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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물리학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3월
평점 :
#0. 슬픔과 물리학이란 단어는 알겠는데, '슬픔의 물리학'은 무엇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주목하면서 읽기 시작했다. 읽기전 시공간을 대상으로 고전과 현대물리학적 지식이 동반된다면 다소 지루할(?) 것이란 선입견을 피할 수 없었다.
#1. 저자인 게오르기 고르포디노프는 <과거부터 현재, 현재보다 미래>에 더욱 유명세를 탈거란 느낌은 읽기전에는 표지 안쪽에 있는 저자 얼굴에서, 읽은후에는 동유럽 작가 계보를 계승할만큼 대작가가 탄생했음을 알 수 있다(부커 인터내셔널 수상과 별도로). 68년생의 불가리아 작가는 러시아와 전쟁중인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와 생김새가 닮아 일단 한번 놀랬다.
#2. 책 띠지에 "나는 모든 종류와 장르를 망라하는 책을 상상한다."고 소개한다. 소설이지만, 소설과는 다른 자서전적 에세이적 요소, 논픽션적 서술전개 그리고 그리스 신화의 문화비평 및 재해석 등이 포함되어 있다. 소설 전개가 산만할 수 있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현대가 선형적인 구조적 명확하게 전개되는 사회가 아니다.
안타까워라, 이야기는 선형적이라서 매번 우회로를 없애고 벽을 세워 옆길을 막아야 한다. 고전적인 서사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가능성을 소거해나가는 것이다. 경계를 확정하기 전, 세상은 평행한 버전들과 옆길로 가득하다. 오직 망설이고 주저하는 상태에서만 모든 출구가 이리저리 이동하며 열려 있다. 불확정성과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양자물리학은 이를 증명해왔다.
소설의 전개와 서사 구조가 규격에 맞게 잘 짜여진 통로와 선형 구조가 지배하는 형식과 내용에서 탈피한 불확정성과 불확실성의 양자물리학으로 설명하고 있다. 서사에 결정적인 선형구조대신 미로 구조를, 기억과 망각, 신화와 이야기를 소환한다.

#3 1번에서 던진 책 제목이 <슬픔의 물리학>인지 주목하면서 읽었다. 슬픔은 인간이 가진 감정의 한 형태이고, 물리학은 물질의 운동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 분야이다. 슬픔의 물리학은 무얼까? 원문 제목도 <The Physcis of Sorrow)이다.
어떤 이들에게 공감은 고통을 통해 열리는데 내 경우는 슬픔을 통해 열릴 때가 더 많다. 슬픔의 물리학-시작은 슬픔의 고전물리학-은 수년 동안 나의 탐구 주제였다. 슬픔은 가스와 증기처럼 자체의 형태나 부피가 없고, 그것이 담기는 그릇이나 차지하는 공간의 형태와 부피를 따른다. 그것은 비활성기체와 비슷할까? 이름은 그럴듯하지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비활성기체는 균질하고 순수하고 단원자 구조를 띠며 무색무취하다. 아니, 슬픔은 헬륨이나 크립톤, 아르곤, 제논, 라돈이 아니다...... 슬픔에는 냄새도 색도 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색과 냄새로 갈아입을 수 있는 카멜레온 가스 같은 것이다. 마치 다양한 색과 냄새가 슬픔을 쉽게 활성화하는 것처럼.
_ 슬픔의 기초 물리학 중 - P390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공감-슬픔-이야기로 이어지는 서사 구조애서 저자는 주인공을 통해 고통대신 슬픔에 주목했다. 화학 줄기율표상의 0족원소(noble gas)는 외곽구조나 궤도에 전자가 완전하게 채워져 반응에 비활성인 특성을 지닌 이유로 화학반응에 참여하지 않는다. 슬픔도 그런 특성에서 출발한다. 고속도로에서 위험표시(해골 이모티콘) 가스 전용 운반 트럭을 만날 수 있다. 본 차량에서 비로소 기체는 용기에 넣은 부피로 전환되어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드러난다. 슬픔의 이동(여기서는 방향과 질량 개념의 벡터)이라는 이야기가 부피를 결정하는 트리거 역할을 한다. 작가는 "어떤 장소는 한 세기에 슬프고 다른 장소는 다른 세기에 슬프다.(p,391)"라고 헸다. 오늘이 4월16일(세월호 참사 12주기)이다. 가스 차량은 그날의 슬픔의 경로를 가리키며 어떤 이야기 그릇에 담을지 아직도 달리고 있는 듯하다.
#4. 작가는 물리학 개념에 중요한 중력의 구체적 물질 단위인 무게에 주목하면서 인간사를 관통하는 공감능력에 필요한 요소 3가지(과거, 슬픔, 문학)과 기존 물리학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한다.
다행히도 내가 관심을 쏟는 것들은 무게가 없다. 과거, 슬픔, 문학이 무게 없는 세 고래만이 나의 흥미를 끈다. 하지만 양자물리학과 자연과학은 그들을 외면해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물리학과 형이상학의 형식적 구분으로 인해 지식의 우주가 명확하고 인위적으로 분할되리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아마 자신의 저작을 손수 불살라버렸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그 안의 여러 부분을 합쳐놓았으리라.
_ 슬픔의 기초 물리학 중 - P377에서
#5. 슬픔의 물리학 9개 단편들은 읽어보면 된다. 러시아문학과 달리, 사람이름 외우는 어려움도 거의 없다. 내용을 이해하는데 어려움도 없다. 아니 동일한 연배일 수도 있다. 소설속 "왜 지하실이나 반지하로 들어가는 설정"이 궁금하다. 어릴적 장롱속이나 다락방에 숨어 나만의 아지트를 만들어 나의 자아 세계를 구축하려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아니면 그 나이 때가 무언가의 결핍을 경험한 시기일수도 있다.
#6. 주인공이 타인이 고통을 느끼는 지점에 들어가 타인의 기억과 경험을 직접 공유하고 나중에는 이야기를 수집하는 간접 경험한다. 여기에 불가리아 현대사의 가족들과 타인의 기억들 인물들, 그리고 동식물까지 슬픔을 만난다. 이런 설정을 보면서 결국 아래 글로 연결될 수 밖에 없었다.
그처럼 내가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이 내속에 수 많은 부분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재의식으로 들어있다. 나는 내가 겪은 수많은 일들과 만난 수많은 사람들로서 구성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_ 신영복의 언약 중
모든 경험을 할 수 없는 우리가 소설을 읽어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7 옆길로 새기 (소설 방식대로)
난 책을 사서 지인에게 선물했고, 선물받기도 했다. 이 책의 이해당사자가 출간전에 대단한 책이라고 알려주었다. 호불호가 있으니 단편별로 나눠 읽는 것도 괜찮다고 알려주었다. 처음 만난 시점도 그 시절이었다. 소규모 등산모임의 등반 주제가 다름아닌 <Back to the Future>였다. 아마 이 책을 번역하고 있을 시절이었을 것이다. 끝으로 문학 번역에서 Ai가 대체할 수 없는 단락을 소개하면서 마칠까 한다.
당당하고 담대하게 말하고 행동하라! 젊음의 다부짐과 청년의 대범함......그 많은 'ㄷ'은 다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