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가죽소파 표류기 - 제3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정지향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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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러디.-민영.

 I'm a fool to want you
I'm a fool to want you
To want a love that can't be true
A love that's there for others to~

책상 위에 ​던져 둔 전화기에서 빌리 홀리데이의 음성이 들려왔어. 햇살이 좋은 날 낮게 울리는 그 목소리가 싫지 않아 첫부분이 끝날 때까지 전화를 받지 않았어.

비가 내리는 날 듣는 빌리의 목소리를 좋아하지만, 뭐 햇살과 같이 귓속을 간지럽히는 느낌도 나쁘진 않아.

​전화기를 들어 누군지 확인 해 보려했지만..알 수 없는 전화번호야. 하긴, 나도 누군가에게 늘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어떤 이들의 기억 속에 내가 그들을 기억하는 총량과 상관없이 저장되곤 하잖아. 빌리의 목소리를 흉내내려는 건 아니었지만 왠지 낮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게 됐어.

-여보세요?

-...

-여보세요? 누굴 찾으시는거죠?

-민영? 나야..나.

그 녀의 전화였어. ​그녀는 내가 인도에서 만난 한국의 여자아이야. 아이라고 말하기엔 좀 그렇지만, 여튼 아직 어른이 된건 아니었으니까. 100도가 되야 물이 끓는거잖아. 아직 끓어오르진 못하고 있고 그렇다고 여전히 차가운건 아닌 상태의 물 같았어. 아닌 척 했지만 간절히 끓어오르길 열망하고 있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어. 문제는 그녀가 자신의 온도를 잘 모르고 있다는 거였지.

-아, 반가워. 잘 지내고 있는거지? ​안보고 싶었어?

그 녀의 목소리에서 조금은 안정적으로 끓기 시작한 듯한 여유가 묻어있었어.

-​반가워. 잘 지내. 자기도 잘 지내? 거기는 어때? 여기는 노을이 질 때 너무 아름다워.

-우와. 민영 한국어 많이 늘었어. 어쩐지 주인아주머니가 전화 안하신다 했어.

그 녀의 목소리를 들으니 "고아의 도시"에서 보냈던 여름이 생각났어.

그녀와 요조, 그리고 나. 카우치 서퍼였던 내게 내어줄 소파 하나 없다던 그녀의 방에서 보낸 시간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물론 그녀의 방 말고 다른 곳에서 머물던 시간 역시 내겐 소중해. 그 모든 빛나는 조각들을 모아서 엮는다면 아주 멋스럽고 따스한 조각이불이 될지도 몰라.

기억할 수 없는 내 엄마도 내게 그런 이불을 만들어주고 싶어했을거라고 생각하면 조금 더 따스해지기도 해.

요조와 그녀는 기묘한 동거관계라고 해야할까? 어쩌면 서로에게 자신의 소파를 내어주고 상대의 소파에서 불편해하는 관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

누군가의 소파에 눕는다는건, 오래 묵은 그의 역사와 체취와 이야기 위에 눕는거라고 생각해. 그들이 서로의 소파에 누워 자신의 소파를 바라보는 건 어떤 느낌일까.

매우 예민하고 애틋할거라고만 짐작할 뿐이야.

거의 떠나고 섬처럼 남은 곳에 우리 셋은 표류하고 있었던건지도 몰라. 특히 요조는 그곳을 탈출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 그녀는 그런 요조를 보며 아파했고..

나? 나는 자발적 표류자라고 해야할까? 그녀가 궁금했어. 아니, 그녀의 곁에 머물고 싶었던거지.

입양된 사람이라서 부모을 찾고 싶다거나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라거나 거창한 무엇을 기대하고 한국에 온 것도 아니었고, 거기 내가 누울 카우치가 있었기에 갔던 것 뿐이야.

그녀는 대학생이었고, 글을 쓰는 공부를, 작업을 하고 있었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어. 그녀가 버린것과 그녀를 버린 것들에 대한 해명과 용서가 없다면 그녀는 오래도록 끓어오르지 못할테니까 말야.

우리 셋은 잘 어울렸던것 같아. 아니 최소한 어울리려고 안간힘을 썼었지.

서로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이질감을 갖을 때도 있었지만, 그 이질감 역시 관심이라는 전제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거야.

서울 구경을 갔던 날 시크릿 가든에 숨어있던 그 밤에 가족과 연락을 끊고 사는 요조와 가족이 없는거나 마찬가지라는 그녀와 그 당시 가족이 없던 나는 나란히 누워 이야기를 했어.

