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근대의 "다문화주의적" 우주론들과 비교해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사유가 가지는 변별적 특징 가운데 하나를 지시하기 위해 "다자연주이"라는 표현의 사용을 제안하게 되었다. 즉, 다문화주의적 우주론들은 자연의 유일성unicité과 문화들의 다양체multiplicité 사이의 상호함축에 의지하는 반면(신체와 실체의 객관적 보편성이 자연의 유일성을보장하고, 정신들과 기의들의 주관적 특수성이 문화들의 다양체를 낳는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개념화는 정신의 단일성unité과 신체들의 다양성diversité을 전제한다고 할 수 있다. "문화" 또는 주체가 보편적인것의 형식을, "자연" 또는 대상이 특수한 것의 형식을 재현할 것이다

 즉, 그들은 자기 집이나 마을에있을 때 자신들을 인간의 형상을 한 존재자처럼 지각하며(또는 그런지자가 되며), 자신의 행동 방식과 특징들을 문화적 외양을 가진것으로 파악한다. 자기 음식을 인간의 음식처럼 지각하고(재규어는피를 옥수수 맥주처럼 보고, 콘도르는 썩은 고기의 구더기를 구운 생선처럼 보는 등), 자신의 신체적 특성들(털, 깃털, 발톱, 부리 등)을 문화적 도구나 장신구처럼 본다는 것이다. 그들의 사회 체계는 인간 제도의 방식(지도자, 샤먼, 족외혼의 한쪽 집단, 제례 ……)으로 조직되어 있다. 

실제로 관점주의적 전도의 기본적인 차원 가운데 하나는 포식자와 먹잇감의 상대적이고 관계적인 지위에 관련되어 있다. 포식에관한 아마존의 형이상학은 관점주의에 지극히 호의적인 실용주의적, 이론적 맥락이다. 

 하나는 가끔 너무나 유사해 보이는 동종집단들 간의 작은 차이들에서 비롯한 나르시시즘이고, 다른 하나는 완전히 다른 종들 간의 커다란 유사성에서 비롯한 나르시시즘이다. 타자들이 승자가 되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지알 수 있다. 즉, 자기 종족중심적 타자와 애니미즘적 타자 모두 부족함 때문이든 지나침 때문이든 항상 정상적인 범위를 벗어난 쪽에 서 있다

바로 여기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친족관계 형성과정 이 성립한다. 즉, 이것이 포식의 강도적 안정화, 포식의 의도적 미완성으로서의 "재생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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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나르시스」의 주요 목적은 (내 분야에서 "종족지학적" 현재 시제를 빌려 오자면) 다음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즉, 인류학은 자신이 연구하는 인간집단에게 무엇을 개념적으로 빚지고 있는가? 만일 정반대의 방향에서 문제를 다룬다면, 이 질문이 어떤 영향을 발휘하게 될지 아마도 더욱 명확하게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인류학 이론내부의 차이와 변동들은 [해당] 인류학자가 태어난 학술적 맥락, 지적 영역, 이데올로기적 논쟁, 사회구성체의 구조와 국면들에 의해서 주로 (그리고 오직 역사 비판적 시점에서만) 설명되는가? 과연 이것만이 유일하게 타당한 가설인가? [이와 달리] 인류학 이론들이 도입한 개념, 문제, 개별체, 행위자들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것들은 그이론들이 설명하고자 하는 사회들 (또는 인간집단들이나 집단들)이 가진 풍부한 상상적 힘pouvoir에서 자기 원천을 찾는다는 사실을 보여줄 관점으로 이동할 수는 없을까? 

따라서 "인간‘ (에게 고유한 것)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거부하며, "인간"의 본질이란 없고, 그의 실존은 그의 본질에 앞서며, ‘인간‘의 존재는 자유와 비규정성이라고 말할 필요는 결코 없다. 오히려 "인간‘ 이란 무엇인가"는 너무나 분명한 역사적 이유들 때문에시치미를 떼지 않고서는 대답하는 것이 불가능한 질문이 되어 버렸다고 말해야 한다. 다른 용어로 말하자면, 고유한 것을 전혀 갖지않음이 ‘인간‘의 고유함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반복하지 않고서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런 식으로, 종 사이에 [성립하는 관점주의, 존재론적 다자연주의, 식인의 타자성은 원주민적 타인류학alter-anthr-pologie의 세 가지 측면을 형성한다. 이런 타인류학은 서구 인류학의대칭적이고 전도된 변형인데, 이때 대칭이란 라투르가 사용하는 의미의 대칭을 말하고, 전도란 와그너가 말하는 전도된 인류학reverseanthropology의 의미와 같다. 

간략히 말하자면유럽적 프락시스는 주어진 물질 신체적 바탕(자연)에서 출발해
"영혼들을 만드는" 데에서(그리고 문화들을 차이 나게 하는 데에서)성립한다. 원주민적 프락시스는 주어진 사회 정신적 연속체에서출발해 "신체를 만드는" 데에서(그리고 종들을 차이 나게 하는 데에서) 성립한다. 

