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작은 촛불이 켜지기 시작해 횃불이 되는 시간은 장엄했다.

모두가 벅찼던 시간, 하나의 목소리를 경험하던 시간. 다양한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모이기 시작했고 어느 덧 2월이 다 지나간다.

금방 끝날 것 같았다. 너무나 명확하고 분명해서 어떤 변명과 속임수도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었다.

이 싸움을, 고상하기까지 했던 싸움을 진흙탕으로 만들고 같이 뒹굴자고 바짓가랑이를 당기는 세력들.

아슬아슬하다.

국민들의 서슬 퍼런 분노와 정의에 대한 갈구 이외엔 체제 안에서 시민들이 틀어쥔 것은 별로 없다.

저들의 법, 저들의 정부, 저들의 행정.

이름갈이만 하는 무리들.

특검연장이 거부당했고, 보란듯이 자유당인지 한국당인지는 지지선언을 했다.

 

민주주의는 어떻게 오는가. 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끝끝내 가로막으려 애쓰는 민주주의는 얼마나 더 고된 시간을 담보로 요구할까.

생각이 많아졌다.

며칠 전 받은 이정희의 새 책을 읽는다.

진보정치에 대한 상상력. 어쩌면 지금 가장 필요한지도 모른다. 진보라는 말이 갖는 느낌. 단단하고 타협없는 냉정함 같은..

혁신과 혁명은 단단하게 굳어버린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 다양한 요구와 그 속을 관통하는 가치관을 기저로 다양하게 구상되고 시도되는 과정에서 다져질 것이라고 본다. 과연 우리는 그런 상상을 하는가.

다부진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보기로 한다. 내가 듣는 다양함 중의 하나의 채널이다.

 

 

 

 

 

 

 

 

 

 

 

 

 

 

폐허를 보다로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사람의 인연이란게 우스워 어떻게 가닿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1년 전 쯤 우연히 알게되어 '인휘 형'이라 부르게 되었지만 그는 도대체 나이를 어디로 먹은건지 궁금할 정도로 천진난만하다. 때로 취하고 때로 울며 글을 쓴다. 글을 쓰는 동안 공장을 다닐 수 없어 생활비를 어찌 조달할꼬..걱정을 했더니 상을 받아 어찌저찌 충당이 된 것 같아 다행이라고 했다.

아내를 돌보며 최소한의 생계만 유지한 채 근 1년 가까이 몸부림치며 쓴 책이 나왔다.

 

 

 

 

 

 

 

 

 

 

 

 

 

3월 1일 광화문 광장 한광호 열사 분향소 앞에서 싸인회를 하겠다고 했다. 책 판매 수익 전부는 한광호열사 장례기금으로 쓰겠다고 한다. 누가 누굴..?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는 평생 노동자였고, 노동자의 친구였고, 사람답게 살 권리를 찾는데 골몰했던 사람인데..

제 주머니 텅텅 비어 먼지 밖에 나올게 없어도 그 먼지라도 모아 시린 손등을 덮어줄 사람인데..

책이 나왔다는 문자를 받고도 축하합니다. 한마디를 건네지 못했다.

"이 책 쓰고 나면, 아마 글은 더 못쓸 것 같다. 다 쏟아부었어" 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가 건너 온 시간들, 그리고 건너고 있는 시간. 그 속을 관통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오롯하다.

우리는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얼마나 더 가야할까? 이 소용돌이 치는 지점만 벗어나면 좀 나아질까?

'건너 간다'

어쨌든 이 시간을 이겨내고 견뎌내고 조금 더 나은 시간으로 한발짝 씩 움직여 간다.

 

매 순간 우리는 조금씩 건너 가고 있다.

눈물겨운 사람들과 천친하게 웃으며 둘러앉아 술 한잔 마실만큼은 팔렸으면 좋겠다.

세상을 떠난 이, 가는 길 초라하지 않을만큼 뜨겁게 보낼 수 있을만큼 팔렸으면 좋겠다.

