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의 자화상
전성태 지음 / 창비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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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표제작


보통 단편선이나 소설집을 읽게 되면 표제작부터 읽는 습관이 있다. 표제작을 읽는다는 건 그 소설집의 내부로 들어가기 위한 사전탐사 같은 것이었다.

대부분의 소설집은 이런 사전탐사에 쉽게 응해주었고 책을 다 읽을 때까지 하나의 지표처럼 자리를 지키곤 했다. 표제작이 파랑이면 다른 글들은 푸르스름하거나 검푸르거나 투명한 파랑이거나 하는 식으로 달을 중심으로 퍼져있는 달무리처럼 하나의 풍경으로 수렴되곤 했다.

모든 소설집이 그런 친절한 구성은 아니지만, 표제작은 그렇게 나침반을 돌려보듯 처음의 읽기를 끌어주는 힘을 가졌다.

두번의 자화상.

표제작이 없다. 아무리 찾아도 두번의 자화상이라는 작품을 찾을 수가 없다.

어떤 일을 할 때 습관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것만, 이 작품은 그 습관마저 놓아야 읽어낼 수 있다니..조금 의아했다.

결국, 처음의 작품부터 읽어간다.

치매에 걸린 노인의 이야기가 그 처음을 열어준다.

나이가 제법 들어버린 나는 홀어머니를 늘 걱정하는게 일이다. 그 첫작품에서 마주한 치매노인 이야기가 나와 무관한 이야기였다면 뜨끔대는 콧등을 느끼지 못했을것이다.

힘겹게 첫 작품을 읽어낸다.

다음 작품과 그 다음 작품들..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저마다의 사연과 삶의 풍파들을 겪어내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열두 개의 작품들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과 사건들과 사연들이 언제쯤 내가 보았던, 겪었던, 생각했던 것들이다.

이미 알고 겪은 이야기가 무어 그리 감정을 흔들 수 있을까마는..그랬던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감정의 흔들림을 감당하기 쉽지 않다.

어쩌면..

애써 모른척 했던 것들이었다고 고백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까? 의문이 들기도 했으니 말이다.


표제작도 찾지 못하고 시작해야 하는 이유는 어느 곳을 디뎌도 만나게 될 "서로 다른 같음"을 알아채게 하려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2. 두 번, 또는 두번.


두 번의 자화상이 아니라 두번의 자화상이다. 띄어쓰기를 틀린 것이 아니라면 무슨 까닭일까 싶어졌다.

한 번과 한번의 차이와 같은 것일까? 그렇다면 '두번'은 어떤 기회를 품고 있는 것일게다.

어떤 기회일까? 작가의 펜은 끝이 가늘고 뾰족한 세필이겠다 싶었다. 미세한 떨림까지 그려내는 예리하고 진하지 않지만 그래서 선명한..

살짝 건조하지만 체온과 맞는, 격정적인 감정의 기복은 느껴지지 않지만 그 울림이 오래가는 조근조근한 책들을 좋아한다.

그런 취향 때문이었을지 모르겠지만, 두번의 자화상은 낮은 소리로 살짝 건조하게 읽는 이의 의중을 계속 확인하곤 한다.

이런 사람이 있어..이런 아이가 있어..이런 일이 있었어..들어봤어?

모든 작품들의 서두에 작가가 묻는 것만 같다.

한 작품을 읽고 나서 작가의 물음에 대답하게 된다.

들어본 것 같아. 사실 나를 닮았어.


작가가 그동안 여러 곳에 실었던 작품들이 모였고, 그 발표 순서대로 배치한 것도 아니지만 마지막 작가의 말에 쓰인대로 "인생에 단 한편은 없으며 어쩌면 겸손한 실패로 점철되는 게 문학인생이 아닐까.."라는 말이 두 번, 혹은 두번의 의혹을 풀어주고 있는 것만 같다.

인생은 수많은 단편들이 이어나가는 옵니버스 장편일게다.

