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8 - 강물은 그렇게 흘러가는데, 남한강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8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간예정일이 9월 15일이고, 오늘은 9월 10

창비에서 남한강편 출간을 앞두고 서평단 모집을 했다. 가제본을 읽는..

창비에 대한 앙금은 여전히 남았는데, 이 책을 사서 볼 수 있을까? 잠시 생각했다. 아마 스스로 수긍이 될때까지 해명과 설득을 자신에게 거듭하다 구매할것 같았다. 결국 구매하게 될 책, 그렇게 결정하고 나서 신청을 해본다.


가제본은 마치 드라마의 대본처럼 위로 넘기게 되어있다. 설명도 없는 사진들과 어쩌다 발견되는 오타 한 두개..가제본의 느낌은 늘 그렇다.

잘 무쳐서 정갈한 접시에 멋지게 담아내기 직전의 맛있는 나물을 먼저 한 입 먹어보는 느낌. 그래서 투박하고, 그래서 때때로 과하다 싶게 머리에 남기도 한다.

그것은 상황이 주는 상상의 맛일게다. 그래서 걱정이 되기도 한다. 과한 칭찬을 하게 될까..?


어느덧 8권째.

남도답사기가 나왔었고, 그 개정판이 나왔었고, 북한편, 일본편..(북한편은 창비가 아니었구나.)

온 나라 구석구석 말 그대로 "답사기". 이 말이 담고 있는 끈적한 땀내와 생각만으로도 무릎이 시큰거려오는 걸음걸음을 떠올리게 된다.그러다보면 그 내용과 무관하게 얼마나 열심히 밟아가며 쓴 글인가, 얼마나 큰 애정으로 들여다보며 마음을 주며 써낸 글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재담꾼이라 해도 부족할게 없는 유홍준 교수의 섬세한 (그래서 때로 과하다 싶어지기도 하는..)하고 전문전인 설명들이 덧입혀진 글은 산길 하나, 작은 누각 하나에도 얼마나 진한 역사의 숨이 배어있는지 말해준다.


강원도 영월에서부터 흘러나온 물줄기가 충청도와 경기도를 지나쳐 두물머리에서 북한강과 만나 한강으로 흘러드는 남한강을 따라 걷는다.

사실, 청령포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단종애사로 불려지는 가장 안타까운 단종의 이야기를 말이다.

그 어린 왕은 보위를 빼앗기고, 서인이 되는 모든 과정을 어떤 마음으로 견뎠을까?

구중궁궐안에 왕손으로 태어난 것이 그의 죄이며 허물이었던 걸까? 어린 단종이 이해하고 끌어안기엔 너무 거대했던 궁궐의 음모와 정치는 그렇게 어린 왕을 궁에서 내 몰고, 멀고 먼 강원도 땅으로 보내기에 이른다. 그 작은 걸음마다 얼마나 큰 두려움과 서러움이 번갈아 밟혔을까?

관음송은 묵묵히 그 울음을 보아내며 어떻게 견뎠을까?

때마침 아침 티비프로그램에서 기차를 타고 한강을 탐방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영월이 나왔고, 청령포가 나왔고,관음송이 나왔고, 엄마의 손을 잡고, 아빠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는 아이들이 비춰졌다. 저런 미소를 어린 단종도 지어본 적이 있었을까? 궁금해졌다.



낯익은 지명과, 어디선가 들었던, 혹은 드라마나 영화의 촬영지라고 이야기 되었던 곳, 비슷해보이지만 서로 다른 모양이었던 정자와 누각..두물머리를 거쳐 한강으로 흘러들기 전까지 남한강이 품은 이야기와 시간은 담담하고 음전하다. 오래 삼킨 그리움이 물결을 끌고, 설움이 물결을 밀어 청령포 에돌아 나가는 눈부신 절경을 만들어냈으리라.

우리 나라 어느 한구석도 박물관 아닌곳이 없고, 도서관 아닌곳이 없다고 했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어느 한구석도 온기가 머물지 않은 곳이 없다고 보태고 싶다.