뼛 속까지 후벼파서 써낸 책을 놓고 많이 팔리길 바라는 속물같은 지인도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떤 각오처럼..책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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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2-27 17: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유경제원’, ‘자유한국당’ 때문에 자유를 ‘가짜 보수의 가치’로 여겨질까 봐 걱정됩니다.

나타샤 2017-02-27 17:12   좋아요 0 | URL
이미 어버이와 엄마도 더럽혀졌죠..
 
한 치 앞도 모르면서
남덕현 지음 / 빨간소금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남덕현의 질펀한 충청도 이야기를 읽는다.충청도의 힘에서 읽힌 수수한 이야기들이 갖는 힘, 슬픔을 권함에서 읽힌 슬픔. 유랑에서 읽힌 섬세한 결, 이 모든것을 읽었어도 읽지 않았어도 한 치 앞도 모르면서는 이 모든 이야기들이 스며있다.

해학과 풍자라고, 향토어로 쓰여진 현장감, 요즘 말로 '웃픈'이야기라고 사람들은 이야기 한다.

까르르 웃고 넘기게 되는 엉뚱함과 발랄함. 대부분 어르신들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어디로 튈지 가늠이 되지 않는 이야기의 흐름은 긴장감마저 갖게 한다. 작가의 섬세함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저 주고 받는 이야기들을 듣고 서술하는 것이 아닌, 그 이야기가 그려내는 큰 그림을 보아내는 능력, 그리고 그것을 고스란히 써내는 진심. 웃음이 지어지는 건 바로 그 대목이다.

 

충청도가 아니더라도 어느 곳에서든 만날 수 있는 오랜 삶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의 흔한 이야기다. 그냥 허투루 뱉어지는 말이 아닌 삶의 문제, 현실의 문제, 관계의 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글. 덮어놓고 윽박지르듯 사설을 풀어내는 것이 아닌 나의 이야기와 너의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귀가 만들어내는 나름 장엄하고 진득한 앙상블인것이다.

먼저 책을 읽은 사람들이 그랬다.

너무 웃었다.

정말 재미있었다.

충청도 사투리가 이렇게 맛깔날지 몰랐다. 등등..

 

그의 전작들을 읽은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읽는 내내 나는 자꾸 슬프고 아팠다. 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눙치듯 뱉어내는 말들이 사무치게 들렸던 것이다. 어디가서 쉬이 하지 못할 말들, 가슴 속에 응어리처럼 단단하게 굳어지는 말들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을 만나 신명나게 풀어낸 것은 아니었을까? 어디서든 언제든 말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비나리처럼 읽혔다.

 

방 안 가득 튀밥을 허옇게 흩뿌리고 손끝에 침을 발라 꼭꼭 찍어 먹는 손주년을 보며 외할미는 입버릇처럼 그랬다.

'저기 이 세상을 우예 살아갈끼고, 천지를 모리고 깨춤을 출낀데..한 치 앞도 모리는걸 우야면 좋겠노.'

할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어떤 걱정인지도 모르는 해맑은 것 밖에 할 줄 모르는 손주년은 그저 튀밥만큼 뽀얗게 웃으며

'잘 살꺼야'했다.

누군들 살아온 시간 속에 소설 같은 이야기 한자락 꺼낼 것이 없을까? 누구에게나 기구하고 누구에게나 아득한 삶의 공평성(이런 것에 있어서만..). 어디가서 딱히 꺼내기 어렵고, 꺼내기 거시기하고, 꺼내기 매깔스럽고, 꺼내기 민망해서 장~다물고 있는 이야기를 들어줄 귀가 있다면 고해성사하듯 주절주절 이야기할게 뻔하다.

듣는 귀 앞에서 신명이 나는 건 그래서 당연한 일일거다. 열심히 들어주고 끄덕여주는 고개, 한마디씩 거들며 이야기를 끊기지 않게 부추기는 입까지 있다면 더 없이 좋을게다.

