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 이야기 - 음식에 숨겨진 맛있는 과학
최낙언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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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밥투정을 할 때면 밥상 맞은 편에 앉아계시던 할머니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시며 보릿고개 이야기를 하셨다.

'니들이 배고픈걸 몰라서 이러는거야. '라며..

조금 더 자라서 아무때나 틈이 날 때 급하게 밥을 먹고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하곤 했다. 엄마는 늘 걱정이었다.

'규칙적으로 먹어야지. 집 밥을 먹어야지..'하며

아이들을 키우고 그 아이들이 독립해서 혼밥족의 대열에 합류하고 덩그러니 남은 내외는 머리를 맞대고 늘 회의를 한다.

'뭐가 맛있을까?'..


먹는 일의 의미가 시간에 따라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떠올린다. 포만감에서 건강으로 그리고 맛으로..먹는 행위는 이 세가지를 모두 담고 있지만 어디에 방점이 찍히느냐의 문제였던 것 같다. 먹을 것이 넘쳐나고 먹방이 대세이고 스타세프들이 티비를 평정하는 요즘. 그렇다면 '맛'이란 뭔가에 대한 의문은 자연스레 생기게 된다.

그 맛의 정체를 묻고 대답하는 책.

VJ특공대 같은 티비 프로그램에서 맛집을 취재하면 사람들의 대답은 어느 순간부터 한결같았다.

"담백하고 맛있어요."

자극적이지 않고 담백하고 맛있는 것.

"재료 본연의 맛이 살아있고 인공의 맛이 없어서 좋아요."

재료 본연의 맛은 있나? 인공의 맛의 경계는 어디지?

"시골 어머니가 해주시던 그 맛"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오로지 손맛으로만 음식을 하시나?

늘 갸우뚱 거리던 것들의 답을 찾는다.

의심하고 있던 맛의 비밀, 혹은 오해때문에 누명을 쓴 재료들. 설탕, 소금 같은 흰 가루들은 참 억울했을 것이다.


'맛'을 이야기하는데 다양한 의견들을 인용하고 여러가지 분야의 증명들이 첨가 된다.

식품영양학자나 요리전문가의 글이 아닌 생리학자와 인문학자, 철학자와 심리학자 작가의 이야기까지 모두 모아놓은 이야기는 한마디로 광대한 인문학이라고밖에.

맛의 인문학. 그렇게 정의해도 좋겠다.

과학적, 사회적으로 증명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지만 그 속에 감성적인 부분들, 우리가 기억하는 '맛'의 왜곡점을 이야기 하는 대목에선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잘 조합되어지는 맛. 그 맛엔 맛과 맛 사이의 조화와 시너지 뿐 아니라 그걸 먹는 사람의 정서까지 포함되어야 한다면 정말 방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아유, 정말 맛있네" 라는 말에 담기는 여러가지 의미들은 맛이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비밀들의 총합일지도 몰랐다. 따로 분리해서 짠맛이 어느 정도이고 단맛이 어떻게 배치되었으며 매운맛과 신맛의 첨가 정도는 얼마나 되어서 조합이 잘 되었다라고 말하지 않는 것. 그저 맛있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상황에 '맛'은 그 모호성만큼의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책의 내용을 100퍼센트 동의한다고는 할 수 없겠다. 아직도 고집스레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으며 그 오해를 철회할 만큼의 설득이 되지 않은 까닭이다. 너무 방대한 이야기여서 내 반론이 무참히 깨지는게 싫어서부리는 오기일지도 모른다.


얼마전 높으신 분들의 식탁이 세간에 회자되기도 했다. 비싼 재료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놓은 사람들. 단지 비싸다는 이유 뿐 아니라 그 음식이 식탁에 올라오기까지 비윤리적 행위에 대한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에 대한 지탄일지도..

