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시집을 끼고 살았다. 어떤 시들은 싱거웠고, 어떤 시들은 거짓말쟁이였으며 어떤 시들은 꿈만 꾸었다.

읽는 것이 심드렁해질 때 보통 시를 끼고 지내곤 한다. 이건 흡사 메뉴판에 끝없이 늘어서 있는 메뉴 중 고를게 없거나 입맛을 당기게 하는 것이 없을 때, 그냥 길가에 서서 계란빵으로 허기를 때우는 것과 비슷하기도 하다.

책을 사들이고 읽고, 때론 쌓아두고 멍~하게 응시하고..적잖은 시간이 지나고 시가 시들해지고 있다.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산문들이 나름 재미지다.

 

 

 

 

 

 

 

 

 

 

 

 

 

 

 

 

호흡이 길어져서라기 보다..누군가 길게 이야기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푹 물러진 시레기처럼 그런 말들이 고팠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우물거리며 후룩 거리며 읽고 나면..비평집도 칼럼집도 또 맛나게 집어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읽어치웠던(?) 김현선생의 책도 다시 집어들어 신나게 읽겠지..

 

 

 

 

 

 

 

 

 

 

 

 

 

 

그리고..요즘 부쩍 관심을 두게 되는 매력적인 '브라질'

 

  브라질 사람들에 이어 브라질총서로 묶이는 "미래의 나라, 브라질"도 기다리게 된다.

  긴 글을 읽고 싶어진다. 이제 조금 긴 호흡으로 읽어도 좋을 때다.

 

 

  산문부터 시작하자. 겨울이 짧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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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스맨의 재즈 밀리언셀러 클럽 144
레이 셀레스틴 지음, 김은정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1. 엑스맨의 저주.


오독의 습관은 읽고 싶은대로 읽는데서부터 시작하는가 보다.  액스맨의 재즈라는 제목을 눈으로 따라 읽으면서 입으로는 엑스맨의 저주라고 발음하고 있었다.

사라마구를 자꾸 사마라구라고 읽고, 시인 임경섭을 임경업이라고 읽어대는 사람이다보니 새로울 것도 없다.

엑스맨. 어느 한 편에 속해있지만 결국 그 편을 몰락하게 만드는 사람을 엑스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내부의 재앙이라고 할 만한 존재.


사람들이 죽어갔다. 도끼로 사정없이 찍힌 채 잔혹하게 말이다. 도끼 날에 남겨져 있는 두개골의 조각. 흥건한 혈흔. 범죄 스릴러라고 구분되는 장르의 소설이 가져야할 디테일한 잔혹함이 형형하게 살아있다. 혼자 책을 읽으며 자꾸 현관을 보게 될만큼 말이다. 대범하게 편지를 보내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범인. 그를 찾아나서는 다양한 사람들과 그들의 삶.

각양각색의 사연을 품은 사람들이 단서를 찾아나선다. 뉴올리언스에서 말이다.


#2. 1919년 뉴올리언스


태평양 이쪽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만세 소리가 요란할 즈음. 태평양 저쪽에선 도끼를 든 살인마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세계대전의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 피폐해졌고 빈곤과 차별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연쇄살인마가 그것도 도끼를 들고 잔혹하게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이 활보하고 있다.

사람들은 더더욱 고립되어간다. 아무도 믿을 수 없고 극도의 공포가 가난과 피폐한 삶을 파고든다.

이민자와 흑인들과 백인들이, 기독교와 부두교와 민간신앙들이 뒤섞인 혼돈의 사회. 혼란과 빈곤과 공포가 가득하지만 그 곳에서도 사람들은 살아냈다.

재즈가 연주되었고 고단한 삶, 불안한 현실 속에서 조금씩 위로를 나누게 된다.

도끼 살인마는 편지에서 재즈를 연주하지 않는 집에 찾아가겠다고 한다. 어째서 재즈일까.

짧은 소견으로 재즈는 흑인들의 영가, 노동요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들었다. 그것이 틀을 갖추고 밴드가 결성되고 1900년대 뉴올리언스에서 전성기를 이루게 된다고..