그 가운데 하나, 둘의 헤아림은 의미를 잃는다. 되돌아 다시 마주보는 자신의 얼굴, 그것을 마주할 용기가 있는가에 대한 단호한 물음이 아니었을까?


#3. 오랜 후유증.

 

책을 꽤 오래 들고 다녔다.

나름 책을 빨리 읽어내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한 번씩 느닷없이 발목이 꺽이는 책들이 있다.

넙죽 받아 입에 물었는데 잘 마른 황률이었던 것 처럼..오래 입속에 굴리며 불려서 잘근잘근 씹어야 삼킬 수 있듯이 말이다.

짧은 글들이기에 덥석 읽기 시작했지만, 행간 사이에서 튀어나오는 유사 경험들과 유사 인물들에 대한 생각에 잠겨 속칭 진도를 뺄 수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마주하고 싶지 않는 것들이었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었다.

인정하고 마주하기엔 이미 용기 없음이 드러나버린 비겁함. 타협하며 살아내는 동안 뒷전으로 밀려난 것들이 이렇게 많았구나를 되새기게 한다.

조금 더 체온을 유지해도 좋았을 껄..

조금 더 눈길을 주었어야 했는데..

조금 더 오래 품고 있어볼 껄.

책은 "네 모습을 봐! 부끄럽지?" 라고 다그치지 않는다. "여길 봐, 이 상처 기억해? 그랬었어, 또 다치지 마"라고 다독이는 것 같다.


전성태의 필력은 뱃사공의 팔뚝에서 나오는 힘과는 다르다. 옆에 앉아 박자를 맞춰 숨을 쉬어주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나약하다는 것이 아니라, 세심하고 인간답다.

책을 읽고 나서 뭐라 정리해야할지 사실 막막한 것도 그 이유이다.

그저..고개를 끄덕이는 것 밖에 달리 할 수 있는 행위가 없었기 때문이다.


산다는 건, 어느 시점에서 자신의 얼굴을 마주봐야 한다는 외마디 비명같은 글을 겨우 읽어낸다.

자신의 삶의 길을, 스스로 그려내는 자화상.

제 얼굴을 마주보는 것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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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연령 60세 사와무라 씨 댁의 이런 하루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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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소한 이야기


마스다 미리를 발음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째서인지 자꾸 미스다 마리라고 발음하게 되는..

여러권의 시리즈처럼 나오는 만화책..읽은 사람들의 평이 대체로 좋다로 이어지고 특히나 미혼여성들에게 호평이 대단했다.

기혼인 사람이 얻을 공감이 있을까? 늘 조심스러운 마음에 구입을 자꾸 미루다 어느 날엔가 "아무래도 싫은 사람"이라는 제목의 책을 구입했다.

어디서나 있을 법한 사람의 이야기와 갈등, 관계 속에서 받는 스트레스와 일반적인 해소법, 혹은 견디는 법이 그려진 책을 꼼꼼히 읽었다.

오래 기억되는 말들이 많았다.

다시 읽게 된 마스다 미리의 책.

아버지 시로씨, 어머니 노리에씨 그리고 히토미..셋의 나이를 평균하면 60세가 되는 고령가족이다. 천명관님의 고령화 가족을 저절로 떠올리게 된다.

책을 받고 읽어가며 여러부분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소소하다.

정말 소소하기 이를 데 없는 이야기들이 과장됨 없이 그려진다. 어느 집에서든 한번 쯤은 겪어봄직한 생활과 관계의 이야기.

때때로 "어머나?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부분도 있었다. 예를 들면?

 

 


휴대전화에 몰입한 사람들을 보며 "뭔가 차 안이 거실화 되었어"라고 생각하는 히토미양..

요 대목에서 이 가족의 관계를 한 번에 이해하게 된다. 그녀의 사고체계는 가정적이다. 결혼을 해야한다는 압박도 있지만 부모님과 가족으로 사는 것에 익숙해진 모습이다.

