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브리오 기담
야마시로 아사코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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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길치의 비애.

 

한 번 갔던 길을 용케도 기억하는 남자가 있다. 어디든 자신이 발을 디뎠던 곳은 어떤 방법으로든 실수 없이 찾아가곤 한다. 네비게이션도 없던 시절, 지도를 한 번 훑어보곤 서울 친정집까지 차를 운전하여 간 사람. 내 짝지다.

한 번이 뭐야. 두 번, 세 번 간 길도 늘 헷갈려하고, 아무데서나 '여기 우리 왔었지?'를 남발하며 길치임을 부정하려 드는 사람이 있다. 나다.

어디를 가든, 미리 갈 곳을 점검하고 가는 짝지와 달리, 나는 대충 어디쯤인가만 (이 역시도 불확실할 때가 대부분이다) 확인하고 일단 간다. 그리곤 곧 길을 잃고 하염없이 걷고, 살피고, 아무데나 들어가서 한 숨 돌리고를 반복한다. 그러다보니 약속시간을 한참 지나쳐버리거나, 골이 난 짝지가 찾으러 오곤 한다.

단 한번의 실수도 없이 찾아가는 것. 그것이 좋은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길을 잃어서 만나게 되는 이야기들은 실로 엄청나다. 그렇게 재미난 이야기가 생겨난 곳을 다시 찾아가보고 싶지만, 찾을 수 없다. 그 근처를 맴돌거나 아주 엉뚱한 곳으로 가고 마는 것. 길치의 비애다.

 

이즈미 로안은 길치다.

그는 길을 건너는 순간에도 길을 잃는다. 분명 산길이었는데 어느새 바닷가에 들어서 있거나, 동굴 속에 들어가 있거나, 남의 집 창고에 들어가 있기도 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다. 길치라면 말이다.

 다시 찾아갈 수 없는 곳에서 벌어진 이야기. 그 이야기들이 모여 엠브리오 기담이 시작된다.

 

 

 

(야첵 예르카( jacek yerka))

 

자신의 삶에서 길을 잃지 않을 자신은 있는가? 어차피 길을 잃게 되어 있다면, 그 이야기를 해보는 건 어떨까?

 

 

# 2. 이런 목차

 

-엠브리오 기담

-라피스 라줄리 환상

-수증기 사변

-끝맺음

-있을 수 없는 다리

-얼굴 없는 산마루

-지옥

-빗을 주워서는 아니 된다

-"자, 가요" 소년이 말했다.

-역자 후기

 

역자후기를 목차와 더불어 적어야만 하는 책이다.  또 하나의 에필로그처럼 적어 내려간 역자 후기 또한 일품이다. '이 사람..멋지다'하게 만든 후기. 뭔가 정형화되고 분석적인 후기가 아니라, '정말 책과 소통하며 내용에 담뿍 젖어들어서 번역을 했구나, 그러니 재미있을 수 밖에..; 라는 생각이 과하지 않다.

 

주운 태아를 품에 안고 키우는 이야기, 파란 구슬을 받아들고 몇번이고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 온천의 수증기 속에서 만나는 오래전의 인연들, 모든 것이 사람의 얼굴 형상을 하고 있는 마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다리 위의 사람들, 잔인함이 뚝뚝 떨어지는 살아있는 지옥, 빗 하나로 벌어지는 사건, 나와 이즈미 로안의 인연..

모든 이야기의 도입부가 비슷하게 시작되어진다. 앞서 읽은 에피소드가 자연스레 연결되는 묘한 구조다. 다른 이야기지만 결코 다른 이야기가 아닌, 개별적 사건이지만 시,공간적으로 치밀하게 얽혀있다.

 

라피스 라줄리의 환상. 나는 이 이야기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다시 태어나는 삶. 이전의 삶 속에서 만나고 겪었던 일들을 고스란히 기억한 채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 이것이 축복일것인가. 스스로 자살을 하지 않는 이상 다시 태어날 수 밖에 없는 기막힌 이야기. 갖고 싶어졌다. 라피스 라줄리..나는 몇번의 삶을 겪어내면 더 이상은 원하지 않아. 라고 결심할 수 있을까? 내 욕심의 끝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라피스 라줄리-청금석)

 

# 3. 이즈미 로안

 

이즈미 로안은 여행서적을 쓰는 일을 한다. 그는 이곳 저곳을 여행하며 그곳의 이야기를 적어내는 것이다. {도중여경}이라는 여행 안내서를 쓰는 작가이다. 책을 읽으며 느껴지는 건, 이즈미는 여행지를 소개하거나 하는 것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보인다. 이즈미의 길잃기가 어쩐지 의도된 것일 거라는 생각 또한 부정할 수 없다. 뭐라고 정의 할 수 없는 존재. 그러나 아직 덜 풀린 이야기들, 저들의 앙금과 아픔, 혹은 오해와 고통을 어루만져주고 해소해 주는 길을 찾는 어떤 사람. 그들의 못다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어떤 사람. 이즈미는 그 어떤 사람인 것은 아닐까.