마지막에 배치된 답사일정표를 본다.

길 가에 돌멩이 하나까지 설명해 줄 근사한 길잡이가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구구절절 이야기를 끌어내,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 속으로 오래 전 그들을 불러와 거닐게 하고 다투게 하고 그리움에 끌어안게 할 이야기꾼이면 좋겠다.

아니면, 그저 혼자 작은 흙먼지를 내며 걸어도 좋겠다. 시간 따위에 구애받지 않고..오롯이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 머물던 사람들을 찬찬히 생각해내며 지금 밟고 선 좌표를 오래 기억할 증표를 하나씩 모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꾸준히 보게 되는 건, 문화재의 역사와 가치 뿐 아니라, 유홍준 교수가 이야기해주는 그것의 본질적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묘미도 없지 않을 것이다.

문화재 몇호, 보물 몇호의 지위가 아닌, 그 시대의 美를 엿보는 느낌..나쁘지 않다.


처서도 지나고, 백로도 지났다. 조금 더 추워지면 강가엔 물기가 서리가 되어 앉을게다.

바짓단이 축축해질게다.

그리움은 그렇게 젖은 길이 어울릴지도 모른다. 내가 걸은 오늘 이 길이 먼 훗날 누군가의 발길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살짝 설레기도 한다.

가볍게 남한강을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많은 것을 보고 깨우치지 못해도 거기 남한강이 있으니 흐를것이고, 거기 남한강이 있으니 걷기에 좋을게다.

그렇게 시간을 답사하는 것이 삶의 또 다른 여백이지 않을까?


댓글(1)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란놀 2015-09-18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처럼 거기 강이 있으니 흐르고
그 강이 있으니 걷고
그 강을 걸으니
마음에 아름다운 숨결이 피어나리라 느껴요
 

서재를 사용하고 뭔가 꼬물거린게 고작 2년쯤?

알라딘 고객이 된지 16년.

하루 한 번 들어와 책을 검색하고 장바구니에 담고, 일주일에 한 번 주문을 한다.

그러다 끄적거릴 것이 생기면 끄적이고 아니면 방치해두는 서재.

알라딘 서재 탭을 열고 들어와 리뷰를 읽다 '나의 서재'를 흘깃 보는데..오늘 방문 134명?

왜때문에?

 

책을 끊는게 술 끊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을 절감한 몇달.

말 그대로 온갖 정나미가 떨어졌다.

내 머리 굵어짐의 시작이었던 창비는 이제 딴나라출판사가 되었고..(대학 입학하자마자 산 창비전집의 지로용지가 아직도 또렷한데..) 일언반구 말도 없는 문지와 결단을 내리고 1세대 총사퇴라는 행동을 보여주는 문동에게서 잘 찾아지지 않는 진정성에 나도 참 가지가지한다 싶었다.

신경끄고 하던 짓이나 하면 되지 뭐 대단한 독자라고 그걸 따지고 있었더란 말이냐..

하지만 그게 그렇지 않더란 말이다.

 

순문학을 지향하는 것도 아니고, 대단히 청렴한 출판사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원하는 건..신뢰할만한 출판사였는지도 모른다. 내 취향과 비슷한 코드로 책을 내는 곳..그곳이 좋은 곳이었으면 하는 일차원적 바람같은 것이었을게다.

책을 고르며 무의식적으로 출판사를 확인하게 된다.

요 며칠 장바구니에 넣었다 뺐다 했던..몇권의 책을 주문하기로 한다.

 

언어의 망각에 대하여라는 부제가 있다. "저 자신은 망실되었으나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마치 메아리처럼 ‘다른’ 언어의 틈새에서 살아남아 그 존재의 ‘지층’이 되는 언어의 특성을 암시한다"라고 책 소개에 있다. 호기심을 극대화하는 소갯글이다.

