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 비평 167호 - 2015.봄
창작과비평 편집부 엮음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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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포르말린 냄새가 나는 작품이었다.

나와 미주와 장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서로 같은 공간에 머물러 서로 다른 시간을 호흡하는 사람들의 차고 시린 이야기들이다.

사빈꼬프의 "창백한 말"을 읽으며 보내는 장의 시선과 시간, 그리고 혁명성과 허무주의가 뒤섞인 혼란이 작품 내내 보여진다.

격자 모양으로 솜씨 좋게 짜낸 카페트처럼 작가의 서사와 창백한 말의 서사가 교차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세기에 살고 있었다(p213)"

나와 미주가 21세기를 산다면 장은 20세기 초반을 살고 있었다고 서술한다.

그 시간에 장을 묶어둔 것은 무엇이었을까? 장은 어째서 그 시간 밖으로 걸어나오지 못하고 스스로 박제되거나 표본이 되는 길을 선택하려는 것인가.

포르말린 냄새가 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변명해본다.

창백한 말의 주인공이 자살한 것인지 아닌것인지가 불분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장 역시 자살한 것인지 타살인 것인지가 불분명하다.

다만..20세기의 기억을 붙들고 있어야만 했던 장의 내면은 얼마나 낮은 온도로 설정되어있는지가 가늠 될 뿐이며, 얼마나 가혹하게 자신을 사랑했는지만을 느낄 따름이다.

 

#2.

 

정지돈의 글.

2014년 발표한 '뉴욕에서 온 사나이'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샤데크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가 사용된 소설.

이란의 불행한 작가 헤다야트의 대표작이라고 말해도 좋을까?

 <삶에는 마치 나병처럼 고독 속에서 서서히 영혼을 잠식하는 상처가 있다> 라는 말로 시작되는 눈 먼 부엉이.

역시, 나와 장의 이야기가 선택되어 격자를 짜나가기 시작한다. 헤다야트스럽게 장 스럽게 정지돈답게..

소설 속에 소설이 등장하고 그 소설과 호흡을 주고받는 과정은 흥미롭다. 원작을 끌어 와 원작과 닮았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새로운 이야기라니..

​물리적으로 수리적으로 도저히 계산값을 유추하기 어려운 구조라고 밖에 대답할 수 없겠다. 1+1=창문 과 같은 결과값인 셈이다.

1과 1이 그대로 있지만 그것을 축으로 새로운 공간과 시간이 그려지는 그런 모습? 유치한 어린아이들의 장난 같지만, 그 묘수에 늘 재미있어하는 나로서는 빗대어 설명할 것이 적당치 않다.

1+1을 바짝 붙여 적고 =을 그 위 아래에 하나씩 배치해서 창문을 그리는 그런..

수와 수의 결합을 통해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얼마나 흥미로운 일인가.​

 

어쩌면 창백한 말은..말(馬)이 아닌 말(言)이었을지도 모를일이다.

#3.

 

하필이면 사빈꼬프였을까? 이데올로기와 혁명적 정세가 맞물려 어디서든 혁명의 격동이 당위로 수긍되는 판에 혁명을 위한 도덕률을 바꾸어야 하는 ​갈등을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것의 허무를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한참 그런 말이 유행일 때가 있었다. '지친 혁명가의 패배적 허무주의' 그 발원지도 의미도 모호한 이 말은 변절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에게 엄격한 목소리로 단죄하듯 부르던 것이었다.

문득 포르말린 냄새와 함께 떠오른 낡아빠진 기억 저 쪽의 말들을 끄집어 내 본다.

장이 그랬다. "허무주의자가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가 이상이 없는 자가 어떻게 혁명가가 될 수 있는가(p211)"

장은 사빈꼬프와 조지 오브라이언에게서 무엇을 듣고 싶었던 걸까? 마치 자신이 놓친 무언가를 찾기 위해 행간을 뒤지는 형국이지 않은가.

어떤 변명과 대답을 구하려고 한 것일까?

