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Q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 1
조엘 디케르 지음, 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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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엘 디케르..

작가의 어머니는 혹은 할머니는 작가가 어렸을 때 뜨개질을 하시곤 하셨을까?

아무것도 아닌 실을 이리저리 떠서 다양한 무늬를 만들어내는 마법을 따스한 미소와 함께 작가에게 보여주곤 하셨을까?

우리 엄마가 그랬다.

꽈배기무늬가 멋지게 들어간 카디건이나 알록달록한 무지개 바지, 빨간 실로 딸기무늬를 넣어주셨던 조끼..

노랑색이 귀여웠던 망토까지..엄마는 늘 손뜨개로 만드신 옷을 맵시나게 내게 입히시곤 하셨다.

그것으로 생업을 삼기도 하셨던 기억이 또렷하다.

솜씨가 좋은 엄마를 바라보며 난 늘 가슴 조리곤 했다. 느닷없이 몇개의 뜨개코를 빼놓으셨다가 한참 뜨고 나서 뒤에 남은 코를 멋지게 잡아끌어 뜨개질을 이어가셨다. 그렇게 하고 나면 햇님 달님의 동아줄이 저렇게 생겼을거야..하고 끄덕이게 하는 꽈배기 무늬가 생기곤 했다.

엄마가 그렇게 코를 떼어 놓고 뜨개질을 할때면 저게 풀리면 어쩌지? 어린 걱정이 꽈배기 무늬보다 먼저 엄마의 뜨개 바늘위를 달렸다.

점점 줄어들기도, 점점 늘어나기도 하는 마법의 뜨개질을 보며 나는 꿈을 꾸곤 했다.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

두 권이나 되는 녹녹치 않은 분량(열권도 넘는 대작들도 있지만)에도 그리 어렵지 않게 읽히는 책이다.

잘 짜여진 뜨개코트 같다는 느낌. 과하지 않은 무늬들로 뽀송한 털이 섞인 크림빛의 뜨개코트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2.

 

꽤 잘나가는 작가인 마커스는 첫 작품의 성공 뒤에 글이 써지지 않자, 옛 스승인 해리를 찾아가게 된다.

그 곳에서 마커스가 만나게 되는 사건.

33년전 실종된 소녀의 사체가 해리의 앞마당에서 발견되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노라 켈러건.

실종 당시 15세였던 소녀.

해리는 주용의자로 체포되고, 해리가 그랬을 리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마커스는 조사를 시작한다.

해리를 통해 듣는 충격적인 이야기.

해리는 노라를 사랑했다고 한다. 노라 또한 해리를 사랑했다고 한다.

이 터무니 없는 사랑의 증언을 토대로 마커스는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기 시작한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모든 오로라 사람들의 이야기가 드러나고 그들 사이의 연민과 애증과 애달픔이 드러나게 된다.

누가 노라를 죽였는가.

 

1부의 내용은 오로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느 누구도 뺄 것 없이 노라가 사라지던 1975년의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며 증언한다.

따로 벌어진 사건이겠지만 결국 하나의 바늘에 꿰어진 코일 따름이다.

잠시 앞 뒤로 순서만 바꾸어 배열되었을 뿐

2부에서 드디어 본격적인 무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커스와 게할로우드..그들이 본 것은 정말이었을까?

해리가 혐의를 벗고,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는 정말 놀라를 죽인걸까?

놀라의 비밀과 해리의 비밀이 고스란히 보여지게 되는 2부의 모습에서는 극한 상황에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인간이 얼마나 교활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3.

범인이 누구인가?

이 소설은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람들의 이야기 .

그들의 속내와 만나게 되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조끼의 무늬도 중요하지만 실이 더 중요했던 엄마처럼 말이다.

절망은 상실은 사람을 얼마나 초췌하게 만드는가. 제니가 그랬고, 노라의 아버지가 그랬고, 루터가 그랬으며 해리가 그랬다.

욕심은 사람을 얼마나 간교하게 만드는가. 태미가 그랬고, 프랫이 그랬고, 트래비스가 그랬으며 해리가 그랬다.

