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봄에 나는 없었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1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3월
평점 :
판매중지


#1. 번역 소설의 경우 번역작가가 얼마나 중요한가.

 

 올 해 들어 두어권의 번역서를 읽은 것 같다. 그 중 하나는 도저히 안되서 던져 놓았다.

거친 독일빵을 뜯어 먹는 것처럼 잘 씹히지도 않고, 자꾸 내 혀를 깨물게 되었다.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극찬을 했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왜? 그 내용을 다 읽지도 못한 결과, 내 몫의 감동과 평가를 내릴 무엇이 준비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앤 스쿠다모어.

이 가여운 여인의 <자신과 마주하기>는 얼마나 솔직하고 적나라한가.

아가사 크리스티의 치밀하고 섬세한 심리의 묘사, 그러나 그것이 한 사람의 내부에서 조근 거리는 것이 아닌 주위의 환경과 주변의 사람들의 심리와 함께 미묘하게 연결되어지는 상황은 정말 대단하다고 밖에 말 할 수 없다.

심리의 문제는 자칫 이리저리 펼쳐내다 방만하게 이루어지기 십상인데, 너무나 명확하고 깔끔하게 떨어진다.

조앤와 로드니,레슬리 셔스턴, 에이버릴과 바버라 ,토니, 블란치...

이 다양한 이들의 심리와 삶의 결을 그려내는 데 작가의 필력이 드러난다.

마치 각각의 인물들이 제 목소리를 내듯, 라디오 드라마를 눈으로 듣듯..번역가의 힘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나에게 맞는 작가가 있듯,

나에게 맞는 번역가도 분명히 있다.

공경희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가장 완벽하게 드러내 놓을 수 있도록, 숨쉬는 번역을 해 내셨다고 감히 평가하고 싶다.

 

#2. 가장 두려운 일

 

식구들이 학교를 가고, 출근을 하고 나면 오롯하게 남는 시간. 시간들은 내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한 발 물러서 바라보게 되는 내 모습. 처음엔 낯설기만 하다.

자신과 마주하는 것이 얼마나 낯설고 두려운 일인지 나는 매일 깨닫는다.

책을 읽고, 게임을 하기도 하고, 때론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기타를 끼고 앉아 단순한 코드 진행에 스티브바이의 연주를 흉내내기도 한다. 실력은 따라주질 않지만, 그의 행동을 따라하다보면 슬며시 웃음도 지어진다.

삶의 어느 영역에 놓여있든 내가 나를 마주하기란 쉽지 않다. 잘못인 줄 알면서도 굳이 고집을 부리거나, 쉬이 납득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꼴같지 않은 자존심 때문에 오기를 부리기도 한다. 자신이 정한 자신의 모습에서 한 발도 비껴서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마치 자신의 삶 전체를 부정하는 일이라도 되는듯이 말이다.

또한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타인을 폄하함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받으려는 비열한 행동조차 서슴지 않는다.

이런 자신을 한 발 물러서 그 어떤 변명도 없이 마주 본다는 건 얼마나 끔찍한 일일까.

조앤은 사막에 고립된 상태에서 가족들과 자신의 관계를 되짚어본다. 자신의 삶에 보여지는 고집과 오류를 여과없이 마주한다. 자신의 변화만이 그 매듭을 풀 첫번째 과제라는 익숙하지 않은 미션을 찾게 된다. 가능할까?

 

로드니의 마지막 말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당신은 외톨이로 앞으로도 죽 그럴거야. 하지만 부디 당신은 그 사실을 모르길 바라"

이 대목에서 나는 대디러브의 로비를 떠올렸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오셨어요 엄마" 했던..

 

#3. 봄에 나는 없었다.

 

내가 그대에게서 떠나 있던 때는 봄이었노라...

책의 첫장에 쓰여진 이 문구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왜 하필 봄일까?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으로 조앤은 자신의 삶이 외롭지 않을 씨앗을 얻었을게다.

사막에서의 모질고 모진 마주하기의 과정은 싹을 틔우기 위한 지난한 시간이었을게다.

그렇게 자신만이 아닌 타인과의 관계를 풀어갈 싹을 들고 돌아온 조앤. 하지만 익숙한 곳에서 그의 싹은 반추의 양분을 더 이상 얻어내지 못한다. 그렇게 시들어버리는 공감의 싹.

그 봄에 뿌려진 씨앗은 결과적으로 결실로 이어지지 못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되는 아이러니.