요조는 한껏 과장하면서 말했어.

 -- 얘네 오빠도 완전 병신이야

요조가 말했고, 민영이 키득거렸지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내가 말했지.

--없는거나 마찬가지야.

요조가 말했지.

--없는거나 마찬가지야.

민영이 말했어 (p84)

 

우리는 어느새 닮아가고 있었나봐. 아니, 어쩌면 닮았다는 걸 그제서야 알아챈건지도 몰랐어.

 

--그래, 민영. 돈을 벌어버려. 그리고 소파를 사서 카우치 서퍼들에게 소파를 빌려주는 사람이 되자. 나도 돈을 많이 벌어서 소파를 살 거야. 초록색으로.

 나는 부끄러움을 감추느라 부러 밝게 말했어.

--응, 며칠을 누워 자도, 등 안 배기는 침대처럼 커다란 걸로 살 거야.

민영이 말했고.

--나는 진짜 가죽소파.

요조가 덧붙였지.(p85)

 

같이 돈을 벌어서 전세집을 얻고 카우치 서퍼 사이트에 우리 집을 소개하고 그들을 초대하자는 우리들의 꿈은 시크릿 가든에서 조심스레 모의가 시작되었지.

그 날의 별들을 잊을 수가 없어. 저 많은 별들 중에 "초록 가죽소파 자리"라는 별자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언제였지? 밤 새 술을 마시고 비가 그친 새벽에 그녀의 학교 정자에 갔을 때, 우리는 신발을 벗고 정자에 올라가 주저 앉았지.

--우리 세상 같다.

요조가 말했어.

--아무도 없네.

민영이 말했지.

--아무도 없어.

내가 말했어.

우리는 한참 동안 거기에 드러누워 있었지.(p97)

 

​-D시는 어때? 나는 여기가 좋아.

둥둥 떠다니는 그녀와 요조와의 기억을 애써 다 잡으며 그녀의 근황을 물었어.

-..그리워.

그녀의 물기 어린 목소리를 듣고 하마터면 "나도 그래"라고 대답할 뻔 했어. 말 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그리움인데 그걸 굳이 말하면 애써 눌러놓은 그리움이 폭발할 것 같았거든.

-요조는?

나는 요조의 근황을 물었어.

-뭐 그렇지..쪽팔려 죽겠다고 하면서도 잘 견디고 있어. 탈출을 위해 뗏목을 만드는 심정일꺼야.

-다행이야.

-민영.

우리 둘 사이의 그리움이 끼어들 틈을 주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가 대뜸 내 이름을 부른 순간 내 목소리는 흔들렸어.

-응?

-여기 안올래? 소파가 생겼어.

-..

나는 대답하지 않았어. 그녀의 소파는 너무 새것일테니까말야.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난 후, 그녀도 나도 요조도 어디쯤에서부터 끓어올라 폭발해야 할지를 가늠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이미 내 냉장고 속에서 김이 빠져가고 있는 맥주와 차가운 맥주를 준비해서 그녀의 소파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어.

-민영. 안녕. 언제든 자러 와. 네가 만들어 준 볶음밥도 그리워.

-안녕.

 

전화를 끊고 나서야 궁금해졌어. 그녀는 여전히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지. 그녀의 글은 얼마나 쓰여져 있는지, 그녀는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이것 저것 한꺼번에..

분명한건..우린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했다는 것과,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 발버둥치면서 어른이 되고 싶어 애쓰는 배반의 시간을 건너고 있다는 거야.

나를 잃지 않으면서 말야. 그래서 아픈거겠지.

그때의 우리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청춘이었어.

 

Viva! St. Youth!

 

 

 

#.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저릿저릿했다. 누군가에게 들었음직했고, 어디선가 봄직했으며 스스로 겪었던 일은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어떤 사건과 관계에 대해 같은 일이 있었는지 증거를 대라고 따지고 든다면 한 마디로 증거는 없다.

삶의 온도는 끝없이 올라가지 않는다. 끓는 점에서 가열이 계속되고 있다면 온도를 유지하겠지만, 증발될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스스로 온도를 낮추어야 한다. 그렇게 서늘해지기를 결정하고 나면, 일명 나이 먹은 사람이 되어지는 거다.

나의 젊은 시간 어디쯤에서 마주쳤음직한 이야기들이 작가의 섬세한 문장으로 빛난다.

대학소설상 수상작. 이라는 말이 없었어도..알아챌 수 있을만큼..