사랑은 사람을 얼마나 달뜨게 하는가. 노라가 그랬고, 루터가 그랬고, 해리가 그랬다.

이 모든것을 우리는 사람이라 부르지 않을까? Human!

 

#4.

마커스와 해리의 대화를 토대로 쓰여지게 되는 글은 주고 받는 대화를 주축으로 이루고 있다. 마치 <악의 기원>이 주고 받은 편지로 이루어진 것처럼 말이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제자의 모습에서 어느덧 훌쩍 커버린 제자와 스승의 조우도 볼 수 있다.

첫 코를 뜨고 이게 뭐가 될까? 가늠도 못하겠지만 어느 순간 모자도 되고, 장갑도 되어져 있는 것을 보는 것처럼,

과정 속에서 훌쩍 커버린 마커스를 만나게 된다.

서른 한가지의 가르침.

골라서 배우는 재미가 있을까?

 

 

< 해리가 이렇게 말했어요. ' 자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게. 삶에 의미를 줄 수 있는 것이 두 가지 있네. 책과 사랑'>

마지막에 마커스가 남긴 한마디가 이 책의 마지막 매듭이 될것이다.

잘 짜여진 카디건이다. 과하게 치장하지 않고 따스하게 가슴에 품게 되는..

중간 중간 몇번인가 코를 놓치고 방황하긴 하지만, 어느새 찾아내어 흔적없이 뜨개질을 해 낸 멋진 작품이다.

 

크림색 카디건.

해리쿼버트사건의 진실은 내게 그렇게 남게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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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봄에 나는 없었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1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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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 소설의 경우 번역작가가 얼마나 중요한가.

 

 올 해 들어 두어권의 번역서를 읽은 것 같다. 그 중 하나는 도저히 안되서 던져 놓았다.

거친 독일빵을 뜯어 먹는 것처럼 잘 씹히지도 않고, 자꾸 내 혀를 깨물게 되었다.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극찬을 했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왜? 그 내용을 다 읽지도 못한 결과, 내 몫의 감동과 평가를 내릴 무엇이 준비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앤 스쿠다모어.

이 가여운 여인의 <자신과 마주하기>는 얼마나 솔직하고 적나라한가.

아가사 크리스티의 치밀하고 섬세한 심리의 묘사, 그러나 그것이 한 사람의 내부에서 조근 거리는 것이 아닌 주위의 환경과 주변의 사람들의 심리와 함께 미묘하게 연결되어지는 상황은 정말 대단하다고 밖에 말 할 수 없다.

심리의 문제는 자칫 이리저리 펼쳐내다 방만하게 이루어지기 십상인데, 너무나 명확하고 깔끔하게 떨어진다.

조앤와 로드니,레슬리 셔스턴, 에이버릴과 바버라 ,토니, 블란치...

이 다양한 이들의 심리와 삶의 결을 그려내는 데 작가의 필력이 드러난다.

마치 각각의 인물들이 제 목소리를 내듯, 라디오 드라마를 눈으로 듣듯..번역가의 힘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나에게 맞는 작가가 있듯,

나에게 맞는 번역가도 분명히 있다.

공경희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가장 완벽하게 드러내 놓을 수 있도록, 숨쉬는 번역을 해 내셨다고 감히 평가하고 싶다.

 

#2. 가장 두려운 일

 

식구들이 학교를 가고, 출근을 하고 나면 오롯하게 남는 시간. 시간들은 내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한 발 물러서 바라보게 되는 내 모습. 처음엔 낯설기만 하다.

자신과 마주하는 것이 얼마나 낯설고 두려운 일인지 나는 매일 깨닫는다.

책을 읽고, 게임을 하기도 하고, 때론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기타를 끼고 앉아 단순한 코드 진행에 스티브바이의 연주를 흉내내기도 한다. 실력은 따라주질 않지만, 그의 행동을 따라하다보면 슬며시 웃음도 지어진다.