부지런히 이야기하고 부지런히 들은 세상에 더없는 '사람'의 이야기. 너와는 조금 다르고 나와도 조금 다르지만 결국 맹탕처럼 한 치 앞을 보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는 그래서 애틋하다.

 

저절로 리듬을 타게 되고, 저절로 장단을 두드리며 읽게 되는, 충청도식 그루브. 충청도식 라임.

한 치 앞을 모른다한들 뭐 대수겠는가.

아주 예전에 은하철도 999라는 만화영화 주제가를 불렀던 가수가 그런 노래도 불렀었다.

'한 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그래도 가끔 알고 싶긴 하다. 정말 재미 없는지..

 

 

"잉 사램이 한꺼번에 다 울구 마는 게지, 슬플 때마덤 새루 우는 중 아남? 사램 사는 일이 다 거기서 거기구, 애통이구 절통이구 난리를 치나마나 다 빤한 일인디, 뭐가 맨날 새루 슬프다구 그때마다 새루 눈물이 난댜? 사램이 맨날 새루 우는 중 알지만서두 내가 볼 띠는 한번이 다 울구 마는겨. 울기는 다 울었는디 미련이 남아설랑 차마 다 못 떨구구선 장 매달구 사는게지. 우는게 일인중 아는디, 우는 건 일두 아닌겨! 매달려 있는 눔의 거 미련 읎이 다 떨구구 가는게 일이지.(....)"

"그랴 사램 한핑생 사는 게 헛비에 헛꽃 피구 지는 건디, 헛으루 우는거맨치 대간헌 일이 또 읎네.(....) 필요헐 띠마다 한두 방울썩 얼굴이다 지리다 간다 생각햐. 헛눈물에 고연히 헛심 쓰지 말구" (p24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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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지 못한 1월이 지나갔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님'이었던 관성은 남아 여전히 뭔가를 한다는 건 더디고 무디다. 책을 제대로 읽지도 않았고, 주절거림도 없이 보낸 1월.

오랜만에 책 주문을 했다. 오래 비우지 않은 장바구니엔 꾸역꾸역 담긴 책들이 그득했지만 신기하게도 시간이 흐르자 변심한 애인처럼 삭제되는 책들도 생겼다.

탄핵은 아직도 오리무중이고 잘한다고 응원하는 일들이 잦았지만 결과는 모호하다.

이 와중에 조기대선의 열풍이 불고 요즘 말로 "아무말 대잔치"가 벌어진 것 같다.

나름 호감을 가지고 있거나 관심을 가졌던 이들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들이 귀를 의심케 한다.

 

문득 오랜 시간동안 마을 사람들에게 인심을 얻고 있던 참한 사람이 마을 사람들의 돈을 몽땅 챙겨들고 도망갔다는 허망한 기사를 마주한 것 같은 느낌이랄까?

 

누군가를 선택해야 한다면 기준은 있어야 할거다.

세월호 진상 규명을 할 수 있는 사람. 기본소득에 대한 제안을 갖고 있는 사람. 사드에 단호한 사람. 식량자급에 대한 플랜이 있는 사람. 이건 농촌의 문제와도 연결될거다. 재벌과의 유착고리를 변명없이 자를 사람. 삼권분립에 대한 이해가 있는 사람. 다 떠나서 '정치 철학'이란게 있는 사람. 정규직과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없애거나 정규직화 하는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 민주적인 사람. ...

끝도 없이 조건들이 늘어난다. 그만큼 빼앗겼던 것들에 대한 성찰이 생긴것이리라. 촛불의 힘은 아마 거기에 있는것도 같다.

각성. 정치권력이라는 말이 소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있다는 실천적 경험같은 것.

 

 

 

 

 

 

 

 

 

 

 

 

 

 

 

 

 

 

 

 

 

 

 

 

 

 

 

 

 

 

 

 

 

 

 

 

 

 

 

 

그리고 뭔가를 해야한다는 조급증을 다스려 줄 몇 권의 책을 더 ..