가족이 모여 저마다의 할 일을 하는 거실을 떠올린다.같은 공간에 모여 다른 일을 할지라도 사랑하는 존재들에 대한 신뢰와 넉넉한 이해가 가능한 거실.

어쩌면 히토미는 그 거실을 떠나는게 겁나는 걸지도 모르겠다.


너그러운 아버지와 귀여운 어머니, 고민이 많지만 긍정적인 히토미..이 단란한 고령가족의 이야기가 조금은 답답한 가족의 이야기가 흡입력을 갖는건..공감일게다.


#2. 소소함의 힘


자주 이야기하는 소재들은 소소한 것들이다. 날씨에 관한 것, 가십, 일부러 심드렁하게 내뱉는 미래에 대한 고민, 주변의 변화와 조급해지는 마음..

국제정세나 테러,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야기로 공감을 끌어내기엔 '대부분의 공감'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 그것은 공감이라기보다 연대나 동맹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가볍고 천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서 그렇게 큰 일을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공감대란 스펀지 같아서 작은 것들을 더 쉽고 빨리 흡수하기 때문일거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작은 알갱이를 빨아들이고 그 속내를 품는 것..그래서 소소한 것들은 쉬이 지나쳐가기도 하지만 오랜 흔적으로 남아 때때로 웃음 짓게 하는 지도 모른다.

마스다 미리의 책.

단순하게 그려낸 이야기가 갖는 힘도 그런 것이 아닐까?

그림마저 단순한 이 이야기는 부러 치장하지도 과장하지도 않고 어느 이웃집의 이야기거나 내가 걸어오면서 겪었던 일 중의 하나이거나. 나도 그런 생각했었어..의 가까운 기억들과 경험들로 여백을 채운다.

두 번을 읽으며 처음의 여운과는 다른 두번째의 구체적인 기억의 개입을 경험한다.

우리 엄마도 그랬었어..라는 생각이 가장 많이 개입된 기억일테지만..


유명한 대성당의 벽화나 천정화를 보며 받는 감동과 엽서만한 종이에 그려진 기도하는 손이 주는 감동은 서로 다르다. 경외심을 품게 하는 거대한 작품과 저절로 손이 모아지는 작은 작품..어느 것이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저마다의 것이 주는 감동의 질량은 같은 무게일게다.

뭔가 자극적이고 통쾌한 한방을 자꾸만 갈구하게 되는 세태에 던지는 소소한 미소.

사와무라 씨 댁의 이야기가 하나씩 툭툭 건드려 준다. 할머니의 다락받에 있던 달큰한 곶감처럼 달게..


#3. 부록 혹은 낙서..

이 가족의 얼굴이 있던 첫 장면.

이 사람들..제법 사람같다.


 

 


 

 

 

 

 


마스다 미리의 다음 작품도 살짝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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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리앗 - 2014 앙굴렘 국제만화제 대상후보작
톰 골드 지음, 김경주 옮김 / 이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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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골리앗의 본질

 

커다란 덩치의 골리앗은 행정에 능한 행정병이었다. 보기엔 전장을 누빌 장수 같지만, 사실 그는 착하고 순한 행정병일 따름이었다.

블레셋 군대는 길고 지루한 전쟁의 승기를 잡을 수 있는 획기적인 대안이 필요했고, 골리앗을 이용하기로 한다.

그를 이스라엘군을 위협하는 용도로 사용하고자 한다. 군인이 군령을 위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드의 골리앗은 명령에 따를 뿐이다. 작은 돌멩이를 건네는 순한 골리앗이, 갑옷 조각 하나가 떨어진 것에 마음이 쓰이는 골리앗이 적군과 아군의 한 가운데에 서서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을 수행한다. 언제 끝난다는 기약도 없이..

그저 묵묵히 매일매일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말을 하며 그렇게 말이다.