책을 읽어내려가며 나는 어느새 장의 시선으로 주변을 보고, 장의 감정으로 분노하고 처연해지고 절망하기 시작했다.

몹쓸 이입을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마지막 흰 눈에 자살인지 타살인지 모를 피를 뿌리고 눕는 순간 비로소 찾은 체온을 무엇이라 표현해야 좋을지 모를일이다.

고집스레 지켜온 차가운 피를 일순간 쏟아내고 붉게 부여받은 온기 같은..

#4

 

조금은 색다르고 조금은 도전적인 소설임에 분명하다.

정지돈이라는 작가의 이름을 독서록에 적는다. 아직은 거칠게 읽혀지는 부분이 있지만, 기대되는 것이 있다.

적어도 사람의 체온을 지켜보려 애쓰는 것이 느껴지는 것이다.

강단있게 써내려가는 것이 일품인 젊은 작가 하나를 만난다.

다음 작품을 기대해도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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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린다. 한 때는 '비가 오시네'라고 반갑게 표현한 적도 있는 것 같다.

어느 때부턴가 나의 표현들이 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비는 내리고, 바람은 불지 않고 울고, 파도는 밀려오지 않고 뒤치며 노을은 물들지 않고 각혈을 하기 시작했다.

어쨌든..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면 두통이 시작된다. 저기압상태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센서가 머리 어디쯤 박혀있나보다.

그래, 그 때, 기절하듯 잠이 들었던 어린 어느 날, 꿈인듯 생시인듯 까무룩한 기억에 쏟아지던 빛들..낯선 형상들..

알 수 없는 그들이 그랬을지도 몰라..

미스테리한 일이 어디 한 두개여야 말이지..

 

 

 

 

 

 

 

 

 

 

 

 

 

 

 

 

후..안되겠어.

진정이 되질 않아..그냥 털어놓아야겠어.

 

출근하는 길이었지. 알겠지만 나의 출근시간은 늘 늦어. 낮에 출근해서 밤 늦게 마치게 되지.

젊을 때는 이런 나를 놓고 동네 사람들이 수근거리기도 했어.

"그집 마누라 말이다. 뭐 하는 사람이고? 한 밤중에 오대?"

"한 밤중 뿌이가? 아래께는 새복이 들어오드라 아이가?"

"아..맞나? 그집 신랑 속도 좋재..마누라가 그라고 다니는데 암말도 않드나?"

"그라이까네 부부 아이가. 부창부수.."

 

이제야 다들 알고 지내니 그 때의 쑥덕거림이 우스갯소리가 되고 있지만 말야.

 

오늘도 출근하는 중이었어. 새벽부터 비가 내린 덕에 그나마 남은 꽃잎들이 바닥에 떨어져 덜 마른 이불처럼 처연하게 보도블럭을 덮고 있었지. 누군가 물풀을 붓고 꽃잎을 후루룩 떨궈 놓은 것 같은 느낌? 아니면 더는 기울 데도 시칠 데도 없던 할머니의 이불처럼 헐거운 느낌? 여튼 그런 느낌이었어.

우산 밑으로 꼬마애 하나가 보였어.

노란 비옷을 입고 깡총거리며 뛰어가고 있었지. 귀엽게도 말야. 아이의 노란 비옷이 어떤 신호라도 되듯 그 뒤를 따라가고 있었어. 비가 오는 날은 두통이 심해서 어딘가에 시선을 붙잡아 매지 않으면 걷기도 힘드니까.

 

큰 길에 도착했어. 깡총거리던 아이가 갑자기 우뚝 섰어.

사격게임장의 표지판처럼, 펀치기계의 둥근 솜뭉치처럼..우뚝.

그러더니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고, 급기야 주저 앉아 흐느끼다 엉엉 울기 시작했지.

어린아이가 저렇게도 울 수 있구나 싶게 아주 서럽게 엉엉 울기 시작했어.

당황스러웠어. 주위를 둘러봐도 아이 엄마는 보이지 않고..비는 내리고..우산으로 가리고 지나칠까? 생각도 했지만 어떻게..