 

 

 

 

 

 

 

 

 

 

 

 

 

 

 

 

 

아무 것도 아닌 시간을 건너 '아무 것'이 되는 것은 조금 힘들지도 모를일이다. 하지만..아무 것이 '어떤 것'이 되는 건 씨앗이 뿌려지고 싹이 트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과정일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다시 2월..

입춘이 지났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고 당연하게 말하지만, 그 봄이 반드시 싹이 나고 움이 트는 봄은 아닐지도 모른다.

오래 해가 뜨지 않는 봄. 폭염을 준비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지나쳐버리는 봄일지도 모를일이다.

어쩌면, 올 해 우리가 맞이할 봄은 조금 더 춥고, 조금 더 절룩이며 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비관적인가?

아무것도 아닌 겨울이 너무 길었던 탓이라고 변명해보자.

 

그래도 봄이 온다는 것이 뭐라도 되고 싶은 봄이 온다는 것이 다행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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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2-06 16: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순실과 박근혜 때문에 정신 못 차렸는데, 대선 기간이 점점 다가올수록 더 머리가 복잡해지고 어지러울 것입니다. 그래도 귀찮다고 미래가 달린 투표 권리를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힘들어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겪어야 할 과정으로 생각합니다.

나타샤 2017-02-06 16:37   좋아요 0 | URL
동감입니다. ^^
 
지연된 정의 - 백수 기자와 파산 변호사의 재심 프로젝트 셜록 1
박상규.박준영 지음 / 후마니타스 / 201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내 사고의 틀이 경직된 것일까.

요즘 들어 읽는 것들은 모두 정치적으로 읽힌다. 껌 하나를 나누는 일조차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고 배려하며 대화하고 조정하는 정치행위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만..

변호사라고 하면 기자라고 하면 어느 한 때 선호하는 직업이었다. 소위 사짜 사윗감 세 손가락에 꼽힐 부류였으며 박식함과 정의로움의 상징이었던 부류였다.

엘리트라고 불리워지는 이들의 철옹성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선망의 대상이 아니며 거짓말장이이거나 앵무새로 불리며 조롱의 대상이 되어갔다. 어째서일까?

사실을 보도해야 할 기자들은 권력의 입이 되어갔고, 억울하게 누명을 쓴 가난한 피고를 변호하는 이는 사라져갔다. 가난한 이를 위한 변론을 열정적으로 펼치는 정의의(?) 변호사는 소설 속에서 읽혔고, 온갖 위협 속에서도 정론을 써내는 기자들은 미디어 밖에서 서성이게 되었다.

정의는 있는자들, 강한 자들의 것이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억울함은 '없는 게 죄지' 라는 자탄으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가장 바른 잣대는 휘어지고 구부러지고 때가 탄 채로 불쏘시개로도 쓰지 못할만큼 외면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스토리펀딩으로 만나게 된 '파산 변호사'의 이야기는 그래서 놀라웠다.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딸 '김신혜' 한사코 아니라고 이야기하는데도 결국 무기수가 된 딸의 이야기는 읽는 내내 화가 치밀었다. 어째서..법은 내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아 온 보통의 주부가 읽어내기에도 허술하기만 한 조서와 수사의 과정은 화를 삭이기 어려웠다. 말도 안되게 짜맞추고 조작된 증거와 조서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일을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진행하는 자들과 그 구조에 화가 난 것이다. 협박과 회유와 강압으로 만들어낸 죄인. 무고한 사람이 범죄자로 낙인 찍히는 것이라는 걸, 짓지 않은 죄의 댓가를 치르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 저지르는 경찰, 검찰의 뻔뻔한 작태. 그 속에 속수무책으로 죄인이 될 수 밖에 없던 순한 사람들.

사실, 조작과 강압은 낯선 모습이 아니다. 해방 이후 줄곧 이어져온 사상범들이 그랬고, 반북 이데올로기의 프레임 속에 무고하게 잡혀들어가 옥고를 치른 이들이 너무나 많았다. 살아보겠다는, 살려달라는 외침조차 불법이라 했고, 좌익 용공, 외부세력, 반국가행위따위의 낙인을 찍기 일쑤였지 않은가. 얼마 전 경찰의 폭력진압으로 돌아가신 백남기농민의 사망사건만 보아도 자신의 잘못보다는 피해자를 깎아내리려하고 가족을 몰아세우며 파렴치한 일을 서슴치 않았던 것을 오롯이 기억한다.