길고 윤기나는 머리카락을 가진 이즈미..삼손처럼 그의 이야기도 그 머리카락 속에 단단히 묶여 있는 것일까?

 

책 속에서 만나지는 관경은 실로 참혹하기도, 두렵고 섬뜩하기까지 하다. 상황이 아주 섬세하게 설명되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가 던져 놓은 환상의 버튼이 작동 되는 순간, 몇가지의 설명 코드만으로도 실로 엄청난 경험을 하게 된다. 속이 울렁거릴만큼의 참담함..같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즈미 로안의 탄생은 언급되지 않지만- 이즈미는 붓을 들고 나왔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고통을 적어내야 하는 천형을 진 것은 아니었을까. 그의 길에서 벗어나기는 어쩌면 잘 프로그래밍 된 행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Jim Warren)

 

 

# 4. 밑줄.

 

- 죽어서 다시 태어나길 반복해, 여태 살아온 세월이 백년을 넘었다. 그동안 만난 사람들은 헤아릴 수도 없다. 그래도 제 손으로 키운 아이들의 얼굴과 이름은 기억했다. 어느 아이가 어떤 성격이었는지도 잊이 않았다. 천 년이 넘게 산다 해도 품에 안았던 아이의 무게를 기억할 것이다. (70쪽) - 라피스 라줄리의 환상

 

- 사라진 사람의 얼굴을 언제까지나 기억하는 게 가능할까? 하루하루 무언가를 새로이 보고 듣는 나날 속에서 옛날 일은 윤곽을 잃고 어렴풋해진다. 머릿속에 수증기가 끼는 것처럼 사라진 사람의 얼굴이 흐려진다.(101쪽)- 수증기 사변

 

-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한 증오였다. (..) 과거에 가지고 있었던 모든 감정과 사랑은 죽음과 함께 사라졌다. (..) 노파를 걷어찼을 때 느낀 감촉이다. 나 혼자만이라도 살아남고 싶었다. 남을 밀어내서라도. (179쪽) - 있을 수 없는 다리

 

- 글을 쓴다는 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걸 누군가에게 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글도 쓸 줄 알아야죠. (309쪽) - "자, 가요 ." 소년이 말했다.

 

 

 # 5. 길을 잃어도 괜찮다.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다. 현실이 팍팍하고 서럽다고 좌절할 일도 아니다. 단지 길을 잘 못 든 뿐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금방 도착할 길이었는데 너무 오래 헤매고 있다고 노여워 할 일도 아니다. 가끔은 오래 걸릴 길을 금방 찾아내기도 하지 않는가.

중요한건, 시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올바른 지도가 아닐지도 모른다. 저마다의 삶 속에 미처 태어나지 못했던 이야기, 태어났지만 너무 약했던 의지들, 몇번이고 다시 태어나도 온전히 만족하지 못했던 이야기, 이게 정말 내 이야기인지 믿기 어려운 자신의 이야기들에 귀 기울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미처 다 듣지 못하고 묻어둔 이야기..차마 꺼내지 못하고 마주 하지 못한 이야기..세상의 평가가 두려워 없는 척했던 이야기..그 이야기들은 그렇게 묻히고 잊혀지고 사라지게 되는걸까?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든 전개되고 드러날 것이다. 맺히고 풀리는 것이 순리라면 말이다. 저마다 살아가는 일은 모험이고 낯선 여행이다.

누구에게나 현재는 처음 맞는 시간이고, 처음 마주하는 상대일테니까..

백만명의 사람들이 백만가지의 방법으로 현재를 살아낼것이다. 그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억울해하거나 두려워 하지 말일이다.

길이 없으면 만들면 되니까 말이다.

 

 

 

(Joel Robison 사진)

 

이즈미 로안이 한 마디 건넨다.

 

"자네는 꽤나 비관적이군. 나는 조금도 불안하지 않아. 그냥 산에서 길을 잃은 것뿐이잖아." (185쪽)

*P.S​

각 이야기들 사이에 끼어있는 나비가 그려진 간지가..정말 멋지다는 귀뜸을 꼭 하고 싶었다.

정말..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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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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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느 날의 뉴스

천국에 가게 해주겠다며 신도들에게 수억대의 돈을 받은 일면 '숙모님'이 잡혔다는 뉴스를 본다.