 

"얘. 왜그래? 뭐 잘못 밟았어? 어디 아야했어?"

눈물이 범벅이 된 채로 아이는 내 얼굴을 보더니 더 그악스럽게 울기 시작했어.

저승사자라도 본 것처럼..

당황하며 아이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데 아이엄마로 보이는 사람이 뛰어와서 아이를 안고 나를 한 번 쳐다봤지.

난, 억울하다는 눈빛과 나는 아무짓도 안했다는 눈빛을 동시에 내보내야했어.

안그래도 머리가 아파 죽겠는데 말야.

 

아이 엄마가 나와 비슷한 말을 아이에게 했어.

"왜? 넘어져서 아야했어? 누가 때렸어?" 누가 때렸냐고 물을 땐 나를 흘깃 쳐다봤지. 아이에게 물었는데 내가 도리질을 하고 있었어.

아이는 울음을 멈출 생각이 없는 것처럼 엉엉 울다 엄마를 꼬옥 끌어안으며 띠엄띠엄 말을 했지.

 

'꼬..꽃이 다 죽었어..물에 빠져서 다 죽었어.."

 

들었어? 저 말?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 눈물이 난것도 같았어. 뭔가 알 수 없는 것이 몸속으로 뛰어들어와 오장육부를 헤집는 느낌이었어.

꽃이 다 죽었어. 물에 빠져서 다 죽었어..

 

아이의 눈에 비에 젖은 꽃잎들이 물에 빠져 죽은 것 처럼 보였을까?

 

아이를 품에 안고 다독이며 아이엄마가 떠나고..

아이가 울던 자리에서 꼼짝을 하지 못했지..노란 환영이 계속되었고.."꽃이 다 죽었어..물에 빠져서 다 죽었어.."라는 말이 환청처럼 맴돌았어.

 

 

 

 

 

 

 

 

 

 

 

 

 

 

 

 

 

미안해..널 아프게 해서..

이해해..나도 너무 아파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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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의 아이들 - 제5회 문학동네 청소년 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28
이선주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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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린 가난.

 

가난이란 건 좀체로 낫지 않는 신경성 위염 같은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예민해질 때마다 도지는 위염처럼, 가난도 그랬다.

잊을만하면 다시 도지고 도지고..결국 끌어안고 사는 법을 택하게 된다. 신경쓰지 않고 팔자 편하게 살아낼 방도가 없는 현실을 잘 아는 까닭이다.

익숙해진 통증은 무뎌지기도 한다. 처음 발병할 때 정체를 모르는 고통은 얼마나 두려운가.

비교를 알게 되고 상대적 박탈이라는 말과 절대적 빈곤이라는 말의 실체를 마주할 때의 당혹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청소년기라면 더더욱..

 

가난한 중3 여자애 란이와 무기력해지는 길을 택한 란이 아버지, 어쩔 수 없이 생업을 이어가야 하는 할머니, 이웃집 콩이 할머니, 자살한 콩이 엄마, 불법체류청소년 민성, ..

그리고 클레어라 불리는 예솔이.

이 다양한 사람들이 세상을 버텨내는 이야기가 이 속에 있다.

 

연초에 그런 기사를 봤다.

초등학교 예비 소집에 아이들을 아파트별로 구분지어 줄을 세웠다는 기사. 행정 편의라고 했다.

얼마전 그런 기사를 봤다.

급식비를 내지 않았으니 밥을 먹지 말라고..교육적 차원에서 학생의 도덕적 해이를 염려해서 한 것이라고 했다.

또, 얼마전..

의무급식을 중단한 어떤 도지사가 가난한 대안학교를 귀족학교라고 추켜세워주는 것도 봤다.

 

아이들의 상처는  깊고 치명적이다. 어릴 적 장난치다 손톱에 할퀸 상처를 여태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고,  계단에서 늘 주춤되는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사람도 있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세상을 마주한 가난한 란이의 성장기.

가난하지 않지만 가난한 친구 클레어..

추방의 위험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는 민성..