사람들은 점점 '미식'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간단한 한끼조차 맛있게 먹고자 한다. 어쩌면 이것은 존중받고 싶어하는 심리의 발현이 아닐까? 생명을 유지하는 최초의 단계 섭식을 맛있게 해결함으로 위로받고 싶은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재미난 책이다. 도대체 안 다룬 분야가 뭐야? 싶게 방대한 분야에서의 분석이 흥미롭다.

가방 속에 언제든 시간이 나면 먹으려고 사발면 하나를 넣어다녔다던 청년을 생각하면 '맛'을 탐닉하는 것이 어쩐지 죄스럽기까지 하다.

어쩌면 가장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할 시간은 노동의 시간이 아니라 식탁의 시간이며 밥상의 시간이지 않을까?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데 '맛' 따위가..라는 생각은 접어야겠다.

그 한끼 마저도 사람답게 '맛'있게 먹어야 할 권리가 있을테니까..


'미식의 가치는 행복에 있"다고 말하는(p315) 대목에서 무릎을 친다.

맛은 개인적인 행복일거라고..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를 떠올려본다. 모든 맛을 분석하며 행복해하는 주인공..

'그래, 이맛이야!'

오래전 할머니의 손에 들려있던 천사모양의 용기..인공조미료 아이미의 기억을 용서하기로 한다.

맛있었다. 할머니의 손끝에서 적당히 계량된 그 맛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든 맛있게 음식을 해주려했던 그 마음을 기억한다.


맛과 행복의 인과관계를 이해한다면 이제 이렇게 인사해야겠다.

"늘 맛있으시길. "

삶의 맛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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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의 할매들이 또 시집을 들고 나오셨다.

아침 뉴스에서 구미의 한 공장에서 폭발 사고가 났고 칠곡 인근까지 영향을 주었다는 말을 듣고 할매들을 생각했다.

사상자들과 미흡한 안전조치, 또 죽음으로 문제를 드러내는 현실.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겠냐는 한탄보다 할매들이 먼저 떠오른건 안심하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뭔가 부족하고, 뭔가 성에 안찰 때, "할머니~"하고 달려가면 어떻게든 해결해주던 신묘했던 경험이 불러낸 데자부 같은 것이었으리라.

 

 

 

 

 

 

 

 

 

 

 

 

 

 

 

 

시가 뭐고? 를 읽으며 찌릿찌리했던, 콤콤하지만 그리운 할매냄새를 떠올렸던 기억은 그 2탄일지도 모를 '콩이나 쪼매 심고 놀지머'의 출간 소식에 마음이 바빴다. 얼른 사야지 싶었고, 득달같이 주문을 했고, 겨우 받았다.

그저 시집인데..심심한 손주년에게 '콩 쪼매 심고 놀자'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저절로 웃음이 지어진다.

할머니들의 시집이 종종 나온다.

할머니 시집들에서 서툴고 어설픈 이야기와 그 속에 녹아든 삶의 이력, 뭐 이런 것들을 찾아내며 애잔해하는 것.

그것만 볼 것은 아니다.

진정성이라는 묘한 말로 얼버무릴 일도 아니다.

절묘하게 떨어지는 리듬. 구석구석 파고드는 은유도 직유도 까짓 시적 작법 따위를 몰라도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는 시어들..신기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다. 배우는 할매들, 그렇게 써내는 작품들..그것을 모으는 손길. 이 모두가 참 건강하다.

이 시집은..건강하다.

 

아, 얼마 전에 본 할머니시집 중에 인상 깊은 것들도 있었다.

칠곡 할매들과는 사뭇 결이 다르다. 그 나름의 맛이 있다.

 

 

 

 

 

 

 

 

 

 

 

 

 

 

 

 

 

일흔이 되면..시를 배워야겠다.

시나 쪼매 쓰고 놀지 머..하며 합죽하게 웃어보는 것도 이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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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0-19 17: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할아버지들도 시를 많이 썼으면 좋겠습니다. 연세가 많은 남성 어르신들은 몸을 움직이는 활동의 취미를 선호하는 것 같아요. 등산, 운동, 악기 연주를 좋아해요.

yureka01 2016-10-19 2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할배들도 분발을 ^^..
 