기호학이나 언어학에 소양이 있는건 아니지만, 평소에 글자와 언어에 대한 흥미가 있었다.

 

  작년에 지인에게 선물받아 읽었던 이 책이 오래 여운이 남았다.

 글이 어떻게 생겨나고 사멸되고 흔적을 남기는지..

 최근에 글자와 관련되어 읽었던 글자전쟁도..

  

 

 

 

 

 

 

 

 

 

 

 

 

글자와 문자의 규정.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다분히 쪼개보고..연결해보고..

책을 읽는다기보다 책의 내용을 왜곡해보고 오해해보고 결론과 가정을 바꾸어보는 것이 재미있는 나로서는 이런 글자들의 움직임 또한 눈이 반짝이는 흥미로움이다.

 

  두 권의 책을 주문했다. 예약주문한 책과 함께 오도록 주문한 탓에 좀 기다려야 하지만 원래 책이란 주문하고 배송되어 오는 동안 가장 행복한 것이 아닌가..그래서 진득한 행복감을 맛보고 있다.

 얼마전 사서 읽는다기 보다 가지고 논다고 평가하는 것이 더 어울릴  <지서>..

 

 기호와 심볼, 이모티콘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어떻게든 읽어지며 어떻게든 이해된다. 놀랍지 않은가..단 한자의 글자도 없는데..그렇담 글자란 어떤 의미여야할까?

 

 

 

 

 

 

 

 

 

 

세권을 장바구니에서 꺼내려다 자꾸 놓아버린다. 속좁은 독자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언어가 얼마나 진정성을 담보해야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고 동력을 갖는지 모르지 않을 출판사들에 대한 작은 반항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대신 이런 책들을 주문한다.

 

 

 

 

 

 

 

 

 

 

 

 

 

 

 

 

 

  

 

 

 

 

 

 

 

 

 

 

 

 

 

어쨌든..책 읽기는 멈추어지지 않고..덕분에 좀 더 건강한 출판사들을 기웃거리게 된다.

  근데..오늘 왜때문에 방문자가 많은거지?

 아..뭔가 찝찝해. 청소도 안하고 사방에 막 널부러놓은 집에 낯선 사람들이 막 왔다갔다 하는 기분이야....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5-09-08 18: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이 ‘화제의 서재글’, ‘알라디너의 선택’에 뜨면 무심코 클릭하는 방문자가 있을 겁니다.

나타샤 2015-09-08 21:45   좋아요 0 | URL
무심코..그렇겠네요^^

펭귄출판사 2015-09-11 15: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국어에 `왜 때문에`라는 말은 없습니다. 왜?라는 질문에 ~~때문에라는 대답이 붙는 것이 일반적인 쓰임입니다 ^^

나타샤 2015-09-11 15:25   좋아요 0 | URL
네..^^

파란놀 2015-09-18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강한 출판사와 즐겁게 만나서
조용하게 사랑받는 책을
기쁘게 만나시기를 빌어요.

세상에는 대형출판사에서 나오는 책뿐 아니라
작은 출판사에서 나오는 멋진 책도 참 많아요
 
메이블 이야기
헬렌 맥도널드 지음, 공경희 옮김 / 판미동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헬렌 맥도널드 작, 공경희 역.

헬렌 맥도널드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공경희라는 이름에 기대를 걸었다. 사실 역자가 누구인가가 무슨 소용일까 싶지만, 단 한 권 "봄에 나는 없었다"에서 공경희의 번역은 너무나 탁월했다. 작가의 쉼표까지 번역한건가? 싶을만큼 말이다.겨우 그거 하나로? 각인이다. 역자가 누구지? 되묻는 과정을 갖게 되었다는 것, 그것으로 작가나 역자에 관심없는 내게 공경희라는 역자의 이름이 각인되었다.

엘렌 맥도널드는 작가이자 시인이며 동물학자이자 역사학자이며 일러스트레이터라는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다. 놀랍다.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이 끝과 저 끝의 이름을 모두 끌어안은 느낌이다.


