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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죽음
제임스 에이지 지음, 문희경 옮김 / 테오리아 / 2015년 8월
평점 :
제임스 에이지 자전 소설.
파란 어린 아이와 파란 홀로그램 나비가 있는 표지는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세상에 남겨진 이들의 안부를 묻기 위해 나비로 찾아온다고 했다.
그 나비를 망연하게 바라보는(사실 아이의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아이. 파란 그리움이 거기에 있었다.
하루 전, 그리고 그날 낮.
그날 저녁
다음 날 아침, 그리고 마지막 날
이전 이야기.
목차는 이렇게 분류되었다. 어떤 일이 일어났구나..라고 짐작할 수 있게 말이다.
이전 이야기에 묻어놓은 추억은 얼마나 애잔할까..잠시 숙연해지다 책장을 넘긴다.
녹스빌 작은 마을에 가족을 이루고 사는, 딱히 문제가 드러나지 않는 평범한 가정의 가장 제이와 그의 아내 메리. 그리고 두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상처 많은 부부생활을 보고 자란 제이는 애써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 무의식적으로 안간힘을 쓰게 된다. 무책임한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미련하게 감당해내는 어머니. 돌아보면 제이에게 가족이란 편안한 대상이 아닌, '우리'의 근원이 아닌 자신이 책임져야하며 또한 책임을 요구하는 부담의 다른 이름이었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은 새벽.
상식적으로 서둘러 떠나야겠지만, 그 와중에 잠깐 생각을 한다. 정말일까? 전화를 한 랠프를 믿어도 될까? 지금 당장 가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제이와 가족의 앙금은 이렇게 즉각적인 반응이 아닌 잠시 생각해야하는 관계였다.
결국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제이와 제이의 준비를 돕는 아내 메리.
그들의 아침 준비는 왠지 엇갈린다. 그러나 절대로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한없이 사랑스러운 상대에 대한 배려와 애틋함이 묻어나는 풍경이지만 그 뒤에 예민하고 날카롭게 고개를 드는 상념들은 그들의 관계가 어색하다기보다 그렇지..라는 수긍을 하게 한다.
어쨌든 상대에 대한 책임을 다하려는 것. 그것으로 스스로의 죄책감을 줄이려는 이기적인 발상들..
길을 나서는 제이.
제이가 없는 빈자리를 지키는 메리의 평범하지만 왠지 불안한 하루가 지난다.
돌아올 시간이 지나도 도착하지 않는 제이와 불길한 전화 한 통.
결국..제이의 사망소식을 듣게 된다
메리의 가족들이 모이고..모두 어쩔 줄 몰라하며 메리를 위로한다.
진심으로..?
위로하며 슬픔을 나누는 과정에서 조금씩 고개를 드는 가족들의 관계와 감정들이 드러나보인다.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기대를 하고 있었으며 어떤 상처를 받았었는지..
언젠가 보았던 영화 "학생부군신위"가 떠올랐다.
상중에 모인 가족들이 보여낸 알력과 극단으로 치닫는 갈등..
물론 그렇게까지는 아니었다. 조근조근 서로를 다독이며 크게 드러나지 않게..큰 문제가 되지 않게..제이와 메리의 평소처럼 속으로 꾹꾹 눌러담는다.
그렇게 눌려진 감정들은 감정들 사이사이에 배인 애정과 신뢰를 바닥으로 흘려낸다
깨를 압착하여 고소한 참기름을 만들듯..그렇게 다져지며 위로라는 멋진 전환품을 내어놓는다.
제임스 루퍼스 에이지.
어째서 자전소설이었는지를 책 날개에 적힌 이름을 다시 보며 확인한다.
제이의 아들 루퍼스.
'이전 이야기'라는 부분에서 루퍼스는 아버지와의 추억을 꺼내 놓는다.
작고 순수하고 상처받기 쉬운 때, 루퍼스의 곁에서 추억을 만들어주었던 아버지 제이.
가족소설이라거나 성장소설이라고 규정지을 수 없다는데 동의한다.
가족의 모습이며 루퍼스의 성장과정이며 되짚어내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의 고백이건 에이지의 글은 생동감이 있다.
마치 롱테이크로 찍어낸 긴 다큐멘터리를 보듯, 출연자의 숨소리까지 귀기울이게 되는 세밀하지만 과하지 않고 여럿의 마음을 드나들지만 번잡스럽지 않다.
수시로 시선이 바뀌지만 혼란스럽다기보다 모두의 입장에서 상황을 이해하는 입체감으로 작용한다.
슬픔에 겨운 메리가 되어 고모에게 안겨있다가, 슬픔에 겨운 메리를 안아주는 고모의 시선이 되는것은 여러개의 정삼각형을 모아 정이십면체의 입체를 만들어내는 것 같은 경험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평범했던 어느 날.
평범한 아버지가 평범치 않아서 평범한 모습으로 사고를 당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특별한 추도가 시작되는 것이다.
"루퍼스가 보기에 아빠는 가정을 사랑하고 식구들을 모두 사랑하지만 가족을 사랑하면서 얻는 만족으로도 어쩌지 못할 만큼 외로웠고, 오히려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 외롭거나 외로움을 떨쳐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 아빠가 행복하려면 무엇보다 잠시 집에서 벗어나 어둠 속에서 고요하게 나뭇잎이 살랑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밤하늘의 별을 봐야 하는 것 같았다 (...) 이런 행복 가운데서도 가장 큰 행복은 이렇게 서로 그런 마음을 안다는 것, 또 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지도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p20-21)"
도입부에서 읽은 이 이야기가..아마 이 책의 모든 내용이지 않았을까 싶다. 안다는 것, 또 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지도 않는 행복..
가족은..그런 것일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