단 한번도 반성하고 사죄하지 않는 사람들을 우리는 사법기관이라 부른다.

'법과 원칙에 따라' 라고 주문처럼 이야기하는 그들의 법과 국민의 법은 사뭇 다른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 곳에서. 기껏 조작하고 범인을 특정하고 끝나버린 일을 다시 파헤치며 억울함을 풀어내려 애쓰는 사람. 그런 사람이 생겨나는 게 가능한가.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무죄주장을 믿고 사건을 다시 파헤치고 누명을 벗겨내는 일.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하는 일. 속된 말로 돈이 되지 않는 일을 기꺼이 수행하는 변호사.

나는 이 사람의 존재가 믿어지지 않았다.


치밀하게 짜여진 조작의 구조가 믿어지지 않았고 그 구조에 맞선 작고 돌맹이 두어개가 전부인 다윗같은 사람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정의는 살아있다'는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일게다.


책은 세가지의 재심사건을 이야기한다.삼례 나라 슈퍼 3인조 강도치사 사건. 약산 약촌오거리 택시 기사 살인 사건. 완도 무기수 김신혜사건.

언뜻 기억을 더듬어 보면, 어느 날 뉴스에 보도가 되었고 '세상에..'라는 탄식을 쏟아낸 기억이 있는 사건들이었다. 사건은 그 후 자극적인 이야기들로 채워져 간헐적으로 들렸고, 장애를 갖고 있는 이들이 그랬다. 소년이 그랬다. 딸이 그랬다. 라는 짧은 결말과 함께 사라졌다.

뉴스를 보며 '그래도 범인이 잡혀서 다행이네'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들은 범인이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범인은 커녕, 진범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진범이 자신이 저지를 일이라고 저들이 아니라고 눈물을 흘리며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한 사람들은 억울한 죗값을 치러야했다는 것이다.


비협조와 압박 속에서도 그 어렵다는 재심을 끌어내고 기어이 무죄를 증명해내는 일은 더이상 정의를 지연시킬 수 없다는 신념이라고 멋지게 말하는 것도 좋지만 글을 읽는 내내 나는 연민과 '사람'에의 존중을 읽는다. 장애가 있건, 약자이건, 스스로 무죄를 증명할만큼의 힘이 있건 없건 간에 '무고한' 사람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어떤 사람도 불의하게 구속당하고 억류될 수 없다는 사람에 대한 존중. 그것이었다고 읽었다.

미드에서 나오는 쿨하고 샤프한 변호사가 아니라 피의자들과 똑같이 빈 손이며 그 태생조차 남루한 변호사.

그 변호사와 기자가 서류를 뒤지고 펀딩으로 힘을 모으며 하나씩 풀어가는 무죄투쟁. 말그대로 진실을 밝히기 위한 투쟁기 같이 읽힌다.

너무나 순해서 눈물이 나다 어째서 이렇게 바보같이 당하고만 있는지 화도 나다..나였어도 이들처럼 주눅든 채 조작의 제물이 될 수 밖에 없었겠다 싶어지기도 했다.


결국은 관심으로 지원으로 일궈낸 일일지도 몰랐다. 파묻어두려는 거짓을 들춰내고 공론화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모아 그것에 의지하며 풀어낸 정의

이 사건들의 무고함을 믿고 지원해 준 사람들의 힘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정의를 간절히 바라는 때. 그것만큼은 마지막까지 지켜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들을 이 무모한 싸움에 밀어넣고 있는지도..


국조특위를 보며 거짓말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야기하는 사람들과 자신이 틀어쥔 것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는 탐욕에 눈 먼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보았다.

그러다보니 조작과 거짓으로 만들어낸 무고는 일도 아니었겠다 싶어졌다.

