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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 1.
너는 뼈와 뼈들이 가지런하게 드러난 공룡 앞에 서 있다. 오래 전 살았던 생명체. 초원을 달리고 사냥감의 목덜미를 물고 흔들었다는 뼈 구조물 앞에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랬구나, 대단했겠네, 티라노사우르스라는 이름과 백악기에 번성했던 육식공룡이라는 설명을 읽으며 또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뒤에 서 있던 남자가 고개를 삐죽이 내밀어 네가 금세 읽었던 설명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마치 너와 같이 이 박물관을 찾은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했다. 대단했겠어요. 이 덩치에 저 이빨에 이 녀석에게 걸리면 도망갈 틈도 없이 먹혔겠어요. 라고 말했다. 그러네요. 마치 일행이었던 것 처럼 너의 대답이 이어졌다.
박물관을 나와 초대장을 주었던 친구에게 전화를 한다. 잘 봤어. 실제로 보니까 더 어마어마하네. 고마워. 덕분에 실감이 나네. 나중에 내가 커피살께. 그래.
공룡을 봤다. 그 어마어마한 몸집과 날카로운 이빨, 초식동물들은 여린 동물들은 얼마나 위태로웠을까. 그래도 그게 나름의 섭리가 아니었겠어? 돌아오는 길에 너는 줄곧 공룡을 생각했고 공룡을 만났고, 공룡을 알게 되었다고 믿었다.
티라노사우르스의 이빨이 목덜미에 박히는 순간은 얼마나 처참했을까.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공포와 폭력을 겪어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저 그게 순리라고? 푸른 초지를 뛰는 동안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안전과 생명을 내주어야 할 때 억울하지는 않았을까? 푸르디 푸른 초지위에 붉게 떨어지던 피는 모두 사라지고 없겠지?
더웠다. 끈적하게 흐른 땀을 씻어내고 책상 앞에 앉은 너는 책꽂이를 찬찬히 읽는다. 어떤 규칙도 없이 마구 꽂힌 너의 책들, 네가 구매한 탓에 너의 것이라고 말하지만 누구의 것인지가 불분명한 책들이 공룡의 뼈처럼 가지런하게 섰다. 흰 꽃이 오송송한 책을 꺼내든다. 어쩐지 어둠이 내리는 초지에 흩뿌려진 초식동물의 바스라진 뼛조각처럼 읽힌 탓이다. 소년이 온다.
#2
80년 5월의 광주를 다룬 이야기. 더 이상의 광주가 있을까? 싶은 수많은 자료들과 텍스트들, 또다시 가장 비극적인 이야기를 마주한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꽃피운다는 잔인한 말을 끌어온대도 너무 많은 피를 흘린 결과, 꽃은 아직도 미지수이며 어쩌면 뿌리에 기생하는 흡혈벌레들에 의해 단 한 방울의 피도 먹지 못하고 고사중인지도 몰랐다.
과거와 현재를, 과거와 더 과거를 하나씩 짚어내며 광주의 싸움이 한순간 촉발된 것이 아님을 드러내는 이야기는 아팠다. 손 끝에 가시가 박힌 건가요? 라고 묻자 아니요. 당신의 몸이 비정상이어서, 여기저기 썩고 있어서, 그걸 알아채라고 어서 뭔가 조치를 취하라고 몸이 보내는 신호예요. 이 손가락의 뼈는 곧 부서질겁니다. 손톱은 빠질거구요. 아, 근육은 곪아가고 있네요. 피가 문제예요. 당신의 것이 아니라고 부정하는군요. 어쩌다 이지경이 되었어요? 손가락을 자르시겠어요? 그래야 살겠지만, 지금 당신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건 이 손가락이 다예요. 당신의 몸은 이미 손 쓸 수 없이 썩었군요. 라는 말을 듣는 느낌?
길고 긴 독재의 어둠을 뚫고 나온 순간 그러니까 목에 묶은 동앗줄을 풀어낸 순간 등 뒤에서 서늘하게 느껴진 총구. 그런 세월이었다. 온몸으로 싸워도 이길 수 없는 세월.
썩어가는 몸체에 내것이라 주장할 마지막 부분. 손가락. 그것이 광주였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두렵지만, 총을 들고 방송을 하고, 시신을 닦고, 아들을 찾고 동생을 찾고 누이를 찾으면서도 꼭 만날거라는 확신이 없던 광주의 이야기다.