씨앗도 싹도 없다. 조앤도 없다. 봄이 없다.

뭐 이런식의 비약이 아물거리긴 하지만 말 그대로 비약일 수 있다.

 

사막에서 만난 친구 블란치.

소설의 도입부에서 블란치의 목소리로 듣는 결론.

"하긴 세상이 그런 거지. 붙어 있어야 할 때는 그만두고, 내버려두어야 할 때는 매달리고, 한순간 인생이 너무나 멋져서 이게 현실일까 믿기지가 않다가, 이내 지옥 같은 고민과 고통 속을 메매고! 상황이 잘 풀릴 때는 이 순간이 영원할 것 같은데 -그런데 그렇지가 않지 - 나락으로 ㄸ러어질 때는 이제 절대 위로 올라가 숨쉬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잖아. 그런 게 인생이잖니?"(p25)

"그래도 난 그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봤기 때문에 좋았다고 생각해.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게 무진장 중요하거든. 안 그래?"(p27)

 

#4. 가엾는 조앤의 쳇바퀴

 

랜돌프와 로드니.

<그랬다, 조앤은 남편이 아닌 그 여자를 탓했다.p52>

 

조앤이 바버라에게 떠나던 날.

<눈에 익은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앤은 자기도 모르게 전율했다. 그의 뒷모습이 갑자기 젊어진 듯이 보였다 그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어깨를 펴고 걷고 있었다.....아미 아무 근심 걱정 없는 청년이 플랫폼을 활기차게 걸어가는 것 같았다.p74>

<뭔가를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그런 생각이 이미 머릿속에 있다는 뜻이다....로드니가 그녀가 떠나느 것을 반겼다니..p76>

 

에이버릴의 문제로 로드니와 조앤.

<조앤, 당신 스스로도 믿지 않는 것들로 자신을 위로해봤자 소용없어. p147>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난 이런 말을 할 수 있어 다행이지만.."

그러자 로드니는 아주 뜻밖에도 조앤에게 미소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불쌍한 우리 조앤" p149>

 

바버라의 일로 로드니와 조앤.

<"원하는 게 뭔지 말해주기만 해도 좋을 텐데요."

"바버라 자신도 그걸 몰라. 그 애는 아주 어려 조앤."

"그러니까 여러가지 일을 대신 결정해줄 사람이 필요해요"p165>

 

토니에 대한 로드니와 조앤.

<"토니의 의무는 아빠를 기쁘게 하는 거지 실망시키는 게 아니잖아요."

"난 실망하지 않았는데" p174>

 

이 모든 일에 대한 로드니의 한 마디.

<"감탄스럽고 편리한 감정이야!"p175>

 

돌아오는 길 기차에서 만난 사샤와의 대화

<"그러다가 ....그 일이 일어났어요...기적처럼. 모든 것을 봤어요. 바로 나 자신, 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말이에요. 그 순간 어리석은 가식과 위선이 모두 사라졌어요. 마치...다시 태어난 것처럼..."

"집에 가서 다시 시작해야 해요. 새로운 인생을...처음부터..."p233>

 

돌아온 조앤.

<로드니, 용서해요, 난 정말 몰랐어요....

로드니, 나 왔어요. 집에 돌아왔어요!

어떤 패턴으로 할까? 어떤 것이 낫지? 조앤은 선택해야 했다.

...

... 그녀는 명랑하게 말했다. "나 왔어요. 로드니..집에 돌아왔어요..."p246>

 

일련의 사건들과 그녀가 매 순간 보여내는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들이 얼마나 공포스러웠을까? 옳다고 믿고 있던 것들이 가져온 상처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을테지만, 결국 그녀는 돌.아.온.다.

 

 

나는 어디 있는가? 아니 그 이전에 "나"라고 하는 것이 있는가, 그것이 나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가? 많은 생각들이 오가는 책이었다. 변화라는 말이 갖는 빈약한 구속력도 말이다. 변하는 사람. 변하지 않는 사람. 우리가 말하는 변화란 어쩌면 "탈피"일지도 모른다. 껍질을 벗는 일. 자신의 껍질의 구성요소와 그 본질을 분석하는 것으로 부터 아프게 시작하는 마주하기와 껍질벗기. 굳이 아프락삭스에게 날아가기 위함이 아니어도 말이다.

생각보다 빨리 읽히기는 했지만, 여운이 많이 남는다.

나는...조앤과..많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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