매.

대학에 입학하고 제일 처음 눈에 들어왔던 것이 걸개그림이었다. 본관 건물은 커다란 광목이불을 덮은 것 같았다.

힘차게 날아오르는 매. 그 밑에 유관순 누나야? 싶은 흰 저고리에 까만 깡통치마를 입은 여자들. 그리고 붉은 글씨..4.3항쟁에 관한 그림이었다.

걸개그림에서 단연 압권이었던 것은 매의 그림이었다. 걸개그림의 한복판에서 하늘을 가를 듯 날개를 펼치고 형형한 눈빛으로 위용을 보이던 매. 장산곶 매라고 했다.

그렇게 눈에 마음에 선득하게 내려앉은 장산곶매는 내 삶의 한 시기를 용감하게 보낼 수 있게 한 부적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래, 날아보는 거야. 장산곶 매처럼..'

'그래 부딪혀 보는거야. 매처럼.'

그런 시간을 보냈다. 헬렌의 매 이야기가 기대되는 이유 중 하나였다.


헬렌의 매.

사진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아버지와 헬렌. 늘 자연의 모습을 함께 보고, 느끼고 찾아다니며 있는 그대로 신비한 자연을 배운다. 더없이 좋은 아버지의 사랑도.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상실감에 어쩌지 못하는 헬렌은 어릴 때부터의 꿈인 참매를 길들이기로 한다.

가슴을 뛰게 하는 매. 맹금류, 그 중에서 매에 매료된 헬렌은 매에 관한 모든 것을 공부하고 연구했다. 어릴 때 부터.

그만큼 매에 관심과 애정이 있던 헬렌이었기에 매를 만나는 과정, 만남을 준비하는 과정, 길들이는 모든 과정에 전문적인 단어들이 나오곤 한다.

대충 뭉뚱그려서 이런 용도일 것이다 추측되는 것이 아닌 정확한 명칭을 구사한다. 그러나 전문성을 담보하다보면 흔히 보여지는 딱딱한 전개가 아니라, 거기 있어야 하는 단어처럼 쓰인다.

작가이자 동물학자인 헬렌의 힘이다.

매를 길들여가면서 헬렌은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과 슬픔으로부터 빠져나오려 안간힘을 쓴다.

그렇게 자신의 슬픔과 아픔을 매에게 투영하여 위로와 기쁨의 보상을 받고 싶었으나 실패한 화이트의 경우와 교차하며 보여지는 헬렌의 이야기는 점점 극적으로 이어진다.

화이트와 고스.

헬렌과 메이블.

두 이야기는 같은 지점에서 시작해 전혀 다른 결말로 이어진다.


헬렌의 눈과 마음.

매와의 교감을 시작하는 과정은 인내의 시간이다. 다른 동물들을 조련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누가 주인인지, 주인이 어디 있는지를 일깨워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 아무도 없음 알게 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도록. 자신에게 해가 되는 존재가 있다고 여기는 게 아니라, 위해의 요소가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지점이 화이트와 결정적인 차이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충분히 먹이를 먹어'라고 갈구하던 화이트. 자신의 결핍, 결핌이 가져온 외로움과 혼란, 궁극적인 고통을 매에게 투영하여 한없이 내어주려고 했던 미련함은 결국 실패하고 만다.

헬렌은 기다린다. 기다리고, 조심스레 시도한다. 그 과정은 마치 자신이 매의 주변이거나 매가 보는 아무렇지 않은 풍경이 되어가는 과정처럼 보인다.

그렇게 슬픔이 극복될까?


이야기는 몰입력이 크다.

단 한문장도 허투루 읽히질 않는다. 세심함과 절제, 그리고 적확한 묘사는 압권이라 할만하다.

책을 읽으며 여러가지 딴짓을 하곤 했다. 유투브 다큐멘터리를 찾아본다던가..참매와 새매를 구분해본다든가..


 

왼쪽이 새매, 오른쪽이 참매다.