악마 기자 정의 사제 - 함세웅 주진우의 '속 시원한 현대사'
함세웅.주진우 지음 / 시사IN북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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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은 선화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서동요를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자꾸만 퍼졌고, 노랫말은 의심이 되고 확신이 되어 선화공주와 결혼을 하게 된다.

어떤 이야기는 어른들의 입(소위 주류언론)을 통해 전해지기 보다 어린아이들의 입(그 외 기타등등)을 통해 전달되며 확장되는 힘이 되기도 한다.

힘 없는 자들의 확장 방식. 분명 역사의 주인임에도 주인의 자리에서 쫓겨나 타자가 되어 떠도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자리는 어디입니까?'라고 물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소심해질대로 소심해져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자리는 여기쯤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당신은 밀려났기 때문이죠. 그것도 부당하게..'라며 찬찬히 일러주는 목소리가 있다.

잔뜩 겁을 먹었거나 망할 놈의 세상이라고 무관심해지려 할 때, 사실은 겁먹지 않아도 된다고, 저들이 우리를 심판할 아무런 권리가 없다고 말해주는 소리가 있다.


벙어리 흉내를 내며 목숨을 부지하는 언론들 사이에서 수없이 고소당하고 고발당하면서도 바른 소리를 하겠다고 취재하는, 마치 강호의 협객같은 기자와 그 삶이 온전히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담고 있는 함세웅 신부의 아주 특별한 강의가 엮인 책이다.

거짓말에 거짓말을 덧대어 누더기를 만들어버린 우리의 현대사. 그 속에 꾸덕꾸덕한 얼룩으로 남은 국민들의 눈물과 한숨과 피를 읽는다.

강동원처럼 스타일리시한 사제도 아니고 말쑥한 언론인도 아니어서 더 귀담아 듣게 되는 말들.

우리가 듣고 싶은 말을 해 주는 사람들의 단단한 목소리를 듣는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들. 참담한 현 정권이 나오기까지의 계보를 듣다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저 한숨만으로 흘려버릴건가.

그저 한숨이 아닌, 역동적인 힘을 끌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두 사람의 모습에 어떤 자책감마저 들었다.

기록.

기록해야한다. 지금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전해질 것이라는 보장이 없는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오롯이 기록해야 한다.

또 다시 왜곡하고 저들의 입맛에 맞게 각색해, 권력유지의 동력으로 삼고도 남을 사람들이지 않은가.

4.19를, 5.18을, 6.10을 기억한다.

4.19와 5.18이 제대로 알려지기까지의 시간, 누명과 통한의 시간을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세월호를 기록하고, 백남기를 기록하고, 노무현과 통진당을 기록하고, 사드와 성주군민을 기록해야 한다.


그리고, 노래해야 한다. 울만큼 울었고, 화낼만큼 화냈으니..이제 노래해야 한다.

이 참담한 시간을 말이다.


역사/정치/민주/통일/신념.

이 다섯가지 주제를 통해 드러나는 빼앗긴 역사의 민낯과, 우리의 표정은 선명했다.

더는 돌아설수도 없고, 뒷걸음질칠 수도 없는 일이다.


미래를 이야기하기 위해 미래를 기록하기 위해, 오늘 서동처럼 노래를 불러야겠다고 자꾸 생각하게 된다.

아무도 전해주지 않는 이야기, 그러나 반드시 밝혀내야 할 이야기.

중구난방 떠드는 노래가 아니라 다섯개의 악장으로 잘 편곡된 웅장한 이야기를 듣는다.