기도 해 주는 댓가로 헌금을 하라며, 마치 빙의 된 무속인처럼 집안의 우환까지 미리 귀뜸해주며 금품을 요구했단다.

천국에 가게 해주겠다며..

그녀에게 헌금을 한 사람들은 모두 성공적으로 천국에 도착했을까?

확인할 방도가 없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지 않는다. 그곳이 천국인지 지옥인지..아니 그 이전에 사후세계라는 것이 있기는 한건지..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인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위해 노력하고 애쓰곤 한다.

 

구동치의 일이 그렇다. 전직 경찰출신인 탐정. 그리고  ​'딜리터deleter'​​.

어느 날 어떻게 죽을 지 모를 사람들이 자신이 죽고 나면 꼭 없애고 싶은 것들을 미리 의뢰해 둔다. 그렇게 의뢰를 받은 후 그 사람의 사망이 확인되면 구동치는 계약대로 주문한 것들을 삭제하기 시작한다. 아무도 모르게..마치 처음부터 그런 것은 없었던 것처럼 ..

구동치가 의뢰받은 일을 제대로 완수했는지 아닌지를 의뢰인들이 확인할 방법은 없다. 마치 천국에 잘 도착했는지 확인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눈 속의 불안은 아직 껍질을 깨고 나오기 전의 새와 같다. 불안은 자라서 공포가 되기도 하고, 폭력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지기도 한다. 구동치는 사람들의 불안을 사랑했다. 불안하지 않으면 아무도 탐정을 찾지 않을 것이다. 구동치는 사람들의 불안에 먹이를 주며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p52) >​

 

# 2. 악어의 눈물

지독한 냄새가 지배하고 있는 악어빌딩 4층. 구동치의 사무실이 그 곳에 있다.

재개발이 시작될 마을, 그 곳에 자리한 악어빌딩. 악취가 빌딩의 주인이고 사람들이 그 곳에 세들어 사는 ..

악취. 어떤 것이든 살아있었던 것이 죽고 나면 제가 살았던 흔적을 남기고 싶어하는 마지막 발악처럼 형체도 없이 오래도록 머문다. 악어빌딩의 악취는 살았던 이가 많았고, 그들의 흔적과 이야기가 때론 발효되고 때론 부패하며 내는 삶의 마지막 가스층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딜리팅을 의뢰받은 사람이 죽는다. 구동치는 그 사람의 흔적들을 지우기 시작하고, 그러다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그의 죽음과 그가 없애주기를 바랐던 물건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 그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 사이의 이해관계와 치졸함, 그리고 비열함.

죽은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려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의 딸을 제외하곤..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잃으며 구동치는 자신의 일을 계속해도 좋을지를 고민하게 된다.

< 살아있으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으려는 마음이 삶을 붙잡으려는 손짓이라면, 죽고 난 후에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으려는 마음은 어쩌면 삶을 더 세게 거머쥐려는 추한 욕망일 수도 있었다.(p328)>

# 3. 김중혁의 글.

언젠가 나는 김중혁의 "악기들의 도서관"을 읽으며 입가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웃었다 굳었다는 반복한 기억이 있다.

김중혁의 글에서만 느껴지는 <김중혁스러움> .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서사는 그가 타고난 이야기꾼임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게 한다.

자칫 사족처럼 열거하다 이야기의 핵심을 비껴가거나 너무 돌아가게되어 지루해지기 십상인 글을 있는대로 펼쳐두고 꼼꼼하게 모으고 다시 펼치기를 반복한다. 야무진 어부가 그물을 엮듯이말이다.

크게만 만들겠다고 엉성하게 엮거나 쫀쫀하게 만들어보겠다고 답답하게 엮어내는 초짜 어부의 어리숙함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물 실을 넓게 펼쳐두고 턱하니 주저 앉아 적당한 크기로, 작은 고기들은 빠져 나갈 수 있게 수완좋은 어부가 하듯이 잘도 엮어낸다.

또한 그의 글이 갖는 <김중혁스럼움>의 중요한 코드. 유머.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순간 아무렇지도 않게 툭 뱉어내는 그의 유머는 '우와` 이 사람 대체 뭐야?' 하는 반문을 하게 한다. 어이없음이 아닌, 대단한 배치인게다.

장례식장 조화 사이에 느닷없이 튀어오른 작고 푸른 청개구리처럼..슬며시 미소짓게 만들고 오래도록 기억하게 만드는 것이다. 상처가, 슬픔이, 언제까지나 그 모습 그대로 유지하며 기억을 파헤치지 않을 거라는 걸 암시라도 하듯이 말이다.