아이들과 란이는 서로의 어깨를 내어주며 견디기 시작한다.

 

#2. 여자가 된다는 것.

 

첫 생리의 충격에 쓰러진 란이. 책임지지 못할 생명을 낳을까 두려워 수술을 하려한다. 아이를 갖지 못하는 수술..그러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고..

클레어와 민성이와의 만남이 이어지는 사건이 시작된다.

여자가 된다는 것.

축복받을 일이고 격려를 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란이는 그렇지 않았다.

가만 생각해보니 나 역시 그랬던 것 같다. 또래보다 늦게 시작한 생리..친구들이 "너 그날이야?" "너두?" 라며 생리통에 잔뜩 찡그린 채 책상에 엎드리기도, 양호실을 찾기도, 서로에게 생리대를 빌리기도 하던 때, 유일하게 생리를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아무래도 남자 같다며 가끔 가슴을 더듬기도 했고 검사를 받아보라는 말도 했다.

'그 귀찮은 걸 왜 하냐?' 라고 말은 했지만, 여자가된 친구들과 여자가 되지 못한 나는 뭔가 어른과 아이처럼 겉돌곤 했다.

첫 생리를 하던 날.

나는 울었다. 좋아서? 라기 보다 여자가 된다는 것이 두려웠다. 뭔가 이제껏 가지고 있던 양성 중 하나의 모습만이 강요될 것이라는 두려움 같은 것이었을거다.

내가 남자이길 바란다해도 그리 되지 않겠지만, 어쩌면 손가락질 받을 수도 있겠구나 싶어지는 대목이었다.

사랑하는 친구와 손을 잡고 걷는 것도 이상하게 보일까? 볼에 살짝 입맞추는 것도 여자들끼리라며 욕을 먹을까?

 

생리를 시작한 란이는 두려웠을거다. 떠나버린 엄마와 콩이를 두고 자살한 이웃집 언니의 모습만으로도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몸이 된것이 두려웠을거다.

 

 

#3. 어른들.

 

아이들에게 비춰지는 어른은 어떤 모습일까? 자꾸만 적대적이 될 수 밖에 없는 어른들의 모습..

내가 아는 아이들이 좀 있다.

며칠 전 한 아이와의 대화가 가슴에 아리게 남았다.

지각을 한 아이는 잔뜩 부어있다. 화가 난 표정으로 딴생각에 빠진 아이를 불러 이야기를 시작했다.

"무슨 일 있어?"

"...."

"왜?"

" 아빠가.. 야근을 안하니까 돈이 없대요. 대출금 갚아야 하는데 엄마가 아빠랑..싸우고, 다 때려치우고 죽자고..막.."

"아이구, 어머니가 힘드셨나보네. 그게 진심은 아닐꺼야.."

"진심이예요. 울 엄마. 세월호 유가족들이 부럽다고 막.."

"뭐? 그건 아니지..자식을 잃은 사람들한테..할 말이 아니지. oo아..그래도 부모님은 널 사랑하셔. "

"사랑 안했으면 좋겠어요. 그냥 좀 내버려두면 좋겠어요. 진짜 세월호 탔어야했어요. 그럼 엄마가 행복했을거에요. 보상금두 받구.."

할 말이 없었다.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는 부모들에게 화가 났고, 이런 생각을 대수롭지 않게 하는 아이들을 만든 세상에 화가 났다.

아이를 돌려보내고..멍하니 앉아있다 보니 툭툭 턱밑으로 미지근한 액체가 떨어져내렸다.

미안했다.

좀 더 희망적인 생각을, 꿈을, 미래를 갖도록 하지 못해서 말이다.

세상을 살아내는 힘이 돈과 권력이라고 믿게 만들어서 말이다.

친구와 마음을 내어주고 받는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알려주지 못해서 말이다.

그 시기를 분명 건너왔음에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내 증오의 대상이 되었던 나쁜 어른의 모습으로 싱거운 웃음이나 날리고 있어서 말이다.

#4.

여러가지 기억들이 혼재되어 날아다녔다.