이미 알고 있다고 그 책임자를 처벌하지 못했을 뿐 광주 폭동이 아니라 광주 민주화 항쟁이라고 이름 붙이고 명예가 회복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기던 것이 얼마나 물염치한 일이었는지..이미 끝나버린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아직도 계속 죽고, 죽어가고 있으며 살려달라, 지켜달라 외치는 울부짖음이 책갈피마다 선연하다
광주의 기록들, 생존자 증언, 이미 숱하게 읽어왔지만 그것은 공룡의 화석을 더듬고 백과사전의 정보를 읽어낸 것으로 공룡을 잘 안다고 이야기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산 사람의 이야기, 죽었으나 죽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 살았지만 죽느니만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차라리 모른다고 도리질치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것과 닮았을까? 두려움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자괴가 불러오는 부인.
광주는 아직도 진행중이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발 딛는 곳마다 선혈이 흘렀던 자리였을테고 눈 닿는 곳마다 시민 여러분 도청앞으로 모여주십시요 라는 긴박한 목소리가 부딪힌 자리였을텐데. 어쩌면 광주의 사람들은 80년 5월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3.
광기. 언제나 희생제물이 필요했던 정권들이 서로에게 쥐어준 바통엔 광기라고 쓰여있는지도 몰랐다. 국민은 단지 디딤돌일 뿐, 반역을 꾀하는 디딤돌은 미련없이 도려냈고, 그것은 디딤돌의 문제일 뿐 그것을 밟고 올라서려는 자의 문제가 아니라고 설득한다. 설득을 당한 이들은 같은 돌 위에 서 있는 자들이며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여 준 다수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려내어 질 테니까.
모양만 조금씩 다를 뿐 결국 똑같이 반복되어지는 역사 앞에 그래도 살아있으니 다행이라는 위로는 차라리 치욕이다.
얼마나 잔혹할 수 있을까.
똑같은 사람인데..라고 생각하다 생각을 거둔다. 똑같지 않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된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p135)
이 물음에 대답할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4.
동호야, 지금 같이 나가야 돼, 위태하게 이층 난간을 붙들고 서서 너는 떨었다. 마지막으로 눈이 마주쳤을 때, 살고 싶어서, 무서워서 네 눈꺼풀은 떨렸다. (p92)
집안 사정이 나빠지지 않았다 해도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그 앳된 학생들의 스크럼 속으로 걸어들어갔을 것이다. 가능한 한 끝까지 그 속에서 버텼을 것이다. 혼자 살아남을 것을 가장 두려워했을 것이다. (p87)
지도부를 이끌었던 대변인이 전날 외신기자들을 만나 했다는 말을 우리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패배할 거라고 그는 말했다지요. 반드시 죽을 것이며,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지요. 고백하건대 나에게 그런 초연한 확신은 없었습니다. (p113)
나는 가방을 열었다. 가지고 온 초들은 소년들의 무덤 앞에 차례로 놓았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쪼그려앉아 불을 붙였다. 기도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묵념하지도 않았다. 초들은 느리게 탔다. (p215)
너는 책을 덮는다. 책 속에서 오롯이 느낀 것은 너무나 살고 싶었던 사람들의 눈빛이었고 체온을 고스란히 간직한 아직 식지 않은 핏물이었다. 눈물은 때때로 뜨겁지만 피는 뜨거워지는 법이 없다. 누군가는 뜨거운 피가 어쩌고 하지만 살고 싶다는 간단한 문구 앞에서 피는 정직하게 제 체온을 지키려한다.
너는 눈을 감았다. 눈 속에 보여지는 잔상들을 책을 읽는 내내 맡아졌던 비릿한 내음을 원시인의 동굴벽화처럼 눈꺼풀에 새기려는 듯 한참을 그렇게 눈을 감았다. 네가 눈을 뜨고서야 알 수 있었다. 눈물이 샐까봐 그런것이란걸..이길 수 있을 거라는 초연한 확신은 없지만 그래도 살아내야 한다는 초식공룡의 불안한 눈빛을 지우려고 한다는 것을..
너는 아직 살아있다. 수없이 간섭당하며 수없이 두려워하며 살아남아있다. 여기가 네 자리임을 분명히 알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지만 아직도 공룡을 알지 못하고, 광주를 알지 못한다.
다만 네가 살아있다는 신호를 보낸다. 너를 찾아올지도 모를 소년들의 눈빛, 누나를 찾는, 친구를 찾는, 언니를 찾는, 선배를 찾는 희뿌연 영혼들이 쉬어갈만한 공간이 되어도 좋다는 생각을 한다.
비로소 너는 긴 숨을 쉬고 책꽂이에 책을 꽂아넣는다.
나는 공룡을 잘 몰라. 라고 메모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