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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열리는 믿음 ㅣ 문학동네 시인선 66
정영효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월
평점 :
#1. 믿을 수 없음의 믿음
<같은 질문들>
폭설에 오랫동안 고립되었다. 길이 막혔고 음식은 모자랐고
지금 필요 없는 사람은 누구일까 여럿이 누군가를 의심하
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 대다수가 되었다.
예외 없이 걷다가 예외 없이 고민했다 사방은 흐릿한데 눈
빛은 뚜렷해져서 우리가 스스로 이유로 남을 수 있게
우리는 여럿으로 소요되었다 여태 함께 모았던 대화가 기
억나지 않았다 눈발이 사납게 울수록 발이 무거워졌고 선택
은 힘들었으므로
예외 없이 주저하다 예외 없는 암묵에 동의했다 여기서 꼭
필요한 사람은 누구일까
반대로 다시 묻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가장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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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폭설에 고립된 것 처럼 살아간다. 모든건 부족하고 부족함의 끝에서 사람을 본다.
이것은 무엇일까? 사람에게 돌려진 시선은 잔혹함을 전제한다. 관계의 공고함이 그 내부에서부터 진동하는 것이다.
주저함이 죄책감을 덜어줄 수는 없다. 암묵적 동의가 가져오는 집단적 외면.
언제나 의심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 조차도. 영원성을 담보로 한 것들은 늘 그 한계를 드러낸다.
다만 주저하고 주저하며 동의 하는 것이지 그것이 절대적인 영원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믿음은 매일 열려야 한다. 그 믿음이 단단하고 분명한 것이 아닌 암묵적 동의일지라도 말이다.
#2. 풍경 같은 시.
시인은 풍경의 밖에서 본다. 모든 시는 마치 창문을 통해 바라보듯, 또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듯, 감정을 가두거나 감출 장치가 있는 곳에서 그려진다.
그래야 한다. 믿을 수 없는 감정이 그 속에 끼어들어 뻑뻑해지는 것을 경계한다고 느껴졌다.
왜냐하면 풍경 속은 부조리하기 때문이다.
같은 곳에 있어도 같은 곳을 보지 않았다(해결책, 중)
일곱시가 지났는데 여전히 다섯시가 따라오고 있었다(비대칭, 중)
나에 대한 확신은 반복되는가 경험적인가
그리고 무력해지는 잠으로 돌아와 차츰 잊어버렸다.
조금씩 다른 생각들이 쌓인 곳에서
다시 물어보기 위해 계속 짐작할 뿐이다(짐작하는 날들, 중)
어느 것도 설명되거나 증명되지 않는다. 믿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계속 되는 의심은 계속 되는 믿음의 갈구이다.
풍경은 아름답다는 것조차 거절되는 ..풍경은 건조하고 그것이 사실인지조차 불분명하다.
시집을 읽어내리며 나는 자꾸 먼 곳을 보게 된다.
믿고 있는 것들이 사실이었을까?를 묻다 사실일 수는 있겠구나 이내 수긍했다.
진실인것인가를 묻다.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다 다다른 질문.."어째서 믿음이 중요하지? 어째서 믿어야 하지?"
외로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에 속하고 싶은 어떤 바람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죄책감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암묵적 동의가 대다수가 되는 순간 조금은 덜어지는 죄책감 말이다.
고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믿고 사람을 믿고 풍경을 믿고 싶은 이 발버둥을 외면하지 말라는 그런 기도말이다.
시지프스.
진실의 정상까지 굴려 올린 믿음은 다시 의심의 골짜기로 떨어져 내리고..끝없이 반복되는 고행이 맺는 열매.
전설과 신화와 어디선가 들은 듯한 이야기들이 저절로 생각나는 시집 하나를 본다.
단정한 언어들이 수더분하게 누워 있는 시집은 조분조분한 걸음으로 무서운 이야기를 한다.
믿을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