삶의 어느 영역에 놓여있든 내가 나를 마주하기란 쉽지 않다. 잘못인 줄 알면서도 굳이 고집을 부리거나, 쉬이 납득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꼴같지 않은 자존심 때문에 오기를 부리기도 한다. 자신이 정한 자신의 모습에서 한 발도 비껴서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마치 자신의 삶 전체를 부정하는 일이라도 되는듯이 말이다.

또한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타인을 폄하함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받으려는 비열한 행동조차 서슴지 않는다.

이런 자신을 한 발 물러서 그 어떤 변명도 없이 마주 본다는 건 얼마나 끔찍한 일일까.

조앤은 사막에 고립된 상태에서 가족들과 자신의 관계를 되짚어본다. 자신의 삶에 보여지는 고집과 오류를 여과없이 마주한다. 자신의 변화만이 그 매듭을 풀 첫번째 과제라는 익숙하지 않은 미션을 찾게 된다. 가능할까?

 

로드니의 마지막 말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당신은 외톨이로 앞으로도 죽 그럴거야. 하지만 부디 당신은 그 사실을 모르길 바라"

이 대목에서 나는 대디러브의 로비를 떠올렸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오셨어요 엄마" 했던..

 

#3. 봄에 나는 없었다.

 

내가 그대에게서 떠나 있던 때는 봄이었노라...

책의 첫장에 쓰여진 이 문구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왜 하필 봄일까?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으로 조앤은 자신의 삶이 외롭지 않을 씨앗을 얻었을게다.

사막에서의 모질고 모진 마주하기의 과정은 싹을 틔우기 위한 지난한 시간이었을게다.

그렇게 자신만이 아닌 타인과의 관계를 풀어갈 싹을 들고 돌아온 조앤. 하지만 익숙한 곳에서 그의 싹은 반추의 양분을 더 이상 얻어내지 못한다. 그렇게 시들어버리는 공감의 싹.

그 봄에 뿌려진 씨앗은 결과적으로 결실로 이어지지 못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되는 아이러니.

씨앗도 싹도 없다. 조앤도 없다. 봄이 없다.

뭐 이런식의 비약이 아물거리긴 하지만 말 그대로 비약일 수 있다.

 

사막에서 만난 친구 블란치.

소설의 도입부에서 블란치의 목소리로 듣는 결론.

"하긴 세상이 그런 거지. 붙어 있어야 할 때는 그만두고, 내버려두어야 할 때는 매달리고, 한순간 인생이 너무나 멋져서 이게 현실일까 믿기지가 않다가, 이내 지옥 같은 고민과 고통 속을 메매고! 상황이 잘 풀릴 때는 이 순간이 영원할 것 같은데 -그런데 그렇지가 않지 - 나락으로 ㄸ러어질 때는 이제 절대 위로 올라가 숨쉬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잖아. 그런 게 인생이잖니?"(p25)

"그래도 난 그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봤기 때문에 좋았다고 생각해.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게 무진장 중요하거든. 안 그래?"(p27)

 

#4. 가엾는 조앤의 쳇바퀴

 

랜돌프와 로드니.

<그랬다, 조앤은 남편이 아닌 그 여자를 탓했다.p52>

 

조앤이 바버라에게 떠나던 날.

<눈에 익은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앤은 자기도 모르게 전율했다. 그의 뒷모습이 갑자기 젊어진 듯이 보였다 그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어깨를 펴고 걷고 있었다.....아미 아무 근심 걱정 없는 청년이 플랫폼을 활기차게 걸어가는 것 같았다.p74>

<뭔가를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그런 생각이 이미 머릿속에 있다는 뜻이다....로드니가 그녀가 떠나느 것을 반겼다니..p76>

 

에이버릴의 문제로 로드니와 조앤.

<조앤, 당신 스스로도 믿지 않는 것들로 자신을 위로해봤자 소용없어. p147>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난 이런 말을 할 수 있어 다행이지만.."

그러자 로드니는 아주 뜻밖에도 조앤에게 미소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불쌍한 우리 조앤" p149>

 

바버라의 일로 로드니와 조앤.

<"원하는 게 뭔지 말해주기만 해도 좋을 텐데요."