내 어린 시간들과 닮은..박탈감과 빈곤이 견고한 격자창처럼 마음을 닫게 만들었던 시간들과 닮은 란이의 이야기를 오래 붙둘고 있었다.

아이들..

창 밖의 아이들이 나의 아이들이며 나 역시 창 밖을 서성이던 사람이었다는 걸 자꾸 잊고 산다.

책상위에 던져 둔 책을 아이들이 좋아한다.

살짝 민성과 란이의 로맨스(?)에 두근거리는 모습도 보인다. 한참 그럴 나이니까..

먼지가 낀 창을 뽀득뽀득 소리가 날 정도로 닦아두고 싶어졌다.

아이들을 좀 더 자세히 만나고 싶다. 그 속에 내 어린 시간을 찾아내고 싶다.

좀 더..괜찮은 어른이 되고 싶다.

- 클레어가 직접적으로 그들에게 모멸감을 준 적은 없지만, 클레어가 신고 다니는 신발, 메고 다니는 가방, 입고 다니는 겉옷 등이 그들에게 비교심리를 일으켰다. 비교보다 비참한 건 없었다. (p12)

-어둠이 빛을 이긴 역사가 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어림없는 말이었다. 어둠은 늘 이긴다. 낮에 햇빛이 잠깐 들었다고 저녁의 어둠이 진 것이 아니다. 밝은 햇빛 뒤에서 어둠이 지켜보고 있다는 걸 이해하는 사람만이 란이 자신과 대화가 통할거라고 생각했다.(p69)

-할머니는 점점 쇠약해지고 있었다. 저러다 사라지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얇아지고 작아졌다. 마치 아기가 되려 하는 것 같았다.(p97)

-자기가 어렵게 자랐으면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더 이해할 것 같은데. 오히려 나는 열심히 해서 성공했는데 너희들은 왜 노력하지 않느냐, 이러더라. 오원장이 나한테 맨날 하는 말이 뭔지 알아?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다. 없는 것들 자꾸 도와주면 버릇 나빠진다. (p145-146)

-돈은 사람의 본질을 가린다. 본연의 모습을 검은 색으로 덧칠해 아무 색도 아니게 만든다. (p148)

-산다는 건 어쩌면 자신이 사람이라는 걸 끊임없이 증명하는 일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지 않으면 세상은 쉽게 잊었다. 사람이 사람이라는 걸 말이다.(P150)

-한 사람을 알게 된다는 건 그 사람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음악을 좋아하고, 어떤 연예인을 좋아하는 지를 알게 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과 똑같이 상처받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되는 거라고..(P154-155)

-탄생과 죽음이 대척점에 놓인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연결된 것이란 걸. 그러니 할머니의 늙어 가는 모습을 마냥 슬퍼할 필요는 없다고. 란이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이불을 덮어 줬다. 그리고 창밖을 봤다.(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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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한 연애 문학동네 시인선 67
김윤이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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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나는 위험한 사랑을 할 거라고 했었다. 치명적인 사랑, 미친 사랑, 허락되지 않는 사랑..

이 모두 매력적인 설정이기는 하지만 구체화되지 않은 뜬구름 같은 이야기였다. 그렇게 내 사랑의 틀을 만들고 사랑의 스토리를 구성하는 것은 파트너가 없는 탱고처럼 쓸쓸하긴 했지만 견딜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갖춘 사랑을 곧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품었던 드라마틱한 사랑과 연애는 사실 그다지 드라마틱하지도 절절하지도 않았다.

굳이 손가락에 꼽자면..은하수 한 갑을 손에 쥐고 출가한 사람이 있었다는 정도?

 

그가 출가하던 날..나는 그 손에 은하수 한 갑을 쥐어주며 혹여라도 내가 생각나면 태우라고 했었다.

먼 훗날 만나게 되었을 때, 그 남은 개비수를 세어보겠노라고..

