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특별잡지 "꿀잠"은10개 언론사 20여명의 기자들이 재능기부를 통하여 만든 잡지다.

 

  SNS를 하며 제일 좋은 건 후원을 하거나 힘을 보탤 곳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기천만원씩, 수억원씩 기부할 깜냥은 안되니(그게 얼만큼인지 가늠도 안된다) 소소하게 내가 조금 덜 편안해도 될 정도, 불편을 기꺼이 감수할 정도에서 펀딩을 하거나 구독을 하거나 후원을 하게 된다.

 비정규직 특별잡지. 송경동의 꿀잠을 떠올릴 법한 '꿀잠'. 거기에 송경동이 있다.

 백기완 문정현 신부님께서 '두 어른전'이라는 행사도 하셨다. 비정규 노동자의 집 '꿀잠'건립을 위한 행보였다.

 

 날이 더워 깊게 잠들지 못하고, 자고 일어날 때마다 물 먹은 솜처럼 고스란히 남은 어제의 피곤을 느끼게 된다. 달게 잠을 자 본 게 언제였나?

아주 어린 시간, 더위에 뛰던 손주년을 그늘진 평상위에 눕히고 살랑살랑 부채질을 해주던 외할미 곁에서의 낮잠이 달았던가?

 

먹고 사는 일에 치여 밥 줄을 쥔 자들에게 끌려다니며 드는 잠은 여전히 고단한 꿈만 꾸게 한다.

비명이, 울음이, 자꾸만 작아지는 목소리가..

 

한 부씩 보내줄 여력이 안된다고 만든이들이 그랬다.

오십부 백부씩이라면 몰라도..그래서 인터넷 서점에 등록했다고.

 

누군가의 다디단 잠. 그것을 나누다보면 내 잠도 달아지지 않을까?

꿀잠을 예약했다.

 

꿀잠을 예약했다..라고 쓰고나니 살짝 설렌다. 텍스트가 아닌 참 꿀잠이 멀지 않은 곳에서 내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 까닭이다. 내 몫의 잠..내 몫의 꿈.

꿀 권리가 있고 꾸어 마땅한 단꿈.

 

문학잡지 하나를 잠시 내려두는 한이 있어도..이 잡지는 봐야겠다.

 

낯익은 이름 몇개가 반갑다.

 

 

 

 

 

 

 

 

 

 

 

 

 

 

 

 

 

 

 

 

 

 

 

 

 

 

 

 

 

 

 

 

맺히고 엉킨 아픈 속을 슥슥 문질러 줄 수 있는 따순 손이 되면 좋겠다.

꿀잠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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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내기 유령 - 어른들을 위한 영국의 동화
로버트 헌터 지음, 맹슬기 옮김 / 에디시옹 장물랭 / 201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파란 표지가 매혹적인 새내기 유령.
친근하고 유연한 그림과 찬찬한 이야기가 좋다. 어쩐지 시린 이야기, 새내기 유령은 다름 아닌 '나'일 수도 '너' 일 수도있다는 느낌에 잠깐 떨렸다.
처음 유령이(사람이, 사회적 사람이) 되고 무엇을 해야할 지 몰라 동료들을 따라가고 관찰하고 그러다 그들을 놓치고 발견하게 되는 첫 시선. 거기에서 만나게 되는 친절한 친구(동료 혹은 인연). 그의 꿈을 듣고, 나의 꿈을 발견하고 가닥을 잡아갈 무렵에 알게 되는 참담한 자신의 임무(가혹한 현실). 누군가를 해치고 만들어지는 정체성과 격려(누군가를 밟고 서야 하는 현실)가 참담했다. 아직 유령이(사회가) 뭔지 모르는 순수가 남은 탓일지도 모른다.
나의 역할을 눈치 챈 가장 소중한 친구는 도망을 가고 그게 아니라고 이야기해주려 친구를 찾아간다. 그 순간 '나'를 찾아온 유령 동료들..
필사적으로 친구를 구하기 위해 도망을 친다. 친구를 끌어안고 멀리, 더 멀리, 유령들이 찾아올 수 없을만큼 멀리..
높이 더 높이..오직 친구를 구하기 위해..유령인 나와 사람인 친구가 만나게 되는 대기권과 우주..친구를 잃고 나자 유령 동료들이 환호했다..
드디어 임무를 완수했다고..