결국, 이 지루하고 무의미한 대치를 다윗이 끝내게 된다. 골리앗은 그렇게, 우리가 알다시피 작은 다윗의 돌팔매로 지루하고 재미없는 미션을 마무리한다.

 

 

#2. 쓰임과 평가

 

어릴 때 단짝친구의 이야기다. 또래에 비해 작고 여렸던 나와 달리 보통의 아이들보다 한뼘쯤 키가 크고 덩치도 좋았던 친구가 있었다.

아래도 동생이 둘이나 있는 친구는 학교를 마치면 쪼르르 집으로 달려가 막내 동생을 데리고 우리집으로 놀러오곤 했다. 엄마처럼 막내가 뭔가를 입에 넣으려하면..

"에이..지지.."하며 자연스레 다른 것으로 바꿔 쥐어주곤 했다. 막내가 울면 혹시 설탕이 있냐고 묻고 한 잔 타줄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수저로 한수저씩 떠서 막내를 먹였다.

언니..

그 친구는 언니였다.

어느 날엔가 학교에서 키 큰 아이들을 뽑기 시작했다. 학교 배구단을 만든다고..당연히 친구는 배구단에 뽑혔다.

배구단을 하면, 수업료를 얼마쯤 덜 내도 된다는 조건이 있었던 걸 나중에 알았다. 덩치는 컸지만 오래 달리기를 하지 못하는 친구는 어쨌든 배구단이 되었다.

훈련이 시작되고..친구는 훈련을 견디지 못해 자주 우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훈련 받는 친구를 뒤로 하고 혼자 하교하는 길은 재미가 없었다.

한 달..두 달..

친구는 여전히 힘들어했고, 소질도 보이지 않았다. 늘 기합을 받고 있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구단을 빠져나올 수는 없었다.

어느 날엔가 기합을 받다 넘어지는 바람에 발목이 부러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제서야 친구의 엄마와 아버지는 학교에 가서 항의를 했고, 그렇게 친구는 배구를 그만두었다.

그 후로 우리는 여전히 막내를 데리고 엄마처럼 흐뭇한 표정으로 놀 수 있었다.

 

문득 친구의 이야기가 생각 났다. 어쩐지 골리앗을 닮았던 친구. 그의 역량과 자질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보여지는 것으로 평가해 유리한대로 사용하려는, 그리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어른들, 혹은 제도에 대한 부조리함을 말이다.

사람의 쓰임을 결정하는 건 어떤 기준을 가져야 하는건가?생각이 많아졌다.

 

#3. 오해 또는 진실..그리고 시선

 

어릴 때부터 다윗과 골리앗(왜? 언제나 다윗이 먼저인지 궁금했던 때가 있었다..가나다 순으로 해도 골리앗이 먼전데..)의 이야기는 작은 다윗의 신앙으로 커다란 골리앗을 제압한 영웅의 서사로 듣고 컸다. 작지만 기름부음을 받은, 즉 선택된 자 다윗이 거대한 폭압과 물렛돌 하나만으로 맞서 이겨냈다는 이야기. 특히나 주일학교에서 듣는 이야기는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위대했는지 모른다. 엄마의 기도에 "다윗과 같은 믿음과, 솔로몬의 지혜와.."라는 문장이 꼭꼭 들어있었던 것도 기억한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골리앗은, 다윗의 영웅적 행위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이지 않았을까? 이런 불순한 생각은 어른이 되어서 품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러던 중. 만나게 된 톰 골드의 골리앗은 어쩐지 뭉클했다.

너무 착하고 여린것이다.

길들여진 시선과 판단으로 오해 받고 제자리가 아닌 곳에서 쓰임 당하는 사람들이 비단 골리앗 뿐이겠는가.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는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갖게 된 지위가 만들어내는 오해와 부조리는 얼마나 가혹한 일인가..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어떤이의 희생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 선택이 올바른 것일까?를 생각해본다.