신세계의 수많은 인간집단이 (아마도 모든 인간집단이) 다음과 같은 개념화를 공유한다. 즉, 세계는 시점들의 다양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즉, 모든 존재자들이 지향성의 중심들이며, 각자의 특징과 역량에 따라 다른 존재자들을 파악한다.
이러한 관념의 전제와 결론은 얼핏 연상되는 상대주의라는 통상적개념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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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네덜란드 사람 식모가 되려는 거야?"
"식모가 아니라 첩이 되는 거야. 이제 나를 냐이**라고 불러."
"제기랄! 대체 왜 첩이 되겠다는 거야?" 마 게딕이 소리를 질렀다.
"안 그러면 어머니랑 아버지가 개밥이 될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널 사랑하는 걸 몰라?"
"알아."
마 게딕은 여전히 마차를 따라 달리던 중이었다. 소년과 소녀는 이별을 한탄하며 눈물을 터트렸다. 눈물의 유일한 목격자는마부밖에 없었다. 사람 좋은 마부는 둘을 달래보려고 했다.
"가질 수 없다고 사랑할 수 없는 건 아니란다." 

**냐이.식민지 시기 네덜란드인의 원주민 첩

 "무인, 이것들은 모두 네가 가져." 데위 아유가 축음기와 레코드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럴 순 없어요. 주인님 물건인걸요."
"망자는 음악을 듣지 않는단다. 내 말을 들으렴."

진짜 미친 짓은 수용소에서 만 2년을 보낸 후에 시작되었다.
일본군이 열일곱 살에서 스물여덟 살 사이인 여자들의 명단을만들기 시작했다. 데위 아유는 벌써 열여덟 살이 됐고 곧 열아홉살이 된다. 올라는 열일곱 살이었다. 처음에는 더 힘든 노동을 시키려나보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아침 군용트럭 몇 대가 강맞은편에 서더니 장교들이 연락선을 타고 블루던 수용소에 왔다.
여러 차례 수용소에 와서 시설을 점검하고 새 규칙이나 명령을전달하던 자들이었다. 이번 명령은 열일곱 살에서 스물여덟 살사이인 여자들은 모두 앞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넌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들어? 아무 걱정도 안 돼?"
"근심은 무지에서 오지." 데위 아유가 대답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 알지?" 올라가 물었다.
"응, 우리는 창녀가 될 거야."
사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다만 데위 아유만 감히 그 사실을입 밖에 낼 수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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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괴물 같은 아기와 수의를 뒤집어쓴 산모가 있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가까운 동네뿐 아니라 멀리 시골 마을에서도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소문은 예언자의 탄생쯤으로부풀려져 예수의 탄생과 잔틱의 탄생을 억지로 끼워 맞추기까지 했다. 들개들의 울부짖음이 곧 동방박사가 본 별이고 수의를 둘러쓴 산모가 기진맥진한 마리아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하느님이나 다른 신들만큼이나 자식 보는 걸 좋아하니 말이야.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을 낳고 판두 의 두 아내가 신들을 낳은 것처럼 말이지. 내 자궁은 악마가 씨를 뿌리는 곳인지라 악마의 자식들을 낳았지. 그런데 로시나, 이제 그것도 지겨워겼어."

"어미 소가 벌써 팔짝대는 제 새끼를 만난 꼴이로다." 알듯 모를 듯한 소리를 하더니 잔틱에게 탁자 위의 커피를 좀 마셔도 되겠느냐고 예의바르게 물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네 에미다. 그 목소리에는 딸이 자신이 바랐던 그대로 만들어졌다는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로시나, 네가 벌써 마흔이라니. 좀 있으면 늙고 쭈글쭈글해 지겠네."
데위 아유는 식탁의 분위를 밝게 해보려고 애쓰면서 조용히웃었다.
"개구리처럼요."
로시나가 수화로 대꾸했다.
"코모도처럼."
데위 아유가 농담으로 받아쳤다. 이제 잔틱의 차례였다. 두사람은 잔틱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저처럼요." 짧지만 무시무시한 말이었다.

"죽어보니 어떻던가?"
키야이가 물었다.
"재미가 꽤 좋더라고요. 그래서 죽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는거예요."
"하지만 자네는 돌아왔잖나."
"그 얘길 해주려고 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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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름 눈 바람 이 많은 것을 시에 집어넣으며 살았다. 철저한 나에 대한 부인이 나를 이끌고 나갔다. 아직 잘 모르겠다.
무엇이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지. 내 언어의 가장 선명한 곳 에는 쓸쓸함이 있다. 

- 연시들이 보통 편지의 형식을 띠게 되는 것은 사랑이라는대상이 자신의 바깥에 있다는 오래된 생각의 관습 때문이다.
이 지독한 산책자의 편지들은 그래서 바지가 거리를 쓸어내리는 빗자루가 되어버리는 흉측함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나에게 네가 부재할 때 어쩔 수 없이 부르는 것이 노래인가? 어쩔 수 없이 의식하는 것이 죽음인가? 절대적인 나는 없는 것. 네가 있음으로써 나는 정의된다. 불만이 아니다. 물만이 아니다. 다만 네가 있어서.

삶이란나에게 이미 없는 것 같다. 다만 시간, 내 앞에 놓인 시간만이 있는 것 같으니 저곳에 두고 온 삶이라는 게 있기는 있는걸까? 잘 모르겠다. 다만 뭔가 있는데 지금 내 앞에는 없는것이다.

1950년대 후반까지 활동한 유럽의 예술가들은 얼굴이 참다.
양하고 그래서 다들 불행하다. 그것은 인간적인 불행이겠으나 예술이라는 아가리가 잡식성이라서 그런 것이다. 그것은슬픈 것도 슬프지 않은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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