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가죽소파 표류기 - 제3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정지향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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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러디.-민영.

 I'm a fool to want you
I'm a fool to want you
To want a love that can't be true
A love that's there for others to~

책상 위에 ​던져 둔 전화기에서 빌리 홀리데이의 음성이 들려왔어. 햇살이 좋은 날 낮게 울리는 그 목소리가 싫지 않아 첫부분이 끝날 때까지 전화를 받지 않았어.

비가 내리는 날 듣는 빌리의 목소리를 좋아하지만, 뭐 햇살과 같이 귓속을 간지럽히는 느낌도 나쁘진 않아.

​전화기를 들어 누군지 확인 해 보려했지만..알 수 없는 전화번호야. 하긴, 나도 누군가에게 늘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어떤 이들의 기억 속에 내가 그들을 기억하는 총량과 상관없이 저장되곤 하잖아. 빌리의 목소리를 흉내내려는 건 아니었지만 왠지 낮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게 됐어.

-여보세요?

-...

-여보세요? 누굴 찾으시는거죠?

-민영? 나야..나.

그 녀의 전화였어. ​그녀는 내가 인도에서 만난 한국의 여자아이야. 아이라고 말하기엔 좀 그렇지만, 여튼 아직 어른이 된건 아니었으니까. 100도가 되야 물이 끓는거잖아. 아직 끓어오르진 못하고 있고 그렇다고 여전히 차가운건 아닌 상태의 물 같았어. 아닌 척 했지만 간절히 끓어오르길 열망하고 있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어. 문제는 그녀가 자신의 온도를 잘 모르고 있다는 거였지.

-아, 반가워. 잘 지내고 있는거지? ​안보고 싶었어?

그 녀의 목소리에서 조금은 안정적으로 끓기 시작한 듯한 여유가 묻어있었어.

-​반가워. 잘 지내. 자기도 잘 지내? 거기는 어때? 여기는 노을이 질 때 너무 아름다워.

-우와. 민영 한국어 많이 늘었어. 어쩐지 주인아주머니가 전화 안하신다 했어.

그 녀의 목소리를 들으니 "고아의 도시"에서 보냈던 여름이 생각났어.

그녀와 요조, 그리고 나. 카우치 서퍼였던 내게 내어줄 소파 하나 없다던 그녀의 방에서 보낸 시간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물론 그녀의 방 말고 다른 곳에서 머물던 시간 역시 내겐 소중해. 그 모든 빛나는 조각들을 모아서 엮는다면 아주 멋스럽고 따스한 조각이불이 될지도 몰라.

기억할 수 없는 내 엄마도 내게 그런 이불을 만들어주고 싶어했을거라고 생각하면 조금 더 따스해지기도 해.

요조와 그녀는 기묘한 동거관계라고 해야할까? 어쩌면 서로에게 자신의 소파를 내어주고 상대의 소파에서 불편해하는 관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

누군가의 소파에 눕는다는건, 오래 묵은 그의 역사와 체취와 이야기 위에 눕는거라고 생각해. 그들이 서로의 소파에 누워 자신의 소파를 바라보는 건 어떤 느낌일까.

매우 예민하고 애틋할거라고만 짐작할 뿐이야.

거의 떠나고 섬처럼 남은 곳에 우리 셋은 표류하고 있었던건지도 몰라. 특히 요조는 그곳을 탈출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 그녀는 그런 요조를 보며 아파했고..

나? 나는 자발적 표류자라고 해야할까? 그녀가 궁금했어. 아니, 그녀의 곁에 머물고 싶었던거지.

입양된 사람이라서 부모을 찾고 싶다거나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라거나 거창한 무엇을 기대하고 한국에 온 것도 아니었고, 거기 내가 누울 카우치가 있었기에 갔던 것 뿐이야.

그녀는 대학생이었고, 글을 쓰는 공부를, 작업을 하고 있었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어. 그녀가 버린것과 그녀를 버린 것들에 대한 해명과 용서가 없다면 그녀는 오래도록 끓어오르지 못할테니까 말야.

우리 셋은 잘 어울렸던것 같아. 아니 최소한 어울리려고 안간힘을 썼었지.

서로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이질감을 갖을 때도 있었지만, 그 이질감 역시 관심이라는 전제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거야.

서울 구경을 갔던 날 시크릿 가든에 숨어있던 그 밤에 가족과 연락을 끊고 사는 요조와 가족이 없는거나 마찬가지라는 그녀와 그 당시 가족이 없던 나는 나란히 누워 이야기를 했어.

요조는 한껏 과장하면서 말했어.

 -- 얘네 오빠도 완전 병신이야

요조가 말했고, 민영이 키득거렸지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내가 말했지.

--없는거나 마찬가지야.

요조가 말했지.

--없는거나 마찬가지야.

민영이 말했어 (p84)

 

우리는 어느새 닮아가고 있었나봐. 아니, 어쩌면 닮았다는 걸 그제서야 알아챈건지도 몰랐어.

 

--그래, 민영. 돈을 벌어버려. 그리고 소파를 사서 카우치 서퍼들에게 소파를 빌려주는 사람이 되자. 나도 돈을 많이 벌어서 소파를 살 거야. 초록색으로.