거기에 사람들의 삶의 애환과 어디에도 하소연하지 못하는 두려움과 절규가 배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루이 암스트롱이라 알려진 사람의 이름이 반가웠다. 트럼펫을 불던 ..빵빵하게 부풀어오른 볼과 커다란 눈 리듬을 끌고가던 연주, 끊어질듯 이어지며 끈적하지만 단호한 선율들이 떠올랐다.

얼마나 멋진 세상인가. 라고 노래하던 걸죽한 음성도..


살인 사건을 추적하는 사람들 역시 정형화된 조직 속의 사람들이 아니라 저마다의 이유로 서로 다른 시작점을 갖고 단서를 찾아 나선다. 다양한 싯점은 다양한 삶의 흔적들과 맞물려있다.

입체적이라고 밖에.

범죄 스릴러에서 스포트 라이트를 받게 되는 사건과 범인 추적자. 그것으로 버무려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의 사회상과 뉴올리언스 특유의 분위기 사람들의 복잡하고 고단한 일상들이 고스란히 들어난다. 책의 두께감에 잠시 당황할 필요가 없었다. 그 많은 이야기들을 이렇게 잘 엮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어쩌면 공포는 사회를 조각내는 촉매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범인을 찾는 것보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그들이 찾은 단서들이 보여주는 범인의 윤곽이 아닌 자신이 살아온 삶의 윤곽이 흥미로웠다.


커다란 태풍이 몰고간 자리에 무엇이 남았을까?

사람들은 여전히 미워하거나 경계하고 때로 싸우고 때로 노래하며 살아내고 있다. 트럼펫은 재즈를 연주하고 살인마는 사라졌다. 뉴올리언스 사람들은 크게 일렁이다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공포와 재즈가 흐르는 뉴올리언스. 어딘가에서 또 다시 도끼 날을 세우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재즈는 연주되고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한 구석에서부터 단서를 모으기 시작할거다. 살아간다는 건 조금 묵직한 공포를 견디며 살아내는 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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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불의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승리하는 것이다>

사필귀정이라고 했다. 권선징악이라고 했다. 하지만 선은 정의는 모두의 것이 아니었다. 어떤 이들의 정의, 어떤 이들의 선만이 힘을 갖았고 대다수의 정의와 선은 짓밟히곤 했다. 역사는 그런 사람들의 저항흔(痕)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시간 전에 우리는 힘 없는 국가의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수탈을 당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도 저항할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물적 조건들 뿐만아니라 신념과 인간성까지 말살당했다.

저항은 끝없이 이어졌지만 불가항력이었다. 불가항력..이만큼 무기력한 이유가 또 있을까..

가장 약한 사람들이 먼저 죽어갔다. 정신이 마음이 육체가..

치유되지 않은 트라우마는 오랜 시간이 지나 방어기제가 되었고 저보다 약한 이들을 밟음으로 자신의 입지를 보장받는 영악함을 키워냈다. 그렇게 사분오열이 되어지는 사람들...급기야 피해자들에게 조롱과 악담을 정의라는 이름으로 대의라는 이름으로 쏟아붓고 있다.

 

얼마 전 한일협약이 이루어졌다.

위안부문제를 해결한 대통령이라고 자화자찬이 이어졌고 정작 피해 할머니들은 소외된 저들의 정의와 선을 구현해낸다.

조악한 근거들을 들어 최선이라고 했다. 팔 수 있는 건 전부 팔아먹고 야반도주를 꿈꾸는 간교한 여편네처럼 환하게 웃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더불어 그들의 편에 서서 이제 그만 용서하라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화가 나고 또 한편 가엾다.

대승적이라는 말은 약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의미로 바뀌고 있다. 과연 그런가.

 

오랜 저항의 시간을 기억해야한다.

우리 나라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이어진 불의에 저항했던 기록들, 그들의 저항흔을 더듬어 볼 필요가 있다.

 

 

 

 

 

 

 

 

 

 

 

 

 

 

 

 

 

 

 

 

 

 

 

 

 

 

 

 저항은 송곳처럼 어디서든 뚫고 나온다.