나는 매가 되어가고 있었다. (p142)

그랬다 헬렌은 매가 되어가고 있었다. 다시 말해 세상의 어느 한 부분이 되어가고 있었다.

슬픔에 젖은 가여운 여자가 아니라 매잡이의 역할을 하는 세상의 한 자리인 것이다.


슬픔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슬픔은 극복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견디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슬픔은 충분히 감각되고 이해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헬렌의 슬픔은 사라지지 않았고, 가벼워지거나 잊혀지지도 않았으며 매에게 전가된 것도 아니다.

다만, 세상의 한 부분이 되어 그 슬픔을 이해하고 빈자리를 충분히 채워줄 친구를 만들어낸 것이다.


매는 슬퍼하지도 않고 상처를 입지도 않는다

그저 사냥하고 죽일 뿐이다.

스코틀랜드 부둣가의 어느 눅눅한 아침

한 낯선 남자가 겁에 질려 퍼덕거리는

검은 발톱과 부드러운 은색 눈빛의 매 한마리를

상자에서 꺼내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매에게 '메이블'이란 이름을 붙여주었고

케임브리지로 데려와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책 표지 안쪽에 쓰여진 문단. 거기에 모든 이야기가 있다.

슬픔과 함께 생활하는, 그렇게 슬픔과 메이블을 인정하는 삶. 그 새로운 삶의 한 가운데 헬렌이 단단하게 있다.


이 다큐를 먼저보고 읽었으면..더 대단했을것도 같다.

https://www.youtube.com/watch <바람의 혼, 참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5-09-04 2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매는 들어본 적이 있는데 새매는 처음 들어봅니다. 사진을 보니까 구분하기 어렵군요. ㅎㅎㅎ
 
가족의 죽음
제임스 에이지 지음, 문희경 옮김 / 테오리아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임스 에이지 자전 소설.
파란 어린 아이와 파란 홀로그램 나비가 있는 표지는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세상에 남겨진 이들의 안부를 묻기 위해 나비로 찾아온다고 했다.
그 나비를 망연하게 바라보는(사실 아이의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아이. 파란 그리움이 거기에 있었다.

하루 전, 그리고 그날 낮.
그날 저녁
다음 날 아침, 그리고 마지막 날
이전 이야기.

목차는 이렇게 분류되었다. 어떤 일이 일어났구나..라고 짐작할 수 있게 말이다.
이전 이야기에 묻어놓은 추억은 얼마나 애잔할까..잠시 숙연해지다 책장을 넘긴다.

녹스빌 작은 마을에 가족을 이루고 사는, 딱히 문제가 드러나지 않는 평범한 가정의 가장 제이와 그의 아내 메리. 그리고 두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상처 많은 부부생활을 보고 자란 제이는 애써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 무의식적으로 안간힘을 쓰게 된다. 무책임한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미련하게 감당해내는 어머니. 돌아보면 제이에게 가족이란 편안한 대상이 아닌, '우리'의 근원이 아닌 자신이 책임져야하며 또한 책임을 요구하는 부담의 다른 이름이었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은 새벽.
상식적으로 서둘러 떠나야겠지만, 그 와중에 잠깐 생각을 한다. 정말일까? 전화를 한 랠프를 믿어도 될까? 지금 당장 가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제이와 가족의 앙금은 이렇게 즉각적인 반응이 아닌 잠시 생각해야하는 관계였다.
결국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제이와 제이의 준비를 돕는 아내 메리.
그들의 아침 준비는 왠지 엇갈린다. 그러나 절대로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한없이 사랑스러운 상대에 대한 배려와 애틋함이 묻어나는 풍경이지만 그 뒤에 예민하고 날카롭게 고개를 드는 상념들은 그들의 관계가 어색하다기보다 그렇지..라는 수긍을 하게 한다.
어쨌든 상대에 대한 책임을 다하려는 것. 그것으로 스스로의 죄책감을 줄이려는 이기적인 발상들..
길을 나서는 제이.
제이가 없는 빈자리를 지키는 메리의 평범하지만 왠지 불안한 하루가 지난다.
돌아올 시간이 지나도 도착하지 않는 제이와 불길한 전화 한 통.
결국..제이의 사망소식을 듣게 된다
메리의 가족들이 모이고..모두 어쩔 줄 몰라하며 메리를 위로한다.
진심으로..?
위로하며 슬픔을 나누는 과정에서 조금씩 고개를 드는 가족들의 관계와 감정들이 드러나보인다.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기대를 하고 있었으며 어떤 상처를 받았었는지..