# 4. 구동치는 아마

책을 읽으며 나는 내내 구동치는 아마 마동석이라는 배우와 닮았을까? 생각했다.

 

 

어쩐지 잘 어울리는 ..만약 이 소설이 영화나 드라마로 재구성된다면..구동치 역할로 어울리지 않을까?

구동치의 냉소적인 모습, 그리도 치밀한 모습.

마치 삶의 어느 한 부분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초연하기도 , 처연하기도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뜨겁게 끌어안은 사람이겠다 싶어졌다.

# 5. 나는

나는 얼마나 내 삶을 끌어안고 있는가.

치밀하게 내가 살아온 길들을 기억하거나 분류하고 있는가.

나는, 딜리팅을 의뢰할만한 무엇이 있는가.

많은 생각들이 머리속을 뛰어다닌다.

딱히 남기고 싶은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지워버리고 싶은것도 없다. 그만큼 애정없이 살아온 것일까? 하는 의문이 바닥에 주저앉아 저혼자 그림자의 길이를 늘이고 있다.​

내가 그늘에 숨지 않는 한 내의지와는 무관한 길이로 제 존재의 영역을 살아내는 그림자. 저마다의 기억이 바닥에 누워 그림자라는 것이 되어진것이라면, 내 그림자의 길이는 얼마나 될지 궁금해졌다.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기억은 있다. 꺼내어 확인하기를 거부하는 것 뿐이다. 내가 딜리팅을 의뢰하고자 한다면, 나는 아마 그 기억들을 마주하고 파헤치는 과정을 겪어야 할게다. 세상에 남기고 싶지 않은 기억.

그건 아마 내가 세상에 저지른 오류의 다른 이름이지 않을까? 지워버리고 싶은 오류..

나 역시..좋은 사람으로 되도록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는 말이다.

내 흔적은 악어빌딩의 악취처럼 지워지지 않더라도..

<일요일의 기다란 그림자는 이미 월요일에 가 닿아 있는 것 같았다. 자동차는 그림자를 밟으며 빠르게 시간을 건너갔다(p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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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는재로 2014-04-05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마동석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어딘지 묵직하지만 인간적인 느낌이라고 할까 구동치라는 인물이 가지는 매력이죠

나타샤 2014-04-08 15:08   좋아요 0 | URL
구동치 캐릭터가 참 아프구나 싶었어요. 더 이상 압착 불가능한 최대치까지 누르고 있는 듯한..
*^^*
흥미로운 작품이었습니다.
 
HQ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 1
조엘 디케르 지음, 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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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엘 디케르..

작가의 어머니는 혹은 할머니는 작가가 어렸을 때 뜨개질을 하시곤 하셨을까?

아무것도 아닌 실을 이리저리 떠서 다양한 무늬를 만들어내는 마법을 따스한 미소와 함께 작가에게 보여주곤 하셨을까?

우리 엄마가 그랬다.

꽈배기무늬가 멋지게 들어간 카디건이나 알록달록한 무지개 바지, 빨간 실로 딸기무늬를 넣어주셨던 조끼..

노랑색이 귀여웠던 망토까지..엄마는 늘 손뜨개로 만드신 옷을 맵시나게 내게 입히시곤 하셨다.

그것으로 생업을 삼기도 하셨던 기억이 또렷하다.

솜씨가 좋은 엄마를 바라보며 난 늘 가슴 조리곤 했다. 느닷없이 몇개의 뜨개코를 빼놓으셨다가 한참 뜨고 나서 뒤에 남은 코를 멋지게 잡아끌어 뜨개질을 이어가셨다. 그렇게 하고 나면 햇님 달님의 동아줄이 저렇게 생겼을거야..하고 끄덕이게 하는 꽈배기 무늬가 생기곤 했다.

엄마가 그렇게 코를 떼어 놓고 뜨개질을 할때면 저게 풀리면 어쩌지? 어린 걱정이 꽈배기 무늬보다 먼저 엄마의 뜨개 바늘위를 달렸다.

점점 줄어들기도, 점점 늘어나기도 하는 마법의 뜨개질을 보며 나는 꿈을 꾸곤 했다.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

두 권이나 되는 녹녹치 않은 분량(열권도 넘는 대작들도 있지만)에도 그리 어렵지 않게 읽히는 책이다.

잘 짜여진 뜨개코트 같다는 느낌. 과하지 않은 무늬들로 뽀송한 털이 섞인 크림빛의 뜨개코트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2.

 

꽤 잘나가는 작가인 마커스는 첫 작품의 성공 뒤에 글이 써지지 않자, 옛 스승인 해리를 찾아가게 된다.

