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차나무 밭의 냄새는 것의 향기가 습한 육질 속에 녹아 있지만, 5월 찻잔 속의 향기는 이 육질이 제거된 향기다. 시(詩)는 인공의 낙원이고 숲은 자연의 낙원이고 청학동은 관념의 낙원이지만, 한모금의 차는 그 모든 낙원을 다 합친 낙원이다.
_ 찻잔 속의 낙원 중 - P96
자연복원된 숲은 생태학적으로 건강하고 재앙에 대한 저항력과복원성도 크다. 왜 무의미하게 막대한 돈을 쓰려고 하는가. 제발 대버려둬라, 제발 손대지 말라. 제발 아무 일도 하지 말아 달라
_ 숲은 죽지 않는다 중 - P108
봄볕이 내리쬐는 남도의 붉은 흙은 유혹적이다. 들어오라 들어오라 한다. 부드럽게 부풀어오른 붉은 흙 속으로 들어가 누워서 백골을 가지런히 하고 쉬고 싶다.
_ 땅에 묻히는 일에 대하여 중 - P109
농부가 밭에 묻히듯이, 가난한 어부들은 백골을 바다에 준다. 그 아들들이 다시 고기를 잡고, 쓸려나간 봉분의 흔적조차도 이제는 편안해 보인다. 바다가 춥고 땅이따뜻한 것도 아닐 것이다.
_ 땅에 묻는 일에 대하여 중 - P113
선암사 화장실에서 나는 잃어버린 삶의 경건성과 삶의 자유로움과 삶의 서늘함을 생각하면서 혼자서 눈물겨웠다. 아, 그리운 것들은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그러니 그리운 것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그리운 것들을 향해서 가자 가자. 가자. 무릎걸음으로 기어서라도 기어이 가자. 그것들이 살아 있는 한, 내 마침내 그곳에 닿을 수 없다 하더라도 내 사랑은 불우하지 않으리. 사랑이여, 쓸쓸한 세월이여, 내세에는 선암사 화장실에서 만나자.
_ 그리운 것들 쪽으로 중 - P120
도산서당은 맞배지붕에 홑처마 집이다. 그것이 그 건물의 전부이다. 그 서당은 한옥이 건축물로서 성립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들만을 가지런히 챙겨서 가장 단순하고도 겸허한 구도를 이룬다. 그 맞배지붕과 홑처마는, 삶의 장식적 요소들이 삶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부화(華)를 용납치 않는 자의 정신의 삼엄함으로 긴장되어 있고, 결핍에 의해 남루해지지 않는 자의 넉넉함으로써 온화하다.
_ 그곳에 가면 퇴계의 마음빛이 있다 중 - P122
그가 생각했던 아름다움은 인격의 내면성에 바탕을 둔 것이고, 자연은 탐닉이나 열광, 음풍농월의 대상이기보다는 인간을 고양시키고 정화시키는 인굑적 기능으로써 아름다운 것이고 인간의 편이었다.
_ 그곳에 가면 퇴계의 마음빛이 있다 중 - P128
하회마을 집들은 서로를 정면으로 마주보지 않고 비스듬히 외면하고 있다. 존재의 품격은 이 적당한 외면에서 나온다.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자신의 욕망을 비스듬히 껴안고 가는 이의 삶의 품격. 그래서 마을의 길들은 구부러져 있다.
_ 그곳에 가면 퇴계의 마음빛이 있다 중 - P129
우물 속의 물과아궁이 속의 불은 언제나 새롭게 빚어지는 원소들이다. 이 새로움은 우물과 아궁이라는 늙음의 형식 속에서 빚어진다. 새로움의 내용은 늙음의 형식 안에 편안하게 담긴다. 이것은 몽상이 아니다. 이것은사람이 누워 있는 방바닥 밑 땅속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과학현상이다.
_ 그곳에 가면 퇴계의 마음빛이 있다 중 - P135
이 한 쌍의 탑은 주변의 야트막한 산세 속에서 그 조화로움이 드러난다. 사람들이 나무로 탑을 만들다가 돌로 탑을 만들기 시작한 초기의 작품이다. 그래서 이 탑에서는 나무에서 돌로 이행하는 과정의 망설임과 머뭇거림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이 흔적이다.
_ 무기의 땅, 악기의 바다 중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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