여성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런 여성들은 아직 여전히 많다. 우리 여성들은 정치, 경제문제애 대해서는 교육 연예 사회 문제와 비교하여 볼 때 견해가 없는 사람이 좀 더 많은 것 같다. 따라서 올렌카는 이런 여성 혹은 성의 구분없이 사회 전반과 지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을 상징화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였다.

그런데, 톨스토이는 이 작품의 올렌카를 당시 러시아의 민중으로 치환하고 이 소설이야말로 러시아 최고의 문학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순수의 결정체이며 그래서 계몽의 대상으로 러시아 민중을 생각했고 올렌카는 이러한 러시아 민중의 잘 형상화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올렌카는 사랑하는 사람의 의견을 수용할 때 편견이 없이 그대로 수용한다. 한치의 의심과 잣대를 둘러댐이 없다. 사랑하는 이의 이야기라면, 진실로 믿고 진심으로 그들을 대해왔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나의 편견이 여성학적 관점에서만 판단되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톨스토이를 소환하면서 그의 의견을 갖다댄다는 것은, 나 또한 올렌카일수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나 역시 나만의 주관이 없이 톨스토이라는 권위자의 말에 솔깃하여 '아~ 그런가'하고 나를 의심하고 반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과연 사람이 온전히 자신만의 견해를 갖는 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얼마나 나를 단련해야 하는가. 온전한 내 의견과 외부 견해의 유입은 어떤 비율이어야 황금비율이 될 것인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내 것화해야하는 가.

책을 곱씹으면 곱씹을 수록 귀여운 여인의 정의는 무엇인지 나는 귀여운 여인인지 어떤지, 나를 자꾸 의심하게 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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