오년쯤 지난 뒤에 충청도의 한 사찰에서 동안거를 마치고 나온 그를 만났다. 그는 주머니 속을 한참 더듬어 작은 공처럼 구겨질대로 구겨진 은하수 담배포장지를 내 손에 전해주었다.

-이거 다 피우는데 일주일도 안걸렸어.

-완전 땡중이네. 행자가 뭐 그래? 속세와 인연을 딱 끊어야지.

내심 나를 그리워했다는 그 일주일이 고맙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다. 그 후, 그 일주일 후, 그는 내가 다시는 보고싶지 않았던 것일까? 혹시 이 담배포장지는 내가 준 것이 아니라 새로 사서 더 피우고 남은 것이 아닐까? 기대를 안고 물었다.

-이거 내가 준거 맞아? 일주일만에 다 피우고 안모자랐어?

-응, 네 생각을 쉬이 끊을 수 없겠기에 하루 저녁에 다 피우고 토하고 한동안 앓았지. 독하더라..그렇게 독할줄은 몰랐어. 너를 잊는게 아니라, 너의 본체를 이해하기 위해 담배만큼 독하게 정진했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하하..모를거야. 몰라도 돼. 다만, 나는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는거, 이전의 휘몰아치는 정욕이 아니라 다음 생, 그 다음 생에라도 인연을 잇고 덕을 쌓고, 그러고 싶다. 네가 지옥에 있다해도 찾아갈께.

-왜? 왜? 내가 지옥에 있을거라 생각해? 넌 극락, 난 천당..그렇게 있자.

-하하..그래..같은 동네지? 이름만 다를거야. 가끔 산에 꽃 필 때, 까르르 웃는 보살님들을 볼 때 네 생각을 하긴 해. 저렇게 유쾌한 인연이 있었지..하면서 말야.

왠지 울컥해서..이야기를 더는 잇지 못했고 그 후로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에게 나는 스무개비의 줄담배로 기억되어 있을까? 독하디 독한 은하수 담배 스무개를 연달아 피우며 독하게 태워버렸어야 했던 사랑이었을까?

이제는 눈에 뜨이지도 않는 은하수 담배를 오래된 영화 속에서 만나거나 이야기 도중 거론하게 되면 알싸한 담뱃내가 나는 것도 같고 껄껄 웃던 그 사람의 웃음이 떠오르다 흩어진다.

이깟 사랑이 뭐라고, 이깟 연애가 뭐라고 온밤을 달려갈 수 있으며 온 맘을 내던지게 되는 것인지..

 

 

김윤이의 독한 연애를 읽어가며 나는 사랑을 낳고 키우다 떠나보내는 긴 의식을 치른 느낌이었다.

어린 나이에 죽어버린 사랑에 대한 위령제, 혹은 천도제를 너끈히 치러준 느낌이었다.

김이강 시인 처럼..세 사람의 성씨를 모아놓은 듯한 이름. 김. 윤.이..어쩌면 이 이름 속에 숨겨진 주술사의 눈썰미가 있었던걸까?

영험한 무녀의 비나리처럼 흐득흐득 사랑의 온 과정을 읊어대며 통곡을 한다. 그러다 헤어진 그 걸음이 저승길 같아 차마 발을 떼지 못하고 허우적 대는 등을 쓸어내려 주며 위로를 한다

괜찮다..괜찮다..그 길로 가도 된다. 그 역시 사람의 길이라고 긴 장삼을 너풀대며 갈길을 가르키는 손짓처럼도 보였다.

 

잘가라는 이별의 말이 피 한방울 떨어지지 않게 베인 상처처럼 아리고 아려도..그렇게 보내는 것이 이 사랑의 매듭이라고 손 흔들어 보내는 것이다.

독하디 독한 인연, 그 사랑의 끝을 마주 본다는 것이 제정신으로 가당키나 하겠는가.

 

김윤이의 시어들은 저릿저릿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내는 것처럼, 부주의하게 던져두는 것처럼 포장된 고백하기 어려운 말들이다.

사랑과 이별을 오징어 찢듯 갈래갈래 찢었다가 다시 이어붙이기를 수백 번 그러나 질척대지는 않는다. 독하게 사랑한 만큼..아프게 이별을 들이켠다.