그 곳에서 마커스가 만나게 되는 사건.

33년전 실종된 소녀의 사체가 해리의 앞마당에서 발견되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노라 켈러건.

실종 당시 15세였던 소녀.

해리는 주용의자로 체포되고, 해리가 그랬을 리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마커스는 조사를 시작한다.

해리를 통해 듣는 충격적인 이야기.

해리는 노라를 사랑했다고 한다. 노라 또한 해리를 사랑했다고 한다.

이 터무니 없는 사랑의 증언을 토대로 마커스는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기 시작한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모든 오로라 사람들의 이야기가 드러나고 그들 사이의 연민과 애증과 애달픔이 드러나게 된다.

누가 노라를 죽였는가.

 

1부의 내용은 오로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느 누구도 뺄 것 없이 노라가 사라지던 1975년의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며 증언한다.

따로 벌어진 사건이겠지만 결국 하나의 바늘에 꿰어진 코일 따름이다.

잠시 앞 뒤로 순서만 바꾸어 배열되었을 뿐

2부에서 드디어 본격적인 무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커스와 게할로우드..그들이 본 것은 정말이었을까?

해리가 혐의를 벗고,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는 정말 놀라를 죽인걸까?

놀라의 비밀과 해리의 비밀이 고스란히 보여지게 되는 2부의 모습에서는 극한 상황에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인간이 얼마나 교활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3.

범인이 누구인가?

이 소설은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람들의 이야기 .

그들의 속내와 만나게 되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조끼의 무늬도 중요하지만 실이 더 중요했던 엄마처럼 말이다.

절망은 상실은 사람을 얼마나 초췌하게 만드는가. 제니가 그랬고, 노라의 아버지가 그랬고, 루터가 그랬으며 해리가 그랬다.

욕심은 사람을 얼마나 간교하게 만드는가. 태미가 그랬고, 프랫이 그랬고, 트래비스가 그랬으며 해리가 그랬다.

사랑은 사람을 얼마나 달뜨게 하는가. 노라가 그랬고, 루터가 그랬고, 해리가 그랬다.

이 모든것을 우리는 사람이라 부르지 않을까? Human!

 

#4.

마커스와 해리의 대화를 토대로 쓰여지게 되는 글은 주고 받는 대화를 주축으로 이루고 있다. 마치 <악의 기원>이 주고 받은 편지로 이루어진 것처럼 말이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제자의 모습에서 어느덧 훌쩍 커버린 제자와 스승의 조우도 볼 수 있다.

첫 코를 뜨고 이게 뭐가 될까? 가늠도 못하겠지만 어느 순간 모자도 되고, 장갑도 되어져 있는 것을 보는 것처럼,

과정 속에서 훌쩍 커버린 마커스를 만나게 된다.

서른 한가지의 가르침.

골라서 배우는 재미가 있을까?

 

 

< 해리가 이렇게 말했어요. ' 자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게. 삶에 의미를 줄 수 있는 것이 두 가지 있네. 책과 사랑'>

마지막에 마커스가 남긴 한마디가 이 책의 마지막 매듭이 될것이다.

잘 짜여진 카디건이다. 과하게 치장하지 않고 따스하게 가슴에 품게 되는..

중간 중간 몇번인가 코를 놓치고 방황하긴 하지만, 어느새 찾아내어 흔적없이 뜨개질을 해 낸 멋진 작품이다.

 

크림색 카디건.

해리쿼버트사건의 진실은 내게 그렇게 남게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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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봄에 나는 없었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1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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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 소설의 경우 번역작가가 얼마나 중요한가.

 

 올 해 들어 두어권의 번역서를 읽은 것 같다. 그 중 하나는 도저히 안되서 던져 놓았다.

거친 독일빵을 뜯어 먹는 것처럼 잘 씹히지도 않고, 자꾸 내 혀를 깨물게 되었다.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극찬을 했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왜? 그 내용을 다 읽지도 못한 결과, 내 몫의 감동과 평가를 내릴 무엇이 준비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앤 스쿠다모어.

이 가여운 여인의 <자신과 마주하기>는 얼마나 솔직하고 적나라한가.

아가사 크리스티의 치밀하고 섬세한 심리의 묘사, 그러나 그것이 한 사람의 내부에서 조근 거리는 것이 아닌 주위의 환경과 주변의 사람들의 심리와 함께 미묘하게 연결되어지는 상황은 정말 대단하다고 밖에 말 할 수 없다.

심리의 문제는 자칫 이리저리 펼쳐내다 방만하게 이루어지기 십상인데, 너무나 명확하고 깔끔하게 떨어진다.