악마라기엔 너무 귀여운 기자와 정의의 사도라고 자꾸 발음하게 되는 사제 함세웅의 이야기.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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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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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너는 뼈와 뼈들이 가지런하게 드러난 공룡 앞에 서 있다. 오래 전 살았던 생명체. 초원을 달리고 사냥감의 목덜미를 물고 흔들었다는 뼈 구조물 앞에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랬구나, 대단했겠네, 티라노사우르스라는 이름과 백악기에 번성했던 육식공룡이라는 설명을 읽으며 또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뒤에 서 있던 남자가 고개를 삐죽이 내밀어 네가 금세 읽었던 설명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마치 너와 같이 이 박물관을 찾은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했다. 대단했겠어요. 이 덩치에 저 이빨에 이 녀석에게 걸리면 도망갈 틈도 없이 먹혔겠어요. 라고 말했다. 그러네요. 마치 일행이었던 것 처럼 너의 대답이 이어졌다.

박물관을 나와 초대장을 주었던 친구에게 전화를 한다. 잘 봤어. 실제로 보니까 더 어마어마하네. 고마워. 덕분에 실감이 나네. 나중에 내가 커피살께. 그래.

공룡을 봤다. 그 어마어마한 몸집과 날카로운 이빨, 초식동물들은 여린 동물들은 얼마나 위태로웠을까. 그래도 그게 나름의 섭리가 아니었겠어? 돌아오는 길에 너는 줄곧 공룡을 생각했고 공룡을 만났고, 공룡을 알게 되었다고 믿었다.

티라노사우르스의 이빨이 목덜미에 박히는 순간은 얼마나 처참했을까.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공포와 폭력을 겪어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저 그게 순리라고? 푸른 초지를 뛰는 동안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안전과 생명을 내주어야 할 때 억울하지는 않았을까? 푸르디 푸른 초지위에 붉게 떨어지던 피는 모두 사라지고 없겠지?

더웠다. 끈적하게 흐른 땀을 씻어내고 책상 앞에 앉은 너는 책꽂이를 찬찬히 읽는다. 어떤 규칙도 없이 마구 꽂힌 너의 책들, 네가 구매한 탓에 너의 것이라고 말하지만 누구의 것인지가 불분명한 책들이 공룡의 뼈처럼 가지런하게 섰다. 흰 꽃이 오송송한 책을 꺼내든다. 어쩐지 어둠이 내리는 초지에 흩뿌려진 초식동물의 바스라진 뼛조각처럼 읽힌 탓이다. 소년이 온다.


#2

80년 5월의 광주를 다룬 이야기. 더 이상의 광주가 있을까? 싶은 수많은 자료들과 텍스트들, 또다시 가장 비극적인 이야기를 마주한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꽃피운다는 잔인한 말을 끌어온대도 너무 많은 피를 흘린 결과, 꽃은 아직도 미지수이며 어쩌면 뿌리에 기생하는 흡혈벌레들에 의해 단 한 방울의 피도 먹지 못하고 고사중인지도 몰랐다.

과거와 현재를, 과거와 더 과거를 하나씩 짚어내며 광주의 싸움이 한순간 촉발된 것이 아님을 드러내는 이야기는 아팠다. 손 끝에 가시가 박힌 건가요? 라고 묻자 아니요. 당신의 몸이 비정상이어서, 여기저기 썩고 있어서, 그걸 알아채라고 어서 뭔가 조치를 취하라고 몸이 보내는 신호예요. 이 손가락의 뼈는 곧 부서질겁니다. 손톱은 빠질거구요. 아, 근육은 곪아가고 있네요. 피가 문제예요. 당신의 것이 아니라고 부정하는군요. 어쩌다 이지경이 되었어요? 손가락을 자르시겠어요? 그래야 살겠지만, 지금 당신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건 이 손가락이 다예요. 당신의 몸은 이미 손 쓸 수 없이 썩었군요. 라는 말을 듣는 느낌?

길고 긴 독재의 어둠을 뚫고 나온 순간 그러니까 목에 묶은 동앗줄을 풀어낸 순간 등 뒤에서 서늘하게 느껴진 총구. 그런 세월이었다. 온몸으로 싸워도 이길 수 없는 세월.

썩어가는 몸체에 내것이라 주장할 마지막 부분. 손가락. 그것이 광주였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두렵지만, 총을 들고 방송을 하고, 시신을 닦고, 아들을 찾고 동생을 찾고 누이를 찾으면서도 꼭 만날거라는 확신이 없던 광주의 이야기다.