"바버라 자신도 그걸 몰라. 그 애는 아주 어려 조앤."

"그러니까 여러가지 일을 대신 결정해줄 사람이 필요해요"p165>

 

토니에 대한 로드니와 조앤.

<"토니의 의무는 아빠를 기쁘게 하는 거지 실망시키는 게 아니잖아요."

"난 실망하지 않았는데" p174>

 

이 모든 일에 대한 로드니의 한 마디.

<"감탄스럽고 편리한 감정이야!"p175>

 

돌아오는 길 기차에서 만난 사샤와의 대화

<"그러다가 ....그 일이 일어났어요...기적처럼. 모든 것을 봤어요. 바로 나 자신, 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말이에요. 그 순간 어리석은 가식과 위선이 모두 사라졌어요. 마치...다시 태어난 것처럼..."

"집에 가서 다시 시작해야 해요. 새로운 인생을...처음부터..."p233>

 

돌아온 조앤.

<로드니, 용서해요, 난 정말 몰랐어요....

로드니, 나 왔어요. 집에 돌아왔어요!

어떤 패턴으로 할까? 어떤 것이 낫지? 조앤은 선택해야 했다.

...

... 그녀는 명랑하게 말했다. "나 왔어요. 로드니..집에 돌아왔어요..."p246>

 

일련의 사건들과 그녀가 매 순간 보여내는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들이 얼마나 공포스러웠을까? 옳다고 믿고 있던 것들이 가져온 상처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을테지만, 결국 그녀는 돌.아.온.다.

 

 

나는 어디 있는가? 아니 그 이전에 "나"라고 하는 것이 있는가, 그것이 나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가? 많은 생각들이 오가는 책이었다. 변화라는 말이 갖는 빈약한 구속력도 말이다. 변하는 사람. 변하지 않는 사람. 우리가 말하는 변화란 어쩌면 "탈피"일지도 모른다. 껍질을 벗는 일. 자신의 껍질의 구성요소와 그 본질을 분석하는 것으로 부터 아프게 시작하는 마주하기와 껍질벗기. 굳이 아프락삭스에게 날아가기 위함이 아니어도 말이다.

생각보다 빨리 읽히기는 했지만, 여운이 많이 남는다.

나는...조앤과..많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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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천기담
임철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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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섯개의 이야기

황천기담은 말 그대로 奇談이다. 기이한 이야기. 우연히 들어온 마을 황천에서,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듣게 되는 '황천'의 기묘한 이야기가 매캐한 누런 먼지가 되어 콜록이게 하고, 눈물나게 하며 이어진다.

연작형식으로 묶여진 이 책은 근 십년의 시간동안 쓰여진 것이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꽤 긴 시간이다. 하지만 그게 황천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그 시간은 그저 고만고만한 시간일 뿐일것이다.

칠선녀주에서 시작되어 분홍주까지 이어져 오는 시간은..

떡례-옥봉-금심-홍녀로 이어지는 여인들의 이야기가 익어가고 엮여가는 시간 앞에서라면 더더욱이 말이다.

이건..황천의 이야기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뭔가에 몽롱하게 취해있는 마을(p17), 바로 그 마을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2.

 

칠선녀주(프롤로그)

나비길

황금귀(黃金鬼)

월녀

묘약

 

이 다섯가지 이야기가 황천에서 꿈을 풀어낸다. 한 때 황금광 시대의 중심에 있던 황천. 그곳에 다양한 사람들이 몰려오고 그 곳에서 벌어지는 신화같은 전설같은 이야기이다.

지도에서 잘 찾아지지도 않을 곳이었지만, 독립군과 일본인의 갈등도, 인민군과 국군의 갈등도 보여진다. 모든 갈등은 씨앗을 품고 숙성된 과실 같은 것이었을까?

갈등의 끝자락에 터져버린 상흔은 기어이 다음에 이어질 사건과 사람의 발단이 되고, 원인이 되어 마인드 맵처럼 점점 자라간다.