대다수를 위한 공익, 또는 공공선을 위한 일일지라도 어떤 이의 희생이 강요되어야 한다면 그것이 과연 올바른 것이라 평가할 수 있는 것인가말이다.

우리는..가끔 대다수라는 것에, 혹은 대의명분이란 것에 기대어, 너무도 당연하게 어떤 이의 희생을 암묵적으로 강요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섬뜩한 일이다.

 

블레셋의 골리앗.

아마 당분간은 "다윗과 골리앗"이 아닌 "골리앗과 다윗"이라고 부를것 같다.

가엾은...골리앗..

 

이 책은..그림이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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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3-11 2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비트는 만화 내용이 인상적인데요. 언더도그마라는 단어가 생각납니다.

나타샤 2015-03-11 22:05   좋아요 0 | URL
그렇죠? 약한것은 선하다는..막연한 도덕률에 익숙해진 것도 같고..서늘하더라구요.^^
 
계속 열리는 믿음 문학동네 시인선 66
정영효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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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믿을 수 없음의 믿음


<같은 질문들>


 폭설에 오랫동안 고립되었다. 길이 막혔고 음식은 모자랐고


 지금 필요 없는 사람은 누구일까 여럿이 누군가를 의심하

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 대다수가 되었다.


 예외 없이 걷다가 예외 없이 고민했다 사방은 흐릿한데 눈

빛은 뚜렷해져서 우리가 스스로 이유로 남을 수 있게


 우리는 여럿으로 소요되었다 여태 함께 모았던 대화가 기

억나지 않았다 눈발이 사납게 울수록 발이 무거워졌고 선택

은 힘들었으므로


 예외 없이 주저하다 예외 없는 암묵에 동의했다 여기서 꼭

필요한 사람은 누구일까


 반대로 다시 묻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가장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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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폭설에 고립된 것 처럼 살아간다. 모든건 부족하고 부족함의 끝에서 사람을 본다.

이것은 무엇일까? 사람에게 돌려진 시선은 잔혹함을 전제한다. 관계의 공고함이 그 내부에서부터 진동하는 것이다.

주저함이 죄책감을 덜어줄 수는 없다. 암묵적 동의가 가져오는 집단적 외면.

언제나 의심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 조차도. 영원성을 담보로 한 것들은 늘 그 한계를 드러낸다.

다만 주저하고 주저하며 동의 하는 것이지 그것이 절대적인 영원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믿음은 매일 열려야 한다. 그 믿음이 단단하고 분명한 것이 아닌 암묵적 동의일지라도 말이다.


#2. 풍경 같은 시.


시인은 풍경의 밖에서 본다. 모든 시는 마치 창문을 통해 바라보듯, 또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듯, 감정을 가두거나 감출 장치가 있는 곳에서 그려진다.

그래야 한다. 믿을 수 없는 감정이 그 속에 끼어들어 뻑뻑해지는 것을 경계한다고 느껴졌다.

왜냐하면 풍경 속은 부조리하기 때문이다.


같은 곳에 있어도 같은 곳을 보지 않았다(해결책, 중)

일곱시가 지났는데 여전히 다섯시가 따라오고 있었다(비대칭, 중)

나에 대한 확신은 반복되는가 경험적인가

그리고 무력해지는 잠으로 돌아와 차츰 잊어버렸다.

조금씩 다른 생각들이 쌓인 곳에서

다시 물어보기 위해 계속 짐작할 뿐이다(짐작하는 날들, 중)


어느 것도 설명되거나 증명되지 않는다. 믿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계속 되는 의심은 계속 되는 믿음의 갈구이다.

풍경은 아름답다는 것조차 거절되는 ..풍경은 건조하고 그것이 사실인지조차 불분명하다.


시집을 읽어내리며 나는 자꾸 먼 곳을 보게 된다.

믿고 있는 것들이 사실이었을까?를 묻다 사실일 수는 있겠구나 이내 수긍했다.