읽는 동안 나는 민영이 궁금했다. 요조도 주인공도 아닌..민영..

그래서,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만용을 저질러 본다.

 

민영은 아주 멀리까지 왔고, 아주 멀리까지 갈 사람 같았지. 그래서 오히려 그애가 편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어. 내가 했던 잘못들을 하나도 알지 못하는 사람. 그리고 내가 앞으로 어떤 잘못들을 할지 지켜보지 않을 사람. 그래서 나에 대해 실망할 일도 없을 사람 같았지(p51-52)

그애는 진심을 손에 잡히는 물건처럼 사용할 줄 알았지. 그럴 때면 의심이 많은 나 역시도 그애에게서 그것을 건네 받을 수밖에 없었어. (p53)

민영은 그저 고아의 도시로 여행을 온 게 아니었어. 그애가 나에게로 여행을 데려온거야.(p72)

나는 우리 사이에 어떤 것들이 감춰져 있는지 묻고 있는데. 그는 그 중간 어디쯤에서 자기 몫의 문제를 뚝 떼어가며 거리를 두는 거야. 이만큼은 상관하지 말라는 듯이. 나는 그게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고 곧 비참해졌어. (p110-111)

나는 처음으로 남겨지는 사람이 되었어(...) 돌이켜보면 나는 별로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었지. 그런데 남겨지고 나니 떠난 사람들밖엔 생각할 수 없더라고. 내가 보는 모든 자리에 그들이 앉거나 섰던 그림자들이 놓여 있더라고.(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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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 17명의 대표 인문학자가 꾸려낸 새로운 삶의 프레임
백성호 지음, 권혁재 사진 / 판미동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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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가? 라는 물음에 어떤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행복.희망.꿈.비전.긍정..낙관..이런 단어들이 힘을 잃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그런 것들이 사라지기 시작한건 아마 상처 때문일것이다. 고통을 통해 단련되는 과정에 깊게 남은 상처들..문제는 그 상처들이 어떻게 삶의 동력이 되어지는지에 대한 방도를 알지 못했던 까닭일지도 모르겠다.

 

# 1. 열일곱명의 인문학자가 꾸려낸 삶의 프레임.

 

저자가 만난 열일곱의 목소리가 반질하게 잘 닦인 대청마루의 결처럼 호방하고 살갑게 펼쳐진다.

표지의 열한명의 이름이 보이고, 나머지 여섯의 이름이 궁금해지며 표지를 연다.

사진과 오래 기억해도 좋을 글들이 보이고..목차가 있다.

열일곱개의 꼭지가 잘 말려진 곶감처럼 조로록 매달려 있다. 누구의 이야기일까 사뭇 궁금해졌고 서둘러 책장을 넘긴다.

내가 가장 주목했던 서민교수의 글은 어디쯤 있을까.

 

 

 

 

 

 

 

 

 

 

 

 

 

 

 

 

 

 

 

 

 

 

 

 

 

 

 

 

 

 

 

 

 

 

 

 

 

 

 

 

 

 

 

 

 

 

 

 

 

 

이야기의 주제들이 쓰여져있고,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보이지 않는다. 성미 급한 나는 주르륵 훑어보며 누구의 이야기인지를 굳이 옆에 적어놓는다. 마치 맛있는 것부터 먹어버리겠다는 욕심많은 꼬마애처럼 말이다.

출판사측에서는 주제를 잡고 주제에 맞는 이야기를 누가 하게 되는지 담담하게 읽어보길 바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청개구리 독자는 누가 이야기 하는 어떤 이야기인지가 궁금했다. 아직은 어떤 이의 이야기인가가 더 중요한 천박함을 지우지 못한 까닭일테지만 말이다.

어쨌든 열일곱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 2. 다 아는 이야기겠지

 

 지레 짐작은 언제나 맹탕한 결론을 기대하곤 한다. "그럼 그렇지..그럴 줄 알았어" 하는 식의..

그들의 이야기를 대하는 나의 태도 역시 다르지 않았다. 뻔한 이야기일테지..고통을 이겨내고 자신을 믿고 성실하게 밀고 나가면 행복해질것이다..뭐 그런?

그러나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왜 "유명인사"의 행복론이 아닌 "인문학자" 열일곱의 프레임이라고 하는지에 대해 깨닫게 되는 것이다. 막연함과 감성적인 부분만을 한없이 자극하거나 불특정 전문분야에 대한 자부심으로 얼룩져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자연이 사람과 역사가, 사람과 신화가, 사람과 우주가..어떻게 어깨동무하고 합일을 이루어 궁극의 행복을 공유할 것인지에 대한 사유가 읽히는 것이다.