이미 알고 있다고 그 책임자를 처벌하지 못했을 뿐 광주 폭동이 아니라 광주 민주화 항쟁이라고 이름 붙이고 명예가 회복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기던 것이 얼마나 물염치한 일이었는지..이미 끝나버린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아직도 계속 죽고, 죽어가고 있으며 살려달라, 지켜달라 외치는 울부짖음이 책갈피마다 선연하다

광주의 기록들, 생존자 증언, 이미 숱하게 읽어왔지만 그것은 공룡의 화석을 더듬고 백과사전의 정보를 읽어낸 것으로 공룡을 잘 안다고 이야기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산 사람의 이야기, 죽었으나 죽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 살았지만 죽느니만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차라리 모른다고 도리질치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것과 닮았을까? 두려움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자괴가 불러오는 부인.

광주는 아직도 진행중이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발 딛는 곳마다 선혈이 흘렀던 자리였을테고 눈 닿는 곳마다 시민 여러분 도청앞으로 모여주십시요 라는 긴박한 목소리가 부딪힌 자리였을텐데. 어쩌면 광주의 사람들은 80년 5월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3.

광기. 언제나 희생제물이 필요했던 정권들이 서로에게 쥐어준 바통엔 광기라고 쓰여있는지도 몰랐다. 국민은 단지 디딤돌일 뿐, 반역을 꾀하는 디딤돌은 미련없이 도려냈고, 그것은 디딤돌의 문제일 뿐 그것을 밟고 올라서려는 자의 문제가 아니라고 설득한다. 설득을 당한 이들은 같은 돌 위에 서 있는 자들이며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여 준 다수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려내어 질 테니까.

모양만 조금씩 다를 뿐 결국 똑같이 반복되어지는 역사 앞에 그래도 살아있으니 다행이라는 위로는 차라리 치욕이다.

얼마나 잔혹할 수 있을까.

똑같은 사람인데..라고 생각하다 생각을 거둔다. 똑같지 않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된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p135)


이 물음에 대답할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4.


동호야, 지금 같이 나가야 돼, 위태하게 이층 난간을 붙들고 서서 너는 떨었다. 마지막으로 눈이 마주쳤을 때, 살고 싶어서, 무서워서 네 눈꺼풀은 떨렸다. (p92)


집안 사정이 나빠지지 않았다 해도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그 앳된 학생들의 스크럼 속으로 걸어들어갔을 것이다. 가능한 한 끝까지 그 속에서 버텼을 것이다. 혼자 살아남을 것을 가장 두려워했을 것이다. (p87)


지도부를 이끌었던 대변인이 전날 외신기자들을 만나 했다는 말을 우리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패배할 거라고 그는 말했다지요. 반드시 죽을 것이며,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지요. 고백하건대 나에게 그런 초연한 확신은 없었습니다. (p113)


나는 가방을 열었다. 가지고 온 초들은 소년들의 무덤 앞에 차례로 놓았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쪼그려앉아 불을 붙였다. 기도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묵념하지도 않았다. 초들은 느리게 탔다. (p215)


너는 책을 덮는다. 책 속에서 오롯이 느낀 것은 너무나 살고 싶었던 사람들의 눈빛이었고 체온을 고스란히 간직한 아직 식지 않은 핏물이었다. 눈물은 때때로 뜨겁지만 피는 뜨거워지는 법이 없다. 누군가는 뜨거운 피가 어쩌고 하지만 살고 싶다는 간단한 문구 앞에서 피는 정직하게 제 체온을 지키려한다.

너는 눈을 감았다. 눈 속에 보여지는 잔상들을 책을 읽는 내내 맡아졌던 비릿한 내음을 원시인의 동굴벽화처럼 눈꺼풀에 새기려는 듯 한참을 그렇게 눈을 감았다. 네가 눈을 뜨고서야 알 수 있었다. 눈물이 샐까봐 그런것이란걸..이길 수 있을 거라는 초연한 확신은 없지만 그래도 살아내야 한다는 초식공룡의 불안한 눈빛을 지우려고 한다는 것을..