다 드러난 거짓조차 아니라고 우겨대는 사람들.

그 파렴치한 사람들이 만들어 낸 구조.


정의는 특정한 이들이 짊어져야 할 과제가 아니라 모두가 일궈내고 지켜내야 할 당위겠다 싶어진다.

더는 약하고 없어서 사회의 틀에서 내몰린 자라서 감내해야할 고난 쯤으로 불의를 인정해서는 안되겠다.


이들의 다음 행보를 주목하기로 한다.

숱한 폄훼의 말들이 이어질것이고, 정의가 두려운 자들의 공작이 시작될 것이다.

정의는 늘 그렇게 누더기의 몰골로 시선 밖으로 내몰리곤 했으니까..

정의가 희미해지는 곳에서 '사람'은 얼마나 존중될 수 있으며 나는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반문해본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표지에 쓰인 문구를 다시 읽는다. 반복해 읽는다.

정의의 지연을 좌시하지 않는 것. 거기서부터 출발해야겠다.

법이 지배하는 사람이 아닌 사람의 정의가 관통하는 법을 세워야 한다.

법은 지배수단이 아닌 자유와 정의의 수호수단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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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07 16: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회 문제나 현상을 정치적으로 보이는 순간,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정치가 대화 주제로 환영을 받지 못해요. 오히려 정치를 주제를 대화를 한다 해도 생각이 앞뒤로 막힌 사람들과 만나면 더 피곤해집니다. ^^;;
 
#혐오_주의 알마 해시태그 1
박권일 외 지음 / 알마 / 2016년 12월
평점 :
품절


혐오의 담론은 최근 확장되고 있다. 소위 메갈리안이라 이야기되는 이들의 출현은 미러링이라는 이름으로 화제가 되었고 불편함과 저돌성이 뒤섞이며 혼란스러웠다. 그런 이야기들이 모여 하나의 의미로 단단해지고 그 가운데 '혐오'라는 개념이 분명해졌다.

일상적으로 쓰는 표현들, 극혐, 혐오식품, 혹은 혐한, ..주변에 혐오로 표현되는 것들은 널리고 널렸다. 단시 싫어하는 것, 기꺼워하지 않는 것, 인정하거나 이해되지 않는 것을 혐오라고 규정했던 것이 얼마나 위험한 사고였는지 되짚어보게 된다.

혐오는 단순한 기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이며 사회철학의 문제이며 역설적이게도 민주주의의 갈등과도 연결되어진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런 것들을 정치수단으로 활용하는 이들도 있었고, 이런 분리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무리들도 있었다. 혐오는 총체적 불안과 불만의 결집체였다.


작은 책은 몇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져있다.

혐오는 원인이 아니라 증상이다-박권일

순수함에의 의지와 정치혐오-김학준

지금 가장 정치적인 것은 여성적인 것이다 -허윤

대중문화에서 여성혐오는 어떻게 작동하는가-위근우

혐오표현을 법으로 처벌할 수 있을까? -이준일.


혐오가 담론으로 구성되어지는데는 페미니즘의 확산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이 더이상 틀 안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그 틀 속에서 요구되는 불합리한 차별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 기폭제가 된 것일 수 있다는 말이다. 충격적인 사건들이 있었다. 혐오범죄라 일컬어지는 사건들의 피해자는 여성들이었고 강요되어진 불합리를 견딘다 할지라도 신변에 위협이 가해지기 시작하는 순간, 더는 견딜 수 없다는 생존의 요구가 촉발되었을지도 모른다.

혐오의 대상은 주로 소수자이며 사회적 약자로 대변된다. 장애인, 성소수자, 여성, 노인, 그리고 생존투쟁을 벌이는 사람들. 생존투쟁이라 일컬어지는 가운데는 노동의 문제도 있고, 세월호의 문제도 있고, 가습기피해자의 문제도 있으며 농민도 있다. 삶을 보장받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의 투쟁은 생존투쟁이라 해도 과하지 않을것이다.