행복은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기준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자연친화적 감수성을 잃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역사를 놓기 시작하면서 신화 속의 바람을 믿지 않기 시작하면서 겪게 되는 오류와 정체되어지는 진화의 길목에 서성이게 되는 것이다. 그 곳에서 그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인정하고 온전히 겪어내며 학습하지 못하고, 피하고 움츠리며 스스로를 가두게 된다.

행복은..그렇게 구속된 채 석방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행복하지 않다. 그렇다면 불행한 것인가? 씨앗을 뿌려놓고 열매가 맺히기까지 기다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조급함이 불러오는 비극일 것이다. 열매 맺음을 기다리지 못하고 이 나무는 글렀어. 라고 단정짓고 ..나는 망했어..라고 스스로 좌절로 몰아넣지만 않는다면 어쩌면 행복은 생각보다 빨리 맺힐 수도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하지 않다는 건. 아직 행복하지 않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행복하기 위한 몇가지 조건만 갖춘다면 가능하다는 청신호일것이다. 불이 들어오지 않았을 뿐이지 단선된 것이 아니라는 것.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욕심많은 겁장이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 아는 이야긴가? 알고 있으며 행동하여 고치거나 그 근원을 찾을 궁리를 하지 않는다면..그래서 스스로의 행복을 놓쳐버린다면..도산선생님께 종아리를 맞는대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 3.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아플거고 제대로 아파야 제대로 낫지.

 

언제나 극단의 명제가 혼란을 가중시킨다. 어떤이는 말한다. "절망하라. 그 끝에서 다시 시작하라" 그러자 어떤이는 또 말한다. "절망을 거부하라." 어쩌란 말인가.

이 두 명제를 조합하면 답이 보일지도 모른다.

절망의 상황에서 상처를 입고 그것이 얼마나 아프고 고된것인지 배워야 한다. 그 절망의 속성이 무엇이며 어디서 온것이고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속속들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상처를 헤집어보는 건 상상만으로도 쓰라리고 고통스럽겠지만 그래야 한다. 그렇게 절망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게 배워가며 하나씩 제거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막무가내로 절망하지 않겠어!라는 선언은 필요하지 않다.

열일곱의 목소리는 절망앞에 겁을 먹더라도 피하지 말고 그것과 마주하라고 한다. 견디지 말고 절망을 끌어안으라고 한다. 그 속에 품고 있는 희망이 가장 건강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려운 일이다.

피하고 싶은 과정이지만 그것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제대로 된 "경험"이라는 무기와 "배움"이라는 해법을 갖지 못하고 말것이다. 그 결과는 혼돈이고 혼돈이 길어지면 자괴감이 스스로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희망의 씨앗도 움켜쥐쥐 못한 채..

 

# 4. 건강하고 빛나는 목소리.

 

잘 알지 못하는 분들의 이야기가 새로웠다. 또한 개인적으로 관심을 둔 분의 이야기는 마치 음성지원이라도 되는 듯 들렸다. 슬쩍슬쩍 웃음이 지어지는 건 그 모습이 그대로 보이는 듯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진정성과 따스함, 현실성이 있었다는 말이다.

책 말미에 붙어있는 그들이 추천하는 책 목록 또한 귀중한 자료다.

내가 읽었던 책들..혹은 낯선 책들의 목록..

그 책들에서 그들이 얻은 것과 내가 얻은 것은 분명 다른 빛깔 다른 의미이겠지만..공유되어지는 것은 분명 있을 것이다.

 

행복하고자 한다면? 아니 최소한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쯤이고 어떤 풍경을 지니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면 읽어보길 권하고 싶은 책이다.

다양한 목소리가 하나의 협주곡처럼 연주해내는 <행복론> 혹은 호롱불 하나 밝혀둔 봉놋방에서 두런두런 나누는 삶의 이야기들, 살아온 궤적의 공유가..묵직하게 내려앉는 느낌을 갖게 한다.

 

 

 

 

고통은 생명체에게 아주 필요했기 때문에 진화한 현상이예요. (p209)

돌파구가 보이지 않을 땐 제가 독서에 열중한 것처럼 뭐든 죽어라 해보세요.도움이 되거든요(p366)

우리는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서 그의 뿌리는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어요. (p117)

만족을 알고 멈출 때 행복함을 알게 되는 겁니다. (...) '그건 내게 없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게 있는 것'을 찾는 일이다.(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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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의 경제학
글렌 허버드 & 팀 케인 지음, 김태훈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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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1. 경제학


경제라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건 오래지 않은 일이다.