 

*네펜데스믹스타*

 

이중 격리된 오블로모프적 일상이다

무기력, 나태로 생기 잃은 나머지 몸이 남아나지 않은지도 모른 채

만사 원만이라며 이름뿐인 자신과 창을 젖힌다

열기와 함께 심심한 오후 풍광이 빙그르르 몇 분 안돼 안을 파고든다.

앞뒤 분간할 틈조차 없다

자연이란 이름은 생존을 기만한 자에겐 무시무시한 무소불위 채찍

찌쯔쯔쯔 젖은 땅에서 소생한 매미

소리 감아죄며 지난날 영혼을 생생히 되살린다

똑 한번 내 안 바뀌는 기척을 보고 싶어, 예전의 교감에 젖는 그녀

바꿔 말하자면 하루 아침에 식육식물 자체랄까, 그렇다

그때 그를 외면하고 자신을 힐책하며 떠난 모습이 여태껏 내면에 붙박여 있다

 

저승까지도 가져가야 한다

안이하게 접근할 수 없는 장애물은 흐트러짐이 없는 법

그러니 누구도 그와 같은 변신 않으리 둘의 어떤 심경인 셈이다

숨막히게 밀폐된 공간이 열병에 들뜬 자의 성감대처럼 뜨겁다

자빠지지 않도록 동여맨 공기 같다

생존에 맞먹는 장, 땀내가 콧등을 때린다

몸짓에 의해 내부로 전달된 냄새다

-유전암호(genetic code)상 매미는 귀청 찌르는 소리 적나라

할수록 구애에 유리하대 사랑하다 죽어버릴 듯이

매미가 나무의 급소를 노린 꼴로 허릴 다리 새에 끼우고

가무잡잡 탄 등골 솟구친 그때부터, 그렇다

 

없앨 방도가 없는

(몸의 주인이 엄연히 그 자신인 이상 전혀 관계없을 수

없으므로)

완전한 합일을 본 순간부터 개인적 고독이란 실체가 진저리

쳐질 만큼 그녀는 무섭다

때마침 세차게 지는 꽃을 안에서 본다.

 

*식충식물, 곤충이나 작은 동물을 항아리 모양 잎 속으로 유인해 잡아먹는다.

 

저마다 가슴 한 켠에 화인처럼, 낙인처럼 찍혀진 흉터 하나쯤은 있을거다. 그것이 독한 연애의 증거일지 미련의 찌꺼기일지는 불분명하지만,

가끔은 까놓고 볕바라기를 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썩지 않고 그래야 노랫거리가 되고, 그래야 독기가 빠지지 않을까?

 

 

헤싱헤싱..웃을 여유도, 독한 연애, 독한 삶의 끝에서 지어지는 표정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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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4-07 2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랏빛 표지 시집과 보랏빛 종이에 옮긴 필사. 잘 어울립니다. ^^

나타샤 2015-04-07 20:1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어릴 때였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여읜다는 말의 무게를 대학에 들어가서야 알았던 나는..어딘가에서 나를 소개해야 할때면 2년전 아버지를 여의고, 3년전 아버지를 여의고..라는 식으로 소개를 했다. 버스 앵벌이처럼 말이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굶더라도 가르쳐야한다는 당시 어머님들처럼 육성회비를 따박따박 내주던 어머니는 가끔 도시락을 못싸주시곤 하셨다.
그런 날이면 나는 영악스럽게도 '오늘 네시간밖에 안하는거 어떻게 알았어?'라며 애써 장난을 치곤 더없이 깡총거리며 학교로 향했다.
엄마는 '다행이네'라고 대답은 하면서도 목소리가 떨렸다. 내 느낌이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정말 속아주고 싶으셨을것이고, 그것이 사실이길 바라셨을게다.
아홉살 여자애의 거짓말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거짓말은 이내 들통이 날 게 뻔했다.