조앤와 로드니,레슬리 셔스턴, 에이버릴과 바버라 ,토니, 블란치...

이 다양한 이들의 심리와 삶의 결을 그려내는 데 작가의 필력이 드러난다.

마치 각각의 인물들이 제 목소리를 내듯, 라디오 드라마를 눈으로 듣듯..번역가의 힘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나에게 맞는 작가가 있듯,

나에게 맞는 번역가도 분명히 있다.

공경희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가장 완벽하게 드러내 놓을 수 있도록, 숨쉬는 번역을 해 내셨다고 감히 평가하고 싶다.

 

#2. 가장 두려운 일

 

식구들이 학교를 가고, 출근을 하고 나면 오롯하게 남는 시간. 시간들은 내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한 발 물러서 바라보게 되는 내 모습. 처음엔 낯설기만 하다.

자신과 마주하는 것이 얼마나 낯설고 두려운 일인지 나는 매일 깨닫는다.

책을 읽고, 게임을 하기도 하고, 때론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기타를 끼고 앉아 단순한 코드 진행에 스티브바이의 연주를 흉내내기도 한다. 실력은 따라주질 않지만, 그의 행동을 따라하다보면 슬며시 웃음도 지어진다.

삶의 어느 영역에 놓여있든 내가 나를 마주하기란 쉽지 않다. 잘못인 줄 알면서도 굳이 고집을 부리거나, 쉬이 납득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꼴같지 않은 자존심 때문에 오기를 부리기도 한다. 자신이 정한 자신의 모습에서 한 발도 비껴서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마치 자신의 삶 전체를 부정하는 일이라도 되는듯이 말이다.

또한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타인을 폄하함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받으려는 비열한 행동조차 서슴지 않는다.

이런 자신을 한 발 물러서 그 어떤 변명도 없이 마주 본다는 건 얼마나 끔찍한 일일까.

조앤은 사막에 고립된 상태에서 가족들과 자신의 관계를 되짚어본다. 자신의 삶에 보여지는 고집과 오류를 여과없이 마주한다. 자신의 변화만이 그 매듭을 풀 첫번째 과제라는 익숙하지 않은 미션을 찾게 된다. 가능할까?

 

로드니의 마지막 말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당신은 외톨이로 앞으로도 죽 그럴거야. 하지만 부디 당신은 그 사실을 모르길 바라"

이 대목에서 나는 대디러브의 로비를 떠올렸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오셨어요 엄마" 했던..

 

#3. 봄에 나는 없었다.

 

내가 그대에게서 떠나 있던 때는 봄이었노라...

책의 첫장에 쓰여진 이 문구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왜 하필 봄일까?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으로 조앤은 자신의 삶이 외롭지 않을 씨앗을 얻었을게다.

사막에서의 모질고 모진 마주하기의 과정은 싹을 틔우기 위한 지난한 시간이었을게다.

그렇게 자신만이 아닌 타인과의 관계를 풀어갈 싹을 들고 돌아온 조앤. 하지만 익숙한 곳에서 그의 싹은 반추의 양분을 더 이상 얻어내지 못한다. 그렇게 시들어버리는 공감의 싹.

그 봄에 뿌려진 씨앗은 결과적으로 결실로 이어지지 못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되는 아이러니.

씨앗도 싹도 없다. 조앤도 없다. 봄이 없다.

뭐 이런식의 비약이 아물거리긴 하지만 말 그대로 비약일 수 있다.

 

사막에서 만난 친구 블란치.

소설의 도입부에서 블란치의 목소리로 듣는 결론.

"하긴 세상이 그런 거지. 붙어 있어야 할 때는 그만두고, 내버려두어야 할 때는 매달리고, 한순간 인생이 너무나 멋져서 이게 현실일까 믿기지가 않다가, 이내 지옥 같은 고민과 고통 속을 메매고! 상황이 잘 풀릴 때는 이 순간이 영원할 것 같은데 -그런데 그렇지가 않지 - 나락으로 ㄸ러어질 때는 이제 절대 위로 올라가 숨쉬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잖아. 그런 게 인생이잖니?"(p25)

"그래도 난 그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봤기 때문에 좋았다고 생각해.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게 무진장 중요하거든. 안 그래?"(p27)

 

#4. 가엾는 조앤의 쳇바퀴

 

랜돌프와 로드니.

<그랬다, 조앤은 남편이 아닌 그 여자를 탓했다.p52>

 

조앤이 바버라에게 떠나던 날.