딱히 아쉽지 않았다는 말일 수도 있으나..그 반면 스스로를 경제의 주체라고 느끼지 못했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경제, 특히나 국가의 경제라는 건 개인과 관계없이 저들의 메카니즘으로 굴러가는 것이고 저들의 규칙에 '나'라는 개인은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막연한 불신때문인지도 모를일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 판세를 읽어내지 못하면 스스로 도태되거나 저들의 먹이가 되고 말것이라는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하기 시작한것이다.

항간에 나와있는 경제학서적들을 읽으면서 "도무지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어.."라거나 "이런 이론까지 알아야해?"라는 반문을 수없이 하게 된다.

즉, 너무 전문적이거나 너무 어렵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고 쉽게 쓰여진 경제학도서들은 멘토링처럼 시시콜콜하게 뻔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희망고문을 하곤 한다.

너무 어렵거나 너무 아쉽거나..이 상황에 경제학의 <총,균,쇠>라고 일컬어지는 책을 마주한다.

그 어마어마한 인류의 역사와 함께 되짚어볼 수 있을까? 기대를 갖는다.


#2. 경제의 문제


역사적으로 세계의 패권을 쥐었던 나라들의 본질은 군사력이나 지도력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로마나 몽골의 정복전쟁은 본질적으로 경제의 문제였다는 관점이 흥미롭다.

위대한 지도자의 통솔력이나 군대의 전투력와 용맹함을 그 원인이라고 알고 있던 보통의 사람의 허를 찌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경제적인 부분을 틀어쥐고 그 규칙과 원리를 살피고 운용하는 것 또한 지도자의 역할이었다고 한다면, 분명 뛰어난 지도자였을게다. 하지만 순수하게 군사력과 통치력으로 패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단단한 오해라고 책은 말한다.

구체적 근거들을 제시하며 역사적으로 변형되거나 주요하게 작용하고 있는 경제원리들을 설명하고 있다

현시점에서 "미국"의 정치적 지위와 경제적 변화와 우려를 역사적인 고찰과 더불어 짚어낸다고 보면 참..걱정 많은 나라구나..싶어지기도 한다. 


4.로마의 폐허

5.중국의 보물

6.스페인의 지는 해

7.노예의 법칙 :오스만의 역설

8.일본의 개방

9.영국의 몰락

10.유럽:통일성과 다양성

11.꿈꾸는 캘리포니아

12.미국의 미래.


처음의 서론과 마지막부분을 제외하고 목차만으로도 그 흥미로움을 더한다.

주목받고 힘을 갖던 나라들. 그 나라들이 중심이 되는 시점과 몰락의 시점을 경제적인 언어와 구조의 풀이로 설명하고 있다.

딱딱하고 어려운 부분도 분명 있지만, 학창시절 배웠던 세계사의 흐름과 기억나는대로 연결해서 이해하며 하나의 커다란 경제연표를 만드는 기분으로 읽어내리는 것이 나름 재미있었다.



#3. 전문가는 아니지만.


다양한 책들을 읽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전문적인 서적들은 감히 도전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쉽게 풀이된 책들은 너무 가볍거나 조금 읽다보면 그 속내를 읽어낼 수 있을만큼 내용이 얇다.

개개인별로 호불호가 분명히 있겠지만, 경제적인 구조와 규칙들이 이미 삶의 일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면, 또한 우리 사회의 중요한 축으로 작용하고 있다면 이에 대한 의문과 개념에 대한 이해는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어렵지도 너무 쉽지도 않고..미처 헤아려보지 못한 기준점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목처럼 BALANCE가 잘 맞추어진 책이라는 느낌이다.


이제는 전문가가 아닐지라도..사회의 변화의 방향을 가늠해 보는 안목을 지니는 것 또한 중요하리라.

문제는..잘 모르는 용어들에 대한 개념정리. 그것을 하나씩 찾아가며 읽다보니 시간이 꽤 걸리긴 했다. 그래프를 읽어내는 것 또한 한참 걸리고..솔직히 어느 부분은 그냥 넘어가기도 했고..

그래도 막연한 고민과 불안이 아닌 자신만의 근거와 개념으로 대안을 읽어낼 수 있다면..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다.


