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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식 룰렛
은희경 지음 / 창비 / 2016년 6월
평점 :
#1. 몇가지의 단상
중국식 룰렛이라는 제목을 듣는 순간 떠오른 어떤 여배우. 안나 카리나. 고다르에 의해 발견된 여인. 이 매력적인 여배우가 "중국식 룰렛"이라는 동명의 영화에 나왔었다. 고다르와 헤어지고 나서 ..별로 흥행하지 못했던 영화지만 꾹꾹 눌러담는 연기가 일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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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때, 나보다 열두살이나 많은 친구의 오빠를 좋아했었다. 그 오빠와 같이 보러 간 영화. 디어 헌터. 정신은 온통 오빠에게 쏠려 있고 무슨 내용인지 어째서 디어 헌터인지, 누가 나왔었는지 기억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만 닉이 러시아 룰렛을 하는 장면. 제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텅 비어버린 시선을 돌리던 장면만 선명하게 남았다.
진실이 무엇이든 룰렛은 원하는 이야기를 내어주지 않는다. 몇가지의 일들이 은희경의 작품을 읽기 전부터 머릿속을 흔들고 지나갔다.
이런 바람의 흔적을 고스란히 두고 읽어도 좋을까?
#2.
모르는 손님이 두고 간 수첩. 그 속에 적힌 한 문장을 읽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알고 있는지. 나의 모든 것은 거짓이다. 진실하지 않은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깨달은 뒤 부터."
커피숍에서 일하는 나와, 나와 같이 사는 Y, 나의 시선은 나였다가, 그 였다가 자꾸만 돌아와 맞춰진다.
딱 하나, 총알이 든 총구를 찾아 수없이 두려움과 진실을 토해내는 룰렛처럼..
총알이 발사되는 순간까지 아무도 그곳을 나갈 수 없고, 포기할 수도 없으며, 그만둘 수 없는 게임의 규칙처럼..
여섯개의 단편 중 하나의 단편을 샘플북으로 읽는다. 너무나 작고 작은 글씨..있는대로 집중하지 않으면 글자가 뭉개져버리는 통에 자꾸만 찌푸리게 되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읽히지 않는 내용. 대충 훑어보아도 될 그것을 그렇게까지 집중해서 읽어내야만 했을까. 어차피 운명에 맡기는 거라지만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하는 룰렛. 그 게임에 참여했다면 그 룰을 따를 수 밖에라고 고개를 주억거린다.
삶의 영역. 나의 영역. 너의 영역. 누군가와 공유하는 영역. 그것이 공간이거나 또한 수첩 속 메모이거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는 저주는 공평하다.
기필코 뚫고 나가려한다면, 혹은 사고로라도 뚫고 나가야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감당해야할 준비가 되어야만 한다.
영역 밖에서 시들어버린 축복은 총탄이 발사되지 않았음에도 두려움에 심장마비를 불러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이 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 분명한 것은 나의 영역에서 일어난 일은 밖에서 이해되지 않으며 다른 영역에 들어선 나는 이미 내가 아니거나 너무나 노골적으로 '나'일것이라는 것.
시선을 오가며 쓰여지는 글은 자칫 산만할 수 있었다. 사실 조금은 산만했다. 빠르게 시선을 돌리지 못하는 이는 어디서부터 놓쳤지?를 몇번인가 되짚어야만 했다.
탄실은 돌아갔는데..방아쇠를 당길 차례인데. '어? 잠시만요 제가 어디까지 했죠?'라고 묻는 짓을 하게 되는것이다.
독자의 역량이 그것밖에 안되었던 탓이려니..
[나는 나를 반기지 않는 세상에 태어났고 투명인간이 되는 도장도 발명해내지 못했다. 그리고 정작 나를 바라봐주기를 바랐던 단 한사람은 나를 투명인간처럼 대했다. 오늘 찻집 앞 사거리에서 우연히 당신과 마주쳤다. 당신도 나도 혼자였다.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춘 나의 곁을 당신은 무심히 지나쳐갔다. 그동안 당신의 웃음이 향한 곳은 내가 아니라 내가 걸친 찻집 에이프런과 쟁반이었다. 그것이 나의 장미였다. (p23)]
#3.
주위를 둘러싼 갖가지 소품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어쩐지 '사물의 비밀'이라는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나를 둘러싼 수천, 수만가지의 소품들과 그 소품들이 목격했을 이야기. 사실과 진실과 갈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순간 발사되는 운명의 총알.
우리는 수없이 룰렛을 돌리고 있는것은 아닐까?
미리 읽어본 단편 하나.
나머지 단편들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왜?
사실..잘 모르겠다. 수많은 이미지들을 끌어들이는 통에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아챌 수가 없다.
처음부터 총알이 없었던 것은 아닐테니까..탄실을 기꺼이 돌려보고 싶다.
오랜만에 보는 은희경.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