나의 진심과 가치관이 집단의 목적과 다를 때, 나의 존재성만으로 그렇게 해야한다고 강요 당할 때, 과연 그것을 거부할 수 있을까?
어떻든 나의 선의가 타자의 불행을 끌어온다면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죄책감을 덜 수 있을까?
집중과 선택이라는 말이 난무하는 때, 무엇에 집중해야할지 무엇을 선택해야할지, 모든 선택 앞에서 '새내기'일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의 선택이 최선일 수 있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지극히 낮은 확률임을 알고도 선택할 수 있을까. 꽤 높은 확률이란걸 알게 되면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할 수 있을까?
공공의 선이랄지, 혹은 존재의 정체성이랄지 하는 카드를 들이밀면서..

어쩌면 살아간다는 일은 언제나 새내기가 되어 지켜내고 싶은 것을 가장 아프게 잃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은 지킬 것을 모두 잃게 되는 것, 그렇게 잃을것이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것을 만들지 않게 되는 것..
그리고..그것에 적당한 의미를 부여한 채 빛나는 별이 되었다고 포장하여 기억하는 과정은 아닐까..생각하게 된다.
극단적이며 부정적일지 모르겠지만 굳이 반박하고 싶지 않다. 이미 그렇게 지내왔고 그렇게 지내고 있으니까..

책을 읽는 내내, 그래봐야 30분도 채 안되는 시간이었지만 파랗게 시리다는 것이 뭔지 페이지를 넘길때마다 체감한다.
행간에 괄호를 묶어 자꾸 끼워넣게 되는 고백. 표지를 제외하고 열네 장.
간단한 책 한권이 간단치 않게 읽혔다.
에디시옹장물랭.
장 물랭 에디션이란 의미일까? 장 물랭이라면 내가 알고 있는 그 레지스탕스 장 물랭인가?
왜 하필 장 물랭이지?
깊어가는 생각을 피하고 싶어 애꿎은 호기심을 발동시켜본다.

기억 해 두어야겠다.
책이 참..괜찮다. 그림도 파랑파랑하고..
표지 뒷면 바코드 옆에 쓰인 '수익금으로 나무를 심어요' 라는 말이 귀엽다.
책을 만든다고 베어 낸 나무를 다시 심는다고? 나무가 많아지면 새내기 유령 여럿이 부딪히겠는걸? 

생각이 많아지는 책이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하던데..어른 보다는 새내기를 위한 고민지침서에 가까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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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웠고 더웠다. 광복절이 뜨거웠던 몇가지 이유들이 있었다.

건국절이라는 망언과 욱일기를 썼다는 아이돌. 프로그램 하차를 요구했고, 그녀는 사과를 했다. 하지만 헌법을 수호해야 하는 이의 헌법을 부정하는 말에 대해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생각했다.

이 조용함의 원인은 뭘까. 두려움인건가? 아니면 아이돌만큼의 영향력도 없는건가?

그렇다면, 그따위 영향력이라면 거기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

정권이 바뀌고 나면..그녀는 어떻게 그려질까.

 

습관적으로 열어본 SNS에서 "백무현님이 소천하셨습니다"라는 문장을 만났다.

그가 갔다. 바보대통령과 이름이 닮은 그가 말이다.

누가 이 세월을 그려줄까? 백무현이 아니라면 그 누가?

 

 

 

 

 

 

 

 

 

 

 

 

 

 

 

 

 

 

 

 

 

 

 

 

 

         그는 왜 이렇게 서둘렀을까? 고생했다 와서 놀자며 부르는 소리가 있었을까?

그의 만평과 그림들과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요즘 화제라는 만화속에서 튀어나온 사람 이야기. 백무현이 그려넣은 만화속으로 들어간 사람들 이야기의 절절함과 날선 비판을 또 볼 수 있을까?

 

잘가요..그대.

애썼어요. 좀체로 나아지지 않는 나라사정은 만화보다 더 만화같지만..그래도 가끔 숨쉴 수 있던 그림이야기를 기억할겁니다. 기억할 것이 자꾸 늘어가는게..안타깝지만 기억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보다는 낫겠지..생각합니다.