경제적 불균형에서 오는 정치적 근간의 흔들림이나 양극화의 심화..구조 안에서 이익과 권력을 취하는 집단과 구조 밖으로 밀려나 소외되는 집단의 거리는 갈수록 멀어지고 깊어진다. 다만 미국의 문제라고 치부할 수 없는건, 이런 모습을 우리나라에서도 구조적 모순과 분배의 불평등이 심화되기 시작했고(이미 고질화되어졌고) 권력의 경제장악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문제는..균형이다. 

이 균형이 시장의 자율로 가능할 것인가. 균형의 근거를 무엇으로 둘 것인가. 역사적으로 드러난 증거들을 어떻게 분석하고 적용하여 오류를 바로잡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적잖이 되어진다.


쉽게 읽을 수는 있지만..결코 가볍지 않은..경제를 틀로 한 전문적 지식이 나열되어져있지만..누구나 읽어볼만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표지를 벗기고..은빛 바탕에 적힌 <BALANCE>라는 글씨를 한참 들여다본다.

그래..균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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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닥터 슬립 - 전2권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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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책을 펼친다

 

<스티븐 킹의 대표작 샤이닝, 30여년만에 돌아온 매혹적인 후속작>

이 카피가 주는 힘은 생각보다 컸다. 스티븐 킹이라는 이름이 주는 기대감과 그 때 그 아이는 어찌된것인가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또한,

스티븐 킹의 닥터 슬립은 킹식 글쓰기의 본질이 훌륭하게 드러난 작품이며, 그의 여러 걸작에 드러난 장점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마거렛 에트우드

마거렛의 추천사는 요즘 말로 "닥치고 정독!"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킹식 글쓰기>라니..그의 장점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니..

 

두 권이라는 분량이 주는 압박감은 차후의 문제였다. 어쨌든 읽어내리기 시작한다.

오버룩 호텔에서 살아남은 어린 댄,그의 특별한 능력으로 호스피스 일을 하며 사람들을 평온하게 죽음의 세계로 인도한다. 자신의 정체를 들키고 싶지 않은 댄. 그가 강력한 샤이닝을 가진 아브라와 샤이닝의 기력을 먹고 사는 초능력 집단 '트루낫'과 만나게 되는 것. 그들과의 목숨을 건 싸움. 아니 전쟁을 겪어내는 것이 주요한 이야기의 골자이다.

킹의 글은 괴기스러움과 잔혹함을 넘어서는 여유를 지니고 있다. 소름이 끼치는 대신 긴장을 하게 한다. 또한 때때로 어떻게 될것인가 집중하고 있던 순간, 누군가 내 생각을 읽어내는 건 아닐까? 주변을 둘러보게 한다.

어쩌면 따스하기까지한 스릴러 판타지. 썩 잘 구성되고 현란하며 집요한 영화를 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긴 숨을 내쉰다. 멍하니 올려다본 천정에 엔딩 크레딧이 멋지게 올라가는 건 아닐까..싶을 만큼 오랜 잔상이 남기도 한다.

 

개인적 취향으로..좀비나, 벰파이어, 외계인이 나오는 글이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초능력자 포함해서..

완전히 신화적이거나 완전히 현실적이지 않으면 깔끔하게 감상이 수습되지 않는 성격과 내가 믿지 못하는 것들에 현혹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닥터슬립을 읽으면서는 몰입이 된것이다.

조이스 캐럴 오츠에 매혹되었던 때가 떠오르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좋아하지 않는 장르의 소설에 매혹되는 원인이 무엇일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치밀함이다.

최소한 내가 거부하는 현상이지만 그럴 수 있다고 치고, 어디 한 번 보자..라는 나의 건방진 자세를 보기 좋게 깨어내는 필력과 치밀함, 어느 하나 허술하지 않아 반격하거나 폄하할 수 없는 치밀함. 그것이 존재할 때, 나는 온전히 매료된다.

 

닥터 슬립은 그런 글이었다. 환상체험을 한 것 처럼말이다. "킹식의 글쓰기" "그의 장점이 모두 발휘된"이라는 추천사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이다.

 

후텁지근하고 끈적한 여름 날, 이렇게 해도 집중이 안되고 저렇게 해도 시원해지지 않을 때, 아무렇게나 누워 펼쳐보면 그대로 시간과 공간을 틀어쥔 채 타임슬립을 결험하게 되는 것이다. 과한가? 아니, 정말 그렇다.