 

 

 

 

 

 

 

 

 

 

 

 

 

 

제국의 위안부..이것이 법정싸움으로 비화된 것에는 우려를 한다. 하지만 그 내용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지배와 피지배, 그 사이에서 동격의 사람들에 의해 체결된 정당한 계약도 뭣도 아니었으며 이것이 개인적 차원의 결정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자발적 종군 위안부도 개중 있었을 수 있다. 포주가 있었을테고, 한국인 모집책들이 있었을게다. 그것이 그들의 선택이었다고 하기엔 상상조차 불가능한 폭력적인 시간이 전제되어 있었다. 일부의 그럴싸한 상황들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 전체의 모순을 뒤엎을 일반화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양국의 화합을 바라는 마음에서 서술했다는 책은 너무나 폭력적이다. 문제제기와 새로운 시각의 제시를 넘어 피해자들에게 사죄도 없이 용서와 화합을 바라는..그러지 못하는 것을 졸렬함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다 읽진 않았다. 읽다 던져버렸다. 그 책을 더 구체적으로 읽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는 없다.

 

불가역적 협의란 없다.

불가역적일 수 있는 건..위안부 할머니들의 시간과 고통. 그것이다.

 

정의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저항하는 사람들이 승리하는 것이고 저항의 흔적이 역사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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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초 말 그대로 역병이 창궐하여 나라꼴이 난리도 아니었다. 경제를 살리자고, 중동으로 떠나라는 신탁을 전한 여인은 머쓱했으리라. 그래서 손만 잘 씻으면 되는 중동감기라고 말했다.

두려움에 떨며 이웃지간에도 경계와 염려가 뒤섞인 묘한 감정으로 지내야했다. 누군가 기침만해도 눈꼬리가 저절로 올라갔으니까.

겨우 수습이 되고 그 와중에도 자신에게 이익이 될만한 것들만 챙기는 꼼꼼함과 언제나 들키고 마는 언론플레이를 시작했다.

 

여전히 세월호는 깜깜하게 묻지도 따지지도 못했고 온 힘을 다해 그들의 입을 막으려했다. 주변인들을 압박했고, 거짓정보를 흘렸고, 추종세력들을 동원해 조롱하고 멸시했다.

 

역사를 국정화한다고 했다. 패배주의적 역사관이 문제라고, 역사학자 90퍼센트가 좌파이며 김일성 주체사상을 배운다고 호도하며 6.25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게 난리를 쳤다. 사람들이 반대했다. 역사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시민들이 나섰고, 역사학자들이 나섰고, 선생님들이 나섰고 급기야 아이들까지 나섰다. 그들은 꼭꼭 숨어서 국정교과서를 만들기 시작했다.

 

쉬운 해고가 가능한 노동법 개혁도 시작되었다. 농민들의 쌀값이 바닥을 쳤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이대로는 안된다고 나서자 차벽을 쌓았고, 물대포를 쏘았다. 사방에서 터져나오는 다양한 요구와 분노들은 함성이었고 아우성이었다.

말하지 말라. 나서지 말라. 혼난다. 아마 이 세가지의 행동지침이 저들에게 있었나보다. 한 노인이 쓰러졌다. 아무도 사과하지도 않았고 그를 구조하던 이가 넘어지면서 무릎으로 친것 같다는 말도 안되는 말을 국회의원이란 자가 했다.

아직도 노인은 깨어나지 않았다.

 

일이 많았고 사건이 많았다. 많은 사건만큼 그 녀의 외국행도 많았다.

많은 이들이 결정적일때 자살을 했고, 내쳐졌으며, 마녀사냥을 당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외국에서 국위선양(?) 중이었다. 외교를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분주히 움직였다.

지랄도 하면 는다고 그토록 열심히 타국의 대표들과 만나고 협상을 해봤으니 그 바닥의 생리를 알거라 생각했다.

미련한 짐작이었다.

 

2015년을 겨우 사흘 앞두고 한일협상이 타결되었다.

위안부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설레발을 친다. 자화자찬은 이어지고, 큰 성과를 내었다고 자축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 사달이 나고야 말았다.

피해자도 모르게 진행된 협상이라니..돈 몇푼에 팔아버린 자존심이라니.

