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예수 붓다 - 그들은 어떻게 살아왔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장석훈 옮김 / 판미동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 1. 무엇을 물을 것인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엄청난 경제 성장 속에 우리 나라는 급성장했으나 1997년 IMF 대란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사람들은 경제의 외곽으로 밀려났고, 망가져버린 일상의 안정을 끌어안고 황망해했다. 그래도 국가를 살리겠다는 갸륵한 마음은 제 손으로 금을 들고 나오게 했고, 저마다 마음을 보태려했다. 그렇게 보태진 마음이 어떻게 쓰였는지에 대한 보고는 없다. 그리고, 그렇게 나라의 밑돌이 되었던 사람들은 여전히 밑돌로 버티고 있다.

어쨌든. 그 때 즈음이었을게다. 웰빙이라는 말이 나돌기 시작한 것은 말이다. 잘 살기..유기농..뭐 이런 말이 나오기 시작했었다. 웰다잉이라는 말도 나왔었다. 잘 죽기..잘 산다는 건,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행복한 마음으로 잘 산다는 건 잘 죽기 위한 준비운동이라는 그런 말이 나돌았다.

일자리가 없었다. 그나마 있던 직장도 잃었다. 창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들은 고스란히 망했다. 그렇게 썩어진 퇴비처럼 몇몇 대단한 가게들의 밑거름이 되었다. 

컨설팅이라는 말과 멘토라는 말이 떠돌기 시작했다.

우리는 멘토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하며, 또한 웃기도 하며 한동안 멘토를 찾았다.

하지만, 여전히 경제의 외곽에 밀려난 이들은 서럽고 힘들다.

힐링이라는 말이 다시 황사처럼 스며들기 시작했다.

치유..다치고 상한 마음을 치유하고 진정한 평안과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고, "진,정,한!"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었다. 힐링을 위한 강연과 캠프가 줄을 잇고, 수없이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징검다리처럼 이어진 수없이 많은 키워드의 홍수 속에 익사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싶다.

결국은 인문학에 귀결된다. 뭐든 '인문학적'이라는 말을 붙이면 근사한 것이 되었다. 사람들은 인문학적인 것에 열광했다.

사람의 문제. 본연으로 돌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상술일테고 말이다.


듣기만 하던 사람들..유창한 강연은 이제 충분하다. 혼을 빼는 웃음과 억지 눈물도 충분했다.

사람들은 이제 묻고 싶어진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거죠?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요? 인간에게 삶은 어떤 의미인가요?"


소크라테스와 예수와 붓다가 그 물음을 이렇게 되돌려준다.



# 2. 실존인물인가?


책의 시작은 그들이 실존하였는가? 묻고 증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들에 관한 책들, 경전들, 단 한 자도 그들이 직접 쓴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되어지고 전승되어지는 이 이야기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정말 실존했을까? 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들도 미미하다. 그렇게 위대한 사람들이었는데 어째서 여기저기 언급되지 않았을까? 그들은 권력을 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책은 말한다. 

아..그렇겠다.

권력이 있던 이들의 소소한 것까지 기록되고 전해지는 것과 비교해보면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문제는, 어째서 나는 단 한번도 자신에게 "이들이 진짜라고 믿어?" 라는 반문을 해보지 않았을까? 였다.

너무도 당연히 고대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있었을테고, 인간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 매달렸다는 예수도 있었던 사람이고, 왕자로 부처가 된 싯다르타도 원래 있었던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들의 가공의 인물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

아마,

그들의 존재가, 평범한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 깨우치고 가르친 그들의 존재가 실제였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이 무의식을 틀어쥐고 있던건 아닐까? 기대고 싶은 무엇이 허상이라거나 가닿을 수 없는 먼 곳의 무엇이라면 너무 막연하고 막막하니까 말이다.

또한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닌, 우리 이웃의 어떤 이였을지도 모를 가까운 곳의 대답이었길 바란것은 아닐까?

그들의 탄생과 성장, 가족과 성에 관한 이야기까지 조근조근하게 비교하며 이야기된다.

책을 읽으며, 그들이 살아있었던 인간이었다는 것이 자랑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그들과 같은 존재성을 가졌다는 것에 흡족해지기 시작했다.



#3.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자유로워지는 존재라는 것.


자유와 평등. 세상에 태어난 인간 모두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권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누군가 나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나를 밀어낼 때 분노했고 그래야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태어나는 순간부터 불평등은 시작되었고 자유는 사회라는 틀 안에서 조금씩 부자유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부자유를 자유라고 믿고 싶어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래야 이 함정투성이의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것 같아서 말이다. 결국, 나를 속이는 가장 큰 적은 내 안에 있었다는 걸 인정해야만 한다.

자유로워지가 위해 끝없는 사유와 혁신을 이루어내야 한다는 것. 소크라테스와 예수와 붓다가 그랬듯이, 끝없는 물음과 대답을 해내는 시간,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내기 위한 시간을 충분히 갖을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사유의 시간은 필시 행위로 발현될 것이고, 그런 움직임들이 혁신의 불씨가 되어질 것이며, 그런 결과들이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어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그들이 실존했었다는 증명이 필요했던 건, 그들이 사람이었다는 전제가 필요했던것일게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내기 위한 과정들, 그 속에서 성장했던 그들과 견뎌야했던 그들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돌려 말하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그 길을 따라 갈 필요는 없다. 그들은 그들의 길을 걸었을뿐이고, 나는 내 몫의 길이 주어져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은 이미 나왔다. 자유로워져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정의로, 예수의 사랑으로, 붓다의 자비로..우리는 기대어 쉴만한 그늘을 이미 가지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잠시 쉬어갈 그늘에 다름 아닐 것이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그들의 그늘에서 쉬어가고 있는 "내"가 살아내는 이야기일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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