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데 어떤 출판사의 책인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이 있고 그것을 구매해서 읽으면 그 뿐. 그 책이 나오게 된 경로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작가의 이름도 늘 헷갈리기 일쑤고 작품과 작가를 따로 생각하기도 하고 작가 이름도 제멋대로 기억해버리는 사람인지라 1. 작품, 2. 작가, 3. 출판사 정도의 비중이었을거다.
아직도 임경섭은 내게 임경업이라는 이름 뒤에 떠오르곤 한다. 죄송하게도..
어느 날 부턴가 들리는 출판노동자들의 이야기. 사실 오래 된, 이미 구태가 되고 관례가 되었을 행태들이 송곳처럼 뚫고 나오기 시작했다. 실망에 앞서 소름이 돋았다. 저들의 횡포에 몇푼 안되는 소액일지라도 보태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은 한동안 책읽기를 멈추게 했다. 그제서야 출판사가 눈에 들어왔고, 그제서야 서점들이 눈에 들어왔고, 그제서야 책이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다는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사회구조는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굴러가기 마련이다. 때때로 나는 어떤 시각에서 보면 반동이고 어떤 시각에서 보면 호인이고 어떤 시각에서 보면 공범일게 분명하다. 비판받을 자리에 서 있었다면 비판 받아 마땅하다.
특히나 내가 선호하던 출판사들이 줄줄이 걸려들기 시작할 때 느껴지는 자괴감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짓을 하고 있던거지?
작은 출판사들에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눈물겹게 책을 내고 있는 단단한 곳들..
계간지구독을 신청하고, 후원계좌를 하나 만들고 펀딩에 보태고.
이렇게 저렇게 적잖은 곳과 연을 맺게 된다. 기분이 좋아졌다.
매달 통장정리할 때 찍혀있는 후원회비가 빠져나간 흔적에 뿌듯했다. 보란듯이 기념품 같은 걸 건내주진 못하는 곳이지만,(그런걸 애초에 만들지도 만들 생각도 안하는 ) 나오는 책 하나 하나가 기대되고 기꺼이 구입해 읽게 된다.
며칠 전 sns에 후원하는 출판사 책임자가 반품된 시집들을 어쩌면 좋을지 고민하는 글을 올렸다.
뭔가 개운치 않은 상황에서 반품이 된 것 같아 안타까웠지만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아마 밀려난 것일게다. 짱짱한 홍보따윈 하지 못하니까..광고판을 모두 접수해버린 대형출판사들에 밀렸으리라.
사람들이 이런 저런 조언을 했다. 어찌 처리될지는 모르겠지만 안타깝다.
시집들이 정말 좋았다. 알록달록한 시집을 모으던(?)걸 그만두고 그 옆에 희고 단정한 시집을 세우는 재미가 좋다.
시가 뭐고?는 칠곡 할매들의 시집이다. 아마 이 출판사에서 나름 히트작일거다. 소개도 많이 되었고..얼마전 칠곡에 포탄이 날아왔다던가? 해서 깜짝 놀랐던 적이 있었다. 할매들은 괜찮으신가? 하고..
포탄 따위는 쨉도 안되는 사드가 근처 성주에 배치된다고 하니..큰일이다. 사드는 어디라도 배치되면 안되는데..
사랑의 파문을 주문했다.
책 소개에서 <~문학의 도구는 언어이다. 아니 언어는 도구를 넘어서는 도구이다.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지금 -여기의 언어는 자의성이 강한 잉여, 혹은 결여의 언어로 떠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를 넘어서는 언어라는 것이다. 그 언어의 정수에 아마도 시가 있을 터이다. 시적 언어란 다시 말해 인문을 인문답게 하는 최종 심 급의 언어인 셈이다. 날것의 언어, 생명의 언어, 여백의 언어, 잉여의 언어, 나아가 결여의 언어를 어떻게 재구축할 수 있을까> 라는 부분을 읽는 순간 찌릿했다.
모든 것에 사랑이 있다. '사랑'이 말랑한 단어가 가지는 정치적 생명력을 보아낸 것이 흥미롭다.
정치란 것이 도무지 일상의 것과 맞물리지 않아 생경하게 느껴지지만 살아가는건 어쩌면 가장 치열한 정치행위일지도 모른다.
작은 출판사들이 의외로 열심히 책을 내고 있다. 책을 사고, 후원을 하고, 펀딩을 하며 "책만 좋으면 되지 뭐"하는 이기심에서 뛰쳐나오려 한다. 안간힘을 쓴다. 어떤 출판사가 그나마 건강한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다만 덩치가 커지면 이익이 우선되기 시작하면 책은 더이상 책이 아니라 상품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책을 읽고 싶은 것이고 상품을 쟁이고 싶지 않으니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가늠해본다. 나만 유난 떠는게 아닌게 분명할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