 나는 부끄러움을 감추느라 부러 밝게 말했어.

--응, 며칠을 누워 자도, 등 안 배기는 침대처럼 커다란 걸로 살 거야.

민영이 말했고.

--나는 진짜 가죽소파.

요조가 덧붙였지.(p85)

 

같이 돈을 벌어서 전세집을 얻고 카우치 서퍼 사이트에 우리 집을 소개하고 그들을 초대하자는 우리들의 꿈은 시크릿 가든에서 조심스레 모의가 시작되었지.

그 날의 별들을 잊을 수가 없어. 저 많은 별들 중에 "초록 가죽소파 자리"라는 별자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언제였지? 밤 새 술을 마시고 비가 그친 새벽에 그녀의 학교 정자에 갔을 때, 우리는 신발을 벗고 정자에 올라가 주저 앉았지.

--우리 세상 같다.

요조가 말했어.

--아무도 없네.

민영이 말했지.

--아무도 없어.

내가 말했어.

우리는 한참 동안 거기에 드러누워 있었지.(p97)

 

​-D시는 어때? 나는 여기가 좋아.

둥둥 떠다니는 그녀와 요조와의 기억을 애써 다 잡으며 그녀의 근황을 물었어.

-..그리워.

그녀의 물기 어린 목소리를 듣고 하마터면 "나도 그래"라고 대답할 뻔 했어. 말 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그리움인데 그걸 굳이 말하면 애써 눌러놓은 그리움이 폭발할 것 같았거든.

-요조는?

나는 요조의 근황을 물었어.

-뭐 그렇지..쪽팔려 죽겠다고 하면서도 잘 견디고 있어. 탈출을 위해 뗏목을 만드는 심정일꺼야.

-다행이야.

-민영.

우리 둘 사이의 그리움이 끼어들 틈을 주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가 대뜸 내 이름을 부른 순간 내 목소리는 흔들렸어.

-응?

-여기 안올래? 소파가 생겼어.

-..

나는 대답하지 않았어. 그녀의 소파는 너무 새것일테니까말야.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난 후, 그녀도 나도 요조도 어디쯤에서부터 끓어올라 폭발해야 할지를 가늠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이미 내 냉장고 속에서 김이 빠져가고 있는 맥주와 차가운 맥주를 준비해서 그녀의 소파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어.

-민영. 안녕. 언제든 자러 와. 네가 만들어 준 볶음밥도 그리워.

-안녕.

 

전화를 끊고 나서야 궁금해졌어. 그녀는 여전히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지. 그녀의 글은 얼마나 쓰여져 있는지, 그녀는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이것 저것 한꺼번에..

분명한건..우린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했다는 것과,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 발버둥치면서 어른이 되고 싶어 애쓰는 배반의 시간을 건너고 있다는 거야.

나를 잃지 않으면서 말야. 그래서 아픈거겠지.

그때의 우리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청춘이었어.

 

Viva! St. Youth!

 

 

 

#.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저릿저릿했다. 누군가에게 들었음직했고, 어디선가 봄직했으며 스스로 겪었던 일은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어떤 사건과 관계에 대해 같은 일이 있었는지 증거를 대라고 따지고 든다면 한 마디로 증거는 없다.

삶의 온도는 끝없이 올라가지 않는다. 끓는 점에서 가열이 계속되고 있다면 온도를 유지하겠지만, 증발될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스스로 온도를 낮추어야 한다. 그렇게 서늘해지기를 결정하고 나면, 일명 나이 먹은 사람이 되어지는 거다.

나의 젊은 시간 어디쯤에서 마주쳤음직한 이야기들이 작가의 섬세한 문장으로 빛난다.

대학소설상 수상작. 이라는 말이 없었어도..알아챌 수 있을만큼..

읽는 동안 나는 민영이 궁금했다. 요조도 주인공도 아닌..민영..

그래서,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만용을 저질러 본다.

 

민영은 아주 멀리까지 왔고, 아주 멀리까지 갈 사람 같았지. 그래서 오히려 그애가 편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어. 내가 했던 잘못들을 하나도 알지 못하는 사람. 그리고 내가 앞으로 어떤 잘못들을 할지 지켜보지 않을 사람. 그래서 나에 대해 실망할 일도 없을 사람 같았지(p51-52)

그애는 진심을 손에 잡히는 물건처럼 사용할 줄 알았지. 그럴 때면 의심이 많은 나 역시도 그애에게서 그것을 건네 받을 수밖에 없었어. (p53)

민영은 그저 고아의 도시로 여행을 온 게 아니었어. 그애가 나에게로 여행을 데려온거야.(p72)

나는 우리 사이에 어떤 것들이 감춰져 있는지 묻고 있는데. 그는 그 중간 어디쯤에서 자기 몫의 문제를 뚝 떼어가며 거리를 두는 거야. 이만큼은 상관하지 말라는 듯이. 나는 그게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고 곧 비참해졌어. (p110-111)

나는 처음으로 남겨지는 사람이 되었어(...) 돌이켜보면 나는 별로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었지. 그런데 남겨지고 나니 떠난 사람들밖엔 생각할 수 없더라고. 내가 보는 모든 자리에 그들이 앉거나 섰던 그림자들이 놓여 있더라고.(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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