엄마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나는 쌀집으로 달려가 '오홉한되'주세요. 라고 했다.
동전 몇개로 바꿔 진 쌀은, 연애편지도 아니면서 흰 편지봉투에 담겨져 내 손에 들려지곤 했다. 그렇게 엄마와 진 밥을 해먹고 나면 나는 또 거짓말을 시작했다.

'네시간 하고 집에와서 뭐 먹었어?'
'응, 경이 언니네 가서 경이언니 엄마가 밥해주셔서 먹었어'
'그래? 뭐해서 먹었어?'
'응, 고기랑, 소세지랑, 계란이랑..'
엄마가 걱정할까봐 손가락을 꼽아대며 거짓말하는 나는 세상에 맛있는 반찬을, 비싸서 엄두도 잘 못내는 반찬을 한 끼 반찬으로 내어놓았다고 해버렸다.
경이 언니네도 우리집처럼 아버지가 없는데..

어쨌든, 어린 시절 배가 고팠던 기억은 오래도록 결핍이라는 말과 함께 내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어른이 되서 아이를 낳고, 아이가 학교에 다니고..
두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4학년일 때, 집안에 큰 일을 겪으며 하루하루 먹는것이 어려웠었다.
급식비를 내는 것이 버거운 그 때..
학교에서는 몇 달이나 밀린 급식비 납부 용지를 아이 손에 들려보냈고..딸아이는 보란듯이 내밀며 '담 달부터 밥 안먹어'라며 소리를 쳤다.
같은 장수의 납부용지를 들고 온 아들녀석은 울먹울먹하며 '나도..'라고 했다.

이웃에게 돈을 빌려 급식비를 내고 담임선생님과 면담을 거친 후 급식비 지원을 받는 동안..아이들은 내내 표정이 무거웠다.

다른 모든 비용들을 줄이고 끊고, 아이들의 급식비를 첫번째로 두고 생활을 했다.
두달의 고문같은 시간이 지나고, 아이들은 급식비를 내고 급식을 하게 됐다.
아이들 손을 잡고 급식비 납부용지를 들고 은행에갔다.
수납을 해주는 여직원이 도장을 쾅쾅 찍고 영수증을 쭉 찢어 내미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돌아오는 길에 아들 녀석은 자꾸만 왼손바닥에 오른손으로 주먹을 만들어 두드리며 '쾅쾅쾅..납부하셨습니다'라고 주문처럼 종알거렸다.

밥은 그런 것이다.
특히나 어린 밥은 그런 것이다.
함부로 손대서는 안되며, 함부로 상처주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오늘 아침..
급식비를 내지 못했다고 아이들 앞에서 상처를 주었다는 어떤 쓰레기의 이야기를 읽으며..'시발새끼'라고 저절로 중얼거렸다.
아들 녀석이 '쾅쾅쾅 납부하셨습니다'를 종알거렸을 때 처럼..저절로..

비가 꾸적꾸적 내린다.
먼 어린 날 어떤 여자애가 영악한 목소리로 "엄마, 난 밥 안먹어도 돼'라고 거짓말을 한다. 영악해도 어린 여자애의 목소리가 자꾸 젖는다.

 

그제..서울가는 길에 읽은 책 한 권이 눈에 밟힌다.

이런 비슷한 감정..그러나 결말은 사뭇 달랐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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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니 2015-04-06 2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진 글이네요! 조금 감동받았어요. 직접읽어보고 싶어요♥

나타샤 2015-04-06 20:12   좋아요 0 | URL
어릴 때의 기억과 충암고의 어이없는 교감과 며칠 전 읽었던 책을..^^
감사합니다.

아무개 2015-04-07 08: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식사는 하셨습니까?˝
˝밥은 먹었니?˝ 를
아직도 인사말로 쓰는 이 나라에서
애들 밥가지고 이게 뭔짓인지...
가난하다고 증명해야 밥을 주겠다니요 하아...

좋은 글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나타샤 2015-04-07 15:55   좋아요 0 | URL
아이들이 배부른 나라..그게 좋은 나라겠습니다. 그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