 

 

# 2. 생각을 지켜라.

 

샤이닝을 고문하고 그들의 기력을 먹이로 삼는 트루 낫. True Knot. 왜 하필 이런 이름을 지었을까를 생각했다. 진짜 매듭, 진짜 고리? 선과 악의 고리, 평온과 파멸의 고리, 그 사이에 어찌할 수 없는 알력의 매듭. 그것을 풀어내는 것이 삶의 전쟁이 되어지는 걸까? 그래서..그들을 트루 낫이라고 명명하게 된걸까?

언제나 부수적인 내용들에 집착하는 나의 독서법은 또다시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힌다.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고, 누군가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읽어낸다.

누군가 죽었고, 그를 잃고 아파하는 사람과 떠나지 못하는 사람을 누군가 보고 있다.

이것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이야기가 진행되어지면서 여러 드라마와 영화들이 겹쳐지기 시작했다.

고스트 위스퍼러, 리스너, 언더 더 돔, 그린 마일, 히치콕..

어쩌면 하나같이 내가 믿지 못했던 것들이다. 저럴 수는 없어. (히치 콕은 예외다. 그는 언제나 존경의 대상이므로..). 혹은 영화니까, 드라마니까, 라는 말로 치부해버렸던 것들이 자꾸 눈에 밟히는 것이다.

극작가로서 스티븐 킹의 그림자가 짙게 배어진 것은 아니었을까?

 

여튼 누군가 내 생각과 기억을 헤집고 있다는 사실, 혹은 내가 잊고 있던 기억까지 짚어낸다는 사실이 가능한 일이라면 이것처럼 섬뜩한 일도 없겠구나 싶어졌다.

때론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으면 좋겠어..하며 자신의 기억 제일 어두운 곳에 가장 은밀하게 숨겨두고 싶은 기억, 혹은 생각들이 있다. 그것을 내 허락도 없이, 아니 나 자신조차도 모르게 누군가 엿보고 있다는 건..무서운 일이다.

샤이닝은 과연 축복일까?

 

# 3.

아주 잘 짜여진 설계도이다. 따라서 가다보면 무엇을 만나든 체감도는 기대 이상일 것이라는 건 분명하다.

뒹굴거리며 누워서 혹은 엎드려서 한숨에 후루룩 읽어냈다.

저녁부터 다시 저녁이 되는 시간까지.닥터슬립을 따라 긴 여행을 했다. 피비린내가 넘쳐나는 그 길이 인상적이었다.

자칫 질려버릴 것 같은 지점에 예기치 않게 나타난 유머코드 또한 훌륭했다. 거친 오프로드를 달리다 만나게 되는 안정적인 길처럼, 혹은 적당히 그늘이 지고 바람이 부는 길처럼 말이다.

 

(도와줄 수 있지. 부탁이야. 닥터. 도와줄 수 있지.)

그렇다 그는 도와줄 수 있었다. 그것이 그의 서약이자 그가 태어난 이유였다. (...)

 

(가지마)

'안 가." 댄이 말했다. "여기 있어. 당신이 잠들 때까지 여기 있을거야."

 이제 그는 두 손으로 칼리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잠들 때까지."

(p406)

 

하지만..누군가 꼭 읽어주었으면 하는 기억과 생각도 있다. 가끔은..

닥터 슬립처럼 내 손을 맞잡고 내 생각을 들어줄 그런 사람이..있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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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예수 붓다 - 그들은 어떻게 살아왔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장석훈 옮김 / 판미동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 1. 무엇을 물을 것인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엄청난 경제 성장 속에 우리 나라는 급성장했으나 1997년 IMF 대란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사람들은 경제의 외곽으로 밀려났고, 망가져버린 일상의 안정을 끌어안고 황망해했다. 그래도 국가를 살리겠다는 갸륵한 마음은 제 손으로 금을 들고 나오게 했고, 저마다 마음을 보태려했다. 그렇게 보태진 마음이 어떻게 쓰였는지에 대한 보고는 없다. 그리고, 그렇게 나라의 밑돌이 되었던 사람들은 여전히 밑돌로 버티고 있다.

어쨌든. 그 때 즈음이었을게다. 웰빙이라는 말이 나돌기 시작한 것은 말이다. 잘 살기..유기농..뭐 이런 말이 나오기 시작했었다. 웰다잉이라는 말도 나왔었다. 잘 죽기..잘 산다는 건,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행복한 마음으로 잘 산다는 건 잘 죽기 위한 준비운동이라는 그런 말이 나돌았다.

일자리가 없었다. 그나마 있던 직장도 잃었다. 창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들은 고스란히 망했다. 그렇게 썩어진 퇴비처럼 몇몇 대단한 가게들의 밑거름이 되었다. 

