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이의 고독
양선미 지음 / 파람북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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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하지 않은 건 그녀의 부모도 마찬가지였다. 자가용으로 등하교를 해주고 수시로 교사와 담임에게 고기와 과일을 나르며 딸의 말과 행동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지만 정작 자신의 딸과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던 그들은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지 못했다.

_ 사격부원의 시간 중 - P60

근데 거기서 누구 봤는지 알아?
하고 싶은 말을 시작할 때 질문으로 운을 떼는 건, 그런방법이 흥미를 유발한다고 믿는 그 아이의 지루한 화법이었다. 영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산 수업에서 계산이 틀릴 때마다 교사에게 주판으로 긁힌 머리가 아팠을 뿐이었다.

_ 급사의 시간 중 - P77

조교가 영이를 책상 앞으로 돌려세웠다. 어깨를 감싼 팔이 부담스러웠지만 다정한 조교에게 불편하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영이는 가방을 챙겼다. 때마침 노크 소리가 났고선옥이 문을 열었다.

_ 급사의 시간 중 - P92

그에 의하면 아내의 죄는 차고도 넘쳐 맞아 죽지 않은 걸 감사해야 했는데, 쌀을 제대로 씻지 않아 밥에서 돌이 나오도록 했고, 아들이 인문계를 쓰도록 방치했고, 그 이전에 아비의 말도 듣지 않는 후레자식으로 길렀다는 이유였다. 졸지에 한손잡이가 된 성철은 꼬박 한 달간을 두문불출하다 마루에 걸려있던 거울을 박살 낸 뒤 핏자국을 남기고 사라졌다.

_ 급사의 시간 중 - P100

돌변하는 날씨 같은 것. 우연한 취중 실수, 혹은 악마성의 돌출, 혹은 계획된 폭력, 과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부딪힌 상황에 영이는 어리둥절해했다. 조교의 텅 빈 눈동자, 비열하거나 잔인했던 웃음, 차가운 손, 입에서 튀어나오던 폭력적인 언사들은 혹시 꿈이 아니었을까, 영이는 생각하고 또생각했다.

_ 급사의 시간 중 - P122

성인이 되자 영이는 조금 변했다. 소심하고 주눅 들고 주변의 눈치를 보는 성정에 새로운 것들이 보태졌다.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으나 염증, 불안, 절망, 상실 혹은 긴장과비슷한 감정들이었다. 그것들은 원래 있던 것들과 뒤섞여시시 때때로 영이를 괴롭혔다. 낮에는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으나 밤이 되면 미래에 대한 희망없음으로 인해 숨이 막히는 듯했다.

_ 경리의 시간 중 - P131

멀어진 공간과 하루하루 지나가는 시간에 비례하여 객관적 거리감도 생겨난 것이었다.

_ 경리의 시간 중 - P137

사실을 말하면 그 외에도 낯선 건 많았다. 사실 영이는휴일 경제부 업무가 싫지 않았다. 하는 일 없이 의자에 앉아있다가 가끔 씨앗이나 호미, 햇빛 가리개 모자 따위를 파는일이었고 수당도 나왔다. 주말에도 딱히 할 일이 없었기에고기를 맘껏 먹을 수 있는 회식도 좋았다. 미스 김이라는 호칭도, 반말도 딱히 싫다고 느낀 적이 없었기에 영이는 그런말을 하는 수경이 낯설었고, 아무것에도 분노하지 않는 자신에 대해 열등감을 느꼈다.

_ 경리의 시간 중 - P142

식사 후 영이는 수경이 건넨 오렌지를 베어 물었다. 향기로운 과즙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달콤했다. 한편으로는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이상한 가역반응이었다. 어릴 때 느꼈•던 것보다 더한 애잔함이 세포처럼 떠다니는 것 같았다.

_ 경리의 시간 중 - P143

문제는 하나의이벤트가 똑같은 반응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청년의 감정이 아스팔트를 달구는 여름 한낮의 햇볕처럼 속수무책으로 쏟아질수록 영이는 놀라움과 번민, 갈등의 늪에서 방향을 잃고 허우적댔다.

_ 경리의 시간 중 - P164

떠남과 떠나보냄. 어느 것이 더 후련할까, 혹은 아쉬울까. 떠남은 의지, 계기, 결단, 적극적인 행동을 함의한다는 점에서 후련함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떠나보냄은 남겨짐, 공허, 수동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에 가까울지 모른다. 아니, 잘못 알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떠남은 선택했다는 점에서 미련과 두려움을 동반한다. 떠나보냄은 비자발성, 수긍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은은한 초연함을 띨 수도 있다. 둘 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영이는 생각했다. 자신은 청년을 떠난 것일까, 떠나보낸 것일까. 선택이었을까, 불가피한 것이었을까.

_ 경리의 시간 중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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