진실인것인가를 묻다.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다 다다른 질문.."어째서 믿음이 중요하지? 어째서 믿어야 하지?"


외로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에 속하고 싶은 어떤 바람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죄책감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암묵적 동의가 대다수가 되는 순간 조금은 덜어지는 죄책감 말이다.

고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믿고 사람을 믿고 풍경을 믿고 싶은 이 발버둥을 외면하지 말라는 그런 기도말이다.


시지프스.

진실의 정상까지 굴려 올린 믿음은 다시 의심의 골짜기로 떨어져 내리고..끝없이 반복되는 고행이 맺는 열매.

전설과 신화와 어디선가 들은 듯한 이야기들이 저절로 생각나는 시집 하나를 본다.

단정한 언어들이 수더분하게 누워 있는 시집은 조분조분한 걸음으로 무서운 이야기를 한다.


믿을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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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3-10 0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폭설에 고립된 듯한 삶이라는 문장을 읽으면서 최승호 시인의 시 `폭설주의보`가 생각납니다.

나타샤 2015-03-10 08:48   좋아요 0 | URL
그렇죠? 최승호님 시도..정호승님의 눈사람도..최근 이병률님의 눈사람 여관도 생각나더라구요. 최승호님 정말 좋아하는데..^^
 
마지막 정육점
김도연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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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가의 음모

 

작가는 매우 능수능란한 사람이다. 한 마디로 선수다. 작가 소개로 나온 사진이나 저간의 매체들과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 어딘지 어수룩하고 순박하기까지 해 보이지만..

허름한 옷을 입고 설렁 설렁 걸어다니다 누군가 시비를 걸어와도 허허 웃어주고, 정면으로 도전하는 자를 우습게 제압해버리는 무당파의 고수같은 느낌인 것이다.

몇명 아닌 작품 속 사람들을 시간과 공간을 엮듯 교묘하게 엮어내며 무언지 모를 현란한 손동작과 씨줄 날줄의 꼬임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들쑥 날쑥해 보인다.

도대체 이게 뭐야..싶어질 때, 보란듯이 펼쳐지는 진경산수화같은 커다란 그림을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 말이다.

키우는 개에게까지 자신의 작품을 읽어주었다는 일화를 읽었다. 이 정도면 거의 궁극의 도에 이르렀다고 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작가의 공력이 100 이라면 보통 그의 작품에 50을 불어넣기도 여간한 일이 아니라고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며 작품의 공력이 100은 넘어 보이는데..그렇담 작가의 공력은 어느정도란 말인가..

처음의 몇 부분은 자의로 읽어낼 수 있었다.

그 후는 작가의 음모에 휘말려, 주인공들과 공간과 시간의 결계 속을 헤매게 된다. 도무지 빠져 나올 수 없는 방진 속에 발을 넣은 셈이다.

처음 보는 초식은 아님에도, 다음 초식이 무엇일지 짐작하고 방어해보지만 고수는 그 짐작을 피해 회심의 일격을 살포시 날리곤 한다.

읽어내다 보니 화딱지가 날 지경이었다.

도대체 정체가 무엇인데..이렇게 사람을 별 힘 안들이고 돌리고 있으며 반항할 의지마저 생기지 못하게 할 수 있는가..하고 말이다.

 

마지막 순간까지..나는 작가의 늘어진 옷깃 하나도 잡아채지 못했다. 완패인 것이다.

#2. 마지막 정육점 - 여기가 마지막인것이 분명하냐고?

도식과 옥자 우연과 종욱과 은실​

신혼여행을 떠난 그 날 사고를 당하는 도식과 옥자..그들은 시공간을 맴돈다. 생각이 머문 곳으로 생각이 멈춘 때로​ 그렇게 옮겨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보고 듣는다.