 

편히 쉬어요.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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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6-10-31 16: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현, 두 도시이야기 보고왔어요..
백무현님의 진심을 봤어요..
 
백 사람의 십 년
펑지차이 지음, 박현숙 옮김 / 후마니타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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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지차이의 '백 사람의 십년"

광풍이 불고 간 자리를 견뎌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빼곡하다. 말 한마디조차 조심스러웠던 시간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회한과 가당치도 않은 누명과 서로를 신뢰하지도 불신하지도 못하던 시절의 이야기는 한국전쟁을 치르던 시기의 사람들과도 닮았고, 혼란 속에 무엇을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지 깜깜한, 억울함과 소외됨의 한 가운데 서있는 지금의 모습과도 닮았다.

혁명의 깃발이 꽂힌 그 곳에 혁명의 주체여야 할 '인민대중'은 있었을까? 개혁의 과정에서 피치못할 희생이라 하기엔 비겁하다.

원칙과 규율이 지켜져야 하는 이유가 사라진 곳에서 고스란히 시간을 견뎌야했던 사람들의 증언.

그 증언들을 풀어 쓴 책이다.


혁명은 이토록 지난한 과정이겠구나. 오해와 불신과 맹목과 광기가 공존하는 시기이겠구나..그런 오류의 과정을 거치며 인민주권을 획득한 혁명국가가 되는거겠구나.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공염불같은 생각이었는지..

물론 실패와 극복과 희생과 진보를 번갈아 내디디며 걷는 과정이 발전이며 인간중심의 국가를, 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이겠지만..그 어떤 이유로도 무고한 희생을 치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어떤 댓가를 지불한데도 사람 위에 이념을 두어서는 안될 노릇이다.


문화혁명의 과정을 겪으며 중국 내부의 변화와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겠지만, 그 댓가를 고스란히 치른 사람들은 누가 보상해주어야 하는지..어디에 하소연해야 하는지.


8살짜리 사형수의 이야기로부터, 어딘가 책에서 읽었던 내용을 이야기한 것 뿐인데 수감되어 고초를 겪어야 했던 사람. 자신이 왜 우파여야 하는지 모른채 비판을 받고 매일 반성해야 했던 사람. 차라리 죽어버리려해도 죽어지지 않아 오히려 고초를 겪는 사람. 

어떻게 살았을까. 이게 과연 사실일까? 과장하거나 왜곡된 기억이진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 만큼 참담하고 황당한 이야기들이 빼곡하다.


한국전쟁 때 아침엔 태극기를 한 밤엔 인공기를 흔들며 살얼음판 위를 걷듯 살아냈다는 외할머니의 말이 머릿 속을 스쳐갔다.

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는 거야. 그들이 걸어낸 시간들이 역사인거지.


<인민의 경험이야말로 시대의 경험이다>


라고 굵은 글씨로 적힌 첫 이야기의 마무리가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더 깊이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성주가 성지가 되고 해방구가 되고 역사가 되는 과정을 매일처럼 확인하게 되면서 더더욱 실감하는 말이다.



<“나중에 태어난 사람들은 우리가 이렇게 살았다는 걸 알 수 있을까? 이런 상황과 이런 비극을 말이야. 앞으로 세월이 흘러 우리가 모두 죽으면 우리 세대가 겪었던 일들을 누가 알 수 있겠어? 그렇게 되면 우리는 괜히 헛고생만 한 것 아니겠어? 지금 이런 일들을 기록하는 사람이 있기는 한 거야?”>


책을 열면 처음 마주하게 되는 문장이다. 이런 이유로 작가는 글을 모으고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문장 속에서..나는 위안부할머니의 음성들 듣는다.


억울하게 희생되고 고초를 겪은 사람들, 그 사람들이 견뎌낸 역사의 현장.

그리고 발견하게 되는 역사의 주체.

역사는 골방에 모여앉아 쓰는게 아니라..인민의 피눈물로 쓰고 인민의 땀으로 새기는 것이리라.


참 좋은 책을 읽었다.

