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1 - 역사평설 병자호란 1
한명기 지음 / 푸른역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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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모문룡을 잘 대접하고 그를 도와 후금과싸우는 것이었다. 요컨대 명은 인조반정을 계기로 조선을 이용하여 후금을 견제하려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을 노골적으로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은 그 과정에서 기우는 제국‘ 명의 궤도 속으로 더 깊숙이 빨려들어가는 상황을 맞게 된다. (p.51)

이괄의 난 이후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어영군과 총융군을 창설하고 남한산성과 강화도를 정비하는 데 온 신경을 기울였다. 하지만 도성과 수도권 방어에만 치중하는 와중에 적의 주요 침입로인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의 방어는 몹시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이괄의난 이후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정권 안보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국가 안보의 기반은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상황에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맞게 된다. 그것은 분명 당시 국가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던 그들의 한계일 수밖에 없었다. (p.81)

1626년 인조는 "작년 태감들이 사신으로 와서 온 나라가 비로 쓴 것과 같았다"고 통탄했다. 요컨대 ‘은 먹는 하마’이자 ‘최악의 약탈자‘들에게 순순히 은과 인삼을 내주어야 했던 것은 인조대 조선이 안고 있던 ‘친명의 질곡‘ 이었던 셈이다. (p.90)

대동법은 광해군 즉위 직후 선혜지법宣惠之法이라는 이름으로 처음실시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실시 지역이 경기도에만 한정된 불완전한 것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런저런 반대에 밀려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p.92)

조선은 정탐을 통해 누르하치의 아들들 가운데홍타이지가 조선에 대해 강경파이고 다이샨이 온건파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p.151)

홍타이지는 조선 정벌을 미약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 즉위 무렵 홍타이지는 명목상으로는 칸이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형들과 권력을 분점하고 연정을 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사촌형 아민은 홍타이지 추대에 반발하여 자신의 기旗를 이끌고 독립하려고 시도했다.
이 같은 배경을 고려하면 홍타이지가 조선을 치러 가는 원정군 사령관으로 아민을 임명한 것은 시사적이다. 아민에게 원정의 모든 책임을 지움으로써 그의 충성심을 시험할 수 있고, 결과가 좋지 않을 경우에는 정치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아민은 원정 도중 홍타이지가 제시했던 지침과는 배치되는 독단적인 행보를 보임으로써 홍타이지의 ‘기대’에 부응한 바 있다. (p.155)

강화도로 옮겨가면서 조정은 임진강을 포함한 다른 지역의 방어에는 제대로 신경쓸 수 없었다. 평안도와 황해도를 포함하여 한강 이북지역의 백성들은 후금군의 칼날 앞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다. 사실상 정권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제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지켜야만 했다. (p.164)

이제 후금이 조선의 형이 되고 조선은 후금의 아우가 되기로 맹세했다. 인조반정이 성공했던 직후 ‘오랑캐’를 정벌하여 명의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내세웠던 ‘이상‘은 사라지고 오히려 그 ‘오랑캐’를 ‘형‘으로섬겨야 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p.174)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력을 양성하려는 노력, 그리고 그 기반이 되는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은 제대로 기울이지 않았다. 진정으로 안민安民, 양병養兵의 의지가 있었다면 궁가, 훈신, 공신들이 육지와 바다의 이권을 독점하고 있던 구조를 혁파시켰어야 했다. 그리고 그 이익으로 국가 재정을 보충했어야 했다. 하지만 인조 정권은 그러지 않았다. 그것은 분명 한계였다. (p.208)

1629년 무렵 공허지국 조선은 정면에서는 명과 후금의 압박을 피하고 배후에서는 일본까지 다독여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p.229)

요컨대 이신들까지 포용할줄 알았던 홍타이지는 탁월했고, 사람과 대국을 볼 줄 몰랐던 숭정제는 어리석었다. 지도자의 국량局量의 차이가 결국 후금과 명의 운명을 극명하게 갈라놓은 것이다. 원숭환의 죽음과 이신들의 존재를 돌아보며 자멸한 왕조 명이 던지는 역사의 교훈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p.253)

조선 또한 명과 후금의 대결 상황에서 수군 문제가 갖는 중요성을잘 알고 있었다. 후금의 강요대로 배나 수군을 제공할 경우, 가도가곧바로 위험에 처하고 명의 내지까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후금에배를 빌려주는 것은 부모의 나라에 비수를 꽂는 일이었다. 1631년 6월, 배 때문에 명과 후금 모두로부터 구애받고 있던 조선의 고민이깊어지고 있었다. (p.297)

1632년 무렵까지 조선이 취한 대외정책은 일견 절묘했다. 명과 후금 모두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조선은 삼국관계에서 독립변수가 아니었다. 명과 후금 두 강국 사이에 끼여 있는 약소국이자 종속변수‘ 였다. (p.335)

강학년의 거침없는 비판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올 수밖에 없었다. 특히 포악한 자가 포악한 자를 갈아치웠다(以暴易暴)는 표현은 충격적이었다. 인조반정의 정당성, 나아가 인조 정권의 정당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상소 내용이 알려진 직후, 조정은그야말로 뒤집어졌다. 강학년을 죽이고 강화도에 있는 광해군까지 죽여야 한다는 주장마저 나타났다. (p.373)

과거의 국서와는 사뭇 다른 내용이었다. 권세가 강한 신료들을 조심하라며 조선의 내정을 걱정하는 듯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서인들의 권세가 너무 커졌다‘고 했던 인조의 푸념이 어느새 홍타이지의 귀에까지 들어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후금은 이제 조선 내정에 ‘충고‘까지 하려고 덤비고 있었다. (p.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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