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비할 바는 아니지만 술의 역사에는 이렇게 우연과 실수로 탄생한 술들이 적지 않다. 스코틀랜드 위스키에서 피트 향이 나는 것도 우연에서 비롯했다. 스코틀랜드를 합병한 대영제국이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자 산지나 오지로 도피한 양조업자들이 그 지역 토탄peat, 땅에 묻힌 지 오래되지 않아 완전히 탄화하지 못한 석탄을 때워 맥아를 건조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술은 새로운 시도에 관대하다. - P80
졸업식이라는 자리가 평가에 적합하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반응이 없었다고 게임이 끝난 것은 아니다. 여과와 숙성이 남았다. 술은 여과하면 부드러워진다. 시간이 어떻게 마법을 부릴지 알 수 없다. 송화 과하주를 냉장고에 넣었다. 10여개월 지난 후 지인 열댓 명에게 풀어놓았더니 다들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어떻게 이런 맛이 나올 수 있느냐고 앞다퉈 잔을 내밀었다. 다소 밍밍한 송화 맛이 사라지고 솔 향이 부드러워지면서 스카치 위스키 향도 살짝 감도는 밸런스 좋은 술이 됐다. 시간이 흘러서 좋은 게 있다. - P108
한국 농수산대학교 최한석 교수는 "낮은 온도에서 발효하면 향미가 더 풍부해진다"라고 말한다. 저온 발효하려면 발효 기간을 길게 가져가야 하기 때문에 짧은 발효로 잔당을 남기는 과하주에는 맞지 않는다. - P116
7평도 채 안 되는 조그만 작업실이 그런 느낌에 실체를 부여했다. 작업실 바깥에는 여전히 불안한 일들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 손에 내 운명이 달린 시간 같은 것. 하지만 작업실에 들어오면 안온했다. 토굴처럼 좁지만 갇혔다기보다는 은신에 가깝다. 바깥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 작은 공간에서는 크게 음악을 틀고 치대고 주무르고 뭉치고 젓고 비틀고 쥐어짜고 펴고 오므리고 집고 깎고 담고 흔들고 씻고 닦고 문지르고 빻고 돌리고 재고 널고 털고 밀고 당기고 올리고 내리고 들고 나를 뿐이다. 사서 하는 고생이지만 자유롭다. - P141
독일인들은 맥주 순수령reinheitsgebor의 전통에 자부심이 있다. 1516년 독일 바이에른 공국의 빌헬름 4세가 공포했는데 맥주를 만들 땐 보리, 물, 홉 세 가지만 허용하는 법령이었다. 그리고 19세기에 파스퇴르가 미생물을 발견한 이후에는 효모도 추가되었다. 이 순수령이 내려온 지 600년이 훌쩍 지났다. - P163
양조는 시간과의 관계를 새롭게 맺는 방법이기도 하다. 아무리 조바심을 내고 종종대도 시간을 단축할 수 없다. 그래서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시간과 같이 가야 한다. 물과 알코올을 잘 섞고 날카로운 향미를 순화하는 작업은 꼭 필요하지만 내가 할 수 없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친구가 최고의 블렌더, 시간이다. -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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