겨우 96억에 해결될만한 사건이었나? 어제 내내 뉴스 상위권에 있던 어떤 기업인의 개인 재산이 조단위를 넘어간다고 하던데..수십년을 악몽같은 삶을 살아낸 할머니들께 그것도 사과의 표시도 아닌 꼴랑 96억으로 퉁치자고 받아온 협정을 성공이라고 할 수 있는가.

 

어이가 없었다.아니 아직도 어이는 없다.

어쩌면 좋지? 이런 상처들을 어떻게 해야할까? 육두문자를 연달아 쏟아내봐도 좀체로 분이 풀리지 않는다.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소리지르며 울어젖혀도 나아질 것 같지 않다.

어떤 이들은 모든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라는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말을 빌어다 적당히 얼버무리며 이따위 정부를 갖게 된 것이 국민의 탓인듯 호도한다.

 

근대화와 민주화가 함께 이루어지지 못한, 먹고사니즘이 승리한 시대적배경에서 근대화에 방점을 찍었던 결과이다. 먹고 살만 해지자 저당잡혔던 민주주의가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먹고 살만했던 살림 살이는 동력을 상실하고 같이 죽어가고 있다.

어째서 변화가 없으며 변혁의 힘이 만들어지지 않는지..짐작은 되지만 그게 다가 아닐거라 애써 위로한다.

 

책을 하나 꺼내든다.

 

   그냥 읽어야겠다. 그 마지막의 모습이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어떤 느낌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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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그 날은 문득 그 꿈을 꾼다.

문득 그 날은 어떤 그 꿈을 꾸기도 했다.

노란 유채꽃이 지천인 어느 섬.. 노란 유채꽃이 피기 전 여린 섬모처럼 꼬물거리던 그 뿌리가 먼저 빨아들였던 비릿한 피의 맛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까.

햇살보다 날카롭게 파고들던 총성과 비명을 낙인처럼 아직도 간직하고 있을까?

 

날이 찼다.

겨울 냄새가 잔뜩 배인 날이다. 하긴 동짓달이다. 동짓날도 머지 않았고..핏빛 팥죽을 쑤어먹는 그 날. 생각은 끝을 모르고 달리고 나는 가만히 책장을 더듬었다. 손끝에 닿은 책 하나. 한라산.

 

 서사는 어떻게 직조되는지..역사는 어떻게 드러나는지..우리는 무엇을 보아야하는지..

 

 학살의 현장은 진실이 드러나는 그 날까지 수습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

 심란했던 지난 밤의 꿈은 또 다시 반복되려는 학살을 감지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제 이익을 위해, 제 무리의 안녕을 위해 국민을 볼모로 잡고, 혹은 그 국민을 외면할 수 있는 사람들..벼랑 끝으로 자꾸만 밀어댄다. 그 곳에서 나라를 잃은 삼천궁녀처럼 후둑후둑 국민들이 떨어져 내린대도 그들은 자신의 손으로 민 것이 아니라며..잘 버티지 왜 떨어지냐고 의지가 부족하다고..혹은 어쩔 수 없었다고..

 

 아직도 선홍빛 누명이 벗겨지지 않은 이야기를 폐병쟁이 노인네처럼 읽는다.

 하나를 읽고 심호흡을 하고..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직 남은 눈물을 훔치며 읽는다.

감상적이다.

 

분노를 일으켜 세워 다부지게 행동할 용기도 자질도 없는..그저 감상일 뿐이다.

 

내친김에 하나 더 더듬어 뽑아본다.

 

  제주도 말로 풀어내려 작가는 고심했겠다.

 시가 산문이 되고 그 사건의 조서가 된다.

  4월이 되면 제주에 가자. 3월의 끄트머리에서 눈물을 닦고..설운 기억들이 켜켜이 쌓인 가난한 집 아이의 바지처럼 온통 기워지고 터지고 헤진 역사 속으로 걸어가자.

 

 

 

 

 

 

 

 

 

문설주에 피를 바른 집은 죽음의 사자가 넘어갔다. 모든 장자의 목숨을 앗아간 그 밤.

붉은 피를 바른 그 집들을 죽음이 넘어갔다.

우리의 문설주엔..얼마나 더 많은 피를 발라야 할까.

 

문득 한라산을 떠올렸다.

시린 겨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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