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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한 연애 ㅣ 문학동네 시인선 67
김윤이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평점 :
언젠가 나는 위험한 사랑을 할 거라고 했었다.
치명적인 사랑, 미친 사랑, 허락되지 않는 사랑..
이 모두 매력적인 설정이기는 하지만 구체화되지
않은 뜬구름 같은 이야기였다. 그렇게 내 사랑의 틀을 만들고 사랑의 스토리를 구성하는 것은 파트너가 없는 탱고처럼 쓸쓸하긴 했지만 견딜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갖춘 사랑을 곧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품었던 드라마틱한 사랑과 연애는 사실
그다지 드라마틱하지도 절절하지도 않았다.
굳이 손가락에 꼽자면..은하수 한 갑을 손에
쥐고 출가한 사람이 있었다는 정도?
그가 출가하던 날..나는 그 손에 은하수 한
갑을 쥐어주며 혹여라도 내가 생각나면 태우라고 했었다.
먼 훗날 만나게 되었을 때, 그 남은 개비수를
세어보겠노라고..
오년쯤 지난 뒤에 충청도의 한 사찰에서
동안거를 마치고 나온 그를 만났다. 그는 주머니 속을 한참 더듬어 작은 공처럼 구겨질대로 구겨진 은하수 담배포장지를 내 손에
전해주었다.
-이거 다 피우는데 일주일도
안걸렸어.
-완전 땡중이네. 행자가 뭐 그래? 속세와
인연을 딱 끊어야지.
내심 나를 그리워했다는 그 일주일이 고맙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다. 그 후, 그 일주일 후, 그는 내가 다시는 보고싶지 않았던 것일까? 혹시 이 담배포장지는 내가 준 것이 아니라 새로 사서
더 피우고 남은 것이 아닐까? 기대를 안고 물었다.
-이거 내가 준거 맞아? 일주일만에 다 피우고
안모자랐어?
-응, 네 생각을 쉬이 끊을 수 없겠기에 하루
저녁에 다 피우고 토하고 한동안 앓았지. 독하더라..그렇게 독할줄은 몰랐어. 너를 잊는게 아니라, 너의 본체를 이해하기 위해 담배만큼 독하게
정진했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하하..모를거야. 몰라도 돼. 다만, 나는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는거, 이전의 휘몰아치는 정욕이 아니라 다음 생,
그 다음 생에라도 인연을 잇고 덕을 쌓고, 그러고 싶다. 네가 지옥에 있다해도 찾아갈께.
-왜? 왜? 내가 지옥에 있을거라 생각해? 넌
극락, 난 천당..그렇게 있자.
-하하..그래..같은 동네지? 이름만
다를거야. 가끔 산에 꽃 필 때, 까르르 웃는 보살님들을 볼 때 네 생각을 하긴 해. 저렇게 유쾌한 인연이 있었지..하면서
말야.
왠지 울컥해서..이야기를 더는 잇지 못했고 그
후로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에게 나는 스무개비의 줄담배로 기억되어
있을까? 독하디 독한 은하수 담배 스무개를 연달아 피우며 독하게 태워버렸어야 했던 사랑이었을까?
이제는 눈에 뜨이지도 않는 은하수 담배를
오래된 영화 속에서 만나거나 이야기 도중 거론하게 되면 알싸한 담뱃내가 나는 것도 같고 껄껄 웃던 그 사람의 웃음이 떠오르다
흩어진다.
이깟 사랑이 뭐라고, 이깟 연애가 뭐라고
온밤을 달려갈 수 있으며 온 맘을 내던지게 되는 것인지..
김윤이의 독한 연애를 읽어가며 나는 사랑을 낳고 키우다 떠나보내는 긴 의식을 치른
느낌이었다.
어린 나이에 죽어버린 사랑에 대한 위령제, 혹은 천도제를 너끈히 치러준 느낌이었다.
김이강 시인 처럼..세 사람의 성씨를 모아놓은 듯한 이름. 김. 윤.이..어쩌면 이 이름 속에
숨겨진 주술사의 눈썰미가 있었던걸까?
