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기담
임철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1. 다섯개의 이야기

황천기담은 말 그대로 奇談이다. 기이한 이야기. 우연히 들어온 마을 황천에서,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듣게 되는 '황천'의 기묘한 이야기가 매캐한 누런 먼지가 되어 콜록이게 하고, 눈물나게 하며 이어진다.

연작형식으로 묶여진 이 책은 근 십년의 시간동안 쓰여진 것이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꽤 긴 시간이다. 하지만 그게 황천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그 시간은 그저 고만고만한 시간일 뿐일것이다.

칠선녀주에서 시작되어 분홍주까지 이어져 오는 시간은..

떡례-옥봉-금심-홍녀로 이어지는 여인들의 이야기가 익어가고 엮여가는 시간 앞에서라면 더더욱이 말이다.

이건..황천의 이야기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뭔가에 몽롱하게 취해있는 마을(p17), 바로 그 마을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2.

 

칠선녀주(프롤로그)

나비길

황금귀(黃金鬼)

월녀

묘약

 

이 다섯가지 이야기가 황천에서 꿈을 풀어낸다. 한 때 황금광 시대의 중심에 있던 황천. 그곳에 다양한 사람들이 몰려오고 그 곳에서 벌어지는 신화같은 전설같은 이야기이다.

지도에서 잘 찾아지지도 않을 곳이었지만, 독립군과 일본인의 갈등도, 인민군과 국군의 갈등도 보여진다. 모든 갈등은 씨앗을 품고 숙성된 과실 같은 것이었을까?

갈등의 끝자락에 터져버린 상흔은 기어이 다음에 이어질 사건과 사람의 발단이 되고, 원인이 되어 마인드 맵처럼 점점 자라간다.

사랑도, 욕망도, 욕심도, 편견과 분노..모든 것이 황천에 들어와 월녀의 서러운 가슴팍처럼 부풀고 부풀어 더 이상 어쩌지 못하게 충만해지고 씨앗을 뿜어내는 것이다.

 

 

# 3. 밑줄

 

-어쨌거나 당신은 그다지 언짢은 기분이 들진 않았다. 그녀의 거친 말투와 눈빛에서 당신이 재빨리 읽어낸 것은 적대감이나 경계심이 아닌, 어떤 질기고 완강한 외로움이었다. 그 정도라면 첫 만남의 소득치고는 괜찮은 편이라고 당신은 생각했다. (p 49. 칠선녀주)

 

-소문이란 때로 낚싯바늘과 같다. 그건 누도 없이 다만 이빨만 지녔으니까. 그 무엇이건 대상을 가리지 않는, 오로지 철저하게 맹목적이고 무차별적인 공격성. 일단 살 속에 갈고리째 깊숙이 찔러 박히면 끝끝내 상대를 유린해놓고야 마는 집요한 잔혹성과 폭력성. 그 때문에 소문과 낚싯바늘은 항상 어딘가에 피냄새를 감추고 있다.(p55. 나비길)

 

-"그래, 울어라. 마음껏 울어버려라. 울어야만 산다. 가슴속 돌멩이, 목구멍의 핏덩이를 토해내야만 산다....내 가엾은 자식들아. 슬픔이 너의 힘이다. 분노와 한이 너의 힘이다. 고통이, 울분이, 후회가 바로 너희를 살게 하는 힘이다. 그러니, 어찌할 것이냐. 그 힘으로 어떻게든 버티어내거라. 한사코 포기하지 말고 어떻게든 이 끔찍스러운 생을 살아내거라...."

(p224 월녀)

 

-이 살벌한 세상에서 죄 없이 남한테 상처받고 밟혀도, 그쪽을 향해 고함 한번 크게 질러볼 용기조차 없거든. 그래서 세상과 맞서 싸우는 대신 거꾸로 스스로를 학대하고 방기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익숙해져버린 거야. 그 친구들에겐 술은 단순한 술이 아니야. 자신들을 위로해주고 의지하도록 도와주는, 지상에서 가장 미덥고 고마운 상대인 것이지. (p283 묘약)

 

-붉게 충혈된 그의 외짝 눈에는 텅 빈 모래사막이 들어앉아 있었다. 일체의 생기와 온기를 상실한 불모의 세계. 홍녀는 살을 저며내는 듯한 슬픔으로 전율했다. (p304 묘약)

 

-모든 인간은 이야기와 함께 나고 살다가 죽는다. 한 생애는 저마다 하나의 이야기가 되고, 타인들의 기억 속에서 각기 고유한 판본으로 살아남아 떠돈다. 인간의 수명처럼 저마다의 운명대로 잠시거나 혹은 아주 오랫동안까지. 그렇게 세상은 무궁무진한 이야기로 차고 끓어 넘치는 영원한 이야기의 강, 설화의 바다가 된다. (p364.작가의 말)

 

# 4. 이야기로서의 삶.

 

살았다는 것. 이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을 겪고 있는것이다.

자신이 어떤 이유로 세상에 태어나게 되고, 살게 되었는지를 명징하게 밝힐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못살겠어" "죽겠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건, 살아간다는게 녹녹치 않다는 반증일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낸다. 이야기의 끝을 지켜내야 하는 책임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쨌든 "나"로 정해졌고, 주인공이 죽는 순간 끝나버리는 일인극, 혹은 다인극일 이야기 말이다.

지나 온 시간 어디쯤을 펼쳐보면 "정말? 에이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 하는 반문을 "이게 사실이 아니면 내 목숨이라도 걸겠어"하는 눈빛으로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여주던 기억 하나쯤은 있지 않는가?

믿을 수 없는 일들..그러나 일어났음이 분명한, 혹은 일어날 수도 있었음직한 이야기.. 그런 이야기의 뭉치 위를 뚜벅 뚜벅 걷다가 발 밑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두 발로 버텨내며 살아내는 삶.

그 이야기에 꿈이 더해진다면, 환상이 더해진다면, 그건 기가막히게 아름다운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단편으로도 손색이 없고 연작으로 풍성해지는 <황천기담>.

누군가에게 "너 이런 이야기 들어봤어?" 하고 속닥거리고 싶어지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