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 비평 167호 - 2015.봄
창작과비평 편집부 엮음 / 창비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포르말린 냄새가 나는 작품이었다.

나와 미주와 장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서로 같은 공간에 머물러 서로 다른 시간을 호흡하는 사람들의 차고 시린 이야기들이다.

사빈꼬프의 "창백한 말"을 읽으며 보내는 장의 시선과 시간, 그리고 혁명성과 허무주의가 뒤섞인 혼란이 작품 내내 보여진다.

격자 모양으로 솜씨 좋게 짜낸 카페트처럼 작가의 서사와 창백한 말의 서사가 교차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세기에 살고 있었다(p213)"

나와 미주가 21세기를 산다면 장은 20세기 초반을 살고 있었다고 서술한다.

그 시간에 장을 묶어둔 것은 무엇이었을까? 장은 어째서 그 시간 밖으로 걸어나오지 못하고 스스로 박제되거나 표본이 되는 길을 선택하려는 것인가.

포르말린 냄새가 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변명해본다.

창백한 말의 주인공이 자살한 것인지 아닌것인지가 불분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장 역시 자살한 것인지 타살인 것인지가 불분명하다.

다만..20세기의 기억을 붙들고 있어야만 했던 장의 내면은 얼마나 낮은 온도로 설정되어있는지가 가늠 될 뿐이며, 얼마나 가혹하게 자신을 사랑했는지만을 느낄 따름이다.

 

#2.

 

정지돈의 글.

2014년 발표한 '뉴욕에서 온 사나이'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샤데크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가 사용된 소설.

이란의 불행한 작가 헤다야트의 대표작이라고 말해도 좋을까?

 <삶에는 마치 나병처럼 고독 속에서 서서히 영혼을 잠식하는 상처가 있다> 라는 말로 시작되는 눈 먼 부엉이.

역시, 나와 장의 이야기가 선택되어 격자를 짜나가기 시작한다. 헤다야트스럽게 장 스럽게 정지돈답게..

소설 속에 소설이 등장하고 그 소설과 호흡을 주고받는 과정은 흥미롭다. 원작을 끌어 와 원작과 닮았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새로운 이야기라니..

​물리적으로 수리적으로 도저히 계산값을 유추하기 어려운 구조라고 밖에 대답할 수 없겠다. 1+1=창문 과 같은 결과값인 셈이다.

1과 1이 그대로 있지만 그것을 축으로 새로운 공간과 시간이 그려지는 그런 모습? 유치한 어린아이들의 장난 같지만, 그 묘수에 늘 재미있어하는 나로서는 빗대어 설명할 것이 적당치 않다.

1+1을 바짝 붙여 적고 =을 그 위 아래에 하나씩 배치해서 창문을 그리는 그런..

수와 수의 결합을 통해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얼마나 흥미로운 일인가.​

 

어쩌면 창백한 말은..말(馬)이 아닌 말(言)이었을지도 모를일이다.

#3.

 

하필이면 사빈꼬프였을까? 이데올로기와 혁명적 정세가 맞물려 어디서든 혁명의 격동이 당위로 수긍되는 판에 혁명을 위한 도덕률을 바꾸어야 하는 ​갈등을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것의 허무를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한참 그런 말이 유행일 때가 있었다. '지친 혁명가의 패배적 허무주의' 그 발원지도 의미도 모호한 이 말은 변절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에게 엄격한 목소리로 단죄하듯 부르던 것이었다.

문득 포르말린 냄새와 함께 떠오른 낡아빠진 기억 저 쪽의 말들을 끄집어 내 본다.

장이 그랬다. "허무주의자가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가 이상이 없는 자가 어떻게 혁명가가 될 수 있는가(p211)"

장은 사빈꼬프와 조지 오브라이언에게서 무엇을 듣고 싶었던 걸까? 마치 자신이 놓친 무언가를 찾기 위해 행간을 뒤지는 형국이지 않은가.

어떤 변명과 대답을 구하려고 한 것일까?

책을 읽어내려가며 나는 어느새 장의 시선으로 주변을 보고, 장의 감정으로 분노하고 처연해지고 절망하기 시작했다.

몹쓸 이입을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마지막 흰 눈에 자살인지 타살인지 모를 피를 뿌리고 눕는 순간 비로소 찾은 체온을 무엇이라 표현해야 좋을지 모를일이다.

고집스레 지켜온 차가운 피를 일순간 쏟아내고 붉게 부여받은 온기 같은..

#4

 

조금은 색다르고 조금은 도전적인 소설임에 분명하다.

정지돈이라는 작가의 이름을 독서록에 적는다. 아직은 거칠게 읽혀지는 부분이 있지만, 기대되는 것이 있다.

적어도 사람의 체온을 지켜보려 애쓰는 것이 느껴지는 것이다.

강단있게 써내려가는 것이 일품인 젊은 작가 하나를 만난다.

다음 작품을 기대해도 좋겠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