영험한 무녀의 비나리처럼 흐득흐득 사랑의 온 과정을 읊어대며 통곡을 한다. 그러다 헤어진 그
걸음이 저승길 같아 차마 발을 떼지 못하고 허우적 대는 등을 쓸어내려 주며 위로를 한다
괜찮다..괜찮다..그 길로 가도 된다. 그 역시 사람의 길이라고 긴 장삼을 너풀대며 갈길을
가르키는 손짓처럼도 보였다.
잘가라는 이별의 말이 피 한방울 떨어지지 않게 베인 상처처럼 아리고 아려도..그렇게 보내는 것이
이 사랑의 매듭이라고 손 흔들어 보내는 것이다.
독하디 독한 인연, 그 사랑의 끝을 마주 본다는 것이 제정신으로 가당키나 하겠는가.
김윤이의 시어들은 저릿저릿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내는 것처럼, 부주의하게 던져두는 것처럼
포장된 고백하기 어려운 말들이다.
사랑과 이별을 오징어 찢듯 갈래갈래 찢었다가 다시 이어붙이기를 수백 번 그러나 질척대지는 않는다.
독하게 사랑한 만큼..아프게 이별을 들이켠다.
*네펜데스믹스타*
이중 격리된 오블로모프적 일상이다
무기력, 나태로 생기 잃은 나머지 몸이 남아나지 않은지도 모른
채
만사 원만이라며 이름뿐인 자신과 창을 젖힌다
열기와 함께 심심한 오후 풍광이 빙그르르 몇 분 안돼 안을
파고든다.
앞뒤 분간할 틈조차 없다
자연이란 이름은 생존을 기만한 자에겐 무시무시한 무소불위
채찍
찌쯔쯔쯔 젖은 땅에서 소생한 매미
소리 감아죄며 지난날 영혼을 생생히 되살린다
똑 한번 내 안 바뀌는 기척을 보고 싶어, 예전의 교감에 젖는
그녀
바꿔 말하자면 하루 아침에 식육식물 자체랄까, 그렇다
그때 그를 외면하고 자신을 힐책하며 떠난 모습이 여태껏 내면에 붙박여
있다
저승까지도 가져가야 한다
안이하게 접근할 수 없는 장애물은 흐트러짐이 없는 법
그러니 누구도 그와 같은 변신 않으리 둘의 어떤 심경인
셈이다
숨막히게 밀폐된 공간이 열병에 들뜬 자의 성감대처럼
뜨겁다
자빠지지 않도록 동여맨 공기 같다
생존에 맞먹는 장, 땀내가 콧등을 때린다
몸짓에 의해 내부로 전달된 냄새다
-유전암호(genetic code)상 매미는 귀청 찌르는 소리
적나라
할수록 구애에 유리하대 사랑하다 죽어버릴 듯이
매미가 나무의 급소를 노린 꼴로 허릴 다리 새에 끼우고
가무잡잡 탄 등골 솟구친 그때부터, 그렇다
없앨 방도가 없는
(몸의 주인이 엄연히 그 자신인 이상 전혀 관계없을
수
없으므로)
완전한 합일을 본 순간부터 개인적 고독이란 실체가
진저리
쳐질 만큼 그녀는 무섭다
때마침 세차게 지는 꽃을 안에서 본다.
*식충식물, 곤충이나 작은 동물을 항아리
모양 잎 속으로 유인해 잡아먹는다.
저마다 가슴 한 켠에 화인처럼, 낙인처럼
찍혀진 흉터 하나쯤은 있을거다. 그것이 독한 연애의 증거일지 미련의 찌꺼기일지는 불분명하지만,
가끔은 까놓고 볕바라기를 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썩지 않고 그래야 노랫거리가 되고, 그래야 독기가 빠지지 않을까?

헤싱헤싱..웃을 여유도, 독한 연애, 독한
삶의 끝에서 지어지는 표정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