너는 아직 살아있다. 수없이 간섭당하며 수없이 두려워하며 살아남아있다. 여기가 네 자리임을 분명히 알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지만 아직도 공룡을 알지 못하고, 광주를 알지 못한다.

다만 네가 살아있다는 신호를 보낸다. 너를 찾아올지도 모를 소년들의 눈빛, 누나를 찾는, 친구를 찾는, 언니를 찾는, 선배를 찾는 희뿌연 영혼들이 쉬어갈만한 공간이 되어도 좋다는 생각을 한다.

비로소 너는 긴 숨을 쉬고 책꽂이에 책을 꽂아넣는다.


나는 공룡을 잘 몰라. 라고 메모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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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 문예중앙시선 46
박지웅 지음 / 문예중앙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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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래와 함께 걸었다>

겨우내 눈만 싣고 다니던 트럭
동네 뒷 길에 버려져 큰 눈 맞더니
흰 고래가 되었다

무엇을 저리 애달피 부르는가
밤하늘 길게 가르는 고래 울음소리

얼어붙은 늑골을 쓰다듬으며
먼바다 어디 있었다는 고래의 땅을 떠올린다

고래는 뭍에 제 무덤을 만든다
죽기 전에 꼭 한 번은 걷고 싶었던 것이다

고래의 눈 안에 눈 내리고
상현달 아래 이동하던 식구들과
먼 외계로 날아간 어미 고래와
별과 별 사이에 힘찬 물줄기들

눈 속에 펑펑 내리는
희디흰 깊이에 나는 곧 묻혔다
그해 겨울에는 나도 아름다웠다

나는 고래와 함께 걸었다.

(시집 . 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 - 박지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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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던 시인은 사실 고래와 함께 걸었는지도 모른다. 구름같은 고래와 무덤 같은 집 사이를 걸었을지도 모른다.
시집을 맹탕하게 읽다 '고래'라는 단어 앞에서 알레르기 반응을 하듯 움찔거렸다. 
이별과 무덤과 죽음과 슬픔과 이승과 영혼이 나비처럼 가볍고 아득하게 팔랑거리는 시집. 나비의 팔랑거리는 날개짓이 가볍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Adagio 싸인을 날개마다 적어넣은 것이 제 죄도 아닌데 ..
몇 해 전 골목 안 깊은 곳에 누군가 버려둔 승용차 한대가 있었다. 찌그러지고 더러운 차는 번호판조차 떼어진 채 버려져 있었다. 손가락을 잘린 채 살해당한 사체를 떠올렸다. 신원조회가 안되는 사체. 누구의 것이었는지 확인이 안되는 자동차. 그 해 겨울 폭설이 서너번 내렸다. 십 몇년만에 보는 눈. 동네 꼬마들과 눈사람을 만들러 골목 안 까지 들어갔을 때, 흰 눈을 덮어쓴 러시아 여자의 모자 같은 그 차를 만났다. 흰 무덤같은 차. 묘비 하나 세우지 못한 가여운 무덤 앞에 눈 사람 하나를 세워주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그 기억이 떠올라 손이 시려웠다. 
시린 손가락엔 나비가 앉지 않았고, 내 기억과 닮은 풍경이 어딘지 '극적인 구성'인 듯 생각되기도 했다.
나는 아직도 '고래로'라는 도로명을 가진 곳에 살고 있다.
고래는 이 길로 다니지 않는데...

네모와 동그라미가 맨질맨질하게 만져지는 시집의 감촉이 좋다.

 

뱀발 : 시인의 태몽은 고래였다고 했다. 이 시집의 제목이 "고래와 함께 걸었다"로 정하려했으나 전작 시집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와 비슷해서 뒤로 밀렸다고 했다.

그래서였을까? 그 많은 시 중에 이 시가 눈에 들어왔던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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