컨설팅이라는 말과 멘토라는 말이 떠돌기 시작했다.

우리는 멘토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하며, 또한 웃기도 하며 한동안 멘토를 찾았다.

하지만, 여전히 경제의 외곽에 밀려난 이들은 서럽고 힘들다.

힐링이라는 말이 다시 황사처럼 스며들기 시작했다.

치유..다치고 상한 마음을 치유하고 진정한 평안과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고, "진,정,한!"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었다. 힐링을 위한 강연과 캠프가 줄을 잇고, 수없이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징검다리처럼 이어진 수없이 많은 키워드의 홍수 속에 익사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싶다.

결국은 인문학에 귀결된다. 뭐든 '인문학적'이라는 말을 붙이면 근사한 것이 되었다. 사람들은 인문학적인 것에 열광했다.

사람의 문제. 본연으로 돌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상술일테고 말이다.


듣기만 하던 사람들..유창한 강연은 이제 충분하다. 혼을 빼는 웃음과 억지 눈물도 충분했다.

사람들은 이제 묻고 싶어진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거죠?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요? 인간에게 삶은 어떤 의미인가요?"


소크라테스와 예수와 붓다가 그 물음을 이렇게 되돌려준다.



# 2. 실존인물인가?


책의 시작은 그들이 실존하였는가? 묻고 증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들에 관한 책들, 경전들, 단 한 자도 그들이 직접 쓴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되어지고 전승되어지는 이 이야기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정말 실존했을까? 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들도 미미하다. 그렇게 위대한 사람들이었는데 어째서 여기저기 언급되지 않았을까? 그들은 권력을 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책은 말한다. 

아..그렇겠다.

권력이 있던 이들의 소소한 것까지 기록되고 전해지는 것과 비교해보면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문제는, 어째서 나는 단 한번도 자신에게 "이들이 진짜라고 믿어?" 라는 반문을 해보지 않았을까? 였다.

너무도 당연히 고대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있었을테고, 인간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 매달렸다는 예수도 있었던 사람이고, 왕자로 부처가 된 싯다르타도 원래 있었던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들의 가공의 인물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

아마,

그들의 존재가, 평범한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 깨우치고 가르친 그들의 존재가 실제였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이 무의식을 틀어쥐고 있던건 아닐까? 기대고 싶은 무엇이 허상이라거나 가닿을 수 없는 먼 곳의 무엇이라면 너무 막연하고 막막하니까 말이다.

또한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닌, 우리 이웃의 어떤 이였을지도 모를 가까운 곳의 대답이었길 바란것은 아닐까?

그들의 탄생과 성장, 가족과 성에 관한 이야기까지 조근조근하게 비교하며 이야기된다.

책을 읽으며, 그들이 살아있었던 인간이었다는 것이 자랑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그들과 같은 존재성을 가졌다는 것에 흡족해지기 시작했다.



#3.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자유로워지는 존재라는 것.


자유와 평등. 세상에 태어난 인간 모두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권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누군가 나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나를 밀어낼 때 분노했고 그래야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태어나는 순간부터 불평등은 시작되었고 자유는 사회라는 틀 안에서 조금씩 부자유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부자유를 자유라고 믿고 싶어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래야 이 함정투성이의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것 같아서 말이다. 결국, 나를 속이는 가장 큰 적은 내 안에 있었다는 걸 인정해야만 한다.

자유로워지가 위해 끝없는 사유와 혁신을 이루어내야 한다는 것. 소크라테스와 예수와 붓다가 그랬듯이, 끝없는 물음과 대답을 해내는 시간,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내기 위한 시간을 충분히 갖을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사유의 시간은 필시 행위로 발현될 것이고, 그런 움직임들이 혁신의 불씨가 되어질 것이며, 그런 결과들이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어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그들이 실존했었다는 증명이 필요했던 건, 그들이 사람이었다는 전제가 필요했던것일게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내기 위한 과정들, 그 속에서 성장했던 그들과 견뎌야했던 그들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돌려 말하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그 길을 따라 갈 필요는 없다. 그들은 그들의 길을 걸었을뿐이고, 나는 내 몫의 길이 주어져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은 이미 나왔다. 자유로워져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정의로, 예수의 사랑으로, 붓다의 자비로..우리는 기대어 쉴만한 그늘을 이미 가지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잠시 쉬어갈 그늘에 다름 아닐 것이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그들의 그늘에서 쉬어가고 있는 "내"가 살아내는 이야기일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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