사랑도, 욕망도, 욕심도, 편견과 분노..모든 것이 황천에 들어와 월녀의 서러운 가슴팍처럼 부풀고 부풀어 더 이상 어쩌지 못하게 충만해지고 씨앗을 뿜어내는 것이다.

 

 

# 3. 밑줄

 

-어쨌거나 당신은 그다지 언짢은 기분이 들진 않았다. 그녀의 거친 말투와 눈빛에서 당신이 재빨리 읽어낸 것은 적대감이나 경계심이 아닌, 어떤 질기고 완강한 외로움이었다. 그 정도라면 첫 만남의 소득치고는 괜찮은 편이라고 당신은 생각했다. (p 49. 칠선녀주)

 

-소문이란 때로 낚싯바늘과 같다. 그건 누도 없이 다만 이빨만 지녔으니까. 그 무엇이건 대상을 가리지 않는, 오로지 철저하게 맹목적이고 무차별적인 공격성. 일단 살 속에 갈고리째 깊숙이 찔러 박히면 끝끝내 상대를 유린해놓고야 마는 집요한 잔혹성과 폭력성. 그 때문에 소문과 낚싯바늘은 항상 어딘가에 피냄새를 감추고 있다.(p55. 나비길)

 

-"그래, 울어라. 마음껏 울어버려라. 울어야만 산다. 가슴속 돌멩이, 목구멍의 핏덩이를 토해내야만 산다....내 가엾은 자식들아. 슬픔이 너의 힘이다. 분노와 한이 너의 힘이다. 고통이, 울분이, 후회가 바로 너희를 살게 하는 힘이다. 그러니, 어찌할 것이냐. 그 힘으로 어떻게든 버티어내거라. 한사코 포기하지 말고 어떻게든 이 끔찍스러운 생을 살아내거라...."

(p224 월녀)

 

-이 살벌한 세상에서 죄 없이 남한테 상처받고 밟혀도, 그쪽을 향해 고함 한번 크게 질러볼 용기조차 없거든. 그래서 세상과 맞서 싸우는 대신 거꾸로 스스로를 학대하고 방기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익숙해져버린 거야. 그 친구들에겐 술은 단순한 술이 아니야. 자신들을 위로해주고 의지하도록 도와주는, 지상에서 가장 미덥고 고마운 상대인 것이지. (p283 묘약)

 

-붉게 충혈된 그의 외짝 눈에는 텅 빈 모래사막이 들어앉아 있었다. 일체의 생기와 온기를 상실한 불모의 세계. 홍녀는 살을 저며내는 듯한 슬픔으로 전율했다. (p304 묘약)

 

-모든 인간은 이야기와 함께 나고 살다가 죽는다. 한 생애는 저마다 하나의 이야기가 되고, 타인들의 기억 속에서 각기 고유한 판본으로 살아남아 떠돈다. 인간의 수명처럼 저마다의 운명대로 잠시거나 혹은 아주 오랫동안까지. 그렇게 세상은 무궁무진한 이야기로 차고 끓어 넘치는 영원한 이야기의 강, 설화의 바다가 된다. (p364.작가의 말)

 

# 4. 이야기로서의 삶.

 

살았다는 것. 이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을 겪고 있는것이다.

자신이 어떤 이유로 세상에 태어나게 되고, 살게 되었는지를 명징하게 밝힐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못살겠어" "죽겠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건, 살아간다는게 녹녹치 않다는 반증일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낸다. 이야기의 끝을 지켜내야 하는 책임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쨌든 "나"로 정해졌고, 주인공이 죽는 순간 끝나버리는 일인극, 혹은 다인극일 이야기 말이다.

지나 온 시간 어디쯤을 펼쳐보면 "정말? 에이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 하는 반문을 "이게 사실이 아니면 내 목숨이라도 걸겠어"하는 눈빛으로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여주던 기억 하나쯤은 있지 않는가?

믿을 수 없는 일들..그러나 일어났음이 분명한, 혹은 일어날 수도 있었음직한 이야기.. 그런 이야기의 뭉치 위를 뚜벅 뚜벅 걷다가 발 밑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두 발로 버텨내며 살아내는 삶.