<눈에 익은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앤은 자기도 모르게 전율했다. 그의 뒷모습이 갑자기 젊어진 듯이 보였다 그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어깨를 펴고 걷고 있었다.....아미 아무 근심 걱정 없는 청년이 플랫폼을 활기차게 걸어가는 것 같았다.p74>

<뭔가를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그런 생각이 이미 머릿속에 있다는 뜻이다....로드니가 그녀가 떠나느 것을 반겼다니..p76>

 

에이버릴의 문제로 로드니와 조앤.

<조앤, 당신 스스로도 믿지 않는 것들로 자신을 위로해봤자 소용없어. p147>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난 이런 말을 할 수 있어 다행이지만.."

그러자 로드니는 아주 뜻밖에도 조앤에게 미소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불쌍한 우리 조앤" p149>

 

바버라의 일로 로드니와 조앤.

<"원하는 게 뭔지 말해주기만 해도 좋을 텐데요."

"바버라 자신도 그걸 몰라. 그 애는 아주 어려 조앤."

"그러니까 여러가지 일을 대신 결정해줄 사람이 필요해요"p165>

 

토니에 대한 로드니와 조앤.

<"토니의 의무는 아빠를 기쁘게 하는 거지 실망시키는 게 아니잖아요."

"난 실망하지 않았는데" p174>

 

이 모든 일에 대한 로드니의 한 마디.

<"감탄스럽고 편리한 감정이야!"p175>

 

돌아오는 길 기차에서 만난 사샤와의 대화

<"그러다가 ....그 일이 일어났어요...기적처럼. 모든 것을 봤어요. 바로 나 자신, 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말이에요. 그 순간 어리석은 가식과 위선이 모두 사라졌어요. 마치...다시 태어난 것처럼..."

"집에 가서 다시 시작해야 해요. 새로운 인생을...처음부터..."p233>

 

돌아온 조앤.

<로드니, 용서해요, 난 정말 몰랐어요....

로드니, 나 왔어요. 집에 돌아왔어요!

어떤 패턴으로 할까? 어떤 것이 낫지? 조앤은 선택해야 했다.

...

... 그녀는 명랑하게 말했다. "나 왔어요. 로드니..집에 돌아왔어요..."p246>

 

일련의 사건들과 그녀가 매 순간 보여내는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들이 얼마나 공포스러웠을까? 옳다고 믿고 있던 것들이 가져온 상처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을테지만, 결국 그녀는 돌.아.온.다.

 

 

나는 어디 있는가? 아니 그 이전에 "나"라고 하는 것이 있는가, 그것이 나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가? 많은 생각들이 오가는 책이었다. 변화라는 말이 갖는 빈약한 구속력도 말이다. 변하는 사람. 변하지 않는 사람. 우리가 말하는 변화란 어쩌면 "탈피"일지도 모른다. 껍질을 벗는 일. 자신의 껍질의 구성요소와 그 본질을 분석하는 것으로 부터 아프게 시작하는 마주하기와 껍질벗기. 굳이 아프락삭스에게 날아가기 위함이 아니어도 말이다.

생각보다 빨리 읽히기는 했지만, 여운이 많이 남는다.

나는...조앤과..많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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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천기담
임철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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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섯개의 이야기

황천기담은 말 그대로 奇談이다. 기이한 이야기. 우연히 들어온 마을 황천에서,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듣게 되는 '황천'의 기묘한 이야기가 매캐한 누런 먼지가 되어 콜록이게 하고, 눈물나게 하며 이어진다.

연작형식으로 묶여진 이 책은 근 십년의 시간동안 쓰여진 것이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꽤 긴 시간이다. 하지만 그게 황천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그 시간은 그저 고만고만한 시간일 뿐일것이다.

칠선녀주에서 시작되어 분홍주까지 이어져 오는 시간은..

떡례-옥봉-금심-홍녀로 이어지는 여인들의 이야기가 익어가고 엮여가는 시간 앞에서라면 더더욱이 말이다.

이건..황천의 이야기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뭔가에 몽롱하게 취해있는 마을(p17), 바로 그 마을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2.

 

칠선녀주(프롤로그)

나비길

황금귀(黃金鬼)

월녀

묘약

 

이 다섯가지 이야기가 황천에서 꿈을 풀어낸다. 한 때 황금광 시대의 중심에 있던 황천. 그곳에 다양한 사람들이 몰려오고 그 곳에서 벌어지는 신화같은 전설같은 이야기이다.

지도에서 잘 찾아지지도 않을 곳이었지만, 독립군과 일본인의 갈등도, 인민군과 국군의 갈등도 보여진다. 모든 갈등은 씨앗을 품고 숙성된 과실 같은 것이었을까?