감수성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체제의 문제이고 구조의 문제일 수 밖에 없다.


개인의 능력과 노력, 열정과 패기를 강요하는 사회. 과잉능력주의를 주장하는 사회. 누구나 가르치려 드는 사회. 그 속에서 모순은 풀어지는게 아니라 타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자신은 그들과 다름을 주장하는 것으로 정당성을 담보하려 든다. 갈등을 풀어내는 치열한 공방이 이어지는 건 민주주의의 중요한 덕목이자 동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등을 풀어내는 것이 아닌 대상화하는 것으로, 그리고 그것이 틀렸다고 주장하며 '혐오'의 틀에 가두고 조롱하거나 가치없음으로 낙인찍는 행위들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져 왔다. 주머니 속에 넣어둔 이어폰 줄이 엉켜있을 때 엉킨 구조를 찬찬히 들여다보며 숨죽여 풀어내는 노력 대신 마구잡이로 잡아다니다 결국 끊어버리고 쓰레기통에 버린 후, 그 이어폰의 단점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이어폰을 만든 회사를 비판한다. 그따위로 엉켜버리는 상품을 만들어 팔다니 파렴치하다고..

책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드러나는 혐오를 이야기한다.

모든 국민이 눈과 귀를 열고 듣고 보고 두 발로 걷고 두 손으로 촛불을 높이 든 촛불집회에 참가하며 잠깐씩 생각했던 것들. 평화와 질서. 우리는 어째서 평화와 질서에 집착(?)하는것인지. 결벽에 가깝게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고자 애를 쓰는 것인지 가끔, 속된 말로 속에서 천불이 나기도 했다.

그것에 대한 이야기. 두번째 꼭지는 많은 공감을 하게 했다. 정치혐오. 그리고 순수함에의 의지.

필자는 샤츠슈나이더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했다. '민주주의 정치의 핵심은 " 갈등, 경쟁, 리더십, 조직"이며, "문제는 대중권력의 한계를 감안하면서도 그것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도록 정치체계를 조직하는 방법"이다 (p70)"라고..

갈등과 경쟁에 취약한 우리들은, 참는 것과 견디는 것에 익숙한 우리들은, 그간의 패배의 경험들에 위축된 우리들은 갈등을 회피하려 한 것은 아니겠는가.

갈등을 순수하지 않음으로 규정하고 갈등의 현상을 타자화하고 혐오의 씨앗을 품게 되는 건 아닐까?

어쩌면 이것은 분리불안의 역설이지는 않을까? 생각하게도 된다.

공동체에 귀속되어 분리되고 싶지 않은 지향과 순수성 훼손에 대한 두려움의 공존은 분리됨의 불안과 분리되지 않음의 공포를 같이 겪어내는 혼란의 상황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어쨌든 '혐오'는 거대담론이 되었다. 단순히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하고 말고의 차원이 아니라 정치구조 안에서 사회체계 안에서 들끓고 있는 갈등의 변양태인 것이다.

그 시작은 어디였을까?

레나타 살레츨은 그녀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선택이란 관념을 강요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는 계급 차이와 인종적, 성적 불평등을 은폐한다. (...) 오늘날 사람들의 선택권은 실제로는 사회적 분할에 따라 심각하게 제한되어 있고,(...) 선택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눈을 가려 이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 결과 사회적 차원에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권력관계들을 변화시킬 선택의 가능성을 잃어버리고 있다.(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 중에서)"

우리의 혐오는 강요된 선택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은 아닐까?

"넌 어느 편인데?" 라는 물음. "성공하는 삶"에 대한 환상.

공동의 삶에 대한 사유가 '혐오'를 해결할 방도가 되기는 할까?


담론이 확장되는 과정을 보며, 자꾸 묻게 된다. 그렇다면? 이 혐오의 담론은 어떻게 수렴되어야 하는가. 진단은 시작되었고 치유는 쉽지 않겠지만, 다름의 인정이 아닌 '혐오'의 해결은 인간성의 회복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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