그 이야기에 꿈이 더해진다면, 환상이 더해진다면, 그건 기가막히게 아름다운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단편으로도 손색이 없고 연작으로 풍성해지는 <황천기담>.

누군가에게 "너 이런 이야기 들어봤어?" 하고 속닥거리고 싶어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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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공중 곡예
다이 시지에 지음, 이충민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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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 하필 공중곡예일까?

 

프랑스어로 쓴 중국인의 글을 한글로 번역한 매우 오묘한 글이다. 작가는 프랑스인들이 거부감을 갖지 않도록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고 했고, 번역가는 최대한 동양적인 정서를 넣으려고 숨죽였다고 한다. 글의 탄생부터가 녹록치 않다.

어릴 때 서커스를 보러 간 적이 있다. 동춘서커스처럼 커다란 천막 안에서 하는 제대로 된 서커스는 아니고, 아마 유랑극단이거나 사이비 약장수들의 공연이었을게다. 다행스럽게도 규모가 작은 서커스에서 공중 곡예사가 곡예를 펼치는 걸 볼 수 있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그네를 타다 홀연 날아올라 공중제비를 넘고 다른쪽 그네에 매달린 남자와 손목을 엇갈려 잡는 묘기는 어린 눈에도 모골이 송연해질만큼 조마조마한 곡예였던 것이다. 몸에 딱 붙는 얇은 타이즈와 얄궂은 장신구를 이리저리 붙인 여자 곡예사는 가난한 선녀였을거라고 어린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돈을 벌러 서커스단에 있는걸꺼라고 말이다. 내 손을 끌고 굳이 서커스를 보러갔던 사촌오빠도 공중곡예 이야기를 했다.

여자 곡예사의 몸매와 아슬아슬했던 옷차림과 농염한 눈빛을 친구들과 방에 모여앉아 손짓 발짓 하며 떠들어댔다.

 

공중 곡예란, 그렇게 꿈이며 환상이며 또한 농염한 것이었다. 화려하며 궁색한 것이기도 했으며, 갈채를 받지만 수모를 감내해야하는 것이다.

그래서 책의 제목을 <공자의 공중 곡예>라고 한걸까? 어쨌든 참 그럴싸한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2. 탱탱볼처럼 어디로 튈지 모를 이야기

 

명나라 황제 정덕제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가 주인공이라는 말이다. 황제의 이야기.

죽음에 대한 강박적인 두려움을 가졌던 황제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대역 네명과 늘 동행한다. 나루토의 분신술 같은 효과를 기대한걸까?

걸음걸이며 말투, 얼굴에 마마자국까지 똑같은 다섯명 중 진짜 황제를 구분해내기란 불가능했다. 그들을 구분 할 수 있는 건 그들이 좋아하는 음료였다. 환관들은 이들을 이렇게 칭한다.

 

 물을 즐기는 황제는 유유수종(類類水宗)

 차를 즐기는 황제는 유유다종(類類茶宗)

 술을 즐기는 황제는 유유주종(類類酒宗)

 유유를 즐기는 황제는 유유유종(類類乳宗)

 꿀을 즐기는 황제는 유유밀종(類類蜜宗)

 

이들을 유유오종(類類五宗)이라 부르는 것이다.

어디를 가도 같이 움직이는 이들 속에 진짜 황제가 있다. 아편을 하고 색을 밝히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황제가 말이다.

늘 그렇듯 불길한 징조는 하늘에서부터 온다. 별빛이 달라지거나 흐릿해짐으로 변고가 시작되고, 화를 피하기 위해 황제는 은밀히 제를 지내러 떠난다.

물론 닮은꼴 넷과 함께.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감히 상상도 안되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길 위에서, 혹은 여정에 만나게 되는 상황과 사건들이 주는 매력은 호기심에서부터 출발한다. 무엇을 만나고 무슨 일을 겪을것이며 어떤 음모가 있을까, 하는 것들..

게다가 이건 온갖 권모술수가 나온다고 해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은 황제의 이야기지 않은가.

황제가 겪게 되는 이야기는 유희이다.