언젠가 보았던 영화 "학생부군신위"가 떠올랐다.
상중에 모인 가족들이 보여낸 알력과 극단으로 치닫는 갈등..
물론 그렇게까지는 아니었다. 조근조근 서로를 다독이며 크게 드러나지 않게..큰 문제가 되지 않게..제이와 메리의 평소처럼 속으로 꾹꾹 눌러담는다.
그렇게 눌려진 감정들은 감정들 사이사이에 배인 애정과 신뢰를 바닥으로 흘려낸다
깨를 압착하여 고소한 참기름을 만들듯..그렇게 다져지며 위로라는 멋진 전환품을 내어놓는다.

제임스 루퍼스 에이지.
어째서 자전소설이었는지를 책 날개에 적힌 이름을 다시 보며 확인한다.
제이의 아들 루퍼스.
'이전 이야기'라는 부분에서 루퍼스는 아버지와의 추억을 꺼내 놓는다.
작고 순수하고 상처받기 쉬운 때, 루퍼스의 곁에서 추억을 만들어주었던 아버지 제이.

가족소설이라거나 성장소설이라고 규정지을 수 없다는데 동의한다.
가족의 모습이며 루퍼스의 성장과정이며 되짚어내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의 고백이건 에이지의 글은 생동감이 있다.
마치 롱테이크로 찍어낸 긴 다큐멘터리를 보듯, 출연자의 숨소리까지 귀기울이게 되는 세밀하지만 과하지 않고 여럿의 마음을 드나들지만 번잡스럽지 않다.
수시로 시선이 바뀌지만 혼란스럽다기보다 모두의 입장에서 상황을 이해하는 입체감으로 작용한다.

슬픔에 겨운 메리가 되어 고모에게 안겨있다가, 슬픔에 겨운 메리를 안아주는 고모의 시선이 되는것은 여러개의 정삼각형을 모아 정이십면체의 입체를 만들어내는 것 같은 경험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평범했던 어느 날.
평범한 아버지가 평범치 않아서 평범한 모습으로 사고를 당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특별한 추도가 시작되는 것이다.

"루퍼스가 보기에 아빠는 가정을 사랑하고 식구들을 모두 사랑하지만 가족을 사랑하면서 얻는 만족으로도 어쩌지 못할 만큼 외로웠고, 오히려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 외롭거나 외로움을 떨쳐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 아빠가 행복하려면 무엇보다 잠시 집에서 벗어나 어둠 속에서 고요하게 나뭇잎이 살랑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밤하늘의 별을 봐야 하는 것 같았다 (...) 이런 행복 가운데서도 가장 큰 행복은 이렇게 서로 그런 마음을 안다는 것, 또 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지도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p20-21)"

도입부에서 읽은 이 이야기가..아마 이 책의 모든 내용이지 않았을까 싶다. 안다는 것, 또 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지도 않는 행복..
가족은..그런 것일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인의 집
전영애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 탐독의 시작은 '시'였다. 세상이 궁금했던 시절, 도스토옙스키와 까뮈, 루쉰으로 이어졌다. 잘난척 하는 까칠한 여고생의 전형이었달까?

실존에 대한 고민과, 아직 발 딛지 않은 묘연하기만 한 '사회'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두려움은 딸 수 없는 신포도처럼 언제나 치기어린 결론을 내리곤 했다.