갈등의 끝자락에 터져버린 상흔은 기어이 다음에 이어질 사건과 사람의 발단이 되고, 원인이 되어 마인드 맵처럼 점점 자라간다.

사랑도, 욕망도, 욕심도, 편견과 분노..모든 것이 황천에 들어와 월녀의 서러운 가슴팍처럼 부풀고 부풀어 더 이상 어쩌지 못하게 충만해지고 씨앗을 뿜어내는 것이다.

 

 

# 3. 밑줄

 

-어쨌거나 당신은 그다지 언짢은 기분이 들진 않았다. 그녀의 거친 말투와 눈빛에서 당신이 재빨리 읽어낸 것은 적대감이나 경계심이 아닌, 어떤 질기고 완강한 외로움이었다. 그 정도라면 첫 만남의 소득치고는 괜찮은 편이라고 당신은 생각했다. (p 49. 칠선녀주)

 

-소문이란 때로 낚싯바늘과 같다. 그건 누도 없이 다만 이빨만 지녔으니까. 그 무엇이건 대상을 가리지 않는, 오로지 철저하게 맹목적이고 무차별적인 공격성. 일단 살 속에 갈고리째 깊숙이 찔러 박히면 끝끝내 상대를 유린해놓고야 마는 집요한 잔혹성과 폭력성. 그 때문에 소문과 낚싯바늘은 항상 어딘가에 피냄새를 감추고 있다.(p55. 나비길)

 

-"그래, 울어라. 마음껏 울어버려라. 울어야만 산다. 가슴속 돌멩이, 목구멍의 핏덩이를 토해내야만 산다....내 가엾은 자식들아. 슬픔이 너의 힘이다. 분노와 한이 너의 힘이다. 고통이, 울분이, 후회가 바로 너희를 살게 하는 힘이다. 그러니, 어찌할 것이냐. 그 힘으로 어떻게든 버티어내거라. 한사코 포기하지 말고 어떻게든 이 끔찍스러운 생을 살아내거라...."

(p224 월녀)

 

-이 살벌한 세상에서 죄 없이 남한테 상처받고 밟혀도, 그쪽을 향해 고함 한번 크게 질러볼 용기조차 없거든. 그래서 세상과 맞서 싸우는 대신 거꾸로 스스로를 학대하고 방기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익숙해져버린 거야. 그 친구들에겐 술은 단순한 술이 아니야. 자신들을 위로해주고 의지하도록 도와주는, 지상에서 가장 미덥고 고마운 상대인 것이지. (p283 묘약)

 

-붉게 충혈된 그의 외짝 눈에는 텅 빈 모래사막이 들어앉아 있었다. 일체의 생기와 온기를 상실한 불모의 세계. 홍녀는 살을 저며내는 듯한 슬픔으로 전율했다. (p304 묘약)

 

-모든 인간은 이야기와 함께 나고 살다가 죽는다. 한 생애는 저마다 하나의 이야기가 되고, 타인들의 기억 속에서 각기 고유한 판본으로 살아남아 떠돈다. 인간의 수명처럼 저마다의 운명대로 잠시거나 혹은 아주 오랫동안까지. 그렇게 세상은 무궁무진한 이야기로 차고 끓어 넘치는 영원한 이야기의 강, 설화의 바다가 된다. (p364.작가의 말)

 

# 4. 이야기로서의 삶.

 

살았다는 것. 이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을 겪고 있는것이다.

자신이 어떤 이유로 세상에 태어나게 되고, 살게 되었는지를 명징하게 밝힐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못살겠어" "죽겠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건, 살아간다는게 녹녹치 않다는 반증일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낸다. 이야기의 끝을 지켜내야 하는 책임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쨌든 "나"로 정해졌고, 주인공이 죽는 순간 끝나버리는 일인극, 혹은 다인극일 이야기 말이다.

지나 온 시간 어디쯤을 펼쳐보면 "정말? 에이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 하는 반문을 "이게 사실이 아니면 내 목숨이라도 걸겠어"하는 눈빛으로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여주던 기억 하나쯤은 있지 않는가?

믿을 수 없는 일들..그러나 일어났음이 분명한, 혹은 일어날 수도 있었음직한 이야기.. 그런 이야기의 뭉치 위를 뚜벅 뚜벅 걷다가 발 밑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두 발로 버텨내며 살아내는 삶.

그 이야기에 꿈이 더해진다면, 환상이 더해진다면, 그건 기가막히게 아름다운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단편으로도 손색이 없고 연작으로 풍성해지는 <황천기담>.

누군가에게 "너 이런 이야기 들어봤어?" 하고 속닥거리고 싶어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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