옥자를 피해 달아나는데 온 정신과 힘을 쏟는 도식, 도식을 놓치지 않으려는 옥자..그들은 죽어서까지 추격전을 멈추지 않는다.

이 지긋지긋한 사랑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러려니 할 수도 있다..도식은 나이트클럽 웨이터다. 옥자는 미장원 종업원이다. 그럴 수 있겠다.

도식은 승복을 입고 ​불자의 길을 걷기로 한 사람이다. 옥자는 예쁜 친구를 이용하여 도식에게 겁탈 당할 계획을 세운다. 그럴 수 있을까?

옥자의 계획에 휘말려 하룻밤을 지낸 도식, 기억조차 없는 그 밤을 지우고 싶다. 옥자는 지우고 싶지 않다.  도식에겐 없던 일이고 싶다. 옥자는 없어질 수 없는 일이다.

이 징글맞은 사랑이 우여곡절을 겪으며 죽음을 넘어 그렇게 만나질 수 밖에 없던 사연을 찾아 떠돌게 된다.

어쩌면 업일지도, 어쩌면 풀지 못한 화두일지도 모를 이 둘의 입을 통해 눈을 통해 마음을 통해 보여지고 느껴지는 것들이 그대로 현실이거나 현실이 아니다.

사랑도, 인연도, 만남도, 시작과 끝도, 잃음과 얻음도 사실일까?

그들은 과연 죽었을까?

이야기 속은 미로처럼 꿈결처럼 펼쳐진다. 흩어진 조각들을 멀리서부터 끌어모아 하나씩 맞추어 나가야 한다.

그래야 보이게 되는 그들의 가족사진...

월정거리에서 시작해 다시 월정거리로 마무리가 되는 작품 ..

누군가 야무지게 묶어놓은 실타래 처럼..그 끝을 찾아 손끝으로 한참을 훑으며 따라왔더니 만나게 되는 처음의 그 매듭.

그 매듭이 처음의 그 매듭이 맞는걸까?

#3.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여러번 앞으로 돌아가곤 했다. 작가는 퍼즐 조각을 밖으로 던져두고 하나씩 끌어다 모으길 바란 것 같으나..나는 한자리에 모아놓고 재배치를 하고 있었다.

도무지 관계가 풀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뭐가 막힌거지? 뭐가 꼬인거지?를 몇번이고 되짚어 보았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지만, 오기였고 심통이었을것이다. 첫 시작을 그렇게 고생을 시키더니 이 엄청난 책은 그 다음부터는 멀미가 나게 달리기 시작했다.

임철우의 황천기담도 슬쩍 들여다 본것 같고, ​야마시로 아사코의 엠브리오 기담도 슬쩍 지나쳐간것 같다. 심지어 닥터 후의 '타디스'의 동양판, 아니 강릉판인가? 싶기도 했다.

그러나..전혀 달랐다.

앞서 말하지 않았는가. 작가는 능수능란한 선수였던 것이다.

비슷해보이지만 실제로 하나도 비슷하지 않은 이야기를 꺼내 놓는 이 오묘함은 아마도 오랜 시간을 곰삭힌 그의 펜에서 나왔으리라.

마지막 장을 덮으며 애잔했다.

애잔하다는 말 이외에는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한껏 달아올라 절정을 지나 차분히 내쉬는 숨처럼..그리고 까마득하게 잊는 것처럼..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은 없는 그런 경험.

그 찰나를 사는 우리들의 닮은 모습들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와 닮은 사람, 그러나 전혀 다른 사람. 어떤 인연과 시간의 터널을 되짚어 돌아가 보면 한번은 만날 법도 한 사람.

이야기가 찰지다는건 바로 이런 것이지 싶다.

찰진 이야기..이해가 안되는 척하며 자꾸 펼쳐보는 옥자와 도식의 '그'장면..나는 그렇게 오래도록 이 책을 놓지 않으려 했다.​

​오롯이 읽는 이의 삶에 투영되어 속살거릴 이야기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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