'별 거 있겠어? 사는거지 뭐..' 이런 시덥잖은 말들이 오가고 그 사이에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나고, 그것이 이성이었을 때, 세상은 적당한 율격을 갖는 시가 되었었다.

막막함과 의심으로 그득했던 여고생의 노트에 릴케가, 하이네가, 브레히트가, 괴테가 그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숨쉬는 것 조차 탄성이 날 정도로 모든 것이 놀랍던 시간들. 그 속에서 '시'는 친절하게 삶을 이해시켜주는 뮤즈였었다.

공동일기를 쓸 때마다 하이네를 썼다.

마냥 낭창하지만은 않은 결기. 삶을 마주하는 견고한 시선이 내 눈과 마음에 들어차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것인가? 어찌해서 이렇게 단단하고 뜨거울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고민은 거기까지였다.

혀끝에서 달달하게 감도는 시들은 청춘의 시절을 건내준 좋은 친구였다.

몇 해의 시간이 흐르고 마르크스를 읽고 엥겔스를 읽어낼 때..다시 만난 하이네.

공산당 선언의 마르크스와 천상 시인인 절친 하이네. 그제서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詩는 時라고 말이다.

시대를 노래하는 시. 끝없는 반역과 반역을 노래하는 시. 사랑조차도 무너뜨리고 넘어서는 사랑이어야한다. 감상에 주저앉아 허우적대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진화하는 영혼의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내 청춘의 대부분의 시간에 세상으로 난 창문에서 파랗게 펄럭이던 시와 시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가만히 앉아 그랬다더라가 아니라 그가 숨쉬었던 곳, 그가 거닐었던 곳, 그가 통곡했던 곳의 이야기가 말이다.

그의 詩가 태어나던 바로 그 時에 머물고 싶어졌다.

 

열 세명의 시인들을 찾아나선 시인.

시인의 집에서 시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노래는 먼 시간을 돌아 시를 읽어내며 신열에 달뜬 여자애를 초대한다.

여기에서, 이 공간에서, 이 때에, 나는 이런 삶을 살다가, 이런 노래를 부를 수 밖에 없었어요. 내가 시를 쓴 것이 아니라, 당신이 찾아온 것처럼 시가 찾아왔지요. 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렇게 전영애의 손을 잡고 그의 발을 빌어 걷는다.

그녀가 거기 시인이 있고 시가 있어서 찾아갔던 것과는 달리 시인의 집으로 초대받은 왕년의 독자가 되어 걸어본다.

길 위의 흙먼지도, 발밑에서 미끄러지며 자락자락 소리를 내는 자갈에서도 젖은 땅에서도, 낮은 웅덩이에서도 오래 전 낯익은 노래들이 만나지는 길이다.

때론 콧노래처럼, 때론 비통한 삶의 비명처럼, 때론 안타까운 신음으로 문 앞에 다가선 내게 조용히 인사를 건넨다.

 

"당신 거기 있군요"

이미 오래 전 떠난 자리라는 걸 알지만, 그 문 앞에 서성이다 시인과 만났던 시들이 그랬듯, 온 신경을 모아 감각해본다.

 

참 성실한 글이다.

다박다박 밟아낸 자욱이 선명하다. 낮이거나 밤이거나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던 사연들이 하나같이 절절하다. 하나같이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에 대한 애정과 존경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글.

시의 행간에 박힌 눈물의 흔적까지 한숨의 얼룩까지 찾아내고야 마는 애정이 느껴지는 글이다.

시인들의 시를 번역하며 얼마나 공을 들였을까 짐작이 되어진다.

 

이쪽의 시간에서 저쪽의 시를 부른다.

너무 먼 간극에 주춤거릴 때, 그녀가 조심스레 노란 징검다리를 놓는다.

"시인의 집" 구경가지 않을래요? 라고 거절할 수 없는 초대장을 내민다.

 

시인이란 아마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인 것 같다. 사람과 세상을. (p290-파리의 미아: 하이네의 미아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