그래서 놀랍고 그래서 엄청나고 그래서 신선하다. 날것처럼 펼쳐지는 적나라한 이야기는 책을 읽는 내내 미묘한 웃음을 흘리게 하고, 저 혼자 붉어지는 얼굴을 통해 얼마나 노골적이고 질펀한지를 증명한다.

그래서 황제는 어떻게 되는가?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되는가?

글쎄..

 

 

#3. 가짜와 진짜 사이.

 

   프롤로그

 

 

  어느 날 황제가 복관(卜官)에게 물었다.

 "내 닮은꼴 대역들이 내 생각마저 따라 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마침내 내가 마음의 평안을 얻겠는가?"

 복관이 대답했다.

 "폐하, 그렇지 않사옵니다. 그날이 오면 폐하는 그 대역들의 대역이 될 것이옵니다."

 

(p13)

 

순간적으로, 남녀노소가 모려들어 해변에 무방비로 누워 있는 고래를 해체하는 장면이 눈앞을 스친것이다.

 그 일시적인 영상은 즉시 사라졌다. ( .....)

 '그 고래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내 대역인가, 아니면 나 자신인가?'

 

(p241)

 

자신과 똑같이 생긴 가짜들 사이에서 죽음의 공포를 피하고, 가짜들이 자신의 흉내를 내는 것을 보며 진짜로서의 우월감으로 그들을 조롱하던 그는, 15장에 이르러 <가짜 닮은꼴 대역>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워지기 시작한다.

진짜 황제 = 가짜 닮은꼴 대역 것이다.

굳이 황제폐하라고 칭하지 않고 '가짜 닮은꼴 대역'이라 하는 것은 무슨 연유였을까?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가의 구분이 필요했던 것일까? 진짜 같은 가짜와 가짜여도 상관없는 진짜 중에 좀 더 가치있는 것은 무엇이었으며 그 가치는 어떻게 주어지는 것인지 자신에게 묻게 되는 것이다.

 

주위로부터 소외될까 두려워 자신과 닮은 사람들을 찾아 그 무리에서 안정을 찾으며 그 속에서도 조금 더 닮은 사람, 조금 더 진짜 같은것을 탐닉하며 조금이라도 다른것을 발견하면 비웃음과 조롱을 던지고 '우리'이기를 거부하는 것. 어쩐지 황제의 유유오종을 닮은것도 같다.

"나"라는 유일무이한 것이 "나"로서 살아내고 "나"로서 평가받는 것은 몹시도 두렵고 떨리는 일이지만, 비슷한 것 속에 숨고 싶지는 않다.

 

#4. 비밀

 

번역을 하신 이충민님은 옮긴이의 말을 통해서 온갖 사료들과 자료들이 나열되어 신빙성으로 중무장한 이 내용들이 사실은 소설적 장치였으며 그 어떤 하나도 진짜는 아니었다고 한다. 텍스트 속의 텍스트..라고 표현하신 부분에서 정말 유쾌하게 웃었다.

소설을 다 읽고 "이제야 다 읽었네 "하고 거드름을 피우는 독자에게 사실은 그게 아니라고 말하는 마지막 장치. 화룡점정이었다.

또한 이 소설에는 아주 유명한 작품의 패러디, 아니 패러디를 넘어 표절에 가까운 희롱도 별것 아니라는 듯 쓰여진다.

현실계와 비현실, 사실과 허구, 진담과 농담.

이 모든것이 어우러져 정신을 쏙 빼놓는다. 그렇게 웃다 고민하다를 반복하다 탈진한 내게 책은 묻는다.

 

"넌 진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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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3 1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13 15: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망할 놈의 수학
카를로 프라베티 지음, 최유정 옮김, 이광연 감수 / 문학동네 / 201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계속 오버랩 되는 책이다.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스토리텔링 수학..비슷한 컨셉의 책들 속에서 세련되고 정확한 개념을 잡아가는 탄탄한 구조가 돋보인다. 게다가 문학적이기까지 하다는 것. 스토리텔링 수학의 표본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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