개 돼지가 아니라 인민대중의 한 부분이라는 것. 역사의 주체라는 것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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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 찐빵집이 하나 있다. 투박한 손으로 뜨거운 찐빵을 빚고 솥에 넣고 맨손으로 꺼내는 주인아줌마의 손맛은 일품이었다.

뜨거움에 단련된 손은 두꺼웠고 잘 쥐어지지 않았고 늘 벌겋게 달아 있었다.

그래도 그 손으로 턱턱 집어주는 찐빵은 고급 베이커리의 빵에 뒤지지 않았다. 그 거친 빵을 좋아하는 사람은 비단 나 하나만은 아니었다.

찐빵집은 늘 거기 있을 것 같았고, 절대로 문을 닫을 것 같지도 않았다. 아무때고 찾아가면 벌겋게 단 손으로 갖쪄낸 찐빵을 집어주는 주인아주머니를 만날 수 있을것 같았다. 저렇게 맨손으로 자꾸 해도 될까? 의심이 되었고 아주머니는 '괜찮어. 이제 인이 백여서'라며 손사래를 쳤다. 핸드크림이라도 바르지..장갑이라도 끼지..라고 말하면 주인 아주머니는 그랬다.

'음식에 화장품 냄새 나면 안돼. 장갑끼면 감각이 없어서 안돼'

그 맛난 찐빵은 아주머니의 희생이 빚어낸 결과물 같은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찐빵집 문이 열리지 않았다.

하루 이틀..소문엔 주인 아주머니가 아프다고 했다. 많이 아파서 찐빵집을 다시는 못할것이라고도 했다.

주인아주머니가 걱정되었다. 또 찐빵도 걱정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찐빵집이 다시 문을 열었다고 했다.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가보니 역시 주인아주머니가 찐빵을 쪄내고 있다. 장갑을 끼고,..

고장난 손을 치료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래, 잘 됐어.

찐빵을 한 봉지 샀고 예전의 그 맛을 떠올리며 한 입 베어물었다. 이런..그 맛이 아니다. 맹숭하고 싱겁고..불현듯 장갑 낀 주인아주머니의 손이 떠올랐다. 아프니까..그렇겠지?

그럼 차라리 찐빵집 문을 열지 말지..

 

"에이..이 맛이 아니잖아. 겨우 이 맛을 내려고 손 치료를 한거야? 영 문을 닫든가 치료를 하지 말지.."라고 말했다.

그 빛나던 순간과 각인된 맛으로 찐빵을 남기고 싶었던 까닭이다.

너무나 특별했고 너무나 소중해서 김빠진 기억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누가 그랬다. "먹을 만 한데, 치료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니. 그게 할 소리냐. 주인아주머니 손을 보고도 그딴 소리가 나오냐? 사람이 왜 그러냐? 뭐라고 말 좀 해봐라. 시발"

"뭘 말해? 내 생각이 그렇다고. "

"니깟거 입맛 맞추자고 주인 아주머니가 치료도 안받아야하나? 그동안 얼마나 고생하셨는데.."

 

그럼..맛이 있든 없든 아주머니의 노력과 고생이 있었으므로 '맛있다, 훌륭하다'라고 말해야 하나?

전과 다르다. 치료하기 전이 더 낫다. 라고 말할 수는 없나?

이건 비인간적인가? 이렇게 말하는건 사이코패스인건가? 이렇게 말해서는 안되는건가?

 

주인아주머니의 처지를 먼저 생각하며 꺼이꺼이 울어주는 사람앞에 '별로야'라고 말한 사람은 욕 먹을 짓을 한건가.

'나도 그래'라고 같이 고개 끄덕여준 사람들도?

 

때론, 드러내지 않는, 아니 오히려 거칠게 말해버리는 진심과 애정도 있는 법이다.

그 깊이와 밀도를 개인적인 잣대로 넘겨짚어 매도하는건 무례하다.

 

어제, 그런 생각을 했다.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던 사람에게 꼭 말해주고 싶었다.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다는 건 누구도 시를 완성할 수 없다는 말일꺼야. 미치지 않으면.."

 

최승자를 사랑하는 것은 때로 위태롭다.

나는 아직도 미쳐버린 그녀가 좋다. 벌건 손을 한 찐빵집 아줌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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