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생일을 지냈고, 어정쩡한 선물대신 현찰을 쥐어준 옆지기 덕분에 주머니가 제법 두둑했다.

두둑해진 주머니의 느낌은 언제든 문지르면 소원을 들어줄 요정이 나오는 램프를 손에 쥔 것 같았고, 절대로 마르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홀쭉해진 주머니. 뭘 했는지도 모르게 주머니의 돈은 사라졌다.

깜빡 졸았더니 컨베이어벨트에 수북히 쌓인 검사해야할 물건들처럼 ..아득했다.

그래도 꼭 읽고 싶은 책을 발견했고 포인트까지 탈탈 털어서 세 권을 주문했다.

 

 

 

 

 

 

 

 

 

 

 

 

 

 

 

 

황해문화 편집주간이자 한국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김명인님의 부끄러움의 깊이.

한 다리 건너고 건너다보면 알게되는 페이스북 징검다리로 알게 된(나 혼자서만 알게 된, 그 분은 모르실) 페친이시다.

이따금씩 올리는 포스팅이 묵직했다. 신영복선생의 타계 후 올린 포스팅은 몇번을 되풀이해서 읽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란 것이 얼마나 뜨거운 것인지 자꾸만 울컥대며 읽었다.

그런 포스팅들을 하나의 묶음으로 내어놓은 책이라고 했다.

모니터로 읽혀지는 글을 텍스트로 인쇄해서 읽을 때 그 느낌과 울림은 사뭇 다르다.

나는 가끔 김명인의 글을 그렇게 인쇄해서 읽곤 했다. 밑줄을 긋기도 하고, 이건 무슨 의미지? 하는 물음표를 적어두기도 했다. 댓글로 되묻는 일은 하지 않았다. 집요하게 파고들 이야기라기보다는 내게 던지는 의문이었고 고민거리였으며 오래 숙고해봐야할 숙제 같은 이야기였으니까. 그 몫은 글 쓴 이에게가 아니라 읽은 이에게 있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해서였다.

A4용지에 인쇄한 글과 책으로 묶인 글은 또 느낌이 다르다. 몇몇의 글은 내게 삼독(三讀)인 셈이다.

일상의 이야기와 날카롭게 혹은 진지하게 문학작품에 대해 제기하는 눈매는 사뭇 날카롭다.

아귀가 잘 맞는, 견고하지만 쓸모있게 잘 짜인데다 곱기까지 한 할머니의 경대같은 느낌이 들었다.

할미는 늘 반질하게 경대를 닦았고 잘 간수하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엄마가 물려받은 경대는 오래지 않아 분실했지만 나는 그 형태와 경대 앞에서 새색시처럼 웃던 할미의 모습이 또렷이 기억난다.

살아간다는 건 그렇게 잘 닦고 잘 묻고 잘 쓰는 일이 아닐까.

부끄러움의 깊이. 자신의 등록상표로 '부끄러움'을 쓰겠다고 했다.

삶 속으로, 혹은 삶을 잘 닦고 성찰하는 글들이 편안하다. 편안하지만 그저 편하지만은 않다.

댓거리를 할 수 없을만큼 편안하게 자꾸 묻는다.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죠?"

 

 

여자전을 읽다가 놀러 온 시누이게게 빼앗겼다. 물론 명목상 선물이었지만, 미처 다 읽지도 못한 책을 매우 감사해하며 가져갔다. 시월드와는 싸우지 않는것이 남는 것. 마저 읽기 위해 주문했다.

 

대통합이라는 과제 앞에 참 이래도 되나 싶은 언사들이 어지럽다. 선의라는 말을 들은 이후, 나는 대통합이라는 말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영조의 탕평은 어땠지? 문득 생각이 거기서 머물 즈음에 출간 소식을 들은 책.

 

마저 읽어야할 책과, 다시 읽는 셈인 책과, 읽을만한 책을 받아들고 마음이 넉넉해진다.

늘 책을 사들이지만 늘 책에 목마른..이 미련한 짓은 언제쯤 끝이날지..어떤 부끄러움의 무게가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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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7-03-28 2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텍스트를 읽고, 필자를 읽고, 최종적으로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한다는 ‘삼독‘ 이 날카롭고 무겁게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