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 나르시스」의 주요 목적은 (내 분야에서 "종족지학적" 현재 시제를 빌려 오자면) 다음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즉, 인류학은 자신이 연구하는 인간집단에게 무엇을 개념적으로 빚지고 있는가? 만일 정반대의 방향에서 문제를 다룬다면, 이 질문이 어떤 영향을 발휘하게 될지 아마도 더욱 명확하게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인류학 이론내부의 차이와 변동들은 [해당] 인류학자가 태어난 학술적 맥락, 지적 영역, 이데올로기적 논쟁, 사회구성체의 구조와 국면들에 의해서 주로 (그리고 오직 역사 비판적 시점에서만) 설명되는가? 과연 이것만이 유일하게 타당한 가설인가? [이와 달리] 인류학 이론들이 도입한 개념, 문제, 개별체, 행위자들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것들은 그이론들이 설명하고자 하는 사회들 (또는 인간집단들이나 집단들)이 가진 풍부한 상상적 힘pouvoir에서 자기 원천을 찾는다는 사실을 보여줄 관점으로 이동할 수는 없을까? 

따라서 "인간‘ (에게 고유한 것)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거부하며, "인간"의 본질이란 없고, 그의 실존은 그의 본질에 앞서며, ‘인간‘의 존재는 자유와 비규정성이라고 말할 필요는 결코 없다. 오히려 "인간‘ 이란 무엇인가"는 너무나 분명한 역사적 이유들 때문에시치미를 떼지 않고서는 대답하는 것이 불가능한 질문이 되어 버렸다고 말해야 한다. 다른 용어로 말하자면, 고유한 것을 전혀 갖지않음이 ‘인간‘의 고유함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반복하지 않고서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런 식으로, 종 사이에 [성립하는 관점주의, 존재론적 다자연주의, 식인의 타자성은 원주민적 타인류학alter-anthr-pologie의 세 가지 측면을 형성한다. 이런 타인류학은 서구 인류학의대칭적이고 전도된 변형인데, 이때 대칭이란 라투르가 사용하는 의미의 대칭을 말하고, 전도란 와그너가 말하는 전도된 인류학reverseanthropology의 의미와 같다. 

간략히 말하자면유럽적 프락시스는 주어진 물질 신체적 바탕(자연)에서 출발해
"영혼들을 만드는" 데에서(그리고 문화들을 차이 나게 하는 데에서)성립한다. 원주민적 프락시스는 주어진 사회 정신적 연속체에서출발해 "신체를 만드는" 데에서(그리고 종들을 차이 나게 하는 데에서) 성립한다. 

신세계의 수많은 인간집단이 (아마도 모든 인간집단이) 다음과 같은 개념화를 공유한다. 즉, 세계는 시점들의 다양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즉, 모든 존재자들이 지향성의 중심들이며, 각자의 특징과 역량에 따라 다른 존재자들을 파악한다.
이러한 관념의 전제와 결론은 얼핏 